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83)
* * *
탐라공이 장인들에게 물었다. 왜 강철이 강하냐고.
그러자 경력이 긴 한 장인이 대답했다.
“녹인 철에 흑토의 기운을 넣으면 주철이 되니, 흑토의 기운을 받은 주철은 단단하나, 흑토의 성질처럼 쉽게 부서집니다. 강철은 주철에서 흑토의 기운을 덜어 내어 단단하게 하되, 부서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니, 강한 것이 당연합니다.”
현대 지식으로 판단하면 코웃음이 나올 답이었지만, 나름 이치가 맞는 답이기도 했다.
흑토의 기운을 탄소라고 해석하면 철과 탄소가 혼합하여 나오는 펄라이트(pearlite)라는 미세 조직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꿈보다 해몽’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면, 강철을 붉게 달군 후, 급랭시키면 더 강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물음에는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불의 기운을 흡수했다는 식의 대답도 하기에는 불의 기운을 단단해지는 것과 연관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장인들이 곤란해 하는 가운데 실소를 짓던 몽주는 ‘상의 변태’에 대해 말하였다.
“모든 물질은 온도에 따라 특정 상태를 가지네. 쉽게 예를 들자면 물이 있겠지. 평상의 온도일 때는 물은 말 그대로 물과 같고, 겨울처럼 기온이 뚝 떨어지면 물이 얼음이 되며, 물에 열을 가해 고온으로 끓이면 수증기가 되는 것 말이네. 이런 것처럼 철도 온도에 따라 상태가 변하네.”
“철이 평상시에는 단단하게 굳어 있고, 열을 크게 가하면 녹으니, 더 열을 가하면 끓어서 수증기처럼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다만, 철을 끓을 만큼 열을 가하지 못하기에 볼 수 없을 뿐이지.”
장인들이 그런가 보다 싶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몽주는 다시 말하였다.
“한데, 그렇게 눈에 보이는 상태 변화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변화가 따로 일어나기도 한다네. 내가 조금 전에 물었던 강철을 달군 후 급랭하였을 때 더 강해지는 것도 그런 변화에 의한 것이지.”
“…….”
장인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몽주를 힐긋거렸다. 대충 그걸 어떻게 아느냐 정도의 의문이 묻은 시선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그 증거를 보이겠네.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작업을 해 보게.”
몽주는 장인들을 시켜 강철을 가열하게 하였고, 틈틈이 가마를 열어 가열된 강철을 꺼내었는데, 거기에 자석을 대어 강철의 자성을 실험하게 하였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는 중에 몽주가 문득 미소를 짓고는 장인들에게도 자석을 강철에 대개 하였더니, 장인들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가? 자석에 붙는 힘이 둔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을 테지?”
“과연 그렇습니다.”
“자, 그럼 계속해 볼까.”
몽주는 강철을 계속 가열하게 하였고, 역시나 틈틈이 꺼내어 자석으로 자성을 실험하였다.
시간이 흘러 제법 붉게 달아오른 철이 나오기 시작하자, 열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멀찍이 떨어져 집게로 자석을 대어야 했고, 실험할 때마다 자석이 손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실험을 반복하던 끝에 어느 순간 다시 몽주가 빙긋 미소를 짓고는 장인들에게도 실험하게 하니, 붉게 달아오른 강철에 자석이 붙는 힘이 거의 사라졌다.
“직전의 강철과 이번 강철의 차이가 느껴지는가?”
몽주가 물으니, 장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전까지만 해도 자석이 딱 붙는 게 느껴졌는데, 조금 더 가열하여 나온 이번 강철은 자석이 붙는 힘을 거의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까 처음 자석의 붙는 힘이 약해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전에 비해 조금 더 온도가 올라갔을 뿐인데, 어느 순간 자석이 붙는 힘이 약해지고, 그 약해진 정도가 이어지다가, 다시 어느 순간에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의 변화라는 것이네. 본디 자석에 반응했던 강철이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그 성질을 두 번 바꾸는 것이지. 그리고 이는 비단 자석에 반응하는 성질의 변화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성질도 바뀐 상태라네.”
사실 자성이 바뀐 것은 강철의 미세 조직의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 자성이 약해진 것은 강철 안의 시멘타이트(cementite)가 섭씨 약 210도쯤에서 강자성체(强磁性體)에서 상자성체(常磁性體)로, 자성이 약한 상태로 변한 탓이고, 후에 자성이 거의 사라진 것은 강철의 철 자체가 약 768도쯤에서 상자성체로 변한 탓이었다.
