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88)
봄이 가까이 온 듯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따뜻함이 여실히 묻어 있었다.
그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홍로현 포구는 한창 소란스러웠으니, 한 무당이 크게 굿을 펼치고 있는 탓이었다.
현 홍로구의 남쪽 지역이자, 과거 홍로 포구 마을에 속한 곳에는 오래전부터 무당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다른 바닷가 마을들이 그러하듯, 아무래도 뱃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인 만큼 미신적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몽주가 탐라를 다스리면서 한 번 크게 무당들을 정리하기도 해서, 이제는 겨우 한 명만이 남았는데, 그 무당의 집을 사람들은 할망당이라 불렀다.
물론, 그 무당은 노년의 여성이었고, 모계적으로 대대로 무당의 직을 잇고 있었다.
무당들이 사라지는 중에도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당이 용왕신을 모시는 무당이기 때문이었고, 그녀가 기거하는 할망당 앞에 홍로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신수(神樹)가 있는 덕이었다.
할망 무당은 용왕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언제나 그 신수,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서 자리를 펴곤 했다.
한데, 오늘은 그 신수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팽나무 아래에서 굿판을 벌였으니, 약 한 달 전에 그 신수가 벼락을 맞아 불타 버린 탓이었다.
그건 사실 엄청난 사건이어야 했다.
그간 할망 무당을 통해 신수는 용왕신의 상징과도 같았는데, 그런 신수가 벼락을 맞아 불타 버린 것은 용왕신의 노여움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이는 바다 근처의 마을에서는 두려움에 떨어야 할 일이었다.
하나, ‘여론’의 흐름은 그와 달랐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애매하군.”
“나쁠 게 있겠습니까.”
홍길도 교관대신이 한창 열기를 띤 무당의 굿판을 멀찍이 구경하며 실소와 함께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아우 길재가 답하였다.
“적어도 주군께서는 그리 즐거워하시지는 않으셨으니까.”
“그야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우셨기 때문이지요. 하나, 이제는 오히려 잘 이용하고자 하시지 않으십니까.”
“잘 이용하신다라…….”
아우의 답을 받아 읊조린 길도는 문득 다시 실소하곤 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주군께서 화덕진군의 현신이라고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구나?”
“하하.”
길재는 형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짓다가 주위 가까운 백성들과의 거리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제가 보고, 또 형님께 들은 바로, 탐라공께서는 인중인걸이시지, 귀신에 쓰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아우의 말에 길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곁에서 주군을 본 이들은 탐라공이 화덕진군의 현신이라는 백성들의 믿음에 실소할 수밖에 없었으니, 주군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인간다운 면모를 갖추신 분이기 때문이었다.
경세제민을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열중하는 모습은 귀신 들린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화덕진군의 현신이라는 ‘주장’의 가장 큰 정황 증거인 탐라공의 지식 또한 그분의 노력임에 틀림없었으니, 매일은 아니더라도 틈틈이, 대략 두 달에 보름가량은 밤에도 불을 끄지 않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계신 것을 대신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방에서 공부하신 것으로 장인들도 모르던 지식을 산출해 내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말 화덕진군의 현신이라면 그런 고됨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나, 그건 가까운 곳에서 탐라공을 보필하는 자들의 ‘특권’이었고, 멀리서 탐라공이 행하신 일의 결과만을 보고 듣는 백성들에게는 분명 그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기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백성들 사이에 탐라공을 화덕진군의 현신이라 믿는 자들이 늘어나고, 현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이상의 사람’이라 여기는 인식이 퍼져 가는 중에 ‘벼락 소환’은 그런 믿음을 공고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홍로현 안팎 곳곳에 ‘벼락봉’을 세워 벼락을 끌어들이는 걸로 모자라, 직접 손을 하늘로 뻗어 벼락을 부르고, 몸에 받아들이신 일은 그야말로 사람일 수 없는 증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게다가 탐라공의 몸에 벼락인(–印)이 남아 있었으니, 아무리 의심이 많은 자들이라도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게 된 터였다.
