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90)
장보는 그날따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시간 동안 그가 한 것은 몸단장이었으니, 머리를 감고, 뺨에 뻗어 난 수염을 다듬고, 상투도 곧게 틀었다.
이틀 전에는 목욕탕에 다녀왔었으니,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한 이틀은 더 있다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남편이 아침 댓바람부터 분주하게 오가는 소리에 일어난 아내는 남편이 하는 행동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평상시에도 그렇게 하지 그러시오?”
“누구 좋으라고? 내가 너무 단정하게 하고 다니면 자내만 불안할걸? 사방에서 여인네들이 내게 홀딱 반할 테니까.”
“하이고, 그게 말이오, 방귀요.”
남편의 농에 웃던 아내는 문득 정색하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 덕진이가 기술학교에 입학하는 날인 건 알고 있지요?”
“아, 맞네. 그랬지.”
“으이구, 장남이 학교 들어가는 것도 잊고 있었소?”
“쩝, 원체 요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 그랬지. 자내가 함께 갈 참인가?”
“가 봐야지요. 우리 덕진이가 영특해서 단박에 낭중지추인 양 튈 거예요.”
“허허, 너무 기대는 마시오. 중요한 건 잘 배우냐는 거지.”
“덕진이라면 기술 한두 가지쯤은 훌륭하게 배울 거예요.”
“암, 기술을 배워야지.”
본인이 철공소 기술자인 장보는 장남이 잘 배워 뛰어난 장인이 되길 바랐다.
그러기만 한다면, 팔자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처럼.
조그만 청동 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마친 장보는 옷장 앞에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내가 다가와 옷을 골라 주었다.
“바지는 이게 좋을 듯하고, 웃옷은 이걸 입는 게 낫겠네요.”
장보는 별 말없이 아내가 골라 주는 대로 입었다. 사실 다른 때 같으면 그가 옷장 앞에 서는 일도 없이, 아내가 내주는 대로 입었을 것이다.
그가 입는 바지는 예전과 달리 바지통과 소매가 좁은 것으로, 탐라공이 옷자락이 날리는 옷은 불편하다며, 몸소 좁은 소매의 옷을 입으시면서 널리 퍼진 복식이었다.
웃옷의 옷자락을 대님으로 매는 대신 단추를 여러 개 달아 자락이 퍼지지 않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실 정작 일할 때는 이 옷이 아니라, 따로 작업복이 있어 그걸 입었다.
윗도리와 아랫도리가 하나로 붙은 요상한 형태의 옷인데, 처음에는 영 어색했지만, 옷자락이 하나도 없는 형태라 걸리적거리는 게 전혀 없어, 일하기에는 편했다.
그 작업복은 보통 공소에서 따로 관리를 해 주는 터라 출근하여 갈아입었다.
“날도 풀렸으니, 외투보다는 이걸 입는 게 나을 거예요.”
“음, 안 그래도 그걸 입을 참이었네.”
아내가 내준 건 가죽 배자(褙子 : 조끼)였다. 지난 가을에 산 것으로, 동금주에서 온 소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장보가 대략 옷을 다 입자, 아내가 다가와 옷깃을 매만져 주고, 손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괜히 벼락공 눈에 들겠답시고 튀지 말고, 얌전히 경청이나 하세요.”
“허허, 별 말을 다 하는군. 내가 경거망동할 사람으로 보이오?”
“혹시 몰라 하는 말이에요.”
아내의 걱정 어린 조언을 마지막으로 장보는 집을 나섰다. 아침 식사는 늘 그러했듯 공소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홍로현 내 장보의 집은 탐라공의 자택 북쪽에 위치한 장인 마을에 있었다.
홍로현 내에는 장인 마을이라 하여 따로 장인들만 모여 살게 하는 마을이 몇 있었는데, 근래에 새로 만든 마을이라 집도 더 좋았고, 무엇보다 담장과 철조망으로 마을을 감싸고, 군병들이 지키고 있어 누가 봐도 안전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특히 장보가 사는 마을은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공택(公宅)의 북쪽에다가 더 높은 위치라, 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탐라공이 그럼 북쪽 터전을 모두 놀게 할 셈이냐 호령하곤 마을 건설을 강행하게 한 것이었다.
