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99)
“어디 섬에다 사람 둘 데려다 놓고 실험이라도 해 봐야 하나? 으으!”
도학생 증향이 백묵을 던져놓고 기지개를 펴며 투덜댔다.
“그래 봐야 그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결론이 나올 뿐이잖아요.”
“답답해서 해 본 말에 뭘 그리 진지하게 대꾸하냐.”
증향은 동행 증표를 타박하려다가 관뒀다.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건지…….”
어쩌다 이런 자리에 끼여 좋아하는 축국 구경도 못 가고 있는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증향은 그의 앞에 모여 있는 세 아이들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였지만, 사실 따져 보면 그가 ‘꼽사리’ 신세였다.
기술학교에서 천재라고 소문난 벼락공의 아우 몽건과 내관대신의 아들 종성, 그리고 마찬가지로 영특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그의 아우 증표에 비하면, 그는 평범한 수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몽건 도령이 무언가 공부를 하자며 부른 것도 그의 아우 증표였고, 자신은 아우를 따라 반쯤은 억지로 끼어든 셈이었다.
벼락공의 아우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면서.
어쨌든 그렇게 ‘모임’의 일원이 되긴 했는데, 그 모임이란 참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도학교 내에도 학문적인 명분을 세워 만든 모임이 여럿 있지만, 사실 반쯤은 친목과 유흥을 위한 모임인 것에 비해, 이 어린 녀석들의 모임은 정말 순수하게 학문에만 치중하였다.
게다가 공부하는 분야도 너무 애매한 것이었다. 경세제민이라니.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게 어디 한두 분야로 이룰 수 있으랴.
심지어 가장 중심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도 경세제민과 관련이 있는가 싶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아, 경세제민이 아니라 경제라고 했지.’
몽건 도령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경세제민과 경제는 다른 것이라 주장하며, 그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한참이나 설파한 바 있었는데, 증향의 귀에는 그저 동어반복처럼 들릴 뿐이었다.
마치 탐라국공과 탐라공은 다른 것이라 말하는 것 같았던 탓이다.
증향은 그러려니 하곤 나름 그 문제에 고민을 해 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동기가 부족한 탓인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모임이 몽건 도령이 만든 게 아니었다면, 나이를 무기로 삼아 다른 걸 공부하고 고민하자고 강요라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바로 관두거나.
“증향 학형.”
“네? 아, 응?”
문득 자신을 부른 몽건 도령에게 존대로 반응하다가, 편하게 하라는 말을 떠올리곤 평대로 고쳐 답하였다.
“이 문제는 탐라공께서 직접 내 주신 문제입니다.”
“……!”
“이것을 미리 밝히지 않은 건, 순수하게 학문적인 접근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굳이 사실을 밝힌 건 학형께는 아무래도 다른 동기가 더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
“계속 저희와 같이 하시겠습니까. 아니라면 더는 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몽건 도령이 담담한 어조와 눈빛에 증향은 움찔하였다. 대놓고 나가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타이르는 것 같기도 했다.
기세에 밀린 것 같아 다소 자존심이 상했지만, 증향은 다음 순간 지금 그들이 매달리고 있는 그 문제가 탐라공이 직접 내리신 문제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자존심을 굽히기로 했다.
“미안하네. 도무지 심의(深意)를 알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 모양일세.”
그 문제의 답을 알게 된다면 탐라공의 귀에 자신의 이름도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그로 하여금 인내를 발휘하게 만들었다.
경제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을 깨달은 지, 그리고 형님으로부터 경제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고 알쏭달쏭한 문제를 받은 지 두 달이 넘었다.
몽건은 함께 연구할 이들로 종성과 증표를 끌어들였다. 나이만 보자면 애들 장난같이 보일 수도 있었지만, 몽건은 낯선 경제에 관해서는 차라리 어려서 경험이 적고, 그저 영특하기만 한 것이 오히려 낫다 보았다.
다만, 어쩌다 보니 증표의 형 증향도 끼어들게 되었는데, 그를 받아들인 건 문제 풀이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증향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진실로 그 문제를 푼 것이라 여겼다고나 할까.
천재적인 머리가 셋이나 모였음에도 탐라공이 내준 ‘무인도의 노인과 청년’에 대한 문제 풀이는 지지부진하였다.
