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92)
탐라 조정 중에 체관부는 건설, 교통, 통신과 같은 중요한 분야를 일괄 관장하는 만큼 매우 중요한 관부였다.
다만, 건설과 교통이 두드러지는 것에 비해, 통신은 아직 그 체계가 정립되지는 않았는데, 유무선 통신이 없는 상황에서의 통신은 어차피 우편물의 운반이 모든 것이라, 수송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통신은 다른 물산을 수송하는 중에 서찰을 곁다리로 끼어 운반하는 수준이랄까.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우편 물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탓이었다.
우편 물량이 많아지려면 민간 분야의 활동량이 증가되어야 하고, 이는 결국 백성들의 산업, 상업적 활동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아무래도 아직 탐라국은 ‘정부’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탐라 상단이 크게 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탐라공이 수장인 상단인 터라, 어차피 관부의 활동이나 마찬가지고, 다들 알아서 우편 수송의 대부분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여, 체관부 산하 체신청은 초창기에는 비교적 한가한 관청이었다.
그저 물동 중에 장계와 녹계 등의 우편물이 제대로 운반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거의 모든 임무였으니까.
한데, 그렇게 한가하던 체신청이었지만, 대략 일 년 전부터는 조금은 더 바빠졌다.
우편물만 따로 운반하는 체계를 시험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왜국의 무라카미 수군에게 먼저 보급되던 ‘해사(海蛇)’급 노함 열 척을 받아 우편물의 운반을 책임지게 된 것이었다.
홍로급 경함선이 아닌 해사급 노함이 배치된 건 노부를 부리는 만큼 바람의 영향에 따라 운송 시간이 좌지우지되는 걸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도 우편 체계가 확립되진 않아서, 내륙에서의 운반은 여전히 일선 관부나 수령이 책임지거나 혹은 내류 회사의 운송에 맡겨졌다.
그래도 체신청 자체가 엄청나게 커진 셈이었는데, 노부가 많이 필요한 해사가 열 척이면 1천 명가량의 인원이 체신청에 배속된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여유롭던 체신청 관리들은 그 인원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관부의 관리들 못지 않게 바빠진 것이다.
체신청은 탐라공의 명에 따라, 해사 열 척으로 탐라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수송망을 세웠고, 시험 운항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오히려 운반이 느려지거나 우편물을 잃어버리는 등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탐라섬과 다른 지역을 오가는 우편물은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정기적으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음?”
체신청 본청 관리인 장하는 무심코 장계를 확인하다가 멈칫했다.
다른 여러 지역에서 탐라섬 본청으로 온 우편물은 ‘전상(前上)’, ‘귀달(貴達)’, ‘평편(平便)’으로 분류되는데, 전상은 탐라공께 직접 올려야 할 우편물이고, 귀달은 관부의 대관들에게 가야 할 우편물이며, 평편은 관부의 실무관리에게 전해야 할 우편물이었다.
귀달이나 평편은 체신청의 6급 행정부관이나 서리들이 담당하고, 전상은 5급 행정관인 그가 담당하였는데, 전상해야 하는 우편물의 대부분은 당연히 장계였다.
장계는 그 표면에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일반적인 장계에는 ‘관(官)’이 찍혀 있고, 군부에서 보낸 장계는 ‘군(軍)’이라 찍혀 있는 식이었다.
만약 지급하여 전상해야 할 장계라면, 붉은 인장이었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검은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붉은 인장이라고 해도 특별히 빨리, 그러니까 따로 배를 띄워 운송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륙에서 곧바로 체관부 소속 해사 노함이 정거하는 포구로 빨리 이동시키고, ‘시스템’상 우편물을 묶이는 시간을 최대로 줄이는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만 해도 일반 우편물에 비하면 하루 이틀, 동금주같이 먼 곳이라면 사나흘은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체계상 검은 인장과 붉은 인장이 뒤섞여 도착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장하가 붉은 인장의 장계를 보고 멈칫한 건 지급을 요하는 붉은 인장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붉은색으로 찍힌 인장의 글자가 ‘어(御)’라는 점이었다.
