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6)
* * *
쿠반은 북동쪽 바다 너머에서 온 자들이 좋았다.
귀 기울여 듣자니, 고려니 탐라니 하는 이름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데, 그 듣도 보도 못한 먼 나라의 사람들은 그의 맘에 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마을을 구해 준 것 때문만은 아니었고, 병든 아버지에게 약을 주어 열을 내리게 해 주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의 태도 자체가 그들이 가진 힘에 비해 매우 공손한 것이 맘에 들고, 존경스러웠다.
그 전사들은 군율이 엄정하여 큰 소리도 없이 묵묵히 일을 수행했고, 관리들은 어떻게든 자신들과 대화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탐라공이라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촌장도 아닌 일개 촌부가 묻는 말에도 대답하길 꺼리지 않았으니, 엄청난 위력을 부릴 수 있는 자로서 너무나 겸손했다.
솔직히 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마사이 마을은 물론, 그의 부족 전체를 평정하고도 남음을 쿠반은 알고 있기에, 그로서는 저들이 겸허히 나오는 지금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하나, 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협상을 그가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대족장에게 그간 파악한 외부인의 뜻을 전했다.
한데, 쿠반의 서찰을 가져간 자가 대족장의 부락에 도착하였을까 말까 하는 정도의 시간이 겨우 지났을 무렵, 대족장이 마사이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일천이 넘어 보이는 전사들을 이끌고.
처음에는 너무 늦긴 했지만, 대족장이 아타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전사들을 이끌고 온 줄 알았다.
전에 아타얄이 쳐들어올 것 같으니, 전사들을 보내 달라 청했을 때는 들은 척도 안 했지만, 그래도 뒤늦게나마 도우러 온 줄 알았던 것이다.
한데, 대족장은 마사이 마을 근처까지 와서는 마을에 들어오는 대신 전령을 보냈다.
그리고 그 전령은 쿠반이나 쿠반의 아버지인 촌장에게 보낸 것이 아닌, ‘침입자’에게 보낸 것이었다.
전령이 가져온 서찰을 펼치는 탐라공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본 쿠반은 가슴이 철렁했다.
“나더러 항복하라는군.”
몽주의 말은 관리에 의해 간단한 한자로 변하여 쿠반에게도 전해졌다.
쿠반은 기겁한 표정으로 탐라공의 눈치를 살폈고, 동시에 대족장을 속으로 욕했다.
먼저 보낸 서찰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전해졌어도 무시했음이 틀림없었다.
그 서찰에는 탐라의 위력이 엄청나니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분명히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나가서 대족장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쿠반이 뜻을 전하자, 몽주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몽주는 목책 위에 올라가 마을 밖으로 홀로 나간 쿠반이 대족장에게 가서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는데, 유일하게 말을 탄 대족장 앞에서 쿠반이 무어라 설명하던 중에 대족장이 크게 호통치더니, 채찍으로 쿠반을 마구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철퍼덕 쓰러진 쿠반이 이마에 흐르는 피를 훔치고는 다시 무어라 애절하게 청하였지만, 이번에는 카발란의 전사가 그를 향해 발길질하고는 억지로 무릎을 꿇렸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듯합니다만.”
함께 그 광경을 보던 석삼이 말하니, 몽주는 옅은 한숨을 내쉬곤 전투를 준비하라 명하였다.
두들겨 맞기만 하고 돌아온 쿠반이 몽주 앞에서 머뭇거리며 대족장의 요구를 전해 왔다.
“항복하면 배를 받는 것으로 용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피식.
몽주가 비웃기 전에 주변의 군병들 중에서 비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군기 엄정하던 그들조차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웃기는 요구였다.
아마 저들은 마사이 마을에서 보낸 전령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받기 전에 탐라의 배들을 발견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머리가 나쁜 건 확실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저 우리 군병의 수가 적어 보여서 만만하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쿠반은 대족장에게 탐라군을 쉽게 보지 말라면서 싸움을 피해 달라 요구했다 하였다. 물론, 그 결과는 이미 본 바였다.
몽주는 쿠반을 비롯하여 근방에 있는 마사이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고 물었다.
“이 중에 우리에게 대적하여 싸울 사람 있소?”
몽주가 물은 바가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중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자들도 있었다.
“없습니다.”
쿠반도 부락민들을 둘러보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사이 마을의 반응이 단지 두렵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호의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몽주는 미소 지었다.
“훌륭한 선택이오.”
이어, 몽주는 탐라군병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곤 물었다.
