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5)
* * *
여나섬으로부터 이주섬까지는 100길미 남짓.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두 배 정도 되는 거리에 불과했다. 아침에 출발하여, 약간의 역풍을 이겨 내며 느긋하게 항주하였음에도 신시 정각쯤에는 이주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탐라 선단이 닿은 해안은 현대에서 이란현(宜蘭縣)이라 부르는 지역의 해안으로, 이주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위아래로 긴 이주섬을 종단하는 ‘대만’ 산맥의 동편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평야 지대를 가진 지역.
현대에서 알아본 바로는 예전에는 갈마란(噶瑪蘭)이나, 합자란(蛤仔難)으로 불렸다는데, 그건 중국 측에서 원주민들이 쓰는 지역명을 음차한 것이고, 실제로는 ‘카발란(kavalan)’쯤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지역명은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족명이기도 했다.
카발란족은 평포족 중 하나로, 평포(平埔)족이란 원주민들 중 평야 지대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대에서 대만 원주민들을 흔히 통칭하여 고산(高山)족이라 부르는 것과 달리, 당대에는 평포족과 고산족이 엄연히 구분되었다.
평포족은 후에 이주섬으로 들어오는 한족의 영향으로 한화(漢化)되었기에, 현대에서는 고산족만 원주민으로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평포족 부족들 대부분은 이주섬의 서편에 있었다. 동서로 평야 지대와 산악 지대가 크게 차이나는 이주섬의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였다.
몽주가 처음으로 접선할 부족으로 카발란족을 선택한 것은 당연히 유구 쪽으로 접근했을 때 바로 닿을 수 있는 북동쪽에 그들이 위치한 탓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이주섬 동편 산악 지대 중 유일하게 존재하는 평야 지대에 거주하는 평포족이기 때문이었다.
평야에 거주한다는 건 농경을 한다는 의미고, 농경을 하는 부족은 그렇지 않은 부족보다 더 평화적일 가능성이 높다.
농경은 쉽게 이주할 수 없게 하고, 지켜야 할 것도 많기 때문에, 낯선 조우에 대해 충돌보다는 협상을 생각할 가능성을 높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여, 몽주는 카발란족과의 만남에 앞서 동행하는 이들에게 이 점을 충분히 주지시켜 줬다.
그런데…….
“음, 평화로운 부족이라고 쳐들어오는 적을 그냥 두지는 않겠죠. 한데, 그런 것치곤 제법 잘 싸우네요.”
대략 2길미 정도 떨어진 해안 마을은 분명 전쟁 중이었다.
멀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해안과 반대편 마을 목책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공중에 무언가가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잔 흔적들, 아마도 화살이 날아다니는 게 분명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열악한 해안 포구…… 라기보다는 그냥 해안에 고기잡이용 배를 둔 곳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도 모두 목책 안으로 들어가 싸우고 있음이 분명했다.
목책 위에 올라 있는 병사들이 목채 너머로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게 얼핏 보였기에 꽤 접전 중임이 분명함에도, 위태로우나마 아직은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선단을 멈추게 한 몽주는 먼 곳 카발란족의 마을로 보이는 곳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 카발란족 마을이 싸우는 상대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카발란족 간의 싸움, 다른 하나는 고산족 부족과의 싸움.
중국인들이나 같은 평포족과 싸우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지형상 카발란 지역은 산악에 의해 완전히 고립된 곳이라 평포족이나 중국인들이 쳐들어오려면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해 와야 하는데, 해안에는 침공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지금 저들이 싸우고 있는 쪽도 해안이 아니라 반대편이었다.
“흐음…….”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몽주가 고민하며 옅은 신음을 내자, 석삼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기본적으로 몽주의 계획에서 카발란족은 중요했다. 그들을 회유하는 것을 토대로 이주섬의 원주민들을 선별적으로 포섭하는 것이 모든 계획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카발란족이 상황 모를 전쟁 중이었으니 다소 곤란했던 것이다.
하나, 크게 보자면 꼭 카발란 부족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부족이든 일단 ‘낚으면’ 된다.
평화적이면 회유하고, 아니면 굴복시키면 된다. 어떤 식으로든 탐라의 힘이라면 이주섬의 일개 부족쯤은 손쉽게 압도할 수 있고, 탐라를 따르는 게 그들에게도 이득임을 이해시킬 수 있다.
다만, 몽주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것은 원주민 간의 전투라는 돌발 상황을 탐라에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몽주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군 전투 준비.”
마침내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탐라 함선 위가 분주해졌다. 그사이에 몽주는 함대 제독 역할을 하고 있는 기함의 창 선장에게 추가적으로 명하였다.
