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4)
* * *
강간(强姦)이라는 개념은 남성 차별적이다.
기본적으로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으로 고정되어 있다. 비단 전근대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도 2012년까지는 피해자의 범위를 ‘부녀’에 한정하였다.
강간이 권력 관계하에서의 강제, 물리적 힘이든, 약점 등을 협박하는 것이든, 혹은 직위상 우열에 의해서든 우위한 자가 열위한 자에게 간음을 강제하는 행위라는 정의적 개념에서 보자면, 강간이라는 개념은 그래서 동시에 여성 차별적이기도 하였다.
여성은 어떻게든 우월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편견이 담겨 있었으니까.
다만, 논리적인 잣대와 무관하게, 강간이라는 개념에 남성이 여성에게 강제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건 통시적으로 일반적인 것이었고, 당대 고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석삼은 자신이 강제로 당했음을 주장하면서도, 마치 구질구질한 변명을 하는 사람처럼 몹시 궁한 기색이었다.
“그만해라. 네가 억울한 건 이해했다.”
“흑흑,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질질 짜는 석삼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몽주는 이내 이 일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고민하는 이 일들이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석삼의 아이들이었다.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에 두 명이 여아였고, 그중 하나는 이소바 여왕의 직계의 딸, 손녀였다.
그 말인즉, 석삼의 아이 중 하나에게 훗날 여나국의 여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반드시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소바 여왕의 딸은 무려 5명이나 되었고, 석삼의 아이는 그중 막내딸이 낳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다만, 상속에 관한 가문법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아, 반드시 직계 여식이 승계한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가문의 딸이거나 직계라 해도 딸을 건너뛰고 손녀가 후계로 지목될 수도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여왕의 승계는 오직 전대 여왕의 지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율법과 석삼의 서녀(?), 그리고 여나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국인 탐라국의 존재와 탐라공의 방문이 뒤엉키면서 흥미로운 사안으로 발전했으니, 이소바 여왕이 석삼의 딸을 후계로 지목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베나를 내 후계로 삼으면, 우리를 지켜 줄 수 있소?”
아베나는 석삼의 딸 이름이었다.
이소바 여왕은 탐라가 언젠가 여나국에 올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에 탐라 사내들이 표류하기 전에 간간이 왕래하던 유구인을 통해 탐라가 유구를 손에 넣었음을 전해 들었고, 멀지 않아 여나국에도 그 손길이 닿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탐라국에서 이주섬으로의 항로를 열기 위해 시도하였고, 그것이 표류라는 사고를 통해 여나국과의 인연으로 발전하였다.
그렇기에, 이소바 여왕이 탐라국과의 만남을 예견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몽주는 여나국에서 석삼을 비롯한 탐라 사내들을 강제로 범한 것이 그들만의 특이한 문화가 아닌, 잘못임을 알고 행한 고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그건 바로 탐라와의 만남에 앞서 일종의 방파제를 얻기 위해 탐라의 씨를 취하고자 했다는 것.
실제로 석삼은 사전에 그가 가장 지위가 높은 사내임을 확인받았고, 하필 여왕의 손녀를 비롯하여 여나국 호족들의 딸과 강제로 동침하게 된 것에서 유추해 보면, 그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석삼을 비롯한 탐라의 표류인들이 경험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여나국이 고립된 곳이라곤 하나, 적어도 유구섬과는 간간이 교류가 있었으니, 만약 외딴 곳에서 온 사내들의 씨를 강제로 혹은 꾀여서 취하는 풍습이 존재했다면, 유구섬에도 잘 알려졌을 터였다.
그렇다면 유구에 파견 나와 있는 탐라인들이 그것에 대해 몰랐을 리도 없었을 것이고.
“후훗.”
몽주는 생각 중에 문득 실소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소바 여왕, 아니 여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여족장쯤 되는 인물이다.
고작 수백 호에 불과한 작은 나라의 수장에게 왕이라는 지위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게다가 대충 돌아가는 걸 보니, 호족 가문이 관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볼 때, 집권력 또한 보잘것없음이 분명했다.
“이보게, 석삼.”
“네, 주군.”
“자네 딸이 이곳 여왕이 되길 바라나?”
“예? 아이고, 그런 말씀은 하들랑 마십시오. 여왕이고 나발이고, 저는 그저 탐라로 돌아가서 점녀에게 어찌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 죽겠습니다요.”
“그래? 하면, 혹시 죽어도 되나?”
“뜻대…… 예?!”
걱정 때문에 대충 대답하려던 석삼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도 혈육이라 죽게 내버려 두긴 어렵겠지?”
