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91)
* * *
탐라국이 동북아시아의 해상 패권을 가졌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동북아시아 바다에 떠다니는 배가 모두 탐라국의 배는 아니다.
해상 교역에 한하여 볼 때도 국제 교역, 즉 국가 간의 교역에 임하는 상선은 탐라국이 압도적이지만, 각각의 나라 안을 운항하는 상선도 많았고, 특히 명나라나 왜국의 상선 수는 탐라국에 못지않았으며, 상당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탐라국에 의한 국제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탐라의 물산이 여러 나라로 수출됨에 따라, 그 물산을 다시 그 나라 안에서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왜국처럼 섬나라인 경우는 두말할 필요 없고, 명나라도 동부와 남부의 해안을 이용하여 물류를 처리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된 탓이다.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해안은 본래 역사보다 더 많은 선박들이 오가고 있었고, 아마도 지금쯤 한창 전성기를 이루고 있는 한자 동맹의 북해 및 발트해 지역과 함께 세계 ‘투 톱’으로 해상 교역이 성행하는 지역일 것이다.
“전방 좌측에 배들이 있습니다. 명나라 배인 듯합니다.”
갑판 위로 올라오자마자, 선장 초남의 귀에 조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십여 척의 작은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곳이 산둥반도와 멀지 않은 곳이니, 명나라 배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선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초남이 안력을 돋아 명나라 배들을 보고 있자, 갑판장이 다가와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 돌아서 가지.”
“알겠습니다.”
초남의 선택에 따라 조타수와 조범수들이 움직였고, 배의 진행 방향이 조금 동쪽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뒤를 따르는 다른 두 척의 배들도 똑같이 방향을 틀어 따랐다.
“현도 선장이 왜 변침했는지 물어서 대답해 줬습니다.”
정거했던 예성강 포구를 나와 장산곶과 요동반도의 끝을 연결하는 직선 항로를 따르는 중에 항로를 비트니, 뒤따르는 동료 선장이 이유를 물은 모양이었다.
초남 선장은 갑판 위를 훑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두 달 전만 해도, 바다 위에 어느 나라 몇 척의 배가 있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항로를 유지했을 테지만, 지금은 조심해야 했다.
“역시 화포가 없으니까 불안하군요.”
“후우…….”
초남의 한숨 뒤에는 누군가를 향한 욕설이 숨겨 있었다.
초남의 배를 비롯하여 요동으로 향하는 그 선단에 화포가 한 문도 없게 만든 누군가를 향한 욕설.
아니, 화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예전 화포는 없지만, 새로 배치된 모자소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제는 화약이 없다는 점이었다.
구경이 작은 모자소포에는 반드시 고형화된 화약을 써야 하는데, 그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가루 화약도 없긴 마찬가지였고.
탐라국 조정에서는 탐라상단 내 모든 회사의 상선에 모자소포와 함께 적정량의 화약도 보급 완료했다고 믿고 있겠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위쪽에서 장난을 치는 것 같습니다. 다른 회사에는 화약까지 모두 배치되었다더군요.”
“…….”
초남 선장은 묵묵할 뿐이었다. 그도 이미 아는 바였고, 누가 장난치고 있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장난치고는 너무 큰 장난이지. 그러다 큰일 나고말고.’
회사 내 누군가를 향한 비난을 혀를 차는 것으로 대신하던 때, 문득 망루에 있던 선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좌측 배들이 일제히 발노하였습니다!”
“……!”
아까 전방 좌측에 있던 명나라 어선들로 보이는 배들은 어느새 좌측 먼 곳에 보이고 있었는데, 그 배들에서 수많은 노들이 튀어나와 바닷물 속에 담기는 것이 보였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명나라 배들이 노를 저으며 움직이기 시작하니, 그 방향은 탐라의 선단 쪽이었다.
그 움직임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제길! 동향 급변침하게!”