경제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그에 대한 개념부터 설명하고, 모자란 부분을 함께 논의하여 짜 맞추어야 했는데, 그 와중에 특히 합리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설정하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합리라는 말이야 이치에 합당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지만, 세상에 이치라 부르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개개인의 차이를 차치하더라도, 치자와 백성의 이치가 다르고, 학자와 상인의 이치가 다르고, 관인과 군인의 이치가 다른 법이다.
그 모든 이치를 아우르는 이치를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수준의 단순한 것이거나 생명은 모두 귀하다와 같이 피상적인 수준일 뿐이다.
하여, 몽건은 종성, 증표와 함께 경제에 쓰일 합리의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결과적으로 합리(合理)는 합리(合利)라 결론 지었다.
즉, 경제의 이치는 이득이라는 것으로, 경제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더 많은 이득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직 경세제민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진 경제이기에, 또 그들이 관찰할 수 있는 현실 경제의 모습을 보자면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기에, 그것이 맞는 것인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몽건은 다른 이들보다 자신 있게 경제의 합리를 주장하였다.
“애초에 형님께서 만행지론을 통해 상도를 널리 알리신 것은 경세제민의 핵심이 그것에 있다 여기신 것이 분명해. 상도라는 게 쉽게 보자면 결국 물산을 만들고, 옮기고, 파는 가운데 모든 이들이 이득을 얻는 것임을 감안하면 경제의 합리는 분명 옳음이야. 물론, 실제로 물산을 사고 파는 걸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걸 찾을 수 있지. 하나, 물산을 파는 자는 가급적 높은 값으로 팔기 원하고, 사는 자는 가급적 싼 값으로 사길 원하지. 그렇기에 합리는 현실을 외면한 가정이기보다, 왜곡된 현실에 흔들리지 않은 가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야.”
그렇게 차근히 개념을 정리해 가면서 탐라공이 내준 문제를 풀이하고자 하였는데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껏 정리한 경제는 수많은 이들이 생산과 매매에 임하는 것을 가정한 것인데, 탐라공의 문제는 고작 두 사람뿐이라는 점이 가장 난감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분명 청년과 노인은 상징이자 대표일 겁니다. 일을 잘하는 무리와 일을 잘 못하는 무리겠지요.”
거기까지는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하면, 물고기를 잡는 일과 집을 짓고 유지하는 일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식량 생산과 건축?”
증향의 단순한 대답에 아우 증표가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고, 종성은 시선을 돌려 외면하였다.
다만, 몽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대답을 받아주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물고기를 잡는 건 그냥 물고기를 잡는 거고, 집을 집는 건 그냥 집을 짓는 겁니다. 달리 상징이거나 대표로 삼은 게 아닐 수 있지요.”
그렇게 말하니, 종성이 물었다.
“하면, 굳이 탐라공께서 그 두 일을 꼬집어 상정하신 이유는 뭘까요?”
“그냥 택하신 거 아닐까. 사냥을 하는 일과 옷을 기워 만드는 일로 바꾸어도 되는……. 그러니까 중요한 건 무슨 일들을 한다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일을 나눠서 해야 한다는 게 초점이란 말이지.”
“음…….”
몽건의 대답을 들은 종성은 문득 침음을 흘리며 뭔가 고심하더니 말하였다.
“하면, 결국은 교환의 필요성을 가정하신 거군요.”
“교환? 아…….”
몽건과 종성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동시에 깨달음이 있었다.
“청년과 노인은…….”
“…나라인 거죠!”
그러자 증표도 깨달았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면 교환은 교역이겠군요!”
“그렇지! 하면, 지금 탐라공께서 교역하시는 양상을 거꾸로 생각하면 답이 나오겠지?”
“…….”
세 아이들이 서로 깨달음을 나누며 좋아라 하는 동안 증향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몽건, 종성, 그리고 증표가 생산과 교역의 ‘우위’라는 개념을 깨닫고 정리한 것을 증향이 깨우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 * *
“여기 계셨군요.”
그 목소리에 내관대신 포은과 교관대신 홍길도가 고개를 돌리니, 예상대로 재관대신 점녀가 있었다.
“식사 후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었소.”
그곳은 청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다점들 중 한 곳이었다.
“저도 차 한 잔 마시러 왔습니다. 합석해도 될까요.”
“청하는 바이오.”