“그게…….”
석삼의 심정이 여간 복잡하지 않음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강간 피해 여성이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도 결국 자기 자식으로 보듬을 수밖에 없는 심정과 다르지 않을 그 마음에 몽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에 그가 고민해야 할 두 번째 사안에 대한 판단도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그 두 번째 사안이란, 감히 탐라의 사내들을 함부로 농락하고, 억지로 만든 자식으로 자신에게 거래를 강요한 여나국의 여왕을 어찌 처벌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 * *
나라 간 모든 종류의 교류에 있어, 군력이 크게 앞선다는 건 두말할 것 없이 굉장한 이점이었다.
쿠구쿠궁!
중함선이 일제 사격하자, 목표였던 오백 미쯤 떨어진 포구 근방 해안가 산비탈에 포탄들이 쏟아졌고, 탄착에 전후하여 폭발이 연이었다.
“어떻습니까?”
포구에 나란히 선 몽주가 비소를 지으며 이소바 여왕에게 묻자, 한 장교가 그 말을 필지에 써서 여왕에게 보였고, 여왕도 그에 답하였다.
물론, 굳이 답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놀란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대단하군요. 화포라는 게 이 정도로 위력적인 줄은 미처 몰랐소.”
아직은 그녀의 반응은 그저 예상보다 놀랐다는 정도였다. 하기야 지금 이 자리는 공식적으로는 여왕에게 화력시범을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나, 몽주는 장교로부터 붓을 받아 들어 다음으로 하고픈 말을 적어 보이자, 그녀의 표정이 일변하였다.
“하려고만 한다면, 나는 반나절 안에 여나국을 몰락시킬 수 있소.”
“대, 대체 그게……?!”
“지금 내 맘속에 여나국을 어찌 처리할지 고민이 많다는 말이오. 물론, 여나국을 지워 버리고 여기에 탐라의 고을을 새로 설치하는 방안까지 포함해서.”
“……!”
이소바 여왕이 어버버거리며 무어라 대꾸하려 하면서도 말을 좀처럼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대략 뻔했다.
탐라의 고위 귀족(?)이라는 석삼의 딸을 후계로 세워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는데, 어째서 이런 협박질이냐고 항의하고픈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나름 괜찮은 수작질이었소. 탐라인의 피를 왕가에 섞어 안전을 보장받겠다라……. 한데 말이오. 방법이 영 글러먹었소. 아무리 사내라고 해도 강제로 간음하고, 그것도 모자라 원치 않던 아이까지 낳게 만든 것은 분명 씻을 수 없는 죄악이오. 심지어 부녀를 둔 사내까지 강제하다니! 이는 부녀를 강간한 것 못지않은 대죄요.”
“우리 여나국은…….”
“여나국이 어머니를 따르는 가문을 구성하는 것을 두고 핑계대지 마시오. 그렇다고 해도 사내를 억지로 취하게 하는 풍습은 없을 터,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여나국의 사람이 아닌 사내까지 억지로 취하는 짓은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그야 사내라면 누구나…….”
“사내는 모두 무턱대고 계집을 취하길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애초에 탐라 사내들을 강제로 범할 것이 아니라, 먼저 제안을 했었어야 마땅하지 않았겠소?”
몽주가 일말의 변명도 허용치 않겠다는 자세로, 여왕의 말을 끊어 버리자, 여왕은 부들부들 주먹 쥔 손을 떨면서 몽주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런 여왕을 향해 낮게 콧방귀를 낀 몽주는 천천히 다시 필지에 말을 옮겨 적었다.
“왕위에서 즉시 하야하시오. 그리고 아베나에게 양위하시오. 그것이 여나국과 그대의 가문을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오.”
“이제 겨우 세 살인 아이를……!”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내가 아베나의 대부가 될 생각이니까.”
쉽게 말해서 섭정의 지위를 얻어 실권을 장악하고, 대리인 격인 관리와 군병을 보내 여나국을 통째로 취할 생각이었다.
“반항할 생각이라면, 그리해도 좋소. 한 이틀 전쟁을 준비할 시간도 주지. 내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고. 아무리 물러났다고 해도 왕이었던 자가 남아 있는 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니.”