“개복포의 도움이 필요한가?”
“필요 없습니다!”
“나는 누구도 상하길 바라지 않는다. 자신 있나?”
“자신 있습니다!”
하기야 그들이 받은 훈련과 경험한 실전, 그리고 카발란 전사들과 비교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잘 갖춘 무장을 생각하면 자신 없는 것도 이상했다.
일제히 고함치며 전의를 돋우는 탐라군병들을 보며, 쿠반은 복잡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 외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고 호의도 가지고 있지만, 막상 같은 부족과 충돌할 분위기가 되자 마치 그 자신이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때, 문득 그의 어깨로 탐라공이 손이 올라왔다.
쿠반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 보자, 하얀 얼굴의 탐라공이 웃으며 무어라 말하였다.
그 말이 탐라의 관리에 의해 한자로 전해졌다.
쉬운 한자로만 쓰인 터라, 정확한 의사는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알 수 있었다.
“족장을 해 보겠느냐?”
쿠반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으려다가 탐라공의 눈빛을 보고 멈칫하였다. 그 눈빛은 조금 전 물음이 결코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님을 의미하고 있었다.
머뭇거린 직후에 쿠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말고 따질 수 없이 그는 탐라공에 의해 카발란의 족장이 되어야 했다.
싸움은 쉽게 일어났고, 쉽게 종결되었다.
몽주가 일백의 군병들을 목책 위로 올려 보내는 것으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수백 미 떨어져 있던 카발란의 전사들이 저들만의 예식인지 무기로 땅을 두드리며 전진해 왔다.
탐라군의 화답은 폭죽시였다.
근래에 탐라군에 보급되기 시작한 강철 합성궁은 폭죽이 달린 화살도 300미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모두가 명사수는 아닐지라도 훈련을 거듭한 덕에 탄성 높은 합성궁의 시위를 너끈히 당길 수 있었던 탐라의 군병들이 폭죽시를 천천히 접근해 오는 카발란 전사들 위로 쏟아 내었다.
예상보다 멀리 날아온 화살에 놀란 카발란 전사들은 서둘러 방패를 들어 이를 막았지만, 폭죽시는 애초에 화살촉으로 승부를 보는 무기가 아니라는 게 그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펑펑!
화포에 비하면 장난 같은 폭음이지만, 생전 처음 경험하는 폭발은 별다른 방어구를 갖추지 못한 카발란 전사들에게는 끔직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방패로 화살을 막아 내었다고 고함을 치던 전사들은 바로 그 화살에 달린 폭죽이 터지자 흙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단 한 번의 일제 사격은 1천의 카발란 전사들 중 절반을 죽이거나 무력화시켰고, 또 한 번의 폭죽시가 쏟아진 후에는 남은 반 중 다시 절반이 사상하였다.
그쯤에 목책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탐라군병 2백여가 달려 나가니, 살아남은 카발란 전사들 중 절반 가까이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도주하였고,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부상을 당하여 도주하지 못한 족장만이 무어라 고함칠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살려내라고 고래고래 소리쳐 독전하는 것이리라.
물론, 창과 칼로 맞부딪친 전투조차도 탐라군병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사기나 기량을 따지기 전에 그들의 창과 칼은 탐라의 창과 칼에 맞부딪치는 순간 잘리거나 부러져 버린 탓이었다.
전사들의 칼날은 철제로 보이긴 했지만, 강철로 재련된 칼날 앞에서는 엿 조각과 같았다.
싸운 시간은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았다.
족장이자 적장을 생포하였고, 1천 전사들 중 700여를 사상케 하는 동안 탐라군은 공식적으로 다친 사람조차 없었다.
물론, 작은 상처라도 입은 자가 전혀 없을 리는 없고, 몽주의 눈에도 한두 명 보이긴 했지만, 모른 척해 주었다. 그저 관리에게 상처 입은 자들을 잘 치료하라고 넌지시 명했을 뿐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몽주는 생포한 카발란의 대족장과 쿠반을 동행하여 카발란의 부락들을 순방(?)하였다.
카발란의 평야 지대는 유구섬의 남산국의 크기와 비슷한 정도에 불과하여, 볼일을 보면서도 며칠 만에 모두 돌아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락들은 곧바로, 혹은 약간 위력 시위를 본 후에 투항하였고, 대족장의 부락만이 끝까지 저항하려 하였다.
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카발란의 마을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여야 했다.
