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8)
* * *
“모두 마흔둘이 사상당했고, 그중 우리 군병의 사망자는 다섯입니다.”
카발란족 전사들 중에 생긴 사상자를 포함한 보고였다.
“대부분은 여기 마을로 오는 도중에 당했겠지?”
“네.”
사디크족의 카잔 마을에서 몽주는 사망 및 부상자 보고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압도적인 전과를 올린 싸움이지만, 기어이 탐라군병 중에 사망자가 나온 것이 아쉬웠다.
“시디크족 사상자는 파악되었나?”
“아직입니다. 하나, 죽은 자는 없는 듯합니다. 한 명 빼고는…….”
“혹시 모르니 잘 알아보게. 우리가 두려워서 말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몽주는 앉아 있던 호상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 시진 전에 아타얄 전사들을 물리치고 카잔 마을에 들어왔다.
폭포길 절벽 위에 있던 아타얄족 전사들이 700여 정도였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으니, 이 마을에서 죽은 자까지 더하면 근 1천의 아타얄 전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에 비해 아군의 사상자는 50이 채 안 되는 수이니, 일방적인 승리였고, 그 대부분이 카발란족 전사들이었다.
사실 더 안정적으로 군을 운용했다면 피해는 더 적었을 것이다.
하나, 폭포길 절벽을 포격하여 적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시킨 후, 가급적 빠르게 카잔 마을에 닿기 위해 행군을 재촉하였고, 그 때문에 오는 길 중에 있던 아타얄 전사들의 기습을 두 번 정도 허용해야 했다.
다행히도 그 기습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싸움이 시작된 이후 조력을 위해 이동 중이던 아타얄 전사들이 탐라군의 진격을 알아채고 급하게 발목을 잡기 위해 싸움을 건 수준에 불과했기에 약간의 피해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몽주가 탐라군과 카발란 전사들을 빠르게 움직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카잔 마을에 있는 아타얄 전사들이 도망가는 걸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카잔 마을에는 카발란을 습격하기 위해, 그리고 정체 모를 ‘탐라군’을 이기기 위해 근방 아타얄 전사들이 거의 모두 집결한 상태였으니, 카잔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는 것은 곧 근방 아타얄족의 장악력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크아벙이었다.
끼이익.
문득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몽주의 뒤쪽 집에서 크아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몽주가 그를 바라보니, 크아벙도 몽주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의 8할은 슬픔이었지만, 약간의 원망도 보였다.
크아벙의 아내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탐라군이 매복에 걸린 게 아니라 오히려 매복을 이용했다는 걸 알게 된 아타얄의 전사들은 자신들을 속인 크아벙에게 앙갚음 하고자 하였고, 그는 거의 한 식경가량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십수 명의 아타얄 전사들을 상대로 가족을 지켜야 했다.
탐라군이 카잔 마을을 공격하면서 크아벙을 노리던 아타얄 전사들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물러났지만, 그 사이에 어린 딸을 몸으로 막아 지키던 크아벙의 아내가 칼에 큰 상처를 입고 결국 죽고 말았다.
크아벙도 어깨와 뺨에 자상을 입었고, 그의 어린 아들도 옆구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고 이미 탐라군의 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몽주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자, 크아벙이 다가와서는 몽주의 곁에 있는 관리의 손에서 흑판과 백묵을 빼앗듯 들고는 무어라 적었다.
“아타얄 놈들을 언제 죽일 수 있소?”
“이미 그대의 아내를 해한 자들은 다 죽였지 않나?”
“그건 아내의 몫이오. 그걸로는 부족하오. 나는 아타얄의 씨를 말려 버릴 것이오.”
탐라군이 카잔 마을을 점령하였을 때, 이미 크아벙은 살귀처럼 날뛰고 있었다.
아내를 죽이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해하려 한 아타얄의 전사들은 살았든 아니든 크아벙에 의해 모조리 목이 잘렸다.