벼락을 받아들이시면서, 탐라공의 오른손 검지부터 오른팔, 오른 몸통, 오른 다리, 오른발에 이르기까지 벼락의 형상이 새겨졌는데,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은 몰라도 손과 팔에 남은 그 형상은 백성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붉었던 벼락인이 점점 하얗게 변하더니, 은근한 빛까지 발하여 어두운 밤에도 뚜렷이 드러날 정도인 터라, 그 모습이 대신들마저 절로 경외감이 들게 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어찌 보일지는 뻔했다.
이제 탐라섬 백성들에게 탐라공은 탐라공이라는 명칭보다는 ‘화덕진공’ 혹은 ‘벼락공’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릴 정도였다.
길도와 길재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할망 무당의 굿은 이어지고 있었으니, 한창 용왕신을 달래는 축문을 크게 읊는 중이었다.
“……선금산용왕 나무 사가라용왕 나무 화적용왕 나무 수섭용왕 나무 덕차가용왕 나무 화수길용왕 주왈 아바라제 인내삼만다 주유마제주 유비남 산파약제 어 두니소 어 두인소 아누다제 삼약삼불타 두류두루 거제거제…… 꺼억!”
한데, 축문을 읊던 할망 무당이 문득 경문을 멈추더니, 갑자기 눈을 해까닥 뒤집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숨이 막힌 것처럼 꺽꺽대었다.
“저, 저런…… 왔군, 왔어.”
구경하는 백성들 사이에 혀를 쯔쯧 차며 안타까워하는 반응이 있었으니, 오늘 할망 무당이 하는 굿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당이 모시는 신을 바꾼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대대로 포구 마을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용왕신을 모시던 무당이 용왕신을 저버리고 화덕진군을 모시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신벌’이 없을 리가 없다 여겼던 것이다.
“저치가 정녕 신벌 중일까?”
길도가 아우에게 조곤히 말을 건네니, 길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아니더라도 힘든 과정을 보여야 할 필요는 있겠지요.”
용왕신을 모시는 무당의 신수가 벼락을 맞은 것은 예전 같으면 용왕신의 노여움이 있다는 신호로 여겨졌겠지만, ‘벼락공’의 위업으로 인해, 화덕진군이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무당은 원치 않았겠지만, 탐라 백성들이 벼락공을 추앙하고 화덕진군의 현신임을 믿기 시작하자, 그녀도 그와 같은 ‘여론’에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제도(濟度)! 제도! 제도!”
북을 치고 무당을 수발하는 자들이 미친 듯이 제도를 외치고, 할망 무당은 땅바닥 위를 구르며 괴로워하다 못해 머리를 쥐어뜯고, 사지와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상처내기를 한참 동안 반복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경련하던 할망 무당이 멈추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경문하였다.
“일사봉청 축지축사태상노군 옥황상제복명사자 태사마마 대원수 화덕진군 대장군 가솔신장을 거느리고 화덕진공을 영솔하고 벼락마즌 듸 강림하야 각단에 좌정하신 신명신도 선생님네와 합의동창 합위하신…….”
그것은 강림축원문이었으니, 용왕신의 신벌을 이겨 내고 화덕진군의 강림을 받기 위한 경문이었다.
그에 주변에 모인 수많은 백성들이 일제히 절을 하며 화덕진군의 강림을 기원하기 시작했으니, 길도와 길재는 그쯤에서 자리를 벗어났다.
다들 웅크리고 있는 중에 둘만 멀뚱히 서 있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같이 무당의 굿판에 휩쓸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 우석목이 또 생겼네요.”
“…….”
걸음 하는 중에 어느 집 정낭(제주도식 대문)의 정주석을 새로 바꾼 게 보였는데, 근래에 크게 번지기 시작한 우석목이었다.
우석목(偶石木)이란 본디 목호들이 탐라에 오면서 가져온 그들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람의 모양을 한 석주(石柱)였다.