말을 마친 몽주가 냉소 어린 표정으로 여왕을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에 후회막급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베나를 비롯한 탐라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을 통해, 탐라와 보다 평등한 수준에서 우호 관계를 맺고, 탐라의 힘을 빌려 왕으로서의 권위와 실력을 높이고자 했던 얄팍한 의도가 오히려 역으로 작용했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궁성으로 돌아간 그녀의 결정은 즉시 하야하고 아베나를 후계로 지목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외의 모든 결정은 호족들에게 맡겼는데, 관리 역할을 하는 호족들 중에서도 화력 시범을 본 이가 적지 않은 만큼, 몽주의 압력을 거부할 자는 없었다.
호족들이 몽주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전해 오자마자 몽주는 군병 300여를 이끌고 입궁하였다.
작고 보잘것없지만, 워낙에 존재 자체가 작고 보잘 게 없는 여나국의 사정에서는 그나마 화려하다 할 수 있는 궁성의 대전에 들어선 몽주는 즉시 아베나를 데려오게 하여,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낯선 어른이 자신을 들어 안는 것에 투정을 부릴 만도 했지만, 분위기를 다른 것을 느낀 듯, 조금 겁먹은 표정의 아베나는 몽주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몽주는 조금 까무잡잡한 아베나의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겨 대전에 있는 옥좌에 앉았다.
대전이라곤 하지만, 홍로현 관부의 총무회의실 정도만한 그곳에는 탐라인들을 제외하면 10여 명의 호족 출신 관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들은 네 개의 가문에 속한 자들로, 이소바 왕가까지 합하여 다섯 가문이 여나국을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한눈에 봐도 누가 같은 가문 출신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걸 바라보면서 몽주는 속으로 실소하였다.
“나 고려 탐라국공 석몽린은 지금 이 순간부터 아베나 여왕의 대부가 될 것임을 선포하오. 이의 있는 자 있소?”
대전 안으로 호출된 호족들은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이에, 나는 여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대리청정할 것이며, 내가 탐라국공인 만큼 탐라국에서 여나국의 통치를 도울 것이오. 이에 이의 있는 자 있소?”
역시나 적막만이 감돌았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될지 알았고, 이미 인정한 뒤였다.
“그대들의 지위는 인정하겠소. 약간의 변동이야 있겠지만, 그건 차후에 일이니, 맡은 바 임무를 그대로 행하면 될 것이오.”
그에 호족들은 자기들끼리 조금 수군거리긴 했지만, 당장 그들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게 된 것에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탐라국에서 관리를 보내는 순간부터 크게 바뀌겠지만, 그걸 미리 밝혀 호족들의 불만을 살 필요는 없었다.
일부러 온화한 미소를 띠며 호족들을 둘러본 몽주의 다음 말은 정작 여나국의 통치와는 별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탐라의 사내들을 강제로 간음할 수 있었던 미약을 가져오시오.”
* * *
여나국에 닿은 지 여섯 밤을 보낸 후, 몽주는 경함선 두 척과 일백의 장령을 여나국에 남기고, 다시 선단을 이끌어 바다로 나섰다.
“거참, 신기한 노릇이네.”
탐라 4호의 마반대에 엉덩이를 걸쳐 앉은 채 고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몽주는 문득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몽주가 이틀 전부터 고민하는 문제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주머니 안에 든 것 때문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그거 같은데…….”
주머니 안의 하얀 가루를 다시 내려다보며, 몽주는 어이없어 했다.
몽주가 석삼의 고백, 즉 표류했던 시기에 여나국에서 당한 일의 전모에 대해 듣고, 다른 건 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사내들을 종마처럼 만들었다는 미약만큼은 미심쩍어 한 바 있었다.
작용을 보자면, 대략 춘약(春藥)쯤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그 효과가 너무 믿기 어려울 정도였던 탓이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미혼향(迷混香)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만독불침의 절대 고수조차도 중독을 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정사를 치르게 만드는 미혼향은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약이었다.
그건 정사를 치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조건을 빼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자연 상태에서 그런 약을 구할 수는 없었다.
다만, 화학적인 처리를 거친 향정신성 약품인 마약 중에는 비슷한 효과를 가진 것들이 있었다.
물론, 다른 신체는 무력하게 만들면서 남성의 특정 부위만 활발하게 활동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존재하는지는 몽주도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마약과 성적 쾌감 및 반응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게 코카나무처럼 보이긴 했는데, 이해가 안 되네.”
주머니의 끈을 다시 조여 손에 꼭 쥔 몽주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 의문은 여나국의 해안가 산비탈에서 자생하고 있는 1, 2미터 정도 크기의 나무들을 향한 것이었다.
코카나무, 마약 코카인(cocaine)의 원료가 되는 나무.