물론, 탐라공의 자택터와 맞닿지는 않았고, 넓은 길과 공원이라는 이름의 공터를 두었으니, 그 공원에 높은 나무를 남겨 두어 공택을 바라볼 수 없게 해 두었다.
“출근하시는 겝니까?”
“그렇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마을의 입구를 나서니, 초소에 있는 군병이 아는 체 하며, 명부에 무언가를 적었다. 장인들의 출입을 그렇게 매번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꽤 불편한 상황이기도 했다. 매번 출입을 확인받아야 하고, 출근이 아닐 때 마을을 나서면 그 이유를 말해 주어야 하니, 귀찮을 때도 있었다.
하나, 장인들이라고 아무나 장인 마을에 살지 못한다는 점이나 순위군 군병들이 특별히 지켜 주고 있다는 점 모두 탐라공께서 그들을 우대하신다는 증거였으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 먼저였다.
장인 마을에 살기 위해서는 나라에 속한 공소에서 일하는 자여야 하고, 이력이 많고 그 재주를 인정받아야 했으니, 탐라공께서 직접 명하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물산의 개발에 참여할 수 있어야 했다.
특히 군기청에 속한 공소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그 대상인데, 장보 역시도 군기청에 속한 공소에서 일하는 장인이었다.
근래에 공소에 들어온 신입 장인들이나, 탐라 상단 내 회사에 속한 장인들은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특권인 셈이었다.
“어험!”
새삼 괜히 우쭐한 기분에 가볍게 발걸음을 놀리며 길을 따라나서니, 평소보다 이른 출근 탓인지, 동료 장인들은 철공소 근처에 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허허, 자네도 일찍 나왔군.”
“암, 오늘은 일찍 나와야지. 벼락공께서 강연을 해 주신다니, 밤잠마저 설쳤다네.”
“나도 아침에 절로 눈이 떠지더군.”
동료와 만나 말을 나누며 철공소에 들어간 장보는 다른 때와 달리, 작업복을 갈아입지 않고 곧바로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미리 준비해 두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말끔히 청소하여 평소보다 더 깔끔한 상태의 작업장 중앙에는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 철로 된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저런 게 작은 벼락을 만들어 내니 참으로 신통방통이야.”
“누가 아니랄까. 왜 벼락봉을 만들라 하셨나 싶었는데, 벼락을 담아내려고 그러셨던 거였으니.”
“한데, 저걸 어디다 쓰시려는 건지 짐작되나?”
“글쎄, 적군에게 벼락을 내리치실 셈인가 싶긴 하지만, 그 정도로 큰 벼락은 아니었으니, 영 짐작을 못하겠네.”
장보가 동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기계 장치는 원통형으로 그 안에는 벼락이 담긴 철덩이가 들어 있어, 회전시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벼락공이 특별히 명하여, 극비리에 만든 그 기계를 가동시키면 작은 벼락을 볼 수 있었으니, 기계와 연결된 구리선을 교차시키면 지직 소리와 함께 하얀 불꽃이 마구 튀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벼락을 작게 만든 것과 같았던 것이다.
“난 저걸 어디다 쓰는 것보다는 벼락공께서 그리 탐탁지 않아 하신 표정이 더 신경 쓰이네. 모르긴 몰라도, 기대하신 것에는 부족하신 모양이야.”
“벼락공께서 심기 언짢으시면 안 되는데…….”
장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내 몸통 두 개만 한 크기의 ‘발전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에 문득 소장이 크게 외쳤다.
“이보게들, 탐라공께서 곧 도착하신다네. 다들 그만 서성대고 자리 잡고 있게.”
* * *
아침 일찍 철공소 안으로 들어간 몽주는 소장을 필두로 한 소속 장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발전기 쪽으로 다가갔다.
열흘 전에 봤던 발전기보다는 더 정돈된 형태의 발전기를 본 몽주는 웃는 표정 중에도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벼락공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마르텐사이트를 영구 자석으로 만들었건만, 만들어 낸 발전기의 성능은 참으로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애초에 눈앞에 있는 그 발전기가 전부였다.
