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7)
* * *
이주섬의 크기는 한반도의 삼남 지방만 했지만, 산세는 한반도보다 훨씬 거칠었다.
크지 않은 그 섬에 백두산보다 훨씬 더 높은 산이 포함된 거친 산맥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대도 마찬가지만, 전근대 시대 지리와 지형은 전투에 더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미 구주에서 작은 산성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꽤 고전했던 경험이 있는 몽주는, 그렇기에 이주섬을 순전히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건 생각지도 않았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경우도, 대만을 점령하는 데 있어서 초기에는 평지에 국한하였고, 평지를 완전히 안정시킨 이후에야 산악에 차근히 손을 뻗었다.
지금 탐라군이 당대에서는 오버테크놀로지급 무장을 갖췄다고는 하지만, 일제의 군대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수준이니, 그들마저 고전했던 산악 지대에서의 싸움은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었다.
여건이 되어, 정말 그냥 점령하려고 한다면, 일제의 경우를 답습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주섬의 평야에는 명국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었고, 탐라가 이주섬에 진출하는 것을 명국에 최대한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평야를 먼저 석권하는 식으로 점령전에 나설 수가 없었다.
카발란족을 이용하여 평포족부터 차례대로 정복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카발란족은 그럴 능력이 안 되었고, 결국 탐라군이 나서야 했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탐라가 대놓고 평야 지대를 점령하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그건 명나라와의 갈등이 생길 짓이기에 지금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때문에 몽주에게 있어, 고산족을 비롯한 이주섬의 원주민은 기본적으로 회유와 포섭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탐라의 편으로 만든 원주민들을 통해 중국인들을 이주섬에서 쫓아내는 게 첫 번째 목적이었다.
이런 절대 조건을 가진 몽주는 당연히 산악 지대로 군병을 진출시키는 것을 지극히 꺼렸고, 시디크 부족의 대전사가 했던 말에 혹한 중에도 자연히 보수적으로 따져야 했으며, 그것이 대전사 크아벙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는 심리적인 기반이 되었다.
카발란 부족의 대부락 내 탐라군의 군진지에 속한 한 빈집에서는 사흘 밤낮으로 비명과 신음이 그치지 않았다.
크아벙을 비롯한 ‘시디크 사절단’에 대한 고신은 당대의 기준에서는 그리 강도가 높지는 않았다.
적어도 고신 이후에 후유증이 크게 남아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신은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신체적인 가해가 적어도 고문할 방법은 많았고, 특히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은 꽤 버티던 크아벙도 나흘째에 이르러서는 기어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할 마음이 생겼나?”
“…….”
크아벙은 묵묵하게 몽주를 보았다. 초췌하기 그지없는 얼굴은 오히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이미지’와 더 닮아 있었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미 고신으로 알아야 할 건 다 알아내었고, 몽주도 그에 대해 보고받은 상태였다.
크아벙이 오군에서 복무한 건 사실인 듯했다. 다만 용병의 신분이었고, 파양호 대전 전에 탈영했다던가.
“왜 탈영했었나?”
몽주는 쉬운 것부터 물었다. 지금의 일이 아닌 예전의 일부터.
고신하던 곳에서 옮겨진 방 안에 크아벙은 아직 발이 묶이고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입과 손은 자유로웠다.
물론, 바로 곁에는 탐라 군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말이다.
“너희 개 같은 중국 놈들한테 지긋지긋해져서.”
“……?”
몽주는 글로 적힌 크아벙의 말을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중국 놈들을 개같이 여기는 건 상관없다. 아마 용병 시절에 꽤 천시 받고 시달린 모양이인 듯했으니.
중요한 건 몽주를 향해 말하면서 ‘너희 중국 놈들’이라 칭하였다는 것이었다.
“나와 우리 군병은 고려인이고, 탐라공국 사람이다. 중국인이 아니지.”
“그래 봐야 결국 중국 놈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놈들 아닌가.”
“아닌데? 저번에 뭘 들었지? 나는 명국 놈들을 이 섬에서 쫓아내기 위해 왔다고 했지 않았나. 그걸 듣고도 우리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겐가?”
“중국 놈들끼리 싸우는 거에 우리 부족을 왜 끌어들이려 하는 게냐?”
“거참…….”
크아벙의 중국인에 대한 혐오는 깊었고, 고려와 탐라를 중국과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뭐, 그거야 차차 알게 되겠지. 한데, 시디크족인 네가 아타얄의 앞잡이가 된 이유는 무엇이냐? 정말 우리를 속여 산중으로 끌어들이면 시디크족을 독립시켜 주겠다는 말을 믿은 게냐? 겨우 그 정도 일로 너희 부족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게 말이 되나?”
앞잡이라는 뜻이 전해지자 크아벙은 발끈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시무룩해져서는 무어라 답하였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 부족은 몰살당한다.”