현대 한국인들이 보면 ‘돌하르방’을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모양이었지만, 사실 당대에 우석목은 탐라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목호들의 마을에서만 몇몇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 우석목이 근래에 ‘벼락공우석목’이라 하여, 널리 퍼지고 있었으니, 본래 맨손인 우석목과 달리, 손에 벼락을 쥔 사람 모양으로 된 우석목이었다.
처음 벼락공우석목을 세운 자는 예래현 산방산의 어느 노승이었다.
산방산의 굴사(산굴 안에 세운 절)에서 부처를 모시던 목호 핏줄의 노승이 산 아래 내려왔다가 벼락봉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또, 탐라공이 벼락을 부르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본래 만들던 우석목을 고쳐 벼락을 쥔 모습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우석목을 굴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두자, 공양을 드리러 가던 탐라 백성들이 그에 감탄하여 흉내 내기 시작하였으니, 벼락공우석목을 그냥 세워 두기도 하고, 정낭에 쓰일 정주석 대신 우석목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이제 홍로현이나 인근 고을에서는 종종 볼 수 있었으니, 늘어나는 속도를 생각하면 머지않아 거의 모든 집에 벼락공우석목이 세워질 것 같았다.
* * *
몽주는 눈빛을 반짝이며 집무실에 모인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도학생으로서 고려와 요동국에서 온 여섯 명의 젊은이들로 도학생들이 온 것을 환영하는 차원에서 몽주가 대표로 몇몇을 불러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중 넷은 요동국에서 보낸 학생들이었고, 둘은 고려에서 보낸 이들이었다.
요동국 출신은 방원 공자와 맹사성, 황희, 그리고 허주였고, 고려 본토 출신은 유창과 조말생이었으니,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들임은 물론, 허주와 유창을 제외하면 역사에 해박하지 않은 현대 한국인들이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자들이었다.
이방원이야 두말할 것 없고, 맹사성과 황희는 조선초기의 명재상들이었으며, 조말생 또한 세종대왕이 아끼던 신하로 잘 알려져 있었다.
유창은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도 실은 조선 개국 공신 중 한 명으로 스무 살에 고려 대과에 급제했을 정도로 영특한 유자였다.
허주 또한 조선 초기에 크게 이바지한 신하였으니, 그의 아우 허조가 맹사성, 황희와 더불어 세종대에 정승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것에 가려지긴 했지만,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던 자였다.
하나, 그런 역사의 기록은 현대에서나 유효한 것들이고, 지금 몽주 앞에 있는 자들은 아직 별다른 공업을 세운 바 없는 새파란 젊은이들일 뿐이었다.
몽주는 잔에 차를 직접 따라 주면서 ‘젊은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끌었다.
“자네들은 어떤 마음으로 탐라에 오게 되었나?”
대화 중에 문득 몽주가 물으니, 그 질문은 방원 공자를 제외한 다섯 젊은이들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에 다섯 젊은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는데, 답할 말이 없기 때문은 아닌 듯했고, 누가 먼저 말을 해야 할지를 따지는 듯했다.
“동포라 하였던가, 자네부터 말해 보게.”
몽주가 맹사성의 호를 부르자, 맹사성이 크게 호흡하곤 대답하였다.
“탐라국의 부강함은 고려 전역에 잘 알려진 바, 고려의 신하가 되려는 자로서, 탐라국의 부강한 원천을 배우고, 익혀 무릇 만백성들을 평안케 하기 위함입니다.”
지극히 모범 답안 같은 대답이 맹사성으로부터 나오자, 곁에 있던 황희의 입가에 실소가 어리는 게 보였다.
“자네는 달리 생각하는 게 있는가?”
“흠흠, 크게 보자면 동포의 생각과 같습니다. 다만, 지금은 아무런 직책도 없는 무명의 유자로서 아직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여,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도학생으로 탐라국에 다녀오면 요동에서 과거를 볼 때 가산점을 준다는 말에 끌렸습니다.”
“후후후.”
몽주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황희를 보았다.