초남이 소리치며 조타수에게 달려갔고, 갑판장은 적습을 알리는 깃발을 올려 뒤를 따르는 배들에게 상황을 전파하였다.
* * *
“힘내! 죽어라 노를 저어!”
구보는 점점 가까워지는 탐라 배들을 보며, 갈고리를 손에 꼭 쥐고는 소리쳤다.
일확천금의 순간이 눈앞이었다.
가렴주구에 못 이겨 섬으로 도주한 지 두 해째, 물고기와 초근으로 연명하며 죽지 못해 살던 자들을 규합하여 탐라의 상선을 약탈하기로 모의한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절호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저 배들마다 금은보화가 가득할 것이야! 따라잡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부자라고!”
재촉하는 구보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노부들은 잇소리를 내며 저 힘껏 노를 저었다.
상황이 흘러가는 꼴이 너무 좋았다.
봄날의 황해는 잠잠했으니, 비단 파도뿐만 아니라, 바람도 잠잠했다.
오직 바람을 받아 달리는 탐라의 배들은 노를 저어 가는 자신들을 절대로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저 배들은 화포가 없는 게 분명해!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
구보가 탐라의 배를 약탈하자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을 때 가장 장애가 된 건 화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탐라의 배들은 군선이든 상선이든 모두 화포로 무장되어 있기에, 접근하는 도중에 모조리 박살 날 것이라는 두려움.
구보 또한 두려웠지만, 많은 수로 적은 수의 상선을 습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거듭 설득하였고, 겨울이 지나 먹을 것이 더욱 부족해지면서 극심해진 굶주림은 마침내 ‘해적단’을 결성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거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고깃배들을 모아 기회를 노렸다.
이미 탐라의 상선들이 얼마나 탐나는 먹이인지는 잘 알려져 있었다.
특히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는 배들은 진귀한 탐라의 물산이나 금은이 가득 실려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탐라의 화포가 엄청나다는 소문도 함께 퍼지지 않았다면, 벌써 바다 위에는 도적떼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천지신명이시어, 도와주소서!’
늘 원망만 하던 하늘을 향해 기도하며, 구보는 눈앞까지 가까워진 탐라의 배를 향해 갈고리를 던졌다.
그간 많이 연습했지만, 한 번에 걸지 못한 갈고리를 몇 번이나 던진 끝에 마침내 탐라 배 갑판난간에 거는 데 성공했다.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바다에 빠질 뻔한 구보는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배에 묶자마자, 등에 맨 활을 들어 화살을 재었고, 노를 젓던 자들 중에서도 절반이 노를 놓고 엉성하게 만든 활로 화살을 탐라의 배 쪽으로 겨누었다.
그때, 갈고리가 걸린 것을 알고 탐라의 선원이 칼을 들고 난간 쪽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갈고리에 연결된 줄을 잘라 낼 요량이었다.
하나, 그가 칼을 높이 쳐드는 순간, 그를 향해 수발의 화살이 날아갔고, 가슴과 머리에 화살을 맞은 선원은 절명하여 난간 바깥 바다로 추락하였다.
그 순간, 구보는 이 싸움이 승리로 돌아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화포만 없는 게 아니라, 탐라군이 가진 유명한 병기 중 하나인 폭죽도 없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 *
탐라상단 내 회사들 중 대부분은 사옥을 탐라섬이나 진주에 두었다.
다만, 몇몇 회사는 그렇지 않았으니, 방사회사도 탐라나 진주가 아닌 나주 무안군에 사옥이 있었다.
다른 여러 요인들도 있지만, 무안에 위치한 가장 큰 이유는 방사회사의 물산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양모 때문으로, 양모의 생산지인 요동과 보다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기 위함이었다.
방사회사는 탐라상단 내 회사들 중 비교적 최근에 설립되었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 중 하나였다.
기성복의 수요가 탐라섬을 넘어 탐라국 전체는 물론 고려에서도 생기기 시작하면서, 방직물의 수요가 폭발한 덕이었다.