“마을 건너편 너머까지 방포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해안 오백 미까지 접근하면, 모자대포뿐만 아니라 일반 화포까지도 마을 너머로 방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거측기로 대략적인 거리를 파악하고 있던 창 선장이 바로 응답했다.
몽주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시행하라 명하였다.
멈춰 있던 함대가 다시 접근하는 동안 석삼이 혼자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 마을을 구원하실 생각이 아니시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만, 목표는 그게 아니지. 짐작하겠나?”
“위력 시범!”
석삼이 정답을 확신하며 소리치자,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을을 쳐들어온 자들이 고산족일 수도 있고, 같은 카발란족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방포에 그들이 크게 상할지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저 마을이 카발란의 마지막 남은 마을일 수도 있고, 카발란 내전(?)의 소수파일 수도 있지만, 그것도 별로 상관없었다.
관건은 탐라의 군력을 저들이 직접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방포에 당하든, 방포에 당하는 자들을 목격하든.
그리고 그것이 차후에 탐라의 입김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 * *
“아타얄 개자식들아!”
목책 위에서 화살을 쏘던 쿠반은 어깨에 적의 화살이 꽂히자, 분노와 고통에 휩싸여 고함쳤다.
벌써 반나절째 이어지는 싸움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쿠반의 아버지가 이끄는 마사이 마을은 이런 싸움을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마사이 마을은 카발란 지역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남쪽 산악 지대와 맞붙어 있어, 언제든 고산족이 쳐들어올 위치이긴 했지만, 그간 남쪽 산악 지대에 살던 시디크(seediq)족과 협상하여 식량을 값싸게 거래해 주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았었다.
한데, 시디크족이 서쪽 아타얄(atayal)족에 흡수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으니, 아타얄족은 남쪽의 부룬(bulun)족과 더불어 가장 거친 부족이라는 악명답게 마사이 마을의 거래 요청을 비웃었다.
하여, 크게 위기감을 가진 마사이 마을은 그때부터 목책을 견고하게 다지고, 마을 사내들을 훈련시켜 싸움에 대비하였다.
나름 큰 마을이라 쉽게 넘볼 수 없을 것이라 자부할 만큼 준비했는데, 막상 아타얄 부족의 전사들이 공격해 오자,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평화롭게 농사와 고기잡이를 하며 살던 그들이 거친 산악 속에서 사냥과 약탈에 이력이 난 아타얄족 전사들의 공격을 이겨 낸다는 것 자체가 허황된 망상이었다.
그나마 목책이라도 단단하게 지어 놔 아직 버티고 있었지만, 목책 곳곳이 불타고 있었고, 방어하는 마사이 사내들도 점점 사기를 잃고 있는 중이라, 쿠반으로서는 그저 암담한 상황 속에서 용을 쓸 뿐이었다.
그때, 쿠반을 따르는 마을 청년이 목책 위로 뛰어올라오며 소리쳤다.
“바다에 큰 배들이 나타났어요! 그중 하나는 정말 엄청나게 커요! 명국 놈들 배보다도 훨씬 큰 배들이에요!”
“…….”
청년이 소리친 말을 들은 쿠반은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다른 때였다면, 꽤 급박하게 해안으로 달려갔겠지만, 지금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날 선 의문이 먼저 들었다.
지금 마사이 마을의 위기는 정체도 모를 배들 때문이 아니라 목책 너머에서 불화살을 날리고 도끼질을 하는 아타얄 놈들…….
쿠구쿠궁!
귓전을 때리는 천둥 치는 소리에 이 맑은 날에 무슨 천둥인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려던 쿠반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소리가 난 곳이 그 방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동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조차 길지 않았다.
무언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듯하더니, 돌덩이 같은 것들이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 아타얄 놈들 쪽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쿠콰쾅!
“……!”
다음 순간에 터진 폭음은 조금 전 들린 ‘천둥’ 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가까운 곳에서 연달아 터진 폭발에 쿠반을 비롯한 모든 마사이 사내들은 머리를 감싸고 목책 뒤로 몸을 웅크렸다.
그것은 작은 폭풍과 같았다.
바람으로 이뤄진 거대한 손바닥이 대지를 마구 휘젓는 듯한 충격이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자, 쿠반은 공포에 떨면서 조상신을 향해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살려 주십시오!”
몇 번이나 외쳐도 자기 귀에도 잘 들리지 않던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분명히 들렸고, 그 직후에 난데없는 바람신의 신벌이 멈췄음을 깨달았다.