“지금 이처럼 가열된 강철은 연하지만, 사실 흑토의 기운을 가장 강하게 품고 있는 상태이네. 하나, 온도를 천천히 낮추면 그 흑토의 기운이 빠져나가게 되지. 한데, 만약 급랭하여 흑토의 기운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혹시 담금질을 한 강철이 강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것이네.”
몽주는 자성을 잃을 만큼 달궈진 강철을 담금질하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물에 담궈져 요란하게 김을 뿜어낸 강철이 충분히 식어 나오자, 몽주는 그 강철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리며 말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강철은 강철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것이네. 하나, 다들 알겠지만, 너무 단단하여 오히려 잘 깨지는 경향이 있지.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다시 열을 가하였다가 천천히 냉각시켜야 하네. 그렇게 하면 단단하면서도 질긴 강철로 변모하게 되지.”
몽주의 말에 장인들이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며 의견을 나누었다.
얼핏 들으니, 제철소나 철공소 등에서 강철을 이용하는 중에 보았던 강철의 변화를 떠올리며 몽주의 설명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다들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모양이군.”
“그런 변화를 알기는 했습니다만, 저희는 단지 강철에 뭐가 섞인 것이라 여겼지, 강철이 온도에 따라 흑토의 기운을 달리 품는지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물론, 강철에 여러 다른 물질이 섞이면 그 역시도 성질이 바뀌지. 하나, 그런 건 우리 손으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지만, 강철 자체는 얼마든지 다룰 수 있네. 하니, 이제부터 자네들이 좋은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걸세.”
몽주는 그쯤에서 현대적 철강 지식을 당대에 맞춰 각색한 설명을 마감하였다.
조금 전 설명한 것은 강철의 미세 조직이 가열됨에 따라 오스테나이트(austenite)로 변하고, 그 상태에서 급랭시키면 마르텐사이트(martensite)라는 조직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사실 원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곤란했는데, 장인들이 강철을 흑토의 기운을 품은 철로 이해했기에 그에 맞춰 설명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설명은 모두 마르텐사이트화된 강철을 얻기 위함이었고, 이는 영구 자석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마르텐사이트 상태의 강철이 가장 자성이 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몽주는 담금질(quenching)과 뜨임(tempering : 담금질한 철을 다시 저온 가열하여 식히는 것)에 대해 장인들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애초에 바라는 것을 명하였다.
그것이 피뢰침과 연결된 마르텐사이트 강철임은 당연한 것이었다.
몽주가 떠난 후, 장인들은 탐라공과 함께 실험한 것을 기록하고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러던 중에 누군가가 실소하며 농을 하였다.
“역시 탐라공께서는 화덕진군의 현신이신가 봐.”
“허허, 무당들이 그 소리를 하던데, 그걸 믿나?”
“생각해 보게. 아니면 어찌 존귀한 탐라공께서 이런 험한 대장장이 일까지 잘 아시겠나?”
화덕진군(火德眞君)은 탐라섬에 있는 일종의 신화로, 불의 신이자, 번개의 신이며, 동시에 옹기장이나 대장장이의 신과 같은 성격도 가진 존재였다.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장인들이 농담 삼아 나눈 이야기일 뿐이었다.
* * *
몽주가 유구의 사토왕과 함께 개경에 도착한 것은 임술년(1382년) 정월 중순이었다.
이미 먼저 유구왕의 고려 입조와 작위 수여를 청하는 사신을 보냈고, 허락을 받은 바 있어, 쉽게 끝날 일이었다.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는 유구국이 고려에 머리를 굽히고 고려국왕 아래 서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특히 유구가 탐라국이 아닌 고려에 입조하는 것을 몹시 기꺼워하였다.
탐라공국과 탐라국공의 위세를 생각하면 유구국이 고려국을 무시하고 탐라국의 제후가 된다고 해도 어찌할 바가 없었을 터인데, 탐라국공이 유구왕을 고려에 입조시켜 나라와 국왕의 위신을 세워 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역시 탐라국공은 이 나라의 동량이요, 이 나라 최고의 충신이오!”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우왕은 옥좌의 팔걸이를 퉁퉁 두드리며 크게 즐거워하였다.
표정을 보면, 마치 천자가 되어 왕을 제후로 삼은 것 같았다.