그만큼 방사회사의 규모도 커졌으니, 그 성장세는 탐라공조차도 미처 살피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안의 포구 내 방사회사 소유의 건물이 있었는데, 창고와 더불어 소속 선단의 선원들을 위한 휴식소였다.
우당탕탕!
갑자기 그 휴식소의 문짝이 부서져라 열렸고, 소란과 함께 등장한 자는 방사회사의 육 부장이었다.
이름이 관하인 자로, 본디 유자로서 출세하려다가 과거 왜적들의 습격으로 가문이 무너지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장사를 하다가 탐라 상단에 입단한 자였다.
지금은 방사회사에서 운영부장에 임하였으니, 나름 끗발이 있는 위치였다.
“초남이! 초남이 어디 있는가?!”
육 부장은, 휴식소 안에 보이는 부상을 입은 선원들을 본체만체하고는 초남 선장부터 찾았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초남이 손을 들어 자신을 알렸다.
“대체 어찌 된 겐가?!”
“이미 아시지 않소? 수적 떼에게 당했소.”
“이이……! 대체 일급 선장이라는 자가 어쩌다가 수적 따위에게 당했다는 게야?!”
육 부장이 크게 화를 내자, 초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곤 이를 악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게요? 세 척 합하여 선원이 일흔도 안 되는데, 이백이 넘는 수적떼들이 달려들었소. 바람도 안 부는 때라 느리기 그지없는데, 노를 저어 달려드는 중과부적을 어찌 당해 낸단 말이오? 게다가 화포…….”
“어허!”
초남이 화포 이야기를 꺼내 들려 하자, 육 부장이 기겁하며 초남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안에 있는 선원들은 어차피 상황을 다 알고 있겠지만, 혹시나 바깥에서 엿듣는 자들이 있을지 몰랐고, 때문에 자칫 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거동이 어렵지 않으면, 잠시 나가서 이야기하세.”
화를 내던 게 조금 전이건만, 어느새 달래는 말투로 육 부장이 초남을 휴식소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포구 구석 외딴 곳에서 다시 말문을 열었으니, 첫말부터가 초남 선장을 놀라게 만드는 말이었다.
“자네의 선단은 폭풍에 당한 것이네.”
“……?!”
“상황이야 무엇이든 뜬금없는 폭풍에 다른 배들이 난파된 것이라는 말이네.”
“나보고 거짓을 보고하라는 게요?”
“그런 셈이지. 왜? 정의의 사도라도 되고 싶은 겐가? 자네가 수적 떼에게 당했다고 하면, 탐라공께서 자네에게 위로금이라도 하사하실 것 같은가? 천만에. 이유가 뭐가 되었든 자네는 파면되거나, 일반 선원으로 강등되는 거야. 무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배를 바다로 몰고 나갔으니까.”
“이이익……! 그거야……!”
초남이 발끈하여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지만, 육관하가 먼저였다.
“내가 화약을 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자네는 정말 내가 화약을 꿀꺽했다고 생각하나? 그 위험한 걸 나 혼자?”
“……!”
“화약을 빼돌리다가 걸리면, 주동자 여부 상관없이 모조리 모가지가 잘리고 말아. 그렇게 위험한 걸 내가 혼자 어쩌려고 했을까? 천만에! 자네도 내가 그럴 깜냥은 아닌 걸 잘 알지 않나?”
초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육 부장은 썩어빠진 자이긴 해도 그럴 위인이 못 되었다.
그저 자신 몸보신에나 신경 쓸 자였고, 부정부패도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하는 조심스러운 소인배였다.
그렇기에 무사하게 부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고.
“하, 하면, 대체 누가……?”
“나도 모르지. 나야 바로 윗선만 아니까. 중요한 건 말이야. 자네가 거짓말만 해 주면, 다 좋아진다는 게야. 자네 경력에 조금 흠집이야 나겠지만, 그렇다고 선장 직에서 파면되진 않을 게야. 내가 조금 두둔해 주면, 험한 폭풍에서 배를 한 척이라도 구해 온 걸 오히려 공으로 만들 수도 있어. 상단에서는 다친 선원들에게 위로금도 내줄 것이고.”
