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9)
* * *
강성한 아미스족이 주변 부족에게 압력을 넣어 개별적으로 탐라에 호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아미스족의 사절단이 다른 부족의 사절단을 이끌고 함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불안감은 조금 더 커졌다.
혹시나 아미스족이 주변 부족과 함께 결탁해서 위세를 부릴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뵙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아미스족 사절단은 물론, 주변 부족들의 사절단까지 함께 이끌고 온 아미스족의 장로는 몽주를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절하듯이 인사를 올렸다.
그는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는 아미스족 여족장의 삼촌으로 아미스족에서 꽤 큰 권력을 가진 자라 들었건만, 몽주를 대하는 자세는 마치 점령당한 나라의 신하와 같았다.
“오는 길에 우리 군병들이 방포 시험하는 걸 우연히 보았다고 합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석삼이 알려 주었다.
“그 때문에 저리 저자세란 말인가?”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기야 시디크족의 전령들이 탐라군이 어떻게 아타얄족 전사들 1천 이상을 무너뜨렸는지도 전했을 테고, 그 증거로 아타얄 전사들의 머리도 주렁주렁 들고 갔으니, 잘 모르더라도 화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아미스족이 주변 다른 부족들에게 압박하여 개별적으로 호응하지 못하게 한 것도, 위세를 부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던 듯싶었다.
그런 입장인 아미스족의 장로였다면, 우연히 보게 된 방포 훈련을 통해 자신들이 어찌 행동해야 할지를 정했을 수도 있었다.
몽주는 고산족 원주민과 산속에서 싸울 생각이 없지만, 저들은 그걸 알지 못하였으니, 혹여 탐라군이 자신들을 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보다 확연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상황을 파악한 몽주는 속으로는 파안대소하되, 겉으로는 잔잔히 미소를 띠며 사절단들을 환영하였다.
“비록 늦긴 했지만,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하오. 하마터면 크게 오해할 뻔했소. 하하.”
환영의 말을 남기며, 몽주가 일부러 뼈 있는 말을 덧붙이자, 그걸 글자로 확인한 아미스족의 장로가 재차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였다.
길이 멀고 험하여, 다른 부족과 함께 오고자 일정을 맞추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변명이었지만, 몽주로서는 그게 오히려 맘에 들었다.
본디 변명이란 어떤 식으로든 약자인 자가 하는 것이고, 이는 아미스족이 그들이 탐라에 비해 약자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주제도 모르고 거만한 자들이었다면, 실제로 이주섬의 산속으로 쳐들어갈 생각이 없는 몽주로서는 그들을 혼내줄 방법이 궁하여 꽤 곤란했으리라.
아미스족과 함께 온 부족들은 사키자야족과 푸유마(puyuma)족을 비롯하여 다섯 개 부족이었는데, 다른 세 부족은 현대에 기록도 남지 않았을 만큼 작은 부족들이었다.
그렇게 이주섬의 동부 최북단의 카발란족부터 최남단 푸유마족까지 사절단이 모이자, 몽주는 정식으로 그들에게 제의하였다.
“나 고려 탐라국공 석몽린은 여러분들께 아타얄족에 대항하여 공조하길 청하오. 여러분들이 뜻을 모아준다면, 나는 뛰어난 무기와 갑옷 그리고 식량을 지원해 줄 것이오. 승전하여 아타얄족을 무너뜨린다면, 그로써 얻게 되는 전리품과 노예들은 각 부족이 투입한 전사들의 수에 따라 배분할 것이오.”
이미 알고 있던 바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부족 사절단들은 모두 쉽게 응하였다.
다만,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반응이 조금 약해졌다.
“아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내가 타이완이 온 것은 이곳을 침범하고 있는 중국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포섭된 평포족들을 축출하기 위함이오. 만약 아타얄족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다시 여러분들께 힘을 합쳐 중국인들을 내쫓고, 그들과 결탁한 평포족들을 무너뜨리자고 제의할 것이오.”
“중국인들을 내쫓고 난 후에 얻은 땅은 어찌 처리하실 것입니까.”
질문한 자는 아미스족의 장로였다. 앞서 아타얄족을 공략하였을 때와 달리 땅의 소유를 두고 물은 것은 산중의 아타얄족과 달리 평야 지대는 그 땅 자체가 전리품이기 때문이었다.
아타얄족이 사라지면 자연히 그 주변의 부족들이 그들의 산으로 진출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평야 지대의 처분은 따로 생각해야 하는 게 마땅했다.
“그 또한 기여한 바에 따라 배분할 것이오.”
“그건 저희로서는 달갑지 않습니다.”
“멀기 때문이오?”
“아무래도 그렇지요. 옥산 너머에 넓은 땅이 있다고 해도 우리 아미스족에게는 별 쓸모가 없지요.”