하기야 유구왕도 왕은 왕이니, 그가 작위를 청한 것을 두고 자신이 황제가 된 듯한 기분을 내는 것도 그리 우습지마는 않았다.
유구왕 사토는 몽주의 요구대로 유구국공의 작위를 얻었으니, 몽주나 이성계와 같은 지위가 되었다.
다만, 몽주나 이성계처럼 종묘에 참배하지는 못했는데, 아무래도 고려인이 아닌 탓에 금상도 종실에 강요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고려국왕은 물론, 왕실 인사나 유구국공 본인까지도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는데, 이상하게 궁중후의 어색한 태도가 몽주의 눈에 자꾸 들어왔다.
처음 개경에 도착하여, 그가 마중 나왔을 때부터 전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고, 유구국공의 작위 수여와 관련한 행사를 치를 때도 계속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던 것이다.
하여, 몽주는 개경을 떠나기 전에 궁중후를 따로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으시오? 있으면 말해 보시오.”
“…….”
“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뒤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지 말고, 말을 하십시오.”
분명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한데도 뭐라 말하지 않으니, 몽주도 말투가 절로 퉁명스러워졌다.
하나, 그 순간에 궁중후는 더 큰 번뇌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지난날 탐라공의 아우가 와서 제안한 것 때문이었다.
‘정말 탐라공은 모르는 일인 건가?’
몽건 도령이 형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래서 그가 아니라 궁중후가 제안하는 형태로 혼사를 맺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린 도령이 독단으로 혼사를 제안하진 않았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그 혼사의 의미를 두고 고민했고, 그 혼사로 인해 가능한 일들을 가늠하는 중에 탐라공이 어쩌면 고려 왕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에까지 이르렀다.
그 추정으로 탐라공은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둔 번뇌에 사로잡힌 지경에 이르렀는데, 정작 직접 본 탐라공으로부터는 아무런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특별한 의도로 혼사를 진행했다면 대놓고 그 의도를 피력하진 않겠지만, 당사자인 자신에게만큼은 하다 못해 눈짓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 어떻게든 내가 먼저 말을 꺼내게 하려는 속셈인가? 차후에 일이 꼬여도 자신이 아닌 내가 시작한 것이라고 하면서 발을 빼려고? 그럼 나도 모른 척해야 하는 건가? 그러다 정말 대계를 품고 있는 탐라공이 나마저도 포기하고 일을 벌이면 어쩌지?’
머릿속에 가득한 상념 탓에 궁중후의 표정은 거무죽죽하게 변할 지경이었다.
“염 후, 혹시 내게 불만 있으신 것이오?”
“아, 아닙니다.”
궁중후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여전히 탐라공의 표정에서 어떻게든 무어라 낌새를 찾느라 바빴다.
물론, 보이는 건 ‘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러나.’라는 식의 어이없어하는 표정뿐이었다.
궁중후는 이를 악물고 도박을 하는 기분으로 머릿속에 가득한 무수한 상념 속에서 결단을 내렸다.
“어, 얼마 전에 몽건 도령이 절 찾아왔었습니다.”
“그렇소? 무슨 일로?”
“…….”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이유를 묻는 탐라공의 얼굴을 본 순간, 궁중후는 그것이 결코 모르쇠 하는 연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 몽건 도령이 제게 혼사를 제안했습니다.”
“혼사? 누구의 혼사 말이오?”
“당연히 몽건 도령의 혼사지요.”
“……!”
탐라공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하면, 몽건이가 누구와 혼사를 맺겠다고 했소이까?”
“제 여식입니다.”
“……!”
탐라공의 표정에 다시금 경악이 서렸다.
다만, 앞서 보여 준 놀란 기색은 그저 몽건이 본인의 혼인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형으로서의 놀라움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파급에 대한 놀라움이라는 게 달랐다.
“그러니까 몽건이가 궁중후의 딸과 혼인을 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이오?”
입마저 벌리고 한동안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몽주가 표정을 일변하며 천천히 물으니, 그 어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궁중후가 보기에 탐라공의 반응은 분노에 가까웠으니, 그 순간 그는 속으로 자신의 현명한 선택에 만세를 외쳤다.
정말 탐라공은 몽건 도령의 행보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 확실했다.
만약 탐라공이 그저 모르쇠하며 자신이 혼인을 제안하길 기다리는 것이라 판단했더라면, 일이 아주 이상하게 꼬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에, 궁중후는 그제야 번뇌를 지우곤 탐라공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고하였다.
“후우…….”