물론, 그 와중에 눈에 띈 다른 아타얄 전사들도 여럿이 죽었다.
아무리 노예로 떨어진 신세였지만, 그는 시디크를 대표하는 전사였으니, ‘다구리’가 아닌 상황에서 그를 이길 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내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한 크아벙은 이제 부족을 위한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정확히 시디크족이 아타얄족에게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탸알족의 평판을 생각하면 너그러운 지배를 했을 리가 없었다.
“아타얄은 반드시 칠 것이다. 하나, 시디크족만으로는 부족하니, 다른 부족을 포섭하는 게 먼저다.”
“…….”
그 뜻을 전해 들은 크아벙이 약간 발끈하는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참는 기색이었다.
아마 탐라군이 쳐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나, 이미 몽주는 도울 수는 있어도, 고생할 생각은 없다고 밝힌 바 있었다. 카잔 마을까지 온 것만으로도 탐라군은 할 만큼 한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우리를 도울 것이오?”
잠시 머뭇거리던 크아벙이 묻자, 몽주는 간단하게 백묵을 놀려 답하였다.
“무기와 갑옷. 화포는 아니고.”
탐라의 선박에는 2천 명가량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와 갑옷이 실려 있었다.
물론, 그 무기 중에 화약 무기는 일절 없었다. 하나, 이주섬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강철로 된 날붙이들과 작은 철판이 붙어 있는 찰갑만으로도 신병이기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포의 지원이 없다는 것에 크아벙은 조금 아쉬운 듯했지만, 몽주가 탐라군병의 무장을 가리키며 무기와 갑옷의 수준을 알려 주자 입술을 축이며 탐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원주민에게 지급할 날붙이들, 즉 칼과 단창 그리고 화살촉은 탐라군이 쓰는 것과 같았지만, 찰갑은 예전에 탐라군이 쓰던 재고품으로, 지금 탐라군병의 갑옷과는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의지를 돋운 크아벙은 언제 다른 부족들을 포섭할 것인지 물었다.
“그야 시디크족이 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 하여, 내 묻지. 언제 다른 부족에게 전령을 보낼 수 있겠나?”
“……바로 준비할 것이오.”
크아벙이 정말 바로 달려나갈 듯 답했다.
하나, 아무리 대전사 크아벙이라고 해도 어수선한 중에 시디크족을 곧바로 동원할 수는 없었다.
카잔 마을의 시디크족 전사들을 추스르고, 그들을 주변의 다른 시디크족 마을로 보내 그들을 지배하던 아타얄 전사들이 제거되었음을 알려 부족의 재건에 끌어들여야 했으며, 크아벙 개인적으로는 그의 아내에 대한 장례도 치러야 했다.
시디크족의 장례법은 조장(鳥葬)의 형태이었다. 그들이 조상의 둥지라 부르는 절벽의 큰 바위 위에 시체를 두면 새가 시체를 쪼아 먹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완전히 버려두진 않고, 뼈만 남게 되면 그 뼈를 갈아서 마을의 수호목 주변에 뿌렸으니, 일종의 수목장(樹木葬)의 형태도 띠고 있었다.
대신, 아타얄족 전사들의 시체는 불에 태운 후 땅에 묻었는데, 시디크족을 비롯한 고산족들에게는 상당히 치욕적인 처리법인 듯했다.
고려인의 입장에서는 어째 적아의 처리가 바뀐 것 같기는 했지만, 산불을 악마처럼 여기는 그들에게 불에 태운다는 건 그만큼 큰 모욕이었고, 반대로 조장과 수목장은 자연과 조상을 신으로 모시는 그들의 풍습에서는 가장 적합한 절차인 듯했다.
그렇게 칠 일에 걸쳐 얼추 수습이 끝나자, 크아벙은 시디크의 전사 중에서 전령들을 뽑았고, 그들에게 바짝 말린 아타얄 전사들의 머리를 몇 개씩 소지하게 하고 동북부의 부족들에게 회합을 청하러 보냈다.