상체를 일으켜 목책에 등을 기댄 쿠반은 크게 호흡하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좌우를 돌아보니, 일단 조금 전 일로 목책이 무너지거나 마사이 사내들 중에 죽거나 다친 자는 없는 듯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를 애써 놀려 쿠반을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일어서면서 쿠반은 한 가지 의문을 가졌고, 일어서자마자 그 의문을 해결했다.
그 의문은 인정사정없던 아타얄의 공격이 왜 멈췄는지였는데, 일어나 목책 밖의 상황을 살펴보니 도저히 싸움이 이어질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목책에서 1리쯤을 전후한 대지 곳곳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아타얄 전사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거나 죽어 가고 있었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타얄 놈들이 희죽거리며 화살을 쏘아 대던 바로 그곳이었다.
바로 아래쪽에서 목책을 공격하던 아타얄 전사들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어이없는 동시에 잔혹한 그 상황에 어떤 자들은 부리나케 그들의 동료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어떤 자들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주저앉고 말았다.
쿠반은 문득 작년에 죽은 대족장의 주술사가 남겼다는 유언을 떠올렸다.
9.5//“새로운 자들은 위기이나 기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저 섬을 잠식해 들어오는 명국인들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쿠반은 동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 * *
카발란 지역은 본디 현대에서 란양계(蘭陽溪)라 불리는 작은 강의 충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곳인 터라 상당히 비옥한 곳이었다.
다만, 해안가가 무척이나 단조로워 항만으로서 적합한 곳은 없었다.
카발란 지역 바로 아래 ‘북쪽의 코’라 불리는 작은 반도가 있어 항구로 쓰기 적합한 지형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배후가 온통 산지인 터라, 당대에는 포구로 쓰이지 않고 있었다.
하여, 탐라 4호는 해변에서 100미쯤 떨어진 곳에 정박하였고, 경함선들만 해변에 가까이 다가갔다.
경함선이야 여차하면 갯벌에 올라앉을 수도 있게 만들어진 덕이었다.
탐라 군병들이 해변 위에 올라올 무렵쯤엔 카발란 마을 사람들이 근처에 잔뜩 모여 있었다.
다만, 젊은 사내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걸로 볼 때, 그들은 아직 싸움이 있던 쪽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탐라 군병들이 해안에 올라와 경위 태세를 갖추자, 몽주도 해변에 상륙하였다.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을 구경해 보니, 역시나 오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의 원류인 곳답게 생김새부터가 동북아시아 사람과는 판이했으니, 대체적으로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체구는 단단해 보였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쌍꺼풀이 진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몽주가 둘러보고 있자, 그 마을 사람들 중에서 몇몇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왔는데, 가운데 앞선 자는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대략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자였다.
어깨를 다쳤는지 감싼 천에 핏기가 비치는 그자가 무어라 말하니, 대충 인사 겸 자기소개쯤 되는 듯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고려 탐라국공 석몽린이오. 물론,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하여, 몽주는 필지를 가져오게 하여 한자로 말을 적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첫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필지에 적힌 글을 본 마을 대표(?)가 상당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몽주를 향해 조금 거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자를 모르시오?”
몽주가 붓을 건네어 글을 적으라고 시늉해도 곤란한 표정이던 마을 대표는 겨우 쥔 붓을 어색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명인?”
삐뚤빼뚤하게 ‘明人’이라 적힌 글자를 본 몽주는 잠시 후 그것이 자신을 명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니오. 나는 고려 탐라에서 온 사람이오.”
…… 라고 말하며, 몽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북동쪽 먼 곳을 가리키는 몸짓을 과장되게 연발하였다.
한참을 ‘바디 랭귀지’로 설명하자, 그제야 마을 대표의 표정에 안도가 스치며 미소를 띠는 게 보였다.
“아, 미치겠군.”
몽주가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것에 답답해하자, 석삼이 자신이 해 보겠다며 나섰다.
석삼도 말을 몸짓으로 표현하여 의사소통을 시도하는데, 의외로 곧잘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쿠반? 네 이름? 알았어. 네 이름이 쿠반이구나. 이 마을 이름이 뭐야? 마을. 그래, 너네 마을. 마사이? 마사이 마을의 쿠반이구나. 그럼, 네가 여기 촌장이야? (엄지를 치켜세우며) 네가 대장이냐고. 아니야? 아, 네 아버지가 촌장인 모양이구나? 아파? 네 아비가 아파?”
석삼이 몸짓으로 정보를 캐내고 있는 동안, 몽주는 마시아 마을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의복을 보아하니 면직물은 쓰는 듯했는데, 어느 늙은이가 든 농구의 날붙이를 보니, 철이 아닌 청동인 듯했다.
목책 밖 해안 쪽에 나와 있는 집은 오직 나무로만 지어진 것처럼 보였고, 지붕도 볏짚과 나뭇잎을 끈으로 고정시켜 놓은 정도였다.