‘‘御’? 이게 뭐더라…….’
일곱 달 전에 전임 관리로부터 인수인계 받을 때를 떠올려 보았지만, 선뜻 기억나지 않았다.
반년이 넘게 셀 수 없이 많은 장계를 처리하면서도 ‘어’ 자 인장이 찍힌 장계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의 직무에 관해 적은 책자를 찾아보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일은 참으로 쉽네. 자네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 근데 딱 하나는 분명히 명심해 두게. 붉은색 ‘어’ 자가 찍힌 장계. 그게 자네 손에 들어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곧바로 탐라공께 뛰어가게. 절차 따위는 필요 없어. 지급이라고 외치면서 그 붉은 ‘어’ 자를 앞세우고 탐라공께 달려가란 말이야. 허허, 너무 걱정 말게. 어차피 거의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나도 못 봤거든. 그 장계를 보내는 놈들도 대개는 그냥 관자 장계를 보내니까 말이야.”
“……!”
장하는 그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뒤를 돌아 붉은 어자 장계를 들고 달려 나갔다.
‘이런 빌어먹을! 붉은 어자라면 애초에 무조건 단독 운송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체 어쩌자고 다른 것이랑 뒤섞여 온 게야!’
공택으로 달리는 장하는 속으로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한 자들을 욕하면서, 그를 막으려는 호위군병 앞에 붉은 어자 장계를 들어 보이며 외쳤다.
“전상 지급이요!”
* * *
몽주가 붉은 ‘어’ 자의 장계를 받은 건 선상이었다.
구주로 떠나기 직전에 체신청 관리가 비서원 관리와 함께 포구로 달려와 그 장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꽤 급했는지 체신청 관리가 장계를 올리고 물러나자마자 포구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대는 사이에 몽주는 그 장계를 서둘러 확인하였다.
그것은 전라도 어사들이 보낸 장계로, 비리를 수사하는 중에 화약 횡령을 기도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곧바로 추포할지, 아니면 ‘몸통’을 확실히 잡기 위해 수사를 계속 진행할지를 묻고 있었다.
분명 붉은 ‘어’ 자의 장계를 보낼 만큼 대단한 위중한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장계를 두 번 읽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몽주는 나직하게 말하였다.
“출항을 연기하라.”
떠날 태세를 다 마쳤던 배가 다시 돛을 내렸고, 몽주는 널판을 통해 부두로 내려가서는 그가 타고 왔던 마차에 다시 올라 관부로 향했다.
마차 위에서 눈을 감은 몽주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구주로 떠난 줄 알았던 탐라공이 되돌아오자,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대신들은 긴장하였다.
예정된 출항을 미룰 만큼의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였고, 이는 곧 탐라공이 그들을 호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반 시진쯤 뒤에 임시로 총무회의가 열린다는 알자의 연락이 있었다.
대신들은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몽주가 회의에 참석하기에 앞서 피치 못해 참석할 수 없는 대신들을 제외한 전원이 회의에 참석하자, 비서원 관리가 붉은 ‘어’ 자의 장계를 회람케 하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모두들 화약 횡령이라는 말에 경악하고 있을 때, 몽주가 회의실에 들어와 자리하였다.
“상황은 파악되었을 터이니,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겠소. 그 장계에는 큰 문제가 두 가지 담겨 있었네.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겠나?”
“…….”
쉬이 답하는 대신들은 없었다.
상단의 ‘잔챙이’가 개인 비리를 저지른 걸 큰 문제라고 하진 않으실 터, 그러면 장계에서 찾을 수 있는 큰 문제는 화약 횡령뿐인 듯한데, 탐라공께서 두 가지라 하니 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는 다들 짐작하듯 감히 화약을 빼돌리고자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배가 수적들에게 강탈당했다는 것이지.”