물론, 개복포 몇 문으로 목책을 부숴 버리고, 전사들 중 일부를 폭사시키는 것으로 사실상 싸움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몽주는 정말로 쿠반을 카발란의 새로운 대족장으로 만들었다.
다행인 것은 쿠반이 카발란의 대족장 승계 서열에서 끝자락이나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위로 서열이 높은 자들이 수십 명은 있었지만, 그래도 아예 자격조차 전혀 없는 자는 아니었기에 반발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쿠반을 대족장으로 만든 부족 회의에서 몽주는 카발란 부족과 협상을 벌였는데, 일방적인 요구를 관철시킬 것으로 예상하고 표정이 어두웠던 쿠반 외 카발란의 족장 및 촌장들은 상당히 자비로운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탐라가 요구한 것은 포구와 도로 건설, 그리고 채광에 필요한 인력과 토지를 요구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력은 식량과 현물로 대가를 제공해 주기로 하였으니, 착취를 예상했던 이들에게는 오히려 꿈만 같았고, 포구나 채광을 위한 토지 제공이야 어차피 해안이나 산기슭에서는 농경도 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다만, 이는 카발란 부족에 국한한 협상이었고, 몽주의 이주섬 구상을 위한 제안이 따로 있었다.
“나는 타이완의 부족들 중 명국인과 결탁하지 않은 모든 부족과 만나길 원하오. 이를 위해 카발란 부족이 나를 도와줘야겠소.”
몽주는 이주섬을 타이완이라 칭하였는데, 현대에서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만, 본디 타이완이라는 명칭 자체가 원주민들이 그들의 섬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어떻게 도와 드리길 원하시는지요?”
부족 전체에서 한자에 익숙한 자들이 몇 명 동원된 덕에 의사소통이 더 원활해졌지만, 쿠반은 탐라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물었다.
“일단은 산악과 타이완 동편의 부족들에게 대리인을 보내 달라 청하려 하오. 탐라의 사람이 가면 크게 의심받고 뜻을 전하기도 어려울 터이니, 카발란 부족이 이를 맡아주시오.”
몽주가 말하자, 쿠반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싶었더니, 그들도 고산족과는 주로 갈등할 뿐, 그 외 교류가 거의 없어 위험하긴 매한가지라는 것이었다.
“아타얄이나 부눈같이 험한 자들은 외지인을 보면 머리를 베기부터 합니다. 그리고 저희도 남쪽 부족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제야 현대에서 자료로 찾아본 내용이 떠올랐다. 대만 원주민들이 출초(出草)라 하여 적을 급습하여 머리를 베어 내는 풍습이 있고, 원주민 부족 간의 언어들 사이에 의외로 큰 차이가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몽주는 그 일을 탐라군이 직접하길 원치 않았기에, 그 점만큼은 카발란족에게 강요하였다.
하여, 쿠반을 위시한 카발란의 지도자들이 그 일을 맡을 자들을 어찌 뽑고,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곤란해하며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다음 날 카발란의 입장에서는 대환영할 일이 일어났다.
카발란의 남쪽에 있던 시디크 부족, 얼마 전에 아타얄에게 복속당했던 그 부족이 사절단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절단은 카발란 부족이 아닌 탐라공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으니, 주된 목적은 그들이 봉기하여 일부 지역에서 아타얄의 전사들을 몰아내었으니, 빼앗긴 땅을 모두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을 도와 달라 청하기 위함이었다.
* * *
시디크 부족은 일제의 대만 점령 시기에 항일 운동으로 이름을 남긴 부족이지만, 사실 원주민 중에 그 세력이 크지 않은 부족이었다.
현대에서도 대만 정부가 원주민들을 공식 인정할 때 거의 마지막쯤에 인정할 정도로 세력이 작았고, 이는 당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고산족임에도 평포족인 카발란족과 거래를 협상하였다는 것 자체가 시디크 부족이 약하다는 증거였다.
하여, 여러 번이나 주변 다른 고산족들에게 정복당하고, 흡수당하며 사라질 뻔했으니, 근래에 아타얄족에게 복속당한 것도 그 경우였다.
본래대로라면 더 오랜 후에 다시 독립(?)했겠지만, 시디크 부족의 땅인 카발란 남쪽을 점령했던 아타얄의 전사들이 마사이 마을을 침략했다가 몽주에게 박살 나는 바람에 기회를 얻어 다시 봉기한 것이었다.