옥산(玉山)은 대만 산맥 중 최고봉이었다. 거의 해발 4천 미터에 육박하는 높은 산은 주변의 다른 봉우리와 함께 이주섬을 양분하고 있었다.
“스스로 경영하기 어려운 부족이 있다면 우리 탐라가 사들이겠소.”
“사들인다고요?”
“그렇소. 대가는 따로 협상해야겠지만, 식량이나 다른 현물로 충분히 값을 치를 수 있을 것이오.”
몽주의 대답에 고산족 사절단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사실 몽주 앞에 모인 고산족들은 모두 동부 고산족들이라 서부의 평야 지대를 얻는다 해도 그걸 유지하기 어려운 부족들이었으니, 차라리 땅을 팔아 다른 식으로 이익을 얻는 게 더 낫기 때문이었다.
그에 몽주는 조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나는 제법 부자요. 결코 헐값으로 그 땅을 대신할 생각은 없소. 그러니,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길 바라오. 물론 일단은 아타얄족부터 함께 도모해 봅시다.”
물론, 진정한 땅값에 비하면 헐값일 것이다.
* * *
몽주가 이주섬에서 고산족 사절단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아우 몽건은 고려 한양부에 있었다.
부모가 그곳에서 절을 짓는 데 열성을 바치고 있어, 형에게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허락을 맡았던 것이다.
천마산 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곳에 제법 큰 규모로 지어지고 있는 사원 건설 현장 주변에는 의외로 상당히 많은 고려의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모두 고려 왕실, 정확히는 궁중후 염흥방의 명에 따라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 배치된 군병들이었다.
몽주, 몽건의 부모 해민과 주이는 그 절에 들어가는 모든 건축재마다 축문을 써서 모든 이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물론, 가장 많은 기원은 그들의 두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저곳이 형님을 살렸다는 고려 장수를 위한 암자입니까?”
건축 현장 근처 임시 거처에 아버지 해민과 마주하여 따뜻한 차를 마시던 몽건이 멀리 산등성이에 보이는 작은 암자를 보며 물었다.
사원 본청보다 먼저 지어 거의 완성된 모습이었다.
“그래, 그 조 장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탐라공께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분이 당하신 건 안타깝지만, 고려와 백성들을 생각하면 천만다행한 일이군요.”
“그때, 조 장군을 부리던 요동공에게 탐라공이 조 장군을 위한 절을 짓기로 약조했단다. 탐라공은 워낙에 바쁘고 먼 곳에 계시는 터라 직접 그 약속을 이행하기 어려우니, 우리라도 나서야지.”
“잘 하셨습니다.”
몽건은 따뜻한 국화차를 음미하였다. 근래에 국화가 널리 재배되면서 국화차도 예전보다 널리 쓰이고 있었다.
특히, 모기나 파리를 쫓음은 물론이고, 몸속 해충도 박멸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더 유행하는 중이었다.
형님은 국화차에 그 정도로 효과가 있지는 않다고 하셨지만 말이다.
몽건은 부모님께서 너무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닌지 염려하였고, 해민은 어느덧 자라 자신을 걱정하는 둘째 아들을 대견하게 보았다.
“두 분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돌아갈 때, 개경에 들르고자 합니다.”
“유람이라도 잠시 할 참이냐.”
“네.”
몽건은 찻잔을 들며 가볍게 답하였고, 해민은 그러려면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갓 열셋에 이른 아들이지만, 이미 고려와 명국을 돌아본 바 있고, 동행하는 수행원들도 있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한데, 직후에 몽건이 이상한 말을 입에 담았다.
“아버님께서는 형님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탐라공에 대해?”
“예.”
“내가 생각하고 말 게 무엇이 있겠느냐. 내 아들이지만, 이미 내 품으로는 안을 수 없을 만큼 큰 분이 되셨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에게 있어 몽건 형님은 그들의 아들이기 전에 부처님의 아들이고, 탐라의 국공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형님은 탐라국공으로서 누구도 엄두 낼 수 없는 큰 공훈을 세우셨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신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허…….”
몽건의 말에 해민은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둘째 아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걸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부처님뿐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자의 시선에서 탐라공은 모든 면에서 크게 세상을 바꾸신 분이니,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못한 게 있다 하더라도 그 부족한 부분마저 비범하다 여기는 것이 맞았다.
그래도 둘째 아들이 한 말이라, 해민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큰 아들의 위업에 가려 있긴 하지만, 둘째 아들도 그가 낳은 자식이건만 그가 품을 수 없을 만큼 영특한 재능을 가진 이었다.
“대체 탐라공이 뭐가 부족하다는 게냐?”
“……욕심이 부족하시지요.”
“욕심? 욕심이 많아서 무엇이 좋다고…….”