아타얄족의 반격이 있을지 몰라 시디크족과 카발란족의 전사들이 길목을 감시했지만, 아타얄족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하기야 도합 천이백 이상의 전사를 잃은 아타얄족으로서는 외부로 힘을 투사하기는커녕, 시디크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의 침입을 걱정해야 할 판일 것이다.
가장 먼저 빠르게 호응한 부족은 시디크족의 바로 남쪽에 닿아 있는 타로코족이었다.
오래전에는 시디크족과 꽤 다투었다고 하는데, 두 부족 모두 아타얄에게 크게 밀린 뒤에는 별다른 원한 관계가 없어, 시디크족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한데, 그 외의 부족에게는 좀처럼 반응이 없다가, 열흘 만에 사키자야족에게 갔던 전령이 돌아왔는데, 그가 전하길, 사키자야족은 시디크족의 요청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아미스족의 요청에 따라 결정을 연기했다고 했다.
동부 해안 고산족들 중 가장 강성한 아미스족이 시디크족의 요청을 두고 주변 부족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독단적으로 화답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아직 아미스족이 시디크족의 요청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디크족이나 탐라의 입장에서는 사뭇 염려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게 되자, 몽주는 탐라로의 귀환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족들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카잘란에 포구도 짓기 시작하고, 시디크족의 재건을 도우며 그들과의 우호 관계를 도탑게 하였지만, 탐라공으로서 슬슬 탐라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원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적지 않았지만, 왜국이든 북방이든 간간이 탐라와의 교신이 가능했던 것에 비해, 이주섬은 그럴 수 없는 곳이라 더욱 그랬다.
하여, 남양 대사 석삼과 차후의 일을 논의하며 이주섬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갑작스레 엉뚱한 부족의 사절단이 카발란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싸오(thao)족의 사절단으로, 싸오족은 아타얄과 부눈족 사이에 있는 작은 고산족이었다.
다만, 지역적으로 동부 고산족이라기보다는 서부 고산족이라 시디크족의 전령도 가지 않은 부족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이 먼저 사절단을 보낸 것이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싸오족 대족장의 아우라는 자는 몽주를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리면서 부탁하였다.
싸오족은 중국인들과 결탁한 서부 평포족 호안야(hoanya)족에게 밀리던 중에 아타얄족의 침략까지 받아 존속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타얄족의 전사들이 급히 물러난 것을 보고 사정을 알아보다가, 외지인이 카발란족과 시디크족을 도와 아타얄족과 싸웠다는 걸 알게 되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손을 뻗은 것이었다.
대아타얄족 전선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몽주에겐 그들이 서부 평야 지대의 소식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더 기꺼운 일이었다.
하여, 몽주는 그들을 환대하며 서부 지역 상황을 물어보자, 싸오족의 사절단은 흔쾌히 답하였다.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은 호안야와 바부자(babuza)이고, 시라야(siraya) 남부에도 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급된 세 지역은 모두 서남부의 평야 지대였다.
그러니까 현대 대만 구역으로 치면, 북부의 타이페이나 타이중을 제외한 서부 평야 지대 전역에 중국인들이 스며드는 중이었다.
다만, 현대의 타이난 지방에 해당하는 남쪽에는 한족이 아닌 월인(越人)들이 세력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중국의 월인들인지 아니면 안남의 월인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호안야의 중국인들은 대략 2천 호가량입니다. 바부자에도 비슷한 수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라야에 있는 월인들의 수는 싸오족도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대략 보건대, 이주섬에 건너온 중국인들은 최소 2만 5천 명가량인 듯했고, 월인들까지 중국에서 온 자들이라면 4만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남중국해의 교역으로 얻은 경제력을 통해 평포족을 흡수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특히 단지 이주섬의 중국인들과 싸워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과 결탁한 원주민들까지 모조리 ‘박멸’할 생각이었던 몽주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수였다.