어쩌다 보니 실상과 달리 역사에 청백리의 상징처럼 남은 황희였지만, 젊은 황희는 어려운 상대 앞에서도 웃음을 지으며 솔직한 말을 내뱉을 정도 능글맞은 모습이었다.
몽주는 잠시 웃다가 다른 이들의 대답도 듣고자 하였다.
다른 이들은 맹사성과 비슷한 말로 대답을 갈무리하였는데, 허주만큼은 꽤 특이한 답을 하였다.
“탐라의 허와 실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왔습니다.”
“탐라의 허와 실이라…… 하면, 그 허실을 가늠하고 있는가?”
“아직은 답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탐라공께 대답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 요동공이 묻는다면 답할 것이고?”
허주는 고개를 묵직하게 주억거렸다. 자신은 요동의 신하가 될 것이니, 요동공의 명은 따를 것이고, 그만큼 탐라공은 경계할 것이라는 뜻이 담긴 모습이었다.
그에 방원 공자를 제외한 다른 도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허주를 바라보았으니, 그 대답이 다분히 공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허주와 허조 형제가 깐깐한 것으로 유명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을 떠올렸으니, 특히 형 허주가 너무 깐깐해서 출세에 지장이 많았을 정도였다고 했다.
몽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강직함을 보니, 요동공이 부럽군. 부디 훗날 요동공이 자네를 잘 쓰길 바라네.”
“선비는 선비의 길을 갈 뿐이고, 그 쓰임은 군주의 그릇에 달렸을 뿐입니다.”
몽주의 말에 그의 강직함이 주군의 성미를 건드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언중유골이 담긴 것을 알아차린 허주의 대답이었다.
과연 허주에 대한 평이 그르지 않았다 여기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몽주는 다시 주제를 바꿔 도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문득 유창이 다소 주저하는 모양으로 질의를 청하였고, 몽주가 허락하였다.
“탐라의 백성들이 하는 말을 듣자 하니, 공께서 벼락을 부르셨다 하였습니다. 관원들에게 물어도 모두 사실이라 말하는데, 저로서는 쉽게 믿기 어려웠습니다. 정녕 사실인지요.”
유창의 물음과 함께 도학생들 전원의 시선이 몽주의 오른손에 닿았다.
소매 아래로 드러나 있는 몽주의 오른손등 위로 하얀 줄기가 뻗어 있었으니, 그것이 소문의 벼락인임이 분명했다.
탐라공의 피부가 많이 하얀 터라,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력을 돋아 주의 깊게 보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새하얀 벼락인이 분명히 보였다.
그에 몽주는 쓴맛을 다시며 자신의 손등을 들어 보았다.
처음에는 붉게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색이 변하여 하얗게 흔적이 남았고, 그것이 자신이 벼락을 불러 그 정기를 흡수하고, 화덕진군의 현신이라는 소문을 증폭시키는 증거가 되고 있었다.
“뭐, 내가 벼락을 맞은 건 사실이네.”
몽주는 사실만 확인해 주고 다른 말을 삼갔다. 벼락을 불렀다는 걸, 그리고 화덕진군의 현신이라는 걸 부정할 수도 있었지만, 고민 끝에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벼락공’의 지위와 그 부담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탓이었다.
몽주가 대략 인정하자, 도학생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었다. 감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쉽게 믿지 못하는 자도 있었고, 허주처럼 옅게 콧방귀를 끼며 비웃음을 애써 감추는 자도 있었다.
그에 몽주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허주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라곤 하지만, 당장은 이제 고작 열다섯에 불과한 어린 녀석이 너무 오만하다 싶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몽주의 시선을 느낀 허주는 정색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끊으셨으니, 억측하는 것, 집착하는 것, 고루한 것, 아집부리는 것이 그것들입니다.(子絶四 毋必 毋意 毋固 毋我) 소인의 생각에, 그것이 지금 공께 필요한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군주는 군자이여야 하고, 군자는 인의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지 않습니까.”
“…….”
백성들이 고루한 미신에 사로잡혀 자신을 추앙하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사실인 양 고집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몽주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변하자, 다른 도학생들 심지어 방원 공자마저도 당황하여 허주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좋은 조언이라도 초면에 국공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질책 같은 시선들이었다.