“평범한 백성들이야 욕심이 과해서는 안 되고, 차라리 없는 게 낫다 할 수 있지만, 위정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난 잘 모르겠구나. 고비(高飛)의 새는 미식(美食)으로 죽는 법이지 않느냐.”
해민이 오월춘추(吳越春秋)의 말을 인용하여 욕심을 경계하는 말을 하였지만, 몽건은 고개를 저었다.
“높이 나는 새라도 먹기는 해야 하죠.”
“탐라공이 기본적인 욕심도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게냐?”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 없구나. 탐라공께서 탐욕하지 않으신 건 분명하나, 그렇다고 얻어야 할 것까지 포기하시지는 않으시는데…….”
해민은 대체 탐라공이 마땅히 가져야 함에도 포기하고 있는 욕심이 무엇인지를 묻는 시선을 둘째 아들에게 던졌다.
하나, 몽건은 대답이 없이 찻잔을 들어 국화차를 음미할 따름이었고, 잠시 후 뱉은 말도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냥 제 사견일 뿐입니다.”
“…….”
몽건이 답을 피하자, 해민은 문득 표정을 엄하게 하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네 능력이 출중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탐라공을 재단할 정도는 아니라 본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탐라공의 아우인 덕에, 은근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나, 그렇다고 네 뜻만으로 행해서도 아니 된다. 그러다 자칫 탐라공의 큰 뜻에 자신도 모르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몽건은 앞서 입에 담은 의미심장한 말과 달리, 고분이 아버지의 말씀에 수긍하였다.
하여, 해민도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에 대한 대화를 정리하였다.
* * *
이틀 후, 한양부를 나선 몽주의 표정은 담담했고, 간간이 수행원들과 경치를 두고 말을 나누기도 하였다.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팔자 좋은 도령의 나들이 모습이었다.
몽건을 호위하고 보좌하는 수행원들도, 예정에 없던 개경 방문에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별달리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개경 시전에 위치한 새로 생긴 좋은 객점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할 때, 문득 몽건 도령이 객점에서 일하는 자를 시켜 서찰 한 통을 보낼 때부터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개경의 하급 관리 하나가 가마를 진 자들을 대동하고 급히 달려와 몽건 도령을 모셔가려 할 때 극에 달했다.
심지어 수행원들이 따라가려 하는 것도 몽건 도령이 막고, 탐라에서도 그를 호위하였던 무사 둘만 대동하려 하였다.
“어디를 가시는 것이고, 누구를 만나시려는 건지 알려 주십시오. 그러지 아니하시면 저도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비서원 출신 행정관은 각오한 듯 몽건에게 말했다. 어리다곤 하지만, 몽건 도령은 탐라공의 아우이고 나이 이상으로 대단히 총명하다 평판이 자자한 자라 행정관의 입장에서는 몹시 어려운 상대였다.
하나, 비서원장이자 국공부인께서 도령을 철저히 모셔야 한다는 명하신 것에 힘입어 막고자 하였다.
잠시 몽건은 행정관과 눈싸움을 하듯 바라보다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곤 답하였다.
“나는 궁중후를 뵈러 갈 참입니다. 형수님께 고하여도 좋으니, 절 보내 주시지요.”
“궁중후…… 참말이십니까.”
“네.”
개경에서 궁중후를 만난다니, 위험할 건 없겠지만, 왜 몽건 도령이 궁중후를 만나는지 절로 궁금해졌다.
하나, 더는 묻지 못하고 몽건 도령을 보내니, 그가 탄 가마가 급하게 길을 따라 사라졌다.
가마 위에 탄 몽건의 표정은 내내 담담하던 것과는 달리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형님께서는 너무 욕심이 없으시다. 마땅히 노릴 수 있음에도 노리지 않는 것은 위정자에게는 죄나 다름없다. 금주를 요동국과 양분한 것에 만족하시고, 이주를 원주민과 양분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야 무슨 상관일까? 중요한 것은 명나라를 양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도…….’
몽건은 형님이 반드시 취해야 마땅한 것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 * *
탐라에 온 이후, 나본은 좋아하는 곳이 생겼다. 그곳은 바로 인쇄소.
탐라국의 교관대신이라는 자를 따라 처음 방문했을 때 받은 압도적인 위압감은 나본에게 큰 충격이었다.
커다란 활자당(堂) 안 수십 개의 선반 위에 가득한 활자와 공기 중에 배어 있는 묵향은 탐라공이 수천, 수만권의 책을 찍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였다.
실제로 매년 수천 권의 책이 인쇄되어 여러 학교와 백성들에게 보급되고 있었고, 달에 세 번씩 순보가 발행되고 있었으니, 나본은 탐라국에 이런 저력이 있었나 싶어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내관대신 포은과 교관대신 홍길도가 나란히 나본을 찾아온 날에도, 나본은 활자당 한 구석에서 삼국연의의 후반부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시오.”