* * *
“이래서야 1만 명을 무장시켜도 모자라겠는데요?”
싸오족의 사절단을 물린 후, 문득 말도 없이 잘 쓰지도 못하는 주판을 들고 찾아와서는 뭔가를 계산하던 석삼이 한참 후에야 꺼낸 말이었다.
“서남부 평포족들이 모두 중국인들과 손을 잡았다는 건 거의 기정사실인 듯하고, 호안야족이 1만 호를 족히 넘긴다고 하니 총 호구수를 대략 5만 호쯤으로 계산하면……. 아, 여기에 중국인들까지 합해서 40만 명가량 될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것만으로도 왜 1만 명을 무장시켜도 모자랄 것 같은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다.
상시적인 충돌이 아닌 총력전 상황에서는 인구 대비 십분지 일 이상을 동원할 수 있다는 상식으로 비춰 볼 때, 중국인들 및 그들과 결탁한 평포족의 전력은 4, 5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일종의 점령전 상황에서 공격과 수비의 적정 비율을 생각하면 공격하는 고산족의 전력이 적어도 15만은 되어야 무리 없을 것인데, 이주섬의 고산족을 모조리 결속시켜서 평포족을 친다고 해도 그 정도의 전력을 뽑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기본적으로 고산족 부족들은 그 호구수가 평포족보다 적기 때문이다.
예컨대, 싸오족처럼 정말 작은 부족은 2천 호도 채 되지 않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싸오족의 사절단이 밝힌 것으로 어쩌면 조금은 과장했을 가능성이 다분한 규모였다.
결국, 무장의 우수함을 더하여 수적 우세의 효과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가져온 2천 명분의 무장량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물론, 그게 탐라국이 예상한 무장 지원의 규모는 아니었고, 석삼이 1만 명을 기준으로 모자랄 것 같다고 판단한 것도, 애초에 이주섬의 원주민을 지원하는 중 무장 부분은 최대 1만 명을 무장시킬 것을 예정했기 때문이었다.
“더 늘리면 되겠지.”
“좀 아까운데요.”
석삼이 말하는 투가 더 쉽게 고산족의 전력을 높일 방법이 따로 있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화약 무기를 조금 넘겨주어 쓸 수 있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개복포는 절대 안 돼. 그리고 그건 제대로 쓰려면 훈련도 많이 필요해.”
“화포나 개복포는 안 되더라도, 폭죽시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훈련이 필요하긴 하지만, 개복포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안 돼.”
“혹시 고산족들이 배신할까 염려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당연히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는 이곳 고산족들이 화약 무기를 쓴다는 소문이 중국에 퍼지면 어찌 되겠나?”
“어찌 되긴요, 더 무섭다고 안 오겠죠.”
“그리고?”
“……그리고 자칫 우리가 배후에 있다는 의심을 사겠죠.”
“잘 아는군.”
몽주가 실소하자, 석삼의 표정이 문득 불퉁해졌다.
“할 말 있느냐?”
“그냥…… 가끔은 주군께서 너무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그럽니다.”
“조심스럽다?”
“예,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야 하는 게 나랏일이겠습니다만, 이건 두드리다가 돌다리가 무너지겠다 싶은 정도지요.”
“해서, 여기 원주민들에게 화약을 주자는 게냐?”
“그보다는 차라리 탐라군이 한 번 일제히 출동해서 이섬을 점령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명국에 소문나는 건 그러라 그러지요. 제깟 놈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예전에 주군께서 명군 수만 명을 수장시킨 것도 자기들끼리 쉬쉬하며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정말 넘어간 것 같으냐?”
“……예?”
미소 띠던 몽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별하며 차갑게 응수하자, 석삼이 움찔하였다.