몽주가 길게 끌지 않고 답을 말하자, 대신들이 그렇구나 싶으면서도 그것이 화약 횡령과 나란히 둘만큼 큰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분위기를 안 몽주는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천 년도 전에 중국은 혼란하기 그지없었지. 당시 사마씨의 진나라는 망국의 길 위에 있었고, 온 천지에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네. 그중에 손은이라는 자가 이끄는 민란이 있었는데, 그들은 장강 일대를 석권하고 장강을 통해 주변 귀족과 권세가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날렸고, 10년이 넘도록 승승장구했지.”
뜬금없이 오래전 중원의 역사 중 한 자락을 꺼내 들자, 대신들은 그 이야기에 담긴 뜻을 깨닫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다만, 내관대신과 교관대신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린 기색을 보이며 깨달음과 걱정의 시선을 나누었다.
“사실 처음 손은에게는 고작 1백의 병력뿐이었다네. 민란을 계획하던 중에 탄로가 나는 바람에 그들만 추려 장강의 어느 섬으로 도주한 것이지. 한데, 고작 1년 만에 손은은 엄청난 수의 병력으로 장강 일대의 귀족들을 척살하였네. 뭐, 어차피 내버려 둬도 천지사방에서 민란이 터지는 중이니, 세력을 규합하기 용이할 수도 있었을 테지. 한데, 아무리 그래도 1년은 너무 짧지. 그것도 고작 1백의 수하만을 추슬러 섬으로 도망간 손은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말이야.”
몽주의 말에 대신들은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1년 만에 사실상 빈손이었던 자가 귀족들을 척살할 만큼 세력을 키운 방도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궁금한 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주군의 의도였고, 아직 그 의도를 가늠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사실 간단하네. 손은은 수적이 되었거든. 살아남기 위해 귀족의 상선을 털었고, 그 소문이 퍼졌지. 귀족의 배를 털면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은 사정이 급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일확천금을 얻을 기회처럼 들렸겠지. 그러자 수적은 나날이 늘어났고, 먼저 수적질을 했던 손은은 그들을 포섭하여 휘하로 두었소. 세력의 확장 속도는 엄청났지. 먼저 식량을 나눠 줘야 할 필요도, 무슨 대의명분을 내세워 설득할 필요도 없었겠지. 나를 따르면 귀족의 배를 털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장강 주변의 수많은 농민들이 손은에게 귀의했다네. 실제로 그는 귀족의 배를 털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비단 수적질만이 아니라 정복에까지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네.”
몽주의 ‘옛날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대신들 모두가 또 다른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면, 탐라의 배를 턴 자들이 또 다른 손은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점녀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몽주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명나라가 건재하니, 또 다른 손은이 등장하긴 어렵겠지. 하나, 그 수적 놈들이 일확천금을 자랑하면 그것에 눈이 먼 자들이 새로이 등장하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이 가능하지 않겠나. 그리고 한 번 수적질에 맛들인 자들이 역시 다시 바다로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고.”
“…….”
수적질을 당한 방사회사의 선단이 입은 물적 피해는 탐라국 전체에 비하면 표도 안 날 정도였고, 탐라 상단으로 줄여 비교해도 마찬가지였으며, 방사회사 하나만 두고 봐도, 빠른 시일에 복구가 가능한 정도에 불과했다.
하나, 일개 백성들, 빈곤으로 수적질을 작당할 만큼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재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 금은만 해도 일백 명이 십여 년은 먹고살 만할 터이니까.
“하나, 이번 경우는 수적 놈들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필 무장되지 못한 배였으니까요.”
탁기는 탐라의 배가 그것이 군함이든 상선이든, 한낱 수적 떼의 먹잇감으로 보일 수 있다는 자체를 인정하기 싫은 듯했다.
“맞는 말이네. 문제는 그 행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는 게지. 앞서 말한 손은의 수적질을 따라 한 자들이 모두 성공했을까? 수적이 등장했다고는 소문에 귀족들도 방도를 세웠을 터인데?”
그럼에도 수적질로 팔자를 고친 자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자들에게는 그것이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해적 지망생’들은 결국 손은의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몽주가 말한 손은(孫恩)은 최초의 해적, 적어도 동양권에서는 최초라 일컬어지는 자였다.