차를 주문하고 포은, 길도와 함께 자리한 점녀의 표정에는 수심이 얼핏 보였다.
“무슨 걱정이 있으시오?”
“걱정까지는 아닙니다만…….”
포은의 물음에 말문을 열었던 점녀는 주문한 차가 나오자, 한 모금 넘긴 뒤 말을 이었다.
“그 숙제 때문에 고민이 있습니다.”
“숙제? 아…….”
전에 탐라공께서 화약을 착복하려는 자들의 농간을 알고 대신들에게 그에 관한 말하다가 비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라며 숙제를 내준 일이 있었다.
다만, 이후 범인들이 잡히고 탐라공께서 이주섬으로 가신 터라 다들 심각하게 숙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점녀의 물음에 포은과 길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숙제라곤 하지만, 주군께서 정말 방법이 요원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신 건 아닐 겁니다. 실제로 어사를 통해 그 일도 발본색원하셨지요. 어쩌면 어사대의 확대를 원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먼저 청하게 하시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우 길래와 길선으로부터 사롱의 숨겨진 기능에 대해 귀띔을 받은 바 있는 길도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어사대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다.
하나, 점녀는 달리 생각하는 게 있었다.
“저는 주군의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주군의 물음에 대한 답이고, 또 하나는 주군의 의도에 대한 답입니다.”
“주군의 의도요? 그 숙제에 주군께서 의도하신 게 있었소?”
포은은 점녀의 말 중에 후자에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점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먼저 전자에 대해 말하였다.
“비위는 결국 권세에서 나오고, 권세는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여러 가지겠으나, 결국은 돈입니다.”
“그렇지요.”
“하면, 돈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특히, 관부가 결탁하거나 직권이 연루된 사안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음, 그렇겠군요.”
“하면, 어사대와 다른,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관부를 두어 살피게 하면 효과적으로 비위를 감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포은과 길도는 점녀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탄복하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점녀가 그런 답을 구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재관부의 수장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모습에 점녀는 고소를 지으며 다시 말하였다.
“사실 제가 하는 일이 있어, 다른 관부에 관해서도 저절로 파악되는 게 있습니다.”
“허허, 이거 재관대신께 앞으로 더 잘 보여야겠군요.”
길도가 농으로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포은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다시 말을 꺼내었다.
“혹시 앞서 말한 주군의 의도가 재관대신이 지금 한 말과 관련이 있소?”
“네, 저는 다른 관부에 대해 절로 아는 게 있는데, 다른 관부는 그렇지 못하지요. 달리 말하면, 저를 감시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재관대신이야 주군께서 가장 믿는 분 중 한 분이시지 않으십니까.”
길도가 마치 위로하듯 말하자, 점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를 믿으시는 것과 재관대신을 믿는 건 다른 문제지요. 제가 남은 평생 동안 재관부를 담당할 리도 없고, 관부의 일을 단지 믿는 것만으로 맡겨 두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지요.”
이미 다들 알고 있듯, 재관대신 점녀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날이 커지는 나라 살림의 대개가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고, 마찬가지로 나날이 거대해지는 전당의 운영을 담당하는 전당청의 청장도 그녀에게 맡겨져 있었다.
한데, 거기에 나랏돈을 관리하면서 자신은 감춘 채 다른 관부의 사정에도 밝기까지 하다니, 확실히 한 사람에게 너무 큰 권한이 쥐어진 것이었다.
아무리 주군께서 재관대신을 믿고 있고, 재관대신 점녀가 그 믿음에 보답할 만한 인물이라고 해도, 제도적으로는 허점이라 부르기 충분했다.
만약 당장 점녀가 병환이 생겨 대신직에서 물러난다면, 그런 막대한 권한이 쥐어진 재관대신 자리에 누굴 놓을 수 있을 것이며, 그자를 점녀처럼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면, 주군께서 내주신 숙제라는 게 재관대신의 권한을 분리 축소하시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오?”
“그렇다 봅니다. 그리고 아마 비단 재관부뿐만 아니라, 너무 큰 권한을 가진 관부는 다 마찬가지겠지요.”
“너무 큰 권한이라…….”
“군관부가 그렇겠군요.”
길도가 군관부를 언급하자, 포은이 동의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군관부는 곧 군부이기도 했다. 군관대신이 탐라군의 총사령관이며 상장군이기 때문이다.