하나, 허주는 뻔뻔하게 몽주를 직시할 뿐이었다.
“……후후후.”
그러다 문득 몽주가 웃음을 흘렸다.
“자네의 말 자체는 틀림이 없네. 하나, 나의 백성들은 자네가 그처럼 무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네. 내 하나만 묻지. 인의는 인의 그대로 평할 수 있는가?”
“인의는 뿌리와 같은 것이니, 파헤칠 수 없습니다. 하나, 예지로 발현되니, 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에 몽주가 그리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내 백성들의 예와 지가 세상 그 어떤 나라의 백성들보다 뛰어나다 여기고 있네. 자네가 미신이라 비웃는 것들 또한 내 백성들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고 말이지. 나는 내 꼴이 우습게 보일 지라도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개와 말의 흉내라도 낼 것이네. 이것이 나의 인과 의이니, 나의 백성들은 예와 지로 화답하겠지.”
“하나, 군자는 말로써 사람을 부추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어찌 화덕진군이니 뭐니 하는 귀신놀음으로…….”
“하하하!”
문득 몽주가 폭소하니, 다들 의아한 시선으로 그 연유를 궁금해 하였다.
“내가 화덕진군의 현신이든 아니든 그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네. 왜냐하면 설령 화덕진군이 내 앞에 강림하더라도, 내게 비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
“내가 확신하건대, 인의(仁義)를 논하는 건 자네가 탁월할지라도, 예지(禮智)는 들먹이지 말게. 내 앞에서는 물론, 내 백성들 앞에서도 말이야. 내 백성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와 지를 탐구하고 있으니까. 탐라에 머무는 동안 자네가 이것만큼은 깨닫고 가길 바라겠네.”
* * *
탐라인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합리’의 시선에서 보자면, 몽주를 화덕진군의 현신으로 믿는 건 미신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지식의 산출과 물산의 개발을 주도하는 탐라공을 이해하기 위한 그들만의 ‘합리’적인 설명은 필요했으니, 그것이 탐라의 민간신앙과 ‘벼락 소환’의 이벤트와 결합하여 가장 그럴싸한 설명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건 몽주의 명에 따라, 행하는 ‘발명’과 ‘발견’에 대한 보다 강렬한 열정으로 드러났으니, 이전에 탐라공의 명에 따라 임무를 함에도 마음속 한편에 남아 있는 의아함과 주저함마저 이제는 지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덕진군께서 벼락공을 통해 세상에 숨겨진 이치와 그를 이용한 물산을 허락하시겠다는데 누가 주저할 수 있을까.
오직 벼락공이 명하신 것을 따라, 그 하명 안에 숨겨진 뜻을 탐구하여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정리하고, 응용하여 물산을 풍족하게 생산하는 것에 몰입할 따름이었다.
‘형님은 신이 되실 생각이신가.’
몽건은 어느 제철소에 있었다.
지난 한 달 넘는 동안 그는 자중하며 바깥출입도 삼갔으니, 이는 형님께 혼난 것을 반성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동시에 형님께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여, ‘벼락공’과 관련된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도무지 형님께서 말씀하신 ‘왕의 자리로도, 천자의 자리로도’ 담을 수 없는 꿈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한 마음에 오랜만에 바깥출입을 하였다.
한데 일하는 백성들, 특히 장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전보다 훨씬 열의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도 형님의 명에 탐라의 백성들이 지극히 순종하긴 하였지만, 지금 백성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순종을 넘어선 열정이었다.
명한 것을 따르는 것과 명한 것 이상을 해내려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고민하던 것이 있는 탓에, 그런 백성들의 일변한 마음가짐을 보니, 형님께서 진정으로 그 자신을 화덕진군의 현신이라 여기시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왕과 천자를 넘어서 신이 되시려는 건 아닌지에 대해 자연히 생각이 닿았다.
하나, 그건 금세 지워 버릴 수 있는 잡생각에 불과했다.