현대에서는 그의 세력 성장에 대해 자세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고려에서 구한 중국의 서적에서는 손은의 이야기가 언급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다.
민란에 대한 예, 그 들불같이 퍼져 나가는 기세에 대한 예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게 바로 손은이었다.
어쨌든 작금 명나라의 상황에서 민란은 어렵겠지만, 바다로 나와 탐라의 배를 노릴 만한 유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절대 허황된 예상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대개가 탐라 상단의 선박일 터이니, 내가 따로 상단에 주의하라 명할 것이나, 혹여 간이 부을 대로 부은 자가 탐라 관부의 배마저 노릴 수도 있으니, 마땅히 대비토록 하게. 그저 화포가 있다고 마음 놓다가 당하는 일이 없도록.”
“염려 마십시오. 절대 당하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탁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였지만, 몽주의 당부는 끝이 아니었다.
“차 대신.”
“예, 주군.”
“명국에 좀 다녀오게. 명 조정에 수적질이 있었음을 알리고, 그 대책을 강력히 요구하게. 나는 가급적이면 우리 손으로 직접 그 수적 놈들을 잡아내고 싶네만, 명국이 그것을 허락할 것 같진 않군. 그러니 적어도 그들이 수적을 잡겠다는 약속만큼은 받아 와야 하네.”
타국이 자국에서 수사하고 추포하는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특히 명나라라면 기대하는 게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수적을 잡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해도 적극적으로 움직여 줄 가능성도 낮았다.
몽주가 바라는 건 그저 그 수적들을 잡는다는 명나라의 ‘액션’일 뿐이었다.
아주 약간이겠지만, 굶주릴 뿐 그저 평범한 농민들이 너도나도 수적이 되고자 하는 흐름의 발목을 잡아 주는 역할 정도는 할 것이다.
“그리고 화약을 횡령하는 자들은…….”
몽주가 화약을 언급하자, 대신들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수적들이 출몰한다는 건 장래의 예상이었고, 어찌 보면 기우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지만, 화약 횡령은 이미 진행 중인 문제이었다.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을 느낀 몽주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미를 돌려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전에 먼저 이 말을 하고 싶군. 비위를 단속하는 것도 장사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
화약을 언급하는 듯하다가 전혀 맥락 없는 것 같은 말이 나오자, 대신들이 당황하는데 상관대신이 무슨 생각이 든 듯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비위를 단속하는 것도 남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더 자세히 말해 볼 수 있겠나?”
“음, 장사는 결국 들이는 돈보다 버는 돈이 많아야 하는 법이니……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는 자를 잡는 데 드는 비용이 비리나 부정으로 생기는 손해보다 적어야 한다는 말씀인 듯합니다만.”
“대략 맞네. 10원의 비위를 저지른 자를 잡기 위해 천금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잡지 않는 게 낫다는 말이지. 물론!”
몽주는 포은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무어라 반론할 기색을 보이자, 서둘러 부연하였다.
“비위 단속의 가치는 비단 금전적으로만 따질 수는 없겠지. 작은 도둑이 결국 큰 도둑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청렴한 이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비위(非違)자들은 결국 잡힌다는 걸 보여 줘야겠지. 다만, 미미한 비위자들을 모조리 곧장 잡아내려 한다면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에 득보다 실이 크다는 말이네. 때문에 내가 택한 건 그런 비위자들을 하나씩 차근히 잡아들이는 것이야. 몇 년 동안 비위를 저질러 얻은 축부는 그때 털어 내면 되고. 청렴한 자들이 부패한 자들을 보며 자신이 바보 같다고 여기는 대신, 저놈이 지금은 떵떵대지만, 언제고 분명히 망한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지.”
몽주가 말하는 건 부정부패에 대한 행동경제학적 시각이었다. 부정부패를 막는다는 건 곧 부정부패의 ‘전염성’을 막는다는 것이고, 그에 대한 행동경제학적 방책은 간단했다.