벼락봉이라 불리는 피뢰침과 연결된 마르텐사이트들 중 벼락 맞은 건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제대로 자석화되지 않았음은 물론, 담금질 후 뜨임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충격을 못 이기고 산산조각 난 것도 있었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느끼며, 유일하게 영구 자석화된 마르텐사이트 철강으로 발전기를 만들게 하였으니, 그 시작이 벌써 한 달 전이었다.
발전기의 원리가 간단하기에, 대형 발전기도 아닌, 소형 발전기 수준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당대에서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몽주가 자세한 구조를 알려 주었음에도 몇 번이나 고쳐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발전기는 기본적으로 ‘회전전자기형’ 발전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발전기는 크게 회전계자형과 회전전자기형이 있는데, 자석을 회전시키느냐 고정시키느냐의 차이로, 달리 말하면 자기장을 회전시키고 도체를 고정시키느냐, 자기장을 고정시키고 도체를 회전시키느냐의 차이였다.
그중 회전전자기형은 자석을 N극과 S극으로 나누어 떨어뜨리고, 그 사이에 도체를 회전시킴으로써 전기를 얻는 방법이었다.
여기서부터 기술적 한계로 인해 벌써 비효율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전자석을 이용하는 현대에서야 N극과 S극을 나누고 떨어뜨리는 게 가능하지만, 영구 자석은 나누어도 나눈 각각이 N극과 S극을 이루기에 떨어뜨린 채 가까이 붙인 N극과 S극 사이의 자기장이 반대쪽 N극과 S극에 의해 교란되기 때문이었다.
회전계자형으로 만들면, 즉 자석을 중앙에 두고 자석을 회전시킴으로써 자기장을 회전시켜 전기를 얻는다면 효율이 더 좋겠지만, 문제는 그리하면 교류 전기가 발생된다는 점이었다.
몽주가 필요한 건 직류 전기였고, 이를 위해서는 회전전자기형 발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기의 역사에서 직류와 교류의 대결이자, 토마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의 대결은 중요한 쟁점이었기에, 현대인의 입장에서 몽주는 전기의 생산과 전송에는 교류 전기가 우월함을 알고 있었다.
하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극과 –극이 나뉘어 있는 직류 전기여야 했고, 이는 몽주가 하고자 하는 전기 분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벌써부터 전기를 대량 생산하고, 원거리 송전하는 것까지 생각할 때는 아니기에 괜히 교류 전기를 생산해서 직류 전기로 바꾸는 번거로움 내지, 당대에서 구현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어려움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 처음부터 직류 전기를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느냐, 어느 정도의 기전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몽주의 눈앞에 있는 결코 작지 않은 그 발전기는 거대한 건전지에 불과했다.
발생하는 전기의 전압(V)이 상당히 낮은 것인데, 전압이라는 게 위치 에너지로 따지면 높이에 해당하는 것인 만큼, 하나의 전하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에너지의 크기 자체가 작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몽주가 현대에서 가져온 소형 발전기의 원리 자체가 최대 수십 볼트(V)에 불과한 것이긴 했지만, 그에도 훨씬 못 미치는 듯했다.
전류(A), 단위 시간 동안 흐르는 전하의 양도 건전지 수준은 아닌 듯하였지만, 그래도 그 발전기에서 얻는 전기로 다른 무언가를 시도해 볼까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준이었다.
사실 전압이든 전류든 그걸 측정할 방법은 없기에 교차 시 생기는 방전을 눈대중과 동물에 시험을 해 보는 정도로 가늠한 것이었다.
참고로, 동물 시험 중에 쥐는 반 식경의 감전 끝에 죽었지만, 그보다 큰 동물은 놀라서 몸부림은 쳐도 죽거나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내친 김에 몽주가 직접 시험해 보았는데, 잠깐 저릿한 느낌만 있었을 뿐이었으니, 전압이 인체 감전이 가능한 수준인 20볼트에 한참 못 미침이 분명했다.
하나, 이런 아쉬움은 오직 몽주의 몫이었고, 발전기를 만든 장인들이나 화극 어른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작은 번개를 만들어 내었다고 몹시 신기해하고, 즐거워하였다.
‘신기하고 즐겁자고 만든 게 아니니까 문제지.’
