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80)
반 시진 전까지 고치의 어리광에 웃음이 흘러다니던 연왕부의 내전은 어느 순간 다시 조용해졌다.
도연이 막 도착한 장계를 가져온 탓이었다.
“흐음…….”
긴 장계를 읽으며 연왕은 침음을 흘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도연은 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말문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화령(카라코룸)을 점령했다니 마음에 들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 하나…….”
장계를 도로 말아쥔 연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러니까 다 알면서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하추의 행보가 좀 께름칙하지 않소?”
“그런 면이 없진 않으나, 쉽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원이 몰락할 것을 알고 실리만 취한 채 도주한 것이라 여기면 그만이기도 합니다.”
“실리라…… 여기 쓰인 것을 보면, 나하추가 원을 강탈할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큰 실리가 있소?”
“작금의 원은 누가 대칸의 자리에 앉는다 하더라도, 위태로운 상황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
도연 요광효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연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국에게 쫓겨 북방으로 옮겨 간 원이기에 서로가 불구대천의 원수임에는 틀림없지만, 근래에만 국한하여 생각하면, 당장 원이 명국에 무너질 것이라 볼 수는 없었다.
연왕이 원을 무너뜨릴 마음을 품는 것과 무관하게 기본적으로 천자께서 남방에 주의를 집중하고 계시기에 가까운 시일 안에 북방을 공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원의 종자들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몇 년 전에 명의 북벌군을 물리친 바 있는 나하추는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바로 그 나하추는 옷치긴(斡赤斤) 왕가와 결탁하여 원을 장악해 놓고는 정작 재물만을 취한 뒤 곧바로 서진하여 막북 너머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물론, 실제로 연군이 출병한 것을 생각하면 아주 적당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우리 군병들이 손쉽게 화령을 취할 수 있었으니, 좋으면 좋지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요동국이 장춘을 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 연왕은 연군을 출동시켜 원을 치게 하였다.
응천부에는 그저 원 내부에 변동이 있는 듯하여 사정을 살피고 경계할 것이라는 보고만 했을 뿐이었다.
이는 그전에 북방의 경계를 연국이 담당하겠다는 것에 합당한 명분이었다.
물론, 실상은 그러한 명분을 넘어 북원의 중심지인 화령(和寧)을 점령하는 것이었고, 연왕 휘하의 장수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원을 잠식해들어갔다.
그쯤에 이미 옷치긴 왕가는 나하추와 함께 먼저 화령을 침탈하고 있었기에, 연군의 앞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분이 있음을 확신한 연군은 그 진군 속도를 늦춰, 원이 충분히 힘을 소모할 시간을 주기까지 하였다.
내란의 결과가 무엇이든, 원이 더 약해지는 건 기정사실이기에 이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렇게 늦어진 시간 동안, 전혀 의외의 일이 있었으니, 나하추가 옷치긴 왕가마저 배신하고 화령의 재물을 강탈하여 서쪽으로 도주한 것이었다.
내란으로 더 약해진 데다가 내란에서 이긴 측마저 분열해 버렸으니, 잔뜩 준비하고 쳐들어간 연군의 입장에서는 다소 김이 새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손쉽게 화령을 점령할 수 있었다.
지금 장계에 쓰인 걸로 보면, 포로만 4만 명에 이르고, 그중 패아지근(孛兒只斤, 보르지긴)씨만 500여 명이라 하니, 원의 뿌리를 움켜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잡아들인 패아지근씨 대부분이 옷치긴 왕가 소속이고, 본디 대칸의 종가로 이어지는 패아지근씨들은 내란 중에 대부분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어부지리를 취한 셈이었다.
도연이 좋으면 좋지 나쁜 건 아니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하나, 연왕이 께름칙해 하는 건 다른 데에 있었다.
“애초에 나하추가 서쪽으로 간 것은, 그러니까 옷치긴 왕가와 손을 잡고 원의 본가를 친 것은 고려 탐라공에 의한 것이었네.”
“…….”