‘확실히 조져라. 골고루.’
비리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함께 특정 관부나 파벌에 속하면 절대 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어사들을 부리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네.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그들에게 어떤 권한을 쥐어 주었는지 정도는 알 테고.”
몽주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대신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말 그대로 알고는 있지만, 주군이 ‘사정(司正)의 칼날’을 직접 언급하자, 마치 조건부 협박처럼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사들의 조사에 내린 몇 안 되는 지시 사항들 중 하나가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것이었네. 그저 쉬엄쉬엄 여기저기 돌아가며 한 놈씩 잡아내라는 거였지.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고.”
몽주는 긴장 가득한 회의실 분위기에 피식 웃었다.
“긴장할 필요 있는가? 내가 알기로는 아직 이중에 내 앞에서 긴장할 만큼 비위를 저지른 사람은 없는데.”
대신들 중에도 비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지른 자들이 있긴 있었다.
그 몇몇 사례는 몽주도 알고 있었으니, 사탕 몇 자루, 유리 몇 장 정도를 사사로이 빼돌려 쓰거나 남은 예산 중 일부를 누락시켜 착복하는 정도였다.
아주 예전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수준의 부패 행위.
아니, 그 정도는 탐라국이 아니었다면 부패라는 인식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단순 기록 수준에도 못 미쳤던 재무제표를 대차대조표 흉내라도 내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덕에, 그리고 관부와 관리를 분리한 덕에, 자기 호주머니와 나라의 것에 대한 구별이라도 생겼고, 나랏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게 부패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물론, 본래도 청렴이라는 개념이야 있었지만…….
“나는 청백리를 바라지 않네. 만인이 부러워하는 권력에 돈까지 쥐었는데, 그저 안빈낙도가 이상이라고 말하는 위선은 필요 없다는 말일세. 청렴은 내게 하나의 능력일 뿐이지. 다만, 좀 중요한 능력이긴 하지만…… 어쨌든 만약 전혀 청렴하지 않더라도, 그게 무색할 정도로 다른 분야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면 나는 계속 그 사람을 품을 것이네. 한데,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청렴한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야 일하다 실수 좀 해도 내게 봐 달라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아니겠나?”
몽주의 말투는 마무리쯤에는 반쯤 농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불그레해진 얼굴색으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신들을 보며, 몽주는 예전에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부정부패 방지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부정부패를 일절 용납할 수 없는 문화를 만들자는 이상적인 이야기로 시작된 그 이야기의 마무리는 경제학적으로 관리된 부정부패라는 현실적인 대처였다.
뿌리 뽑을 수 없다면, 차라리 현명하게 관리하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니, 그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멍청하고, 욕심이 과한 자들을 쏙쏙 뽑아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자, 사실 지금 대신들을 불러 모은 건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네. 내 생각을 밝혀야, 대신들도 장차 휘하에 대한 사정(司正)과 감독을 어찌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겠는가? 뭐,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해야겠지. 화약 횡령 같이 미친 짓을 하는 간덩이 부은, 제 딴에는 꽤 위세 부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머저리들을 어찌 잡아야 하겠나? 그런 놈들은 잡는 데 드는 비용도 클 터인데 말이야.”
“…….”
당장 대신들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숙제로 드리지. 가장 먼저 그럴싸한 방안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상을 줄 터이니, 모두들 심사숙고해 보게나.”
“……?”
이제 화약 횡령에 대한 대책을 논할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숙제만 받은 대신들은 몽주가 정말 회의를 마무리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당황스러움이 더욱 커졌다.
“농담 아닐세. 숙제이니, 열심히 강구해 보도록.”
어정쩡하게 주군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대신들을 뒤로하며 회의실을 떠난 몽주는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비서원 관리에게 지필묵을 가져오게 명하였다.
그러곤 전라도 어사들에게 사령을 담은 서찰을 써 내려갔으니, 그 마지막 문장은 아마도 어사들을 크게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남면 어딘가에 있을 사롱의 종도를 찾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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