사정을 확인한 몽주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궁중후가 오해를 확신하고 혼사를 제안했다면, 그래서 그냥 집안 대 집안의 일이라 여기고 그 혼사가 이뤄졌다면 궁중후는 ‘역모’까지도 오해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일이 추진되었다면, 자신도 얼결에 역모에 가담하는 꼴이 되었을 뻔했고.
그렇게 되면, 몽주가 구상하고 있던 고려 대계는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이었다.
어느 시점에선 몽주가 먼저 그 예기치 못한 역모에 대해 알게 되었겠지만, 궁중후가 탐라공의 이름으로 역모를 추진한 것 자체가 그가 얼개를 그리던 모든 계획을 파탄 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일을 수습하더라도, 결국은 고려의 충신 탐라공이라는 이름에 큰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역모를 진행하면 당연히 그럴 것이고, 도중에 역모의 진행을 막더라도, 그 역모에 가담했던 이들 중에 크게 반발하는 자들이 생길 것은 자명한 일이니, 그런 자들 중에 돌발 행동을 하는 자가 나타나는 것도 십중팔구였을 것이다.
예컨대, 재력과 심력을 쏟아 역모에 가담했던 자가 탐라공이 역모를 ‘취소’한 것에 반발하여 반대로 왕실이나 다른 권세가에게 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모에 가담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역모에 가담했다는 부담감을 덜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계기로 삼으려 할 테니까.
역사에 역모를 같이 꾸미다가, 그 실행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을 때, 그에 불만을 품고 배신한 자들은 부지기수가 아니던가.
물론, 역모를 꾸몄다는 고발이 있다고 해서, 몽주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려 전체에서 탐라공을 벌할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
하나, 그때부터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충신 탐라공은 없어지고, 의심만이 가득할 것이다.
지금의 ‘범’ 고려가 유지되는 바탕에 탐라공이 고려의 충신이라는 점이 기여하는 건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었다.
탐라공이 충신이기에 고려 왕실은 탐라국을 믿고 의지하였고, 요동공이 감히 고려 왕실에 대항하여 왕좌에 오를 생각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탐라공이 역모를 꾸몄다는 게 밝혀진다면?
왕실은 탐라공에 대적하기 위해 온갖 방도를 강구하려 할 것이고, 요동공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왕위에 오르려 할 것이다.
그렇게 고려 내 판도가 요동치면, 그때는 정말 몽주가 나서서 고려를 정벌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품고 있는 대계가 그런 것이 아니었더라도, 고려가 산산조각이 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으므로.
궁중후와의 혼사가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아찔한 미래를 떠올리자, 몽주는 절로 이를 악물었다.
‘몽건이, 이 자식이…….’
아무래도 아우와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말만 오가지는 않을 터였다.
* * *
“여어, 우리 수장님께서 어딜 갔다 이제 오시는 겐가?”
“그 수장님 소리는 빼면 안 되겠나?”
“아니, 수장님을 수장님이라 불러야지, 아니면 대체 누구를 수장님이라고 부르나?”
“됐네, 됐어. 내 말을 말지.”
객점에 들어선 맹사성이 황희 앞에 앉고는, 점원에게 손짓하여 소고기 탕 한 그릇을 시키며 1원 동전을 두 개 건넸다.
맹사성은 요동의 도학생들 중에서 선임자가 되었다. 유자 출신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덕이었다.
“부자시네. 나는 돼지 국밥이나 하나 먹는데.”
황희가 반쯤 비운 1원짜리 돼지 국밥을 한술 뜨며 말하니, 맹사성이 피식 웃었다.
“나는 자네와 달리 점심은 먹지 않을 터이니, 든든하게 먹어야지.”
“허허, 탐라에 왔으면 탐라의 법을 따라야지.”
사실 1원짜리든, 2원짜리든 그다지 많은 노잣돈을 가지지 못한 그들로서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탐라국에서 따로 식사를 제공해 주지 않는 대신 식대를 나눠 주어 이런 호사를 부릴 수 있었다.
그 식대가 일인당 하루에 5원에 이른 덕이었다.
“탐라국이 부유하긴 부유한 모양일세. 나는 그냥 쌀이나 주고 알아서 지어 먹으라 할 줄 알았건만.”
“…….”
황희의 말에 맹사성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가?”
“탐라국이 부유한 건 맞지만, 어찌 보면 이렇게 객점을 이용하게 하는 게 저들에게는 더 유리하다 싶어서 말이네.”
“유리하다?”