상당히 열악해 보였지만, 당대의 시선에서는 크게 낙후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만 해도, 산지나 오지로 가면 이보다 더 열악한 살림살이를 하는 곳이 많았다.
다만, 카발란 지역은 이주섬에서 적어도 중간 이상의 풍요로운 곳이라 짐작되는 걸 감안하면, 고려보다는 문명의 수준이 낮다고 보는 게 맞다 싶었다.
“아? 그거? 하하, 그게 우리 탐라군의 화포일세. 저기 보게. 배 위에 철로 된 커다란 게 보이지? 저게 바로 화포네. 저게 뻥하고 불을 뿜으며 머리통만 한 철구가 휘이이이잉~ 십 리나 날아가서 다시 뻥! 하고 폭발하는 게지.”
몸짓을 과장되게 하다 보니, 설명 자체도 과장이 섞이고 있었다. 십 리면 4길미인데 그 거리는 일반 화포 최대 사정거리의 약 두 배였다.
물론, 그런 세세한 과장까지 전해질 리는 없었고, 오히려 석삼의 설명에 쿠반이라는 자가 이해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덕분에 해변에 가득했던 긴장감도 조금 풀리는 게 느껴졌다. 부모는 어디 있는지 꼬마 아이들 중에서 일부가 탐라 군병에게 다가가 기웃거리며 무장을 구경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할 정도였다.
“이보게, 석삼.”
“그러니까 싸우는 상대가…… 예?!”
“언제까지 여기서 몸짓이나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본격적으로 협상을 해야지. 내가 보기에 마을 사람들 중에 한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을 모으면 대충이나마 뜻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몽주의 뜻을 전해 받은 석삼이 다시 쿠반에게 몸짓으로 글 적는 시늉에 입을 놀리는 시늉 등을 해 대며 협상하자 청하니, 쿠반도 얼마 뒤 그 의미를 알아듣고는 주변에 다른 사람에게 무어라 소리쳤다.
그리하여 해가 먼 곳 산맥 너머로 막 넘어갈 무렵에 몽주는 마사이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탐라 군병들 모두가 마을로 들어가려는 줄 알고 다시 긴장했던 쿠반은, 몽주가 스무 명 정도의 호위군병만 데리고 들어가고, 나머지는 목책 밖에 진을 치게 하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필담을 나누는 건 몽주에게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마사이 마을에서의 필담은 그런 그에게도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흰머리 가득한 노인부터 총기 넘치긴 하나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아이까지, 마을에서 한자를 어느 정도 아는 자들을 불러 모으니 대략 십여 명이었고, 그들을 상대로 필담을 나누는 건 꽤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여러 명이 아는 한자를 동원해도 제대로 된 글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저 한자 하나의 뜻을 보고, 의미를 짐작해야 했다. 틀리게 쓴 한자도 많았고.
“우리, 싸우다, 아타얄.”
‘우리’와 ‘싸우다’는 한자로 쓴 것이었고, 아타얄은 그들이 발음한 것이었다.
아타얄족은 몽주도 기억하고 있는 부족이었는데, 대만 산맥의 가장 깊은 산중을 차지한 두 고산족 부족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고산족 아타얄족이 평포족 카발란족을 공격했던 것을 몽주가 막은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막은 정도가 아니라, 아타얄족 전사들 수백을 절단 내 버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탄착지 중 일부가 하필 아타얄족 전사들이 뭉쳐 있던 곳이었던 것이다.
“우리, 청하다, 쌀, 교환, 아타얄, 거부하다, 빼앗다.”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다가, 석삼이 마사이 마을에서 살을 아타얄족에게 거래를 청했다가 거부당했고, 이번에 약탈을 당할 뻔했다는 의미라 해석하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의 뜻을 따져 짐작하기 시작하니, 한 시진 가까이 지나고 나자, 대략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제 몽주가 그곳에 온 목적을 밝힐 차례였다.
“나는 너희를 도와 명국인들을 내쫓고, 이 섬을 너희 원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왔다.”
물론, 그 원주민의 것이 된 이주섬을 추후 탐라의 영역에 포함시킬 의도는 감추고 말했다.
“우리, 땅, 주인.”
글로 적으며 말도 하니, 이제는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그들의 어투에 의문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몽주는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려다가 멈칫했다. 정확하게 의미가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카발란족에게 이주섬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쪽 평야 지대를 점유하고 있는 명국인들을 내쫓고, 그곳의 땅을 원주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몽주는 암담할 따름이었다.
거기다가 사실 돌려준다는 것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되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이야기는 또 어찌 전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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