“…….”
“알량한 정의감으로 화약을 언급하는 순간, 자네도 격동에 휘말리게 될 거야. 탐라공께서 자네까지 신경 써 주실 것 같은가? 탐라공은 자네라는 사람이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이 점은 분명히 명심해야 하는데, 고발한다고 해서 당장에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쓸려 나가진 않아. 자네 정도의 사람을 파멸시킬 시간은 충분하단 말이야.”
마지막 말은 그냥 협박이었다.
고발하면, 넌 죽는다는 협박.
“자네 딸이 올해 열 살이던가? 아들은 일곱 살이고?”
육 부장이 가족까지 언급하자, 초남의 표정은 급히 어두워졌다.
혼자라면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기에 아내와 아들딸의 삶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자, 욱한 마음이 절로 수그러들었던 것이다.
“어찌하라는 겁니까.”
“말했잖은가. 선원들을 설득해서 폭풍으로 배를 잃었다고 보고하는 거야.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가 다 처리할 걸세.”
“하지만, 남은 배에 실렸던 물산과 모자포소를 잃은 건 어찌합니까?”
“그야 잃은 물산은 난파된 배에 모두 실려 있었다고 하고, 자네 배의 모자소포도 풍랑 중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 버렸다고 하면 되지 않나. 모자소포를 적도에게 빼앗겼다면 큰 문제였겠지만, 그것도 아니잖아.”
육 부장의 입장에서는 천만 다행으로, 모자소포는 빼앗기지 않았다. 수적 떼가 배를 장악하기 전에 모자소포를 모조리 바다에 던져 수장시켰기 때문이었다.
탐라군은 화포에 대해 엄하게 관리하였는데, 적에게 화포를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하면, 차라리 파손시키게 명하였고, 함포의 경우에는 바다에 던져 넣게 교육하였던 것이다.
“…….”
대략 말이 되는 변명거리를 안겨 주자, 초남의 고개도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잘 생각했네. 내 위에 잘 말해서, 자네에게 따로 상이 돌아가도록 하겠네. 아니, 이미 자네는 상을 받은 걸세. 언제까지 뱃놀음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 말에 초남은 당황했지만, 그리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 * *
초남 선장을 설득한 육 부장은 회사 사옥으로 돌아와 누군가에게 보고하였다.
“아랫것들은 무마하였습니다. 다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으니, 다른 말은 없을 것입니다.”
“수고했네.”
닫힌 문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더는 아무런 말이 없자, 육 부장은 그대로 물러나려다가 멈칫하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갈 듯합니다만, 다음에도 같은 일이 있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라는 말인가?”
“……조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알아들었네. 물러나게.”
“예.”
육 부장의 말대로 얼마 후 뒤늦게 방사회사의 상선에 화약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화포는 탐라군에서 직접 배치하고 관리하였지만, 화약은 각 회사에 지급되고 재량껏 배급하게 한 ‘시스템’의 허점이었다.
자칫 일개 선장들이 과한 화약을 보유하게 되는 걸 우려하여 회사 차원에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나눠 주게 했는데, 반대로 회사의 상층부에서 화약을 착복할 수 있음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든 육 부장은 일을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여겼다.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니, 큰 여파와 작은 여파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큰 여파는 탐라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작은 여파는 의외로 육 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 * *
“……생각해 보면, 우리도 꽤나 대단한 사람들이야.”
어사 선구의 말에 어사 동채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정체를 밝히고 나쁜 놈들이랑 결탁한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부자가 될 테지.”
“그렇겠지.”
“해 볼까?”
선구가 분명히 장난임에 틀림없는 제안을 하자, 동채는 피식 실소했다.
“돈이 부족해?”
“아니지.”