몽주는 쓴 입맛을 다시곤, 고개를 돌려 출입구 쪽을 보며, 대기하는 자들을 들어오게 하라 명하였다.
그러자 잠시 뒤, 몇몇의 장인들이 크고 작은 나무 상자를 조심스레 들고 들어왔는데, 그들은 유리나 도기를 만드는 공소의 장인들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상자를 열자, 안에는 유리로 된 그릇들…… 치고는 묘하게 생긴 것들이 가득했고, 유리가 아닌 도기들도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막대도 들어 있었다.
발전기 옆으로 가져온 상 위에 그 ‘그릇들’을 차례로 놓아 두고 나서야, 몽주는 장인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이미 지난번에 말했듯이 이 기계는 발전기고, 자네들이 작은 번개라고 말하는 건 전기라는 것이네. 전기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힘들 중 하나로, 익히 알고 있듯 번개도 전기고, 건조한 날 쉽게 볼 수 있는 기 빠짐도 실은 전기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지. 쉽게 말해서 번개는 강한 전기고, 기 빠짐은 약한 전기라 할 수 있네.”
기 빠짐은 정전기 현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전기도 전압만 따지면 엄청난 고전압인 경우가 있지만, 전류가 매우 적기에 약한 전기라고 하는 표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전기를 잘 쓰면 많은 편리를 얻을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하고, 많은 전기를 얻기 위한 연구가 먼저 필요한 바, 오늘은 애초에 내가 이 발전기를 만들게 한 목적을 집중하려 하네. 만약 오늘 내가 목표한 것을 얻게 된다면, 자네들이 내가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니, 반드시 눈여겨보고, 도중에 내가 하는 말을 귀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이네.”
“예!”
벼락공이 벼락에 대해 말하는 것인 만큼, 장인들은 신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고 있었다.
몽주는 수하에게 시켜, 아주 진한 소금물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미 준비하고 있기에 커다란 주발 형태의 항아리에 담긴 소금물을 이내 대령하였다.
그사이 몽주는 손수 유리로 된 길쭉한 그릇 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은으로 된 얇은 막대 끼워 넣은 후, 발전기에 연결된 구리선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두 번 하였다.
유리 ‘시험관’이나 은으로 된 접지도 마련하는 데 꽤 고생이 많았다.
판유리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탐라이건만, 그릇 형태를, 그것도 길고 좁은 생김새의 ‘실험용 시험관’을 만든 적은 없었기에, ‘맨땅에 헤딩’하는 도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옛 유리 공예의 기록대로 숨을 불어넣어 만들려 했지만, 그것도 수 년, 십수 년의 경험을 가진 자나 할 수 있는 것이라 바로 포기하였다.
이후, 거푸집에 유리액을 부어 만들고자 하였는데, 판유리와 달리 녹인 주석을 깔아 매끈한 면을 만들어 낼 수가 없어, 만들어진 것 모두가 우둘투둘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장인들이 온갖 방법을 강구하다가, 아예 주석으로 먼저 시험관 모양을 만들고 그것을 거푸집처럼 쓰되, 가열하여 녹이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 조금 더 낫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현대에서 보던 실험용 유리 도구와 비교하기에는 손색이 많았다.
은으로 된 접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디 흑연 접지를 만들고자 하여, 흑연을 구해 오게 하였는데, 당대에 흑연은 그냥 ‘쓰레기’ 취급이었다.
흑연 광산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광물을 채굴하는 중에 나오면 재수 없다고 버리는 수준이었는데, 그나마도 석탄과 함께 버려져 도저히 따로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어차피 흑연은 달리 쓰임이 있기에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에 많이 매장되어 있는 흑연 광맥을 찾게 하되, 당장은 은으로 된 접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몽주는 유리 시험관에 끼워진 은접지에 구리선을 연결하였는데, 그 구리선은 유약을 발라 구운 후 그 위에 천을 감아, 초창기 형태의 전선처럼 만든 것이었다.
“자, 이쪽은 양극, 이쪽은 음극에 연결하였네, 이걸 소금물에 넣고 전기를 가하면, 소금물에 녹아 있는 것이 양극과 음극에 따라 분해되네.”
“……?”
“……일단 보게나.”