“그 거짓말을 믿는다고?”
아무리 아타얄족이 강성하다고 해도 다른 고산족 모두를 몰살할 수는 없었다. 정말 부족 간의 말살 전쟁이 벌어지면 아타얄족도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세상 어디에서든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복속함은 기본적으로 착취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인신 공양 풍습의 제물을 얻기 위한 명분으로 ‘꽃의 전쟁’을 일으켜 주변 부족을 침략했던 아즈텍족도 그 실상은 결국 다른 부족을 착취하고 군림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은 죽는다.”
그제야 조금 솔직한 답이 크아벙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군. 하면, 너는 너와 네 가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부족을 팔아먹으려 한 거군.”
“……!”
크아벙이 이맛살을 와락 구기곤 몽주를 노려보았다.
어찌 그런 모욕을 주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긴, 부족을 팔아먹었다는 건 좀 과한 말이긴 했다. 그가 팔아먹으려 했던 건 탐라군이었으니까.
“우리가 너희 시디크족을 정말로 도울 수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부족을 팔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헛소리 하지 마라. 중국 놈들 입 발린 소리 따위에 속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너희가 왜 고생을 자처한단 말이냐?”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려 탐라공국 사람이니, 네가 중국인에 대해 뭐라 말하든 우리와는 상관없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있다고 했지, 우리가 고생을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몽주가 말을 마치면서 대필하던 관리에게 고갯짓을 하자, 그가 일어나 방문을 열었고, 밖에 대기 중이던 쿠반이 안으로 들어왔다.
쿠반은 몽주에게 고개를 숙이곤 별다른 령을 받기도 전에 크아벙을 향해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앞서 쿠반에게 명해 둔 것이 있었으니, 크아벙에게 탐라에 대한 것과 타이완에 온 목적에 대해 설명하게 하였다.
카발란족과 시디크족이 협상하여 식량을 거래하면서 쿠반과 크아벙은 서로 안면이 있었고, 쿠반은 앞서 크아벙을 두고 고산족 중에 신의 있는 자라 평한 바 있었다.
몽주는 쿠반과 크아벙의 대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혼자만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타얄이 크아벙들을 통해 조장하길, 이번 달 보름날까지 탐라군을 꾀어 오라 한 듯했다.
보름날까지는 아직 엿새 정도 남은 걸 생각하면, 제법 시간이 있지만, 탐라군이 그 전에 출병할 수도 있으니, 아타얄족도 잃은 전사들을 동원하고 매복 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이 그리 많은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 매복지가 두 곳 이상일 가능성이 낮다는 말이었다.
만약 그 매복지를 미리 알아내 역으로 아타얄의 매복군을 격멸할 수 있다면 연달아 타격을 입은 아타얄족의 전력은 급격히 약해질 것이다.
아타얄족이 이주섬의 원주민 부족들 중 가장 강대한 군력을 가지고 있는 부족들 중 하나라곤 하지만, 그래 봐야 전사라고 불리는 자들은 수천, 아마 3, 4천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 수백이 사상당한 그들에게 한 번 더 수백의 피해를 입히면, 그래서 1천 이상의 피해를 준다면 아타얄족의 주변 부족들도 체감이 가능할 정도로 전력이 줄어들 것이다.
몽주가 아타얄족을 꺾는 것을 염두에 두는 건, 하나의 부족을 공략함으로써 다른 부족들을 포섭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타얄족을 ‘시범 케이스’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그간 아타얄족이 주변 부족을 상대로 행패를 부린 전력을 이용하고자 함이니, 일종의 ‘왕따’로 삼고자 함이었다.
카발란 부족민들의 증언에서 아타얄은 그야말로 인두겁을 쓴 짐승들이었다.
그건 아타얄과 서쪽으로 닿아 있는 카발란 부족민들이 워낙에 시달린 탓이기에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타얄이 카발란족 외에 다른 고산족과도 자주 다툰 건 사실인 듯했다.
예컨대, 시디크족의 남쪽에 위치한 타로코(taroko)족은 시디크족처럼 아타얄에게 복속될 위기에 처해 있었고, 타로코족 남쪽에 거주하는 사키자야(sakizaya)족과 아미스(amis)족과도 근래에 크게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타얄족은 동북부 산악 지대의 패권을 얻고, 지키기 위해 전쟁을 자주 일으킨 것이다.
그나마 아타얄족과 다투지 않은 부족은 아타얄족의 남쪽 부눈(bunon)족 정도에 불과하다는데, 부눈족은 똑같이 가장 깊은 산악에 사는 부족으로 아타얄 못지않게 거친 부족인 터라 아탸얄도 조심한 모양이었다.