형님은 스스로 신격화한 적이 없었다. 벼락공과 관련된 일이 있은 전후로도, 화덕진군의 현신이라 추앙하는 것은 백성들이었지, 형님이나 신하들이 부추긴 게 아니었다.
게다가 형님께 혼나고 훈계를 받은 건 ‘벼락공’의 일이 있기 전이었으니, 선후가 맞는 추정도 아니었다.
여전히 수심이 깊은 표정으로 몽건이 천천히 몸을 돌려 철소를 나서려는데, 문득 앞에 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공관대신 화극이었다.
“음? 오, 몽건 도령, 오랜만이야. 그간 두문불출하더니, 간만에 출타하였군.”
“예, 안녕하셨는지요.”
묵직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화극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화극의 손이 그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할 말은 없고,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보기에 뭔가 달라진 게 있지 않나? 여기 분위기랄까, 장인들의 태도 같은 거 말이야.”
그야 물론, 느낀 바가 있기에 몽건은 간략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 역시 그렇지? 내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지만, 자네처럼 간만에 들른 사람이라면 더욱 확실할 것 같아서 물은 거거든.”
“예…….”
별 시답지 않은 질문이라 여기며 몽건은 다시 고개를 숙이곤 떠나려 하였는데, 이번에도 화극이 그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도 잘 모르네.”
화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문득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어찌 주군께 혼이 났는지 말이야. 다만, 주군께서 괜히 자네를 혼내신 건 아닐 터이니, 대략 주군의 경세제민에 자네의 행동이 위배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지.”
“…….”
“그리고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조언을 해도 될 것 같군. 주군께서 여태껏 행하신 일을 차근히 살펴보게. 주군께서는 서두르는 일이 거의 없으셨지만,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빠르게 탐라의 세상을 변모시키셨지. 그게 가능했던 건 모든 일에 있어 경세제민을 중심에 두신 덕일 게야.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들을 구제하시는 데 열중하였기에 백성들이 주군을 점점 더 힘껏 따르고, 세상의 운마저 주군께 모인 게지.”
“경세제민…….”
문득 몽건이 경세제민을 읊조리자, 화극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성들은 절대 어리석지 않네. 적어도 누가 자신들을 이롭게 하는지 결국은 깨달을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지금 백성들이 벼락공이라면서 주군을 추앙하는 것도, 만약 주군께서 암군이셨다면 오히려 벼락 맞고 죽지도 않는다고 탄식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야. 하나, 주군께서는 내내 경세제민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으니…… 응? 왜 그러는 겐가?”
화극이 긴 충고를 잇다가 문득 몽건 도령의 어깨를 짚은 손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그를 보았으니, 몽건 도령이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경세제민…… 이롭게 하는 것…….”
“몽건 도령……?”
“공관대신, 충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멍한 표정이던 몽건이 문득 허리를 굽혀 화극에게 감사하곤 급히 발걸음을 옮기니, 화극도 이번에는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의아한 표정이 가득한 화극을 뒤로하고, 뛰듯이 걸음을 옮긴 몽건이 향한 곳은 몽주의 집무실이었다.
그 집무실 문을 곧바로 열어젖힐 것 같은 기세였지만, 비서원 관리가 만류하며 몽건의 방문을 알렸으니, 잠시 후 몇몇 관리가 집무실을 나온 뒤 들어갈 수 있었다.
몽건이 안으로 들어가 형님 앞에 서자, 연이은 업무로 약간 피곤한 안색으로 눈매를 손으로 짚고 있는 몽주가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냐.”
“하나 여쭐 게 있습니다.”
“뭔데 그러느냐?”
“경세제민과 경제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
몽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우를 보다가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짧게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로 쓰이던 경제(經濟)라는 말이 진정 독립하는 순간이고, 길게는 정치행정적인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던 광범위한 의미의 경세제민으로부터 근현대적인 의미의 경제가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몽주가 아무리 경제를 강조해도, 경세제민으로 알아듣던 당대인들 중에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첫 인물은 몽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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