누군가 제법 능숙한 명국말로 인사를 건네 오자 나본이 고개를 들어 보았고, 이내 탐라의 대신들임을 알아차렸다.
특히 포은은 전에 보았을 때, 명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을 알고 인상이 남았다. 물론 동시에 어째 자신을 불만스레 여기는 것 같아 인상에 남기도 했다.
하나, 오늘 온 포은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자네의 소설을 읽어 보았네.”
“그러셨습니까.”
“대체로 재밌더군. 내 이제껏 소설이란 게 그저 허황되고, 사람을 현혹한다고만 여겼는데, 이처럼 수많은 인생마저 녹일 수 있는지는 미처 몰랐네.”
“감사합니다.”
나본은 담담하게 응대하였다. 꽤 절찬이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포은이 처음 말한 ‘대체로 재밌다’는 표현이 거슬렸다.
왜 정말 재밌다라는 표현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이어 홍길도가 한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밤잠을 잊을 정도로 재밌는데, 제갈 승상이 죽은 뒤에는 다소 김이 빠지더군.”
포은의 통역으로 소감을 전해 들은 나본은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게…… 역사의 흐름이 일변도로 변한 상황이라 극적인 부분이 사라진 탓이지요.”
삼국시대를 연 수많은 군웅과 무장들이 사라진 것은 물론, 위촉오 세 나라 중 위나라의 패권이 공고해진 이후 삼국 역사의 흐름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완전한 통일까지 적잖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시간은 역사적인 시각에서는 그저 한 줄로 요약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 겐가?”
문득 포은이 물으니, 나본은 조금 수세적인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되물었다.
“달리 무슨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 전에 하나 묻지. 내가 보기에 삼국연의는 단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 같던데, 맞나?”
“그야 그렇지요. 그저 역사를 쓰는 거라면 소설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삼국연의가 한족의 부흥을 염원하고 있다고 본 내 판단도 틀리진 않겠군.”
“그렇게 보셨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나본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사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물론 주된 바람은 떠도는 삼국군웅의 이야기를 집대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곧 한족을 위한 전설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애초에 삼국연의를 집필할 것을 마음먹은 건 그가 아직 원나라 백성일 때였다.
혼란한 원이 무너지는 중에 새롭게 한족의 나라가 건국될 것을 예감하며, 옛부터 중원이 한족의 터전이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나, 그걸 스스럼없이 밝히기에는 지금 그가 있는 곳이 한족의 터전이 아니기에 다소 꺼림칙했다.
“그대가 한족인 만큼 한족이 번성하길 마음이 작품에 깃드는 건 응당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한족이 아닌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삼국연의에는 지금의 명나라가 대단한 이유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본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항의조로 물었다.
명나라가 대단한 이유가 표현되지 않았다는 지적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삼국연의에는 사실 삼국의 이야기가 아닌 명나라의 이야기인 것도 많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적벽대전에 대한 기술은 실상 파양호 대전의 일을 각색한 것에 가까웠고, 제갈 재상의 모습은 홍무제의 군사였던 백온 유기를 본떴으니, 당대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명나라가 대단한 것은 비단 홍무제가 다른 한족 군웅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지 않은가. 원나라를 무너뜨렸고, 원나라를 이용한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지.”
사실 홍무제가 직접 원나라를 친 적이 거의 없음을 아는 포은이지만, 홍무제가 군웅이던 시절에 원나라와 손을 잡고 다른 한족 군웅을 견제하고, 공략했었음을 알기에 그 점을 지적하였다.
“중국이 어째서 중국인가? 한족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사방이 있기에 중국일 수 있는 법이라네. 그리고 그 사방과 갈등함에도 기어이 이겨 내어 중원을 취하고, 그 영역을 넓힌 것이야말로 실로 한족의 대단함일 것이고.”
나본은 딱히 대답 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한족이 아닌 자가 오랑캐라는 말까지 언급하며 한족의 위대함을 치켜세우니, 달가우면서도 이상했기에 섣불리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도 할 만큼 하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동오가 산월과 다툰 것, 촉한이 남만을 지배하고자 한 것, 그리고 조조의 오환 원정도 연의에 실었기 때문이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한족의 역사를 두고 짐작하자면, 위가 패권을 가진 후에도 촉과 오 또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원을 넘나들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을 것인데, 그런 게 제대로 표현되지 않으니, 삼국연의의 말미가 지루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족의 기상마저도 색이 바라는 기분이었네.”
“…….”
포은의 그 말이 꽤 아프게 나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고,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그의 머릿속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나본의 모습을 힐끔 본 포은이 홍길도에게 시선을 던지니,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주군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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