비공식적으로 어사들은 탐라 관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임금을 받는 자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신들보다도 많을 것이다.
“다른 거 부족한 건 있어? 여인네?”
“내 마노라께 죽을 일 있나?”
선구의 말은 농담조였지만, 동채는 그가 뒤늦게 얻은 가족을 몹시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때 도박으로 인생을 통째로 날릴 뻔한 선구에게 가족은 그만큼 더 소중했다.
“아니면 권력을 휘둘러 보고 싶어?”
“이미 많이 휘두르고 있지. 사실 우리보다 더 막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또 있을까. 탐라공이 아니라면 비교할 자리가 없을걸?”
하나씩 답하던 선구는 마지막으로 그리 답하곤 키득키득 웃었다.
동채 역시 웃다가 문득 정색하고 말했다.
“대신 우리가 부패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많지. 특히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정의 실현 같은 걸 내세우지 않아도, 그들의 아들딸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부패해서는 안 되었다.
탐라공이 그들에게 큰 권력을 쥐어 주며, 만약 어사가 부정을 저지른다면 그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파멸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탐라의 형벌은 상당히 지엄했으나, 연좌하는 것을 극도로 삼갔음에도 탐라공이 직접 그렇게 천명하였으니, 결코 공갈이 아닐 것이다.
엄청나게 우대해 주는 대신, 극도로 높은 수준의 청백을 요구하는 자리가 바로 어사라는 자리였다.
오래 전, 구주에서 처음 어사라는 직위로 임무를 수행한 어사들은 구주가 안정됨에 따라 탐라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중 선구와 동채는 남면 전라도를 담당하게 되었고, 휘하에 각각 여섯의 보좌들을 이끌고 있었다.
어사의 권한은 많았지만, 그중 핵심은 최대 100인의 군병을 착출, 및 동원할 수 있다는 권한과 민관을 불문하고 압수 수색을 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이는 사전에 따로 허가를 구할 필요 없이 사후에 보고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전횡할 수 있는 권력이었다.
과거 구주에서 남몰래 운신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쥔 셈이다.
물론, 지금도 어사는 자세한 정체를 감춰야 했고, 타인 앞에 나설 때는 검은 삿갓을 쓰고 검은 복면으로 눈 아래를 가리게 되어 있었다.
가족들도 그들이 여기저기 파견 나갈 일이 많은 하급 관리라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일반 관리보다 월등히 많은 녹봉은 따로 나뉘어 전당에 예금되고 있었고, 차후에 어사직에서 물러날 때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공무는 오직 탐라공에게만 직접 보고되니, 어사는 그야말로 탐라공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자들이었다.
끼익.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삿갓은 쓰지 않았지만, 복면은 착용한 선구와 동채는 나란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선구와 동채가 사용하는 안가 중 하나로 나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먼저 등장한 이는 한 사내로, 어둠 속에서 횃불에 비친 걸로 봐도 많이 운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등을 떠밀린 듯 문을 나섰다가 ‘어(御)’자가 새겨진 복면을 쓴 두 사내를 보며 경기하듯 놀라 허리를 굽혔다.
“1호, 무슨 고문이라도 한 거야?”
“고문은 무슨 고문요?”
이어서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몇몇 사내들, 아니 한 명은 여인으로 보이는 자들 중에서 몸집이 큰 사내가 퉁명스레 대꾸하였다.
“그냥 탐라공께서 다 알고 계신다. 정말 큰일 치르기 싫으면 이실직고해라. 이렇게 말하니까 질질 짜면서 다 토해 내던데요?”
“내가 보기에 네놈이 너무 덩치가 커서 그런 것 같은데? 곰만 한 놈이 검은 칠을 한 얼굴로 협박하니 놀란 게지.”
“거참, 그놈의 곰 타령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크크크, 한 일 년만 더 하고.”
선구의 농담은 어사와 보좌들 사이에서는 농담이었지만, 아직도 허리를 굽힌 채 벌벌 떨고 있는 자에게는 농담이 아니었다.