“그렇지. 자네, 이 대촌현에 객점이 몇 개나 있는 줄 아나?”
“모르지. 눈에 많이 보이긴 하더군.”
“나도 관리에게 물어봤는데, 대략 삼십여 개에 이른다네.”
“그렇게나?”
“그뿐만 아니라, 식당이라고 부르는 밥을 파는 상점은 그 배가 넘는다고 하네.”
“허허, 탐라 사람들은 손수 밥을 지어 먹을 줄 모르는 모양일세.”
황희가 너스레웃음을 흘릴 때, 점원이 소고기 탕을 가져와 맹사성 앞에 내려놓았다.
큼직한 도기 그릇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국이 있었으니, 소고기 덩어리들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물론, 하얀 밥이 봉긋하게 담긴 밥그릇도 따로 있었으니, 대식가로 소문난 고려 사람들의 배도 든든하게 만들어 줄 만한 푸짐한 양이었다.
“많군.”
“많지. 내 조만간 비육지탄을 터뜨릴까 걱정스러울 정도야.”
“말은 탈 줄 아나?”
“허허허.”
유현덕이 자신의 살찐 허벅지를 보고는 말을 타고 달리며 세상을 질주하던 때를 그리워했다는 고사를 두고 농을 나누며 맹사성은 소고기 탕을 음미하였다.
“양만 많은 게 아니라, 맛도 좋아.”
“최고지.”
“이런 식사를 고작 2원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탐라국이네.”
“2원이 고작인가?”
“탐라에서는 일개 잡부도 하루에 15원 정도는 벌 수 있다니, 고작이지.”
“엥? 그게 정말인가?”
“그것도 겨우 네댓 시진만 일하면 된다더군.”
맹사성은 요동 도학생의 수장이라는 신분 아닌 신분을 이용하여, 다른 도학생들보다 대촌현을 많이 둘러볼 수 있었다.
딱히 운신에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들 아직 어색하여 머물고 있는 개점이나 현청 주변만 둘러본 것에 비해, 맹사성은 요동 도학생 담당 관리와 함께 제법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듣고 본 내용도 많으니, 탐라국 백성들의 사정에 대해서도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탐라 백성들의 사정은 한마디로 복에 겨운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루에 5원 정도 주는 건 싸다고 할 수 있겠지. 우리에게 뒤치다꺼리하는 자들을 붙여 주는 것보다는 말이야.”
물론, 그 자체만 보자면 도학생들에게 5원씩 주는 것보다는 식사를 마련하도록 도와주는 이들의 일당이 더 적게 들 수도 있겠지만, 도학생들의 식비가 결국은 객점이나 식당을 통해 도로 소모될 것을 생각하면 탐라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더 나은 것이었다.
“흠, 정말 식대를 주는 게 유리하겠군.”
황희는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에 맹사성은 자신이 본 것을 더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촌현 내 흐르는 내천 주변에 가득한 수많은 공소와 그 공소마다 달고 있는 크고 작은 수차들, 그 공소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넓고 평탄한 길과 다리 위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짐수레들, 그 짐수레들이 향하는, 식당만큼이나 많은 온갖 상점들.
그건 그저 부유하다는 단어로만 표현할 수는 없는 탐라국의 진면목이었다.
대촌현 자체가 생기 넘치게 꿈틀거리는 느낌이랄까.
“사실 나도 이상한 소리를 들었네.”
문득 황희가 국밥 그릇을 다 비우고 입을 훔치며 말문을 열었다.
“무슨 소리?”
“대촌현이 탐라에서 가장 큰 고을이 아니라고 하더군.”
“여기가 대촌현이지 않나?”
보통 대촌(大村)이라는 명칭은 그냥 붙이는 게 아니었다. 주변 고을 중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고을에게만 주어지는 이름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뭐, 예전에는 대촌현이 가장 컸다곤 하는데, 탐라국 이래로는 남쪽에 있는 홍로현이 제일 커졌다더군.”
“탐라공이 머무는 고을이라서 그리된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여기 대촌현도 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큰 것 같은데, 대체 홍로현은 얼마나 큰 건지…….”
그에 맹사성은 관리로부터 대촌현에 대략 3만 호가 산다는 말을 들은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이 과장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역시 대촌현이라서 크긴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더 큰 고을이 있다니, 탐라국이 탐라섬만으로도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탐라에 발을 디딘 지 이레째.
그저 부유하기만 한 작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탐라국에 대한 인상이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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