이런 아타얄족에 대한 주변 다른 부족의 반감을 이용하여, 만약 아타얄족을 무너뜨리는 목적으로 아타얄에게 당했거나 당하고 있는 부족들을 결속시켜 아타얄을 몰락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을 다시 명나라 이주민들을 내쫓는 데에도 끌어들일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될까?’
가늠할 수 없었다.
이 작은 섬에 수많은 부족들이 모여 있는 만큼 그들 간의 충돌은 끊임없었을 것이니, 단지 아타얄족을 처단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탐라의 중재하에 손을 잡을 지는 미지수였다.
하나, 시도해 볼만 일이었다.
된다면 이주섬의 동북부만큼은 빠른 시기에 ‘탐라 연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몽주의 생각이 한창 진행되었을 무렵, 탐라공이라는 어색한 발음에 담긴 쿠반의 부름이 들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쿠반이 설명할 건 다 설명했다는 듯 공손한 미소로 몽주에게 이제 말씀하시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아벙은 아까보다는 덜 적대적인 시선으로 몽주를 보고 있었다. 적어도 고려 탐라가 중국과 무관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 듯했다.
몽주는 다시 크아벙 맞은편에 앉았다.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보지. 일단 이것부터 알아 두어야겠지. 자네 가족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야. 내가 자네를 계속 억류해 두든, 아니면 자네를 돌려보내든 말이지. 자네는 나와 우리 군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운이 좋다면 약간이나마 자네 가족들이 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겠나?”
* * *
거친 산악 지형은 그 자체가 훌륭한 매복지였다. 울창한 숲과 구불구불하고 등락이 심한 지형이 그렇게 만들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탐라군이 시디크족의 부락, 즉 크아벙의 부락으로 출병할 경우 아타얄족이 매복할 곳은 수도 없이 많다고 봐야 했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그 지역의 지리를 아는 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한 곳을 매복지로 지목하였다.
이른 바 ‘폭포길’이라는 불리는 곳이었다.
카발란 지역에서 남쪽 길을 따라 산악으로 들어가다가 크아벙의 부락에서 1길미 정도 떨어진 곳에 5백미 정도의 오르막길이 있는데, 그 길은 냇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나 있었고, 그 계곡에는 2, 3단의 작은 폭포들이 연달아 놓여 있기에 폭포길이라 불렸다.
계곡 아래쪽 길이라는 것 자체가 매복하여 위에서 아래로 적을 공격하기에 적합했지만, 폭포길은 지형적 특색이 하나 더 있었으니, 계곡 반대쪽으로 경사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절벽이 솟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 암석 절벽의 위는 크게 넓고 평평해서, 폭포길을 따라 전사들을 배치해도 1천 정도는 너끈히 둘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 절벽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크아벙의 부락을 통해 이어진 길로 가거나, 아니면 크게 돌아 동쪽 해안부터 올라가야 했으니, 만약 폭포길 중에 절벽 위에서 공격을 받으면 아래쪽에 있는 자들은 사실상 위로 올라가기 불가능한 곳이라는 말이었다.
마치 한순간에 도망갈 수도 없는 데다 성벽 아래 모여든 공성병의 입장을 적에게 강요할 수 있는 지리이니, 최적의 매복지라 할 만한 곳이었다.
몽주가 탐라군 400명과 카발란족 전사 100명을 몰아, 천천히 폭포길로 접근한 건 보름날 하루 전이었다.
혹시 몰라, 오는 길에 첨병을 적극 활용하여 매복 가능성을 짚으며 온 것인데 역시나 없었다.
군병이 고삐 끌어 주는 말 위에 앉아 몽주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폭포길 오르막을 거의 다 올라간 한 필의 말이 있었다.
그 말에 탄 자는 바로 크아벙이었다.
그는 탐라군에 앞서 아타얄족에게 탐라군이 온다고 알린다는 명분으로 먼저 간 것으로, 당연히 아타얄족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실상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몽주가 크아벙에게 말한 일말이라도 가족을 건사할 방법이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가 홀로 가족을 지키는 것이었다.
무슨 신신묘계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몽주가 허락해 주어야 했고, 그 허락을 얻기 위해서 크아벙은 ‘이중 첩자’의 노릇을 해야 했다.
폭포길 오르막을 다 올라간 크아벙은 문득 말을 멈추고는 말머리를 돌려 한 바퀴 둘러보는 모습을 보였고, 멈칫한 직후에 그대로 다시 말을 달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폭포길 오르막 꼭대기도 곁에 3미 정도 절벽이 있었지만, 그 절벽 위가 약간 경사가 있어 아래쪽 절벽 위와 눈높이가 대략 맞았다.
그러니까 만약 그 위에서 본다면 절벽 위에 매복이 있는지 대략 판가름할 수 있다는 뜻이니, 조금 전 그가 아무런 신호도 없이 언덕 너머로 사라진 것은 예상대로 매복이 있다는 의미였다.
“행군 중 방포 준비.”