도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나하추가 고려 탐라공과의 싸움에서 지면서 여러모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탐라공에 의해 나하추가 그런 결정을 했다고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저 나하추가 생존을 위해 궁리하다가, 자신보다 더 약해진 원의 종가를 쳐서 잡아먹기로 작정한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나는 원 태위 나하추가 기껏 점령한 화령에서 재물만 취하고 도주한 것이 여간 의미심장하지 않아.”
“그저 연군의 진격 소식을 알고 도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옷치긴 왕가 놈들도 도주했겠지.”
연군이 원의 내란을 위해 시간을 주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연군이 곧 쳐들어갈 것임을 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외곽으로 이동하여 화령이 목표라는 걸 알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연군의 목표가 화령이라는 게 알려졌다면, 나하추의 돌발 행동과 무관하게 옷치긴 왕가도, 적어도 왕가의 중심인물들만큼은 도주하였을 것이다.
하나, 연군이 화령으로 쳐들어갔을 때 옷치긴 왕가는 도주는커녕 방비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나하추의 행동이 고려 탐라공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 다만, 지금 내 군병들이 화령에서 하고 있는 걸 생각해 보게.”
화령을 점령한 연군이 하고 있는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파괴’ 내지 ‘초토화’였다.
오래전 철목진(테무친)이 초원에서 봉기한 이래로 화령은 거대한 제국의 중심이었고, 초원 기마 민족의 상징과 같았다.
하여, 어차피 지속적으로 점령할 수도 없고, 점령해야 할 이점도 없는 그곳이 다시는 기마 세력의 구심점이 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파괴하라 명한 것이었다.
물론, 포로는 연국으로 데려가 노예로 쓸 것이고, 나하추가 먼저 털어 버리긴 했지만, 남은 재물이라도 싹싹 긁어 송두리째 연국으로 가져갈 예정이었다.
그저 화령이라는 공간을 초원으로 돌려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도 기마 유목 민족들이야 남겠지만, 그들은 예전처럼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며 좀처럼 하나의 세력으로 커지지 못할 것이다.
한데, 나하추가 남아 있게 되었다. 화령을 먼저 털어먹은 걸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하추는 주변 기마 민족들을 규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결코 작지 않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중에 화령을 파괴해 버린다면, 어쩌면 나하추가 초원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돕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혼란으로 유명무실하던 원을 끝장냄으로써 나하추가 구심점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 나하추는 화령 주변이 아니라, 어디까지 갔는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서쪽 먼 곳으로 이동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괜한 걱정을 사서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께름칙함이 남아 있었지만, 연왕도 그쯤에서 그 문제에 심력을 쓰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중요한 건 중원의 일이지, 언제 있을지 모를 혹은 어쩌면 아예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우환을 미리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연왕은 도연과 더불어, 응천부에 보낼 장계에 대해 논의하였다.
경계하고자 하였을 뿐임에도, ‘우연히’ 그리고 ‘하늘이 도와’ 연군이 원의 화령을 점령하였음을 알리는 그 장계는 천자께서 관원을 보내 화령을 확인하여 원나라가 마침내 사라졌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맺게 될 것이다.
그렇게 논의가 끝날 무렵, 문득 도연이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인 후에 연왕에게 고하였다.
“요동국공과 탐라국공 간에 혼사가 있을 모양입니다.”
도연은 요동공의 오남과 탐라공의 장녀 간에 혼약 논의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흐음…….”
연왕이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리자, 도연이 슬쩍 물었다.
“혹시 신경 쓰이십니까. 한번 훼방을…….”
“……차라리 내게 시집을 보내지. 제법 이색적인 매력이 있는 아이였는데 말이야.”
“…….”
“농담일세. 나는 본디 피부가 백옥 같은 여인을 좋아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혼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게. 요동이든 탐라든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있겠나? 요동공의 장남도 아니고, 오남이라면 중요한 혼인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저 친분을 더 도탑게 할 모양이겠지.”
* * *
탐라에 도학생을 보낸다는 소식이 요동에 퍼진 이래로, 많은 자들이 그에 응모하고자 하였다.