보좌들 역시 정체를 되도록 감추게 되어 있어, 마찬가지로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임무 중에 입는 복장마저 검은 색이라 무슨 저승사자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1호라 불린 보좌는 목소리마저 낮고, 갈라져 있어 어두울 때 대면하여 말을 듣고 있으면, 절로 오싹할 정도였다.
“이보쇼, 갑판장.”
“예, 어사 나리!”
“갑판장의 죄가 가볍긴 하나, 무죄인 건 아니오.”
“암요, 그렇습니다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아니, 죽을죄는 아니라니까.”
붙잡혀 온 사내, 얼마 전에 풍랑에 난파한 선단에서 살아온 선원들 중 갑판장이었던 사내는 아예 땅바닥에 부복하여 죄를 빌었다.
“어쨌든 오늘 수사에 적극 협조한 만큼, 갑판장의 죄는 묵인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두 가지 약속을 해 줘야겠어. 하나는 오늘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발설하지 말아야 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티도 내면 안 되고. 무슨 말인지 알았소?”
“예예!”
“그리고 또 하나는 차후에 우리가 재판에 증인으로 호출하면 반드시 출두해야 하는 거야.”
“재판이요? 제 죄는 묵인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증인으로 부른다고, 당신 죄를 심판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 예예.”
갑판장이 연신 굽실거리자, 선구 옆에 가만히 있던 동채는 다른 보좌에게 턱짓을 하였다.
그러자 여인임에 틀림없는 보좌가 갑판장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곤 무언가를 건네며 말하였다.
“이걸 받으세요. 만약 당신이 의심을 받아 위험에 처하면 집문 앞에 걸어 두세요. 그리하면 세 시진 안에 우리가 찾아갈 겁니다.”
“제, 제가 위험에 처하면요?”
갑판장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고, 그의 손에 쥐어진 걸 보았다. 그저 붉은 천에 불과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판장은 자신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말 자체가 두려웠다.
그저 육 부장의 개인적인 비리에 대한 조사였지 않았던가.
아무렴 육 부장이 그의 비리를 입막음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까.
“의례적인 겁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죠.”
“아, 예. 알겠습니다.”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달리 더 캐물을 수도 없었기에 갑판장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고맙다 말할 뿐이었다.
잠시 후, 한 보좌가 그를 데리고 안가를 벗어나자, 선구와 동채는 다른 보좌들과 함께 안가 안에서 회의를 하였다.
“일단 비위 하나는 더 확보했군. 여기서 덮칠까? 지금까지만 해도 그 육관하라는 놈하고, 조필리 이사 놈 정도는 확실히 조질 수 있잖아.”
“…….”
한데 선구의 의견에 동채는 물론, 다른 보좌들도 딱히 동의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역시 더 윗선이 있을 것 같지?”
“다른 것도 아니고, 화약을 빼돌린 놈들이야. 조필리 이사라는 자가 화약을 처분할 정도의 능력은 없잖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다시 말하지만 화약이야. 뭔가 확실한 선이 있어야 건드릴 수 있는 거라고.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면 이사직에 오를 수도 없었을 거고.”
동채의 짐작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윗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는 거야. 그거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화약이 정말 사라질 수도 있어. 지금 덮친다면 꼬리만 잡겠지만, 적어도 화약이 새나가는 건 막을 수 있겠지.”
“…….”
선구가 우려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겠지만, 반대로 너무 기다리다가 자칫 대어가 먹이만 채어 도망칠 여지를 줄 수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탐라공께 이쯤에서 보고하고 명을 기다리는 게 낫지 않나 싶네.”
동채의 말에 선구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문제라면 자신들끼리 끝까지 해결하려 했겠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도 아니고 화약의 유출이 걸린 일이었다.
“동의하지. 다른 의견 있나?”
선구가 진지하게 말하며, 보좌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이견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