몽주가 탐라 사내들을 농락한 미약을 가져오라 명하였을 때, 여나국 관리들이 가져온 것이 하얀색 작은 결정체로 이루어진 가루였다.
그들은 그걸 ‘극락향’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태워 흡입하면, 탐라 사내들이 당한 것 같은 효과가 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몽주도 그게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한데, 극락향의 제조법을 토설케 하고, 극락나무를 직접 확인해 보자, 어느 순간 마약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코카나무로 추정되는 나무의 잎을 가루 낸 후, 양귀비 열매의 즙과 섞고, 여나인들이 ‘지옥에서 올라온 물’이라고 부르는 온천물을 넣어 말린 것.
익히 알려져 있는 대로 양귀비 열매는 ‘오피움(opium)’, 즉 아편의 원료였고, 만약 몽주가 본 그 나무가 코카나무가 맞다면, 아편과 코카인을 섞은 마약인 셈이었다.
물론, 단지 코카나무 잎을 가루로 만들었다고 해서 바로 코카인일 수는 없었지만, 그 지옥에서 올라온 물이라 하는 온천물에 들어 있는 성분과 어떤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면, 코카인 내지 그와 비슷한 어떤 물질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가능성 자체는 인정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시기에 코카나무가 동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몽주가 코카나무를 알아보고, 조금이나마 그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 일전에 읽었던 신대륙에 관한 책 때문이었다.
서양의 신대륙 진출은 수많은 식생의 광범위한 전파를 이루었는데, 그중 하나가 페루와 볼리비아 등 남미 지역에 자생하던 코카나무였다.
15세기 말에 처음 퍼질 때는 나뭇잎을 씹어 그저 약간 기분 좋게 만드는 정도, 혹은 고산병 예방용 약재로 쓰이는 정도였다.
그러다 19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가공한 코카인이 발명되었고, 코카인은 우울증 치료약 등으로 널리 쓰이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마약으로 지정되어 금지되었다.
몽주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어쨌든 그런 역사가 모두 최소 15세기 말 이후에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그가 읽은 책에서는 아시아 지역에 코카나무가 이식된 건 19세기에 이르러서였는데, 그렇다면 지금 여나국에 코카나무가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혹시 남미의 코카나무가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통해 동남아 쪽에까지 자생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면 역사에 코카나무의 자생 지역이 남미 지역에 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더라도, 그 후에 태평양 탐사를 통해 그곳에서도 코카나무의 자생을 발견했을 테니까.
지금은 남미에만 존재해야 할 코카나무가 여나국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은 남미에 생긴 토네이도에 휩쓸려 하늘로 솟구친 코카나무 씨앗이 제트기류에 떠밀려 수천 킬로미터 이동한 후에 다시 떨어졌는데 하필 그게 여나국이었다는 정도…….
“그걸 가능성이라고 해야 하나?”
로또 맞을 확률에 번개 맞을 확률을 곱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어이없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어이없는 가능성을 따지고 있을 때, 석삼이 다가왔다.
그는 몽주 곁에 와서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걸 가져가는 건지 궁금한 모양이지?”
“그보다는 그 극락나무의 씨앗을 모으라고 명하신 뜻이 더 궁금합니다.”
“쓸데가 있을까 싶어서 그랬지.”
“쓸데요?”
석삼이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에 몽주는 실소했으니, 석삼이 연상하는 쓸데라는 게 그가 당한 일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말게. 그런 데 쓸 건 아니니.”
몽주는 몸을 일으키며 석삼의 어깨를 두드리곤 갑판 난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나국에 남은 장교에게 코카나무로 추정되는 극락나무의 씨앗을 구해 두도록 명한 것은 마취약으로 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코카인에 마취 효과가 있는지는 몽주도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현대에서 알아볼 일이었다.
다만, 마약 중에 마취 효과가 있어, 마취제로 쓰인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본 적이 있기에 혹시 몰라 모아 두게 한 것이었다.
사실, 극락향을 음모에 쓸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하지만, 아니지.”
몽주는 손에 들린 극락향 주머니를 한 번 살짝 공중에 띄웠다가 다시 잡자마자 손을 휘둘러 주머니를 먼 곳으로 던졌다.
이미 대양으로 나온 바다 위에서 그 주머니가 떨어질 곳은 오직 바닷물뿐이었다.
현대에서 600년이라는 파이널 보스를 상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려와 탐라의 성세를 이끌기로 다짐했지만, 그래도 마약은 아니었다.
“이 바다를 이제부터 극락해(極樂海)라 부르면 되겠군.”
몽주는 농담 같은 말을 던지며 극락향에 대해 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