몽주의 명이 떨어지자, 뒤를 따르는 탐라군병들 사이에 작은 소란함이 생겼다.
걸으면서 개복포를 조립하는 소리이자, 가급적 빠르게 초탄 방포하기 위한 준비로 인한 웅성거림이었다.
그사이 몽주는 절벽 위를 노려보며, 사라진 크아벙에 대해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작은 우려는 크아벙이 다시 배신하여 아타얄족에게 탐라군이 매복을 눈치챘다고 고하는 것이었다.
그 고자질의 대가로 가족의 안전을 얻는 게, 그가 홀로 분전하여 가족을 지킬 가능성보다는 클 테니, 크아벙으로서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생각일 것이다.
하나, 그건 최종적으로 아타얄이 탐라군에 승전했을 때나 보장받을 수 있는 대가였다.
그걸 생각하면 크아벙도 그렇게 쉽게 배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카발란에서 탐라군의 개복포와 폭죽시가 가진 위력을 견문한 바 있었다. 그가 이중 첩자 역할을 감당하고, 홀로 가족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도 그것을 본 이후였다.
탐라군이 가진 위력이라면 매복군을 빠른 시기에 몰락시키고, 크아벙의 부락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래서 조금만 버티면 그 자신과 가족을 지킴은 물론이고, 시디크족의 독립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감히 위험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되짚어 보던 몽주가 실소하였다.
그러고 보면 크아벙을 조장하여 탐라군을 끌어들이려 한 아타얄족의 작전이 오히려 탐라군을 도운 셈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몽주는 만약 이런 산세에서 유격전식으로 자신들을 괴롭혔다면 오히려 힘겨워서 물러났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한데, 오히려 저들이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승부를 보고자 하니, 탐라군의 입장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상황인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부처께 감사드린 몽주는 다음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앞에 큰 바위가 있는 넓은 곳까지 가서 방포하지. 한 400미쯤 되겠군.”
바위까지는 대략 50미 정도 남았고, 크아벙이 폭포길 너머로 사라진 것도 반 다경 정도 지났다. 이미 크아벙은 마을에 닿아 아타얄족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가족을 만났을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방포음이 난다고 해도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여길 뿐이지, 매복이 걸렸다고 곧장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몽주의 말이 큰 바위를 지나 공터에 다다르자, 몽주는 말없이 살짝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탐라군병들이 우르르 달려 저마다 지정해 둔 자리에 개복포를 방열하였고, 방열하자마자 역시 준비해 둔 포탄을 장착하였다.
이미 사거리는 대략 정해 두었으니, 대략 800미 정도를 타격할 예정이었다.
보이지 않는 절벽 위인 터라 정확한 사거리를 포착하기는 어렵겠지만, 몽주는 탐라군이 그간 행한 훈련과 실전 경험을 믿었다.
800미라는 거리는 탐라군의 위치에서 절벽의 뒤쪽까지였으니, 그곳부터 차례대로 거리를 당겨 쏘면 절벽 위의 매복한 전사들은 감히 도망치지 못하고 절벽 위에 갇힐 수밖에 없을 터였다.
폭포길 위의 절벽이 오를 수 없는 곳이라면 마찬가지로 쉽게 내려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한 셈이지 않은가.
“방포!”
어느 장교의 신호와 함께 초탄이 일제히 방포되었다.
펑퍼벙!
방포음이 있었고, 잠깐의 공기 찢는 소리가 들려올 때, 문득 절벽 위에 금속의 반짝거림이 연달아 보였다.
아마 절벽 위에서 탐라군이 다가오길 기다리던 아타얄족의 전사들이 방포음에 놀라 일어서거나, 움직이면서 보인 반사광인 듯했다.
그리고 그 반사광은 방포된 포탄이 절벽 안쪽에 탄착하여 폭발할 때부터 급격히 늘어났다.
쿠구쿠궁!
폭음에 화답하듯 개복포들이 연달아 거리를 줄이며 방포를 시작하니, 산중에 폭음이 메아리쳐 사납게 귀를 때렸다.
물론, 귀 아픈 것이야 탐라군이라면 다들 이력이 났고, 몸이 아플 적군의 신세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뒤쪽에 어중하게 있던 카발란 전사들이 덩달아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고 있는 걸 빼면 말이다.
카발란족의 전사들이 하는 꼴에 미소 짓던 몽주는 점점 절벽 위 전체를 때리기 시작한 방포에 다시 주목했다.
독안에 든 쥐 신세.
매복이란 본디 적을 독안에 든 신세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지만, 들통난 매복은 반대로 자신이 독안에 든 신세로 만드는 법이었다.
몽주는 손자약해에서 말하는, 출기불의(出其不意)라는 적의 허점을 노리는 기병(奇兵)의 핵심을 되씹으며 탐라군의 포탄 세례가 절벽 위를 얼른 다지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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