탐라국의 부유함은 널리 알려져 있고, 특히 영구 같은 포구 고을에서는 탐라국의 존재감이 그 거리에 비해 워낙 크니, 특히 상거래와 관련된 일을 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본인이나 혹은 친인척을 보내어 배우고 또 인맥을 얻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하나, 정작 정말 인재다 싶은 자들 중에서는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들 중 대다수가 과거를 준비하고 있는 터라, 과거와 무관한 배움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들 대부분이 이색 휘하의 유자들을 스승으로 삼고 있는 터라, 탐라에 도학생을 보내는 것에 탐탁지 않아 하는 이색 학파의 분위기 속에서 감히 도학생으로 가겠노라 밝힐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요동의 조정에서도 그들이 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자세였으나, 후에 고려 본토에서도 도학생이 파견하는 것이 알려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 때문이었는데, 고려 본토에서 이미 관리인 자들까지 도학생으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자칫 요동국의 도학생들이 그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도학생의 수준이라는 새로운 잣대가 생기자, 비단 고려 본토뿐만 아니라 왜국이나 탐라국의 인재들과 비교될 것까지 염두에 두게 되니, 그저 응하는 자들만 보내겠다는 기존의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하여, 요동공이 직접 서찰을 써서 이색 선생에게 부탁하고, 좌의정 정도전을 비롯한 유자 출신 관리들도 설득에 나서서, 인재들을 선발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여전히 협조하지 않았는데,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길재가 도학생 출신이 차후에 요동에서 과거에 응하면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권하여 관철시키자, 상황이 달라졌다.
무반응하던 인재들이 이제는 서로 가겠노라 나서는 바람에 도학생으로 보낼 자를 골라내느라 애를 먹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동공의 아들 중 하나도 도학생으로 간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그 또한 또 하나의 유인책이 되었으니, 장남은 아닐지라도 요동공의 아들과 인연을 맺어 두는 게 나쁠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여, 근 두 달 만에 힘들게 탐라로 보낼 도학생 50명을 선발하였으니, 처음과 달리 상당수가 유자 출신들이었다.
나이가 어린 자는 십 대 초반이었고, 나이가 많은 자는 서른이 넘은 자도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자들 중에는 상인 가문 출신이 많았고, 어린 층에는 유자 출신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유자들 중에 도학생을 뽑힐 정도의 인재라면 이미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소과라도 붙어 이미 관리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유자 출신 도학생 중 최연장자는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이었으니, 그의 이름은 맹사성(孟思誠), 호는 동포(東浦)였다.
본디 고려 충청도 출신인 맹사성은 그의 집안이 최영과 인연이 있는 터라, 최영이 요동공인 시절에 요동으로 이주하였는데, 최영이 그를 두고 장차 자신의 손녀 사윗감으로 점찍었을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최영이 몰락하고 이성계가 요동국을 건국하면서 그의 집안도 위기에 처했는데, 다행히 직접적으로 최영의 휘하에서 공헌한 건 아닌 터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요동국에서 여러모로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상황이라, 맹사성은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지난번 과거에 응했던 맹사성은 대과인 요동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고민 끝에 소과 합격의 특전인 하급 관리 임명을 포기하고 다시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과거 시험에 특혜를 준다는 도학생 파견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이보게, 방촌(厖村). 저 꼬맹이들이 그 허씨 형제들인가?”
“음, 그런 것 같군. 소문대로 비쩍 마른 데다가 아우가 허리가 굽었으니까.”
맹사성이 가리킨 자들은 어린 형제였다. 꼭 닮은 두 형제는 체구가 작고 마른 대다가 특히 아우로 보이는 자는 허리가 조금 튀어나와 있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나, 그 어린 형제가 허씨 형제가 맞다면, 결코 동정이나 무시를 받을 위인들이 아니었다.
이색 학파 휘하의 수많은 유자들 중에서도 이름이 퍼져 있을 만큼 뛰어난 인재들로서, 어린 나이임에도 이색이 크게 칭찬하며 그의 제자이자 현 우찬성인 권근의 제자로 삼게 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요동의 조정이 개편되면서 좌우찬성(左右贊成)직은 삼정승을 보좌하는 종1품의 직책으로 변했다.