“내가 명군을 수몰시킨 것도 이제 대략 예닐곱 해 정도 지났구나. 고작 그 정도 지났을 뿐이다. 사람의 삶에는 충분히 긴 시간일지 모르나, 나라의 원한에는 그렇지 않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짧다고 하는데, 나라의 복수는 몇 년이 흘러야 많이 흘렀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 하나, 어차피 그 일을 아는 자들은 극히 적지 않습니까?”
“그 극히 적은 자들 중에는 명국의 태자도 있고, 연왕도 있다. 지금은 그들이 나와 이해관계가 맞아 입을 다물고 있지만, 언젠가 그 일을 폭로하는 것이 그들의 대국적인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밝혀질 수 있다. 만약 그리된다면 명국은 위신 때문에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
몽주의 지적에 살짝 고개를 숙였던 석삼은 문득 고개를 들고는 무슨 각오라도 하듯이 크게 마른침을 넘기고는 말문을 열었다.
“감히 참람한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명국과 탐라가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는 승산이 있다고 보느냐?”
몽주의 물음에 석삼의 머릿속으로 예전에 간간이 들었던 명국과의 전쟁이 불가한 이유들이 몇몇 스쳤다. 하나, 예전의 탐라와 지금의 탐라는 분명 달라졌기에 석삼은 과감하게 반론하고자 하였다.
“네. 아무리 명국이 크고 엄청나게 많은 군병이 있다곤 하지만, 결국 바다를 넘보지 못하면 탐라를 칠 수 없지 않습니까. 반대로 탐라군은 배를 통해 명국의 해안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명군을 조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탐라군의 수준이라면 장강같이 큰 강을 통해 더 내륙마저도 침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몽주는 옅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가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우리 탐라국이 많이 크긴 한 모양이구나.”
“저는 그저 이치를 따져 보았을 따름입니다.”
“네 말 속의 이치를 따져 보면 뭐, 너무 쉽게 생각한다 싶긴 하지만,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지. 하면, 명국의 입장에서 이치를 따져 보면 어떻겠느냐.”
“그야 다를 바가 …….”
“……있지. 내가 명국의 천자이고, 탐라를 치고자 마음먹는다면 얼마 간은 힘을 모을 것이다. 한 2, 30만의 군병을 1년쯤 동원할 수 있는 힘 말이지. 명국에서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지만,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오래전 수당은 더 큰 규모로 해낸 것이니까.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요동공과 고려왕에게 사신을 보내는 거지. 탐라를 칠 터이니 길을 열라고 말이야. 하면, 요동공과 고려왕은 어찌할 것 같으냐?”
“…….”
“같이 고려의 일원이니 단박에 거절해 줄 것 같으냐?”
몽주가 재차 물음에도 석삼은 답하길 주저했다.
정황상 요동국이든 고려든 거부할 가능성은 너무나 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국이 20만 이상의 군세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진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미리 어떻게 잘 설득하면 수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수단이 뭐가 있겠느냐. 내가 요동에서 많은 물산을 사준다고 그들이 나라의 위기를 자초해 줄 것 같으냐? 내가 고려 왕실에 지극히 이바지한다고 해서 고려왕이 나를 위해 국운이 걸린 전쟁에 나설 것 같으냐?”
“……아니요.”
그럴 리가 없다.
얼핏 요동국과 고려가 가진 군병과 탐라군이 동원할 수 있는 군병을 더하면 명의 원정군에 대적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싶기도 했지만, 관건은 요동국과 고려가 그들의 모든 군병을 동원하면서, 나라의 안위에 위태로움을 떠안으면서까지 탐라를 위해 주겠느냐는 물음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절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동국과 고려국이 나를 적으로 삼아 명국에 붙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요동국과 고려가 명국의 강요에 굴복하는 순간, 나는 남면과 동금주 중 적어도 한 곳은 잃게 되겠지. 탐라군이 이제는 일국 면에서의 승부라면 뭍에서도 크게 활약할 수 있지만, 전선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의 수적 한계는 더 큰 약점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대답을 일단락한 몽주는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후후, 생각해 보면 이런 가정도 다 쓸데없다.”