하나, 여전히 아타얄 부족에 비해 많이 모자란 전력인 시디크 부족은 살길을 찾고자 하였고, 아타얄 전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외부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시디크 부족이 보낸 사절단을 이끈 자는 시디크의 대전사이자 전대 시디크 대족장의 사위로, 이름은 크아벙이었다.
몽주의 귀에는 꺼벙처럼 들리는 발음이라 조금 우스웠지만, 마주한 크아벙의 눈빛은 전혀 꺼벙하지 않았고, 오스트로네시아인들 특유의 얼굴 타투(tattoo) 탓인지 상당히 민첩하고, 강렬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덩치도 이주섬에서 본 이들 중 가장 커서, 키도 몽주보다 더 큰 듯했고, 어깨가 쫙 벌어져 있어 대전사라는 지위가 잘 어울리기도 했다.
심지어 한자도 상당히 많이 아는 편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인상적인 크아벙은 공손하게 도움을 청하면서 동시에 도와준다면 크게 보답할 것임을 먼저 밝혔고, 그렇기에 대화가 편한 감이 있었다.
“내가 타이완이 온 것은 이 섬 서부에 들어온 명국인들을 쫓아내고자 함이다.”
몽주는 시디크족을 도울지에 대해 답하기 전에 먼저 이주섬에 온 목적부터 밝혔다.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저희도 공을 돕겠습니다.”
“명나라에 원한이 있나?”
“없진 않습니다만, 그것과 상관없습니다. 그저 저희 부족을 살려 주신다면, 세상 모두와도 싸울 마음도 있습니다.”
시디크 부족을 회복시켜만 준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자세가 맘에 들었다.
“우리 탐라가 너희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군.”
“마사이 마을을 공격한 아타얄 전사들 중에는 강제로 끌려갔던 저희 시디크의 전사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도망쳐 온 자가 공이 가진 위력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믿는 겐가? 아마 허황되게 들렸을 터인데?”
“저는 화포를 본 적 있습니다. 어릴 적에 오군에서 복무한 적이 있습니다.”
“아하.”
그가 말한 오군(吳軍)이란 명나라 건국 전 주원장이 이끌던 군대를 말하는 것이었으니, 그가 화포를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앞서 명국에 원한이 없지 않다 답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몽주는 크아벙과 대화를 더 나누어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하였다.
크아벙은 오군에서 나름 군공을 세웠지만, 한족이 아니라 하여 무시당하고, 출세도 힘들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본디 그의 작은아버지가 시디크의 대전사였는데, 아타얄와의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숙청당하였고, 그 역시도 아타얄 전사들의 노예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아타얄 전사들이 마사이 마을에서 크게 죽는 바람에 전력이 약해지자, 그가 주동하여 시디크 부족을 다시 봉기시킨 것이었다.
크아벙이 하는 말이 상황에 맞고 거짓을 찾을 수 없자, 몽주는 그를 믿을 만하겠다는 시선으로 보았다.
“오군에서 복무하면서 화포를 보았다면 파양호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보았겠군.”
“네, 파양호 전에도 본 적 있었지만, 실제로 방포하는 건 그때 처음 보았지요.”
“그래? 어땠나? 한번 말해 보게. 그 유명한 싸움에 참가했던 당사자를 만나니 무척 궁금하군.”
“일개 병졸이었던 터라 보고 들은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역사적 현장에 있던 자에게 몽주는 이것저것 물으며, 파양호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였다.
크아벙도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몽주가 술상까지 가져오게 하여 본격적으로 자세를 갖추자, 그도 조금은 신이 난 듯 여러 말을 해 주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 문득 문밖에서 몽주를 찾는 석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몽주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웃는 낯으로 말하곤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니 정작 석삼이 보이지 않았는데, 앞에 지키고 있던 군병이 한 칸 건너뛴 다른 방문 쪽을 가리켜주었다.
그곳에 조금 열린 방문 틈으로 석삼의 얼굴이 보였기에, 몽주는 실소하며 다가갔다.
“거기 숨어서 뭐 하는 겐가?”
“바로 문 밖에서 이야기하다 크아벙에게 들리면 어쩝니까?”
“들린다고 해서 알아들을 리도 없지 않은가?”
“혹시 모르지요. 저와 긴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를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요.”
걱정도 팔자다 싶었지만, 석삼이 하는 말을 들으니, 긴히 할 말이 있는 듯싶어 몽주가 정색하고 물었다.
“알아보았나?”
“예…….”
석삼은 무엇이 아쉬운 듯 한숨과 함께 답하였다. 대략 그가 할 말이 짐작되는 모습이었다.