“형이 허주고, 아우가 허조라 했던가?”
“맞네. 내가 보기엔 형이 더 총명해 보이는데?”
“소문에는 아우가 더 총명하다더군. 형은 사람이 어찌 그러나 싶을 정도로 깐깐하고.”
“난 둘 다 깐깐하다고 들었네만?”
“조금 더 깐깐한 모양이지.”
맹사성은 그리 말하곤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깐깐하든 말든, 금 동아줄을 잡은 녀석들을 보자니, 배가 아프구먼.”
“자네가 뭐가 어때서 그러는 겐가. 자네야말로 한때는 요동공의 사위……! 읍읍!”
방촌이 말을 하는 것에 놀란 맹사성이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리자, 방촌은 입이 막힌 중에도 낄낄 웃었다.
“제발 좀 그 소리는 하들 말게. 자네는 농담일지 모르지만, 나는 가슴이 철렁거린단 말이네.”
“읍읍! 아, 알았네, 알았어. 어차피 요동공께서 문제 삼지 않으시는데 뭘 그리 그러나.”
“그러니까 요동공께서도 상관하지 않으시는 일이니, 자네도 입에 담지 말게.”
“껄껄.”
방촌이 그저 웃으니, 맹사성은 얄미운 양 방촌을 노려보았다.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가 너무 위축된 것 같아서 그랬네. 우리가 저 허씨 형제들에 비해 못할 게 뭐가 있나? 여기 도학생으로 뽑힌 것만 봐도, 나라에서 인정한 인재들이 아닌가.”
“…….”
맹사성은 방촌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유들유들한 그의 성품이 부럽긴 했다. 아니, 그건 부러움이 아닌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맹사성 본인도 본래는 지금처럼 쫓기는 것 같은 심성이 아니었으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던 팔자는 과거의 일이었고, 지금은 집안을 되살리는 데에 목매인 신세였다.
“아, 저기 방원 공자가 오시는구먼.”
모여 있는 자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한곳을 바라보니, 풍체 좋은 젊은이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방원 공자는 우리랑 달리 혼자 가진 않으시는 모양이군.”
“공자랑 우리 같은 치들이랑 같나.”
탐라로 가기 위해 모인 도학생들은 모두 혼자였다. 허씨 형제들처럼 형제가 함께 뽑힌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형제 둘만 탐라로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짐도 오직 혼자 들 수 있는 정도로 국한되었으니, 요동 수군의 배로 이동함에 있어 많은 선객과 짐을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다만, 방원 공자만큼은 일행이 몇 명 있었는데, 대충 보아하니, 한 명은 방원 공자를 보좌할 관리인 듯했고, 나머지 서너 명은 방원 공자를 위한 사복인 듯했다.
어쨌든 방원 공자가 도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도학생들이 모두 모이자, 예문학의 한 관리가 무어라 훈시하였다.
대충 몸 건강히 배우고 요동공의 위신을 높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곤 늦었다면서 서둘러 승선하라고 하였는데, 포구에 닿아 있는 탐라행 배는 모두 두 척이었다.
“누런 배랑 검은 배, 어느 쪽에 탈까.”
두 척의 배가 같은 모양이지만, 하나는 선체가 누르스름했고, 다른 하나는 그 색이 짙어, 구별이 가능하자, 맹사성이 방촌에게 물었다.
나라에서 정하여 승선하게 하였으면 고를 필요가 없겠지만, 그냥 대충 수를 나눠 타게 한 터라, 재빨리 움직이면 골라 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누런 배지. 누런 소랑 검은 소 중에서도 누런 소가 일을 잘 하는 법이네.”
방촌은 답을 하자마자, 봇짐을 들고 움직이려 하였다.
맹사성도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실소하며 방촌에게 물었다.
“자네의 대답이 은근히 뼈가 있는 것 같군. 자네의 성이 황(黃)이고 그 뜻이 누렇다는 것이니, 자네야말로 일 잘하는 누런 소라는 말 아닌가.”