“예……?”
“명국은 굳이 군병을 동원할 필요 없이 탐라를 망하게 할 수 있으니까.”
“에……?!”
“이미 우리가 연국에서 교역하고 있다는 건 명국에서도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고 있으니, 천자도 능히 알고 있을 터. 그저 교역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크게 위태로워진다.”
정말 위태로워진다.
탐라가 생산하는 물산의 절반쯤이 명국에서 교역되고, 교역의 8할이 명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바, 현대 한국보다 중국 시장에 의지하는 바가 더 큰 게 작금의 탐라 경제 상황이었다.
“바다에서 명국을 압박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시일이 걸리고, 고생이 심하겠지만요.”
석삼은 어떻게든 몽주의 가정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듯 함포에 의한 ‘강제 개항’에 해당하는 방안까지 입에 담고 있었다.
“며칠이면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아니, 며칠이란 말로는 모자라겠지, 아마 몇 달도 모자랄 것이고.”
“하나, 지금 탐라의 물산은 명국의 귀족들이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자의 분노 앞에서는 그깟 취향 따위야 아무것도 아닌 게 되겠지.”
사탕이든, 유리든, 은이든 있어서 쓸 수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삶이 위태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기호품이거나 그에 가까운 것들이니까.
오히려 그 틈에 명국 내부에서 탐라의 물산을 흉내 내거나 비슷하게 만든 것들이 크게 번성할 기회만 줄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군력을 동원하여 바다에서 압박하면, 천자는 진실로 분노할 것이고, 앞서 가정한 명국이 요동과 고려를 통해 남면과 동금주를 치는 것이 현실이 될 것이다. 아마 더욱더 큰 규모로 말이지.”
그쯤 되자 석삼은 묵묵해졌다. 비록 표정에는 답답한 불만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걸 본 몽주는 다시 실소하곤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명나라가 두렵지 않다. 내가 계획한 대로 명나라를 다룰 수 있는 한에서는. 하나, 상대가 두렵지 않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지. 명나라는 새로운 중국의 제국이니까. 하여 나는 야금야금 세력을 넓히고자 한다. 생각해 보아라. 만약 명국과 충돌하게 된다면, 이 이주섬이 탐라의 영역이 되었을 때와 아닐 때 어느 쪽이 더 유리할 것 같으냐.”
“그야 물론…….”
“이주섬이 탐라의 것일 때가 훨씬 유리하겠지. 이주섬의 원주민 중에 고용병을 얻는 걸 제외하더라도, 명국의 바다를 압박하는 데 있어 전초 기지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클 터이니.”
“하면 이주섬을 얻고자 하신 것에는 명국을 견제하실 의도도 있으신 겝니까.”
“최우선은 아닐지언정, 이주섬을 얻게 되면 자연히 그리될 것이다. 명국 또한 이곳이 탐라의 영역이 된 것을 알게 되면 그걸 깨달을 것이고, 별 관심도 없던 이주섬에 신경을 쓰겠지. 이보게, 석삼. 오늘에 이르러 탐라가 크게 성장하였고, 군력이 그 규모에 비해 월등해진 건 사실이지만, 지금 명국과 다투는 것을 셈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그건 이긴다 해도 필사로 모든 걸 쏟아넣어야 얻을 수 있는 피투성이 승리일 테니까. 손자가 이르길, 싸움은 실리를 따져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 한다 하였네. 하여 나는 실리를 따져 피할 필요가 없을 때에야 진실로 싸움을 각오할 생각이야. 그전까지는 그깟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굽힐 수 있지.”
그제야 석삼의 무거웠던 고개가 끄덕여졌고, 그것이 신호인 양 군병이 바깥소식을 전해 왔다.
“아미스족를 비롯한 여러 고산족들의 사절단이 함께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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