“그자와 함께 온 전사들 모두가 아타얄족인 듯합니다. 모두 정수리에 문신이 있답니다.”
“……역시 그런가.”
문신(tattoo)는 전근대 사회에서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문화지만, 그 양상은 많이 달랐다.
보통 일반적인 문명사회에서 문신은 범죄자나 노예 등을 구별하기 위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하나, 일부 문화에서는 전혀 달리 쓰였으니, 그중에서도 오스트로네시안들은 문신을 매우 진지하고,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특히 얼굴이나 머리에 새기는 문신은 아무나 새길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겠지만, 마오리족의 원류가 이주섬의 원주민인 만큼, 평포족은 아닐지라도 고산족 중에서는 얼굴이나 머리에 문신을 한 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단, 얼굴이나 머리 문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부족의 지도층이거나 숙련된 전사여야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명예’였다.
그런데 시디크족의 독립을 위해 온 크아벙과 동행한 전사들에게서 아타얄족의 식별 문신이 발견된 것이었다.
사실 쿠반이 크아벙은 본 적 있어도, 다른 전사들은 본 적 없다고 했을 때도, 다른 전사들의 얼굴 문신이 시디크족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을 때도, 의심을 확정할 수 없었다.
쿠반이 시디크족 전사들을 모두 보고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시디크 스타일 문신이라고 해서 명백히 구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아타얄족의 숙련된 전사들은 정수리에 독수리 모양의 문신을 새겨 그 자신이 ‘베테랑’임을, 그리고 아타얄 부족임을 자랑하고 식별에 쓰는 풍습이 있었다.
하여, 크아벙과 동행한, 자칭 시디크족의 전사들에게 여자와 술을 내어주어 흐트러지게 한 후, 그들의 머리카락 속에 숨은 정수리를 확인하게 한 것이었다.
“하긴, 시디크족들로만 보낼 수는 없었겠지.”
몽주도 아쉬움을 곱씹곤, 석삼에게 크아벙도 추포하라 명하였다.
그러자 석삼이 방을 나섰고, 잠시 후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큰 소음과 함께 크아벙의 고함이 들렸다.
제법 반항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탐라군병들을 홀로 이겨낼 수는 없었고, 억압되어 끌려간 것을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사람 자체는 괜찮은 모양인데 말이야.’
몽주는 쿠반에게 들은 크아벙에 대한 평판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고산족임에도 신의가 있는 인물이라 했던 것이다.
하나, 사실 몽주는 이미 크아벙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 중에 거짓말이 적잖았기 때문이었다.
크아벙이 정말 오군에 복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파양호에서 싸운 적은 없는 게 분명했다.
일단 그의 한자와 중국어 실력은 정식으로 군무에 임했다고 보기에는, 특히 크아벙이 스스로 오군에서 4년이나 복무했었다고 밝힌 것에 비하면, 많이 모자랐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크아벙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나, 파양호 대전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면서 슬쩍 몇 가지 ‘낚시’를 시도해 보니, 거짓으로 응수하는 것이 상당했다.
다른 싸움이라면 모를까, 파양호 대전은 전근대 중국에서 있었던 싸움 중에서 현대에도 그 싸움의 시작과 과정 등이 면밀하게 밝혀져 있는 유명한 전투였다.
특히 함포를 보았다면서 당시 오군 장수 유퉁해가 함포 싸움을 전담했던 것도 잘 몰랐고, 서달이 마지막 결전쯤에 전선에서 벗어나 응천부로 돌아가 장서성의 침략에 대비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일개 병졸이었기에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오류가 보이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까지도 섣불리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확신하진 못했는데, 평판과 달리 허풍이 센 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가 동행한 전사들이 아타얄족 전사임이 확인되었으니, 허풍이기 전에 거짓말을 한 게 분명했다.
시디크족의 봉기를 위해 찾아온 자가 시디크족을 복속시킨 아타얄족의 전사와 함께하고 있으며, 그 아타얄족이 며칠 전에 탐라군에 크게 당했다는 사실이 더해지니, 아탸알족이 무슨 꿍꿍이로 크아벙을 보냈는지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를 산중으로 끌어들이려 한 게지.”
아마 탐라군을 외부에서 온 정복자로 오해…… 마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리 여기고 시디크족을 미끼로 삼아 산속 매복지로 끌어들일 속셈이었을 것이다.
몽주는 쓴웃음을 지었고, 그 직후에 이를 어찌 이용할 수 있을지 맹렬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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