“허허,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방촌 황희(黃喜)가 키득키득 웃으며 서둘러 누런 배 위로 올라갔다.
* * *
궁중후 염흥방은 사랑채에 앉아 서탁에 팔을 기대곤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것 참…….”
문득 고심 어린 한숨이 흘러나오니, 근래에 없던 고민이 생긴 탓이었다.
“도대체 왜지? 왜 하필 나지?”
중얼거리며 자문하니, 답은 여러 개 나왔지만 모두 정답이 아닌 듯했다.
며칠 전, 탐라공의 아우가 그를 찾아왔고, 뜻하지 않은 제안을 건넸다.
그건 바로 그와 자신의 여식 간의 혼사였다.
딸아이가 탐라공의 아우와 혼인을 맺게 된다면, 궁중후로서는 나쁠 건 없었다.
고려의 실세 중 실세인 탐라공과 인척 관계가 되는 걸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 일반적인 혼사와 달리, 탐라공의 아우가 직접 제의했고, 그것이 탐라공의 의사와 무관한 것이며, 자신이 탐라공에게 그의 아우와 자신의 여식 간의 혼사를 청하는 형태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점 등이 궁중후를 고민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고작 열셋에 이른 어린아이였다.
예전 더 어릴 적에 탐라공과 함께 순방하면서 본 적 있었는데, 그때도 어른스럽고 영민하다는 감상을 가진 적이 있긴 했다.
그리고 사실 탐라공의 아우를 두고 혼사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다만, 자신의 여식이 아닌 왕실의 여인과의 혼사인 게 달랐다.
왕실에 적합한 여인이 없어, 일단 접긴 했지만, 탐라공의 아우와 왕실의 여인을 혼인시킬 수 있다면, 왕실이 더욱 튼튼해질 수 있다 여기고 있었는데, 정작 그 탐라공의 아우가 자신에게 찾아와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니, 놀랍고 기쁘면서도 그 의중이 의심스러웠다.
“정말 탐라공은 모르는 일일까?”
의심을 머릿속에 안고 궁리하자, 탐라공의 아우가 한 말들 중에도 의심이 생겼다.
만약 탐라공의 뜻이면서도, 모르쇠하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청혼하게 한 것이라면…….
“내게 사사로이 손을 내미는 것일까?”
오래전부터 탐라공과 인연을 맺은 그였지만, 사적인 관계가 깊은 건 아니었다.
그저 나랏일을 함에 탐라공을 전담하게 된 탓에 자주 본 것에 불과했고, 지금도 왕실의 경영을 사실상 담당하는 궁중후인 탓에 탐라공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혼인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는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탐라공이 손을 잡는다…… 고려의 궁중후와 탐라국공이 손을 잡는다…….”
그리하면 무엇이 가능한지를 따져 보니,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다.
왕실의 위엄을 해치지 않는 선만 지킨다면, 고려 안에서 못할 게 없다. 물론, 이미 탐라공은 고려 안에서 못할 게 없는 위인이긴 하지만, 보다 원만하고 원활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 그런 생각은 결국 ‘겨우 그 정도?’라는 의문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조금 편해지는 정도의 변화는 달리 말하면 변하는 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뭔가 내가 아니면, 탐라공도 감히 시도하고 이루기 어려운 게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아니면 불가한 일을 스스로 물으니, 염흥방의 머릿속에 서경, 시전, 왕실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궁중후로서 그의 권력이 미치는 분야들이 그것들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런 단어들은 결국 왕실 하나로 좁혀졌다.
그가 서경을 비롯한 왕실의 토지를 경영하는 것이든 개경과 서경의 시전을 운영하는 것이든 모두 왕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왕실과 관련해서 탐라공도 쉽게 할 수 없는 게 있나? 내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마침내 그 물음에 닿자, 어느 순간 궁중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입에 담기는커녕 속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탐라공이 오랜 시간 동안 보인 충성심을 떠올리며 염흥방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떨치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궁중후인 그의 앞날도 크게 뒤바뀔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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