시험관과 접지를 소금물에 담근 뒤, 몽주가 신호하여 발전기를 돌리게 하자, 장인 네 명이 동시에 축대를 돌렸고, 그 축대와 치차로 연결된 발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양쪽 은접지에 기포가 생기기 시작하니, 전기 분해가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몽주는 장인들을 가까이 오게 하여, 이를 관찰하게 하였고, 장인들은 기포가 생기는 걸 보며 몹시 신기해 하였다.
그날 장인들은 쾌쾌한 냄새를 통해 염소(Cl)를, 불을 붙여 폭발시킴으로써 수소(H)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손을 넣어 미끌거리는 느낌을 통해 소금물이 수산화나트륨용해액으로 바뀌는 것마저 확인할 수 있었으니, 다행히 그리고 예상대로 소금물을 전기 분해하는 것까지는 성공적으로 시험해 볼 수 있었다.
* * *
끝내 질산을 제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전기 분해 시험이 있었던 날로부터 거의 두 달 뒤에 잠정 포기를 결정한 것이다.
소금물 전기 분해를 통해 수산화나트륨을 얻는 것까지는 꽤 만족스럽게 성공하였고, 수산화나트륨과 북정사(北庭沙), 즉 염화암모늄을 섞어 가열함으로써 소금과 암모니아가 섞인 수용액을 얻는 것까지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 그 수용액에서 암모니아 증기를 포집하는 것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면서 비효율적으로 적은 양의 암모니아를 구하는 것에 그치더니, 그 암모니아를 공기 중에서 가열한 백금 촉매로 산화시켜 이산화질소를 얻고, 그걸 다시 물에 녹여 질산으로 만드는 과정은 비효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된 설비 하나 없이 공기 중에 발생되는 이산화질소를 얻는 것도 문제였지만, 애써 얻은 이산화질소로 질산을 만드는 건 당장은 몹시 힘든 작업이었다.
이산화질소가 워낙에 물에 잘 흡수되지 않는 터라, 그를 위해서는 흡수탑(吸收塔)이 따로 필요했으니, 현대에서 그 설비의 원리를 알아 와 구현해 보아도 한계가 역력했다.
마치 지난 날 황산을 얻기 위해 애를 쓴 끝에 황산인지 뭔지 모를 산성 액체를 조금 얻은 것에 좌절해야 했던 일을 연상케 하는 결과였다.
다만, 황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분명히 ‘잠정’ 포기였다.
황산 농축에 필요한 설비와 질산 농축에 필요한 설비의 난이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후에 고무를 얻고 기계 설비에 대한 기술이 발달하면 다시 도전해 볼 만하다고 느꼈다.
어쨌든 당장 질산을 얻는 건 실패했고, 당연히 뇌홍을 개발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기에 몽주는 또 헛된 노력을 했다며 적잖이 실망했다.
하나, 몽주도 몰랐지만, 질산 제조를 위한 노력을 헛되지마는 않았다. 질산을 얻기 위한 그 시도들이 탐라의 장인들에게 물질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특히, 그들에게 전기 분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분명 소금물이건만, 전기를 가하자 이상한 기체 두 가지와 미끌미끌 살갗을 녹이는 액체로 분해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 서서히 물질을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시야를 가지게 만든 것이었다.
이전에도 몽주가 이온화된 원소를 이용한 적이 제법 있었지만, 체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터라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는데, 소금물 전기 분해는 그 분해된 결과물을 그들의 감각으로 체감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사고방식과 지식 체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아직 ‘원소’라는 개념에 대한 상상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건 특별한 변화였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비단 전기 분해 실험을 목격한 장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질산 제조는 포기하였지만, 발전기는 여러 물질을 전기 분해하는 데에 계속 쓰였고, 그 실험의 결과는 자료로 남아 기술학교에까지도 전수되었다.
후에 몽주는 그것을 알고 흐뭇해하면서, 일단은 탐라 출신 학생과 장인들에 한정하여 그 자료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물론, 그 자료를 가장 먼저 그 자신이 받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염소가 그렇듯 실험 중에 어떤 해로운 물질이 나올지 모르는 탓이었다.
훗날 과학 혁명을 위한 탐라의 작지만 큰 발걸음이 천천히 내디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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