군관대신이 상장군직을 겸하도록 함으로써 군권을 독점하게 하는 게 아주 이례적인 일은 아니지만, 탐라군의 경우 고려군과 달리 무관계 고위직위가 임시직이 아님을 생각하면, 다분히 제도적인 허점이라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군관대신 또한 정해진 권한 이상으로 나랏일에 대해 정보를 구하거나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재관대신이 돈을 통해 그러하듯, 탐라 도처에 깔린 군병을 통해서.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꽤나 예민한 문제로군요.”
재관대신이야 먼저 말을 꺼냈으니 문제가 없다 쳐도, 군관대신에게 군권을 나누길 권한다는 건 자칫 반발을 일으키거나 반감을 사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탁기라면 순순히 대의에 교감하여 동의해 줄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기에, 똑같이 대신인 자들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어려웠다.
“내 생각에는 일단 재관대신이 먼저 재관부의 상황에 대해서만 주군께 청하는 게 나을 듯싶소. 재관대신이 자진하여 권한을 분리하겠다고 한다면 주군께서 비슷한 처지인 군관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시지 않겠소?”
“저도 그게 낫겠다 싶습니다.”
“하면, 어느 권한을 버리실 생각이시오? 역시나 재관대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게…….”
“전당청을 맡고 싶습니다.”
“……?”
점녀의 말에 포은과 길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점녀가 가진 권한은 그녀의 말대로 나누면 세 가지라 할 수 있는데, 나라살림을 맡는 재관대신, 전당을 담당하는 전당청장, 그리고 지금은 따로 지위가 없었지만, 숙제의 해답이 될, 돈의 흐름을 감시하는 자리가 그것이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 그 세 가지 권한 중 가장 권한이 떨어지는 자리는 돈의 흐름을 감시하는 자리였다.
돈의 흐름은 재관대신 또한 파악할 수 있고, 새로 그것을 감시하는 자리를 만든다고 해도, 그 정보를 독점하는 것만 막을 뿐,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점녀가 잡고 있는 권력의 백미는 재관대신의 자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점녀는 그 자리 대신 전당청장의 자리를 원했다.
전당청이 전당의 운영을 맡기에 상당한 돈을 쥐고 움직일 수 있는 자리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창고지기에 불과한 자리이기도 했다.
“저는 장차 전당이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관부가 될 것이라 봅니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나라살림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으로요.”
“……?”
“그거 아십니까? 얼마 전에 탐라 상단에서 20만 원을 전당에서 빌려갔습니다. 주군께서 연간 이자를 일분(10%)으로 하여 빌리게 하셨지요.”
“들은 바 있소.”
탐라 상단이 크게 번창함에 따라 투입할 여유 자금이 부족해지자, 전당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어차피 탐라상단의 주인도 주군이시고,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전당의 주인도 따져 보면 결국 주군이시기에 다들 그러려니 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전당에서 돈을 빌려갈 만한 곳이 탐라 상단 정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령을 떠올려 보십시오.”
“다른 장사치들도 돈을 빌릴 것이란 말입니까?”
길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양 물었다.
“그럴 것입니다. 아직 회사령이 제대로 통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백성들의 오해도 풀릴 테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자들이 장사나 생산을 위해 돈을 빌리고, 수많은 회사들이 생겨 돈을 유통시키는 날이 오면 전당이 얼마나 중요해지겠습니까? 전당이 얼마나 제대로 운영되는지에 따라 나라가 건실해지느냐 마느냐마저 달려 있게 될 것입니다.”
“…….”
점녀는 은근 신이 나는 양 말하였지만, 포은이나 길도로서는 동감하기 어려웠다.
탐라공으로부터 나름 ‘재정과 금융’에 대한 과외를 받은 바 있는 점녀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전당의 장래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잘은 모르겠지만, 주군께서 재관대신을 그토록 크게 믿으시는 이유를 이제야 진정으로 알게 된 것 같소.”
점녀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점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포은이었다.
* * *
전후 뒤처리는 매번 힘든 것이지만, 이주섬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였다.
동금주나 구주에서도 큰 싸움이 있었지만, 이주섬에서의 싸움이 가장 큰 것이었고, 동시에 가장 급박하게 진행된 탓이었다.
점령군을 유지하지도 않고 급한 처단을 마친 후에 곧바로 또 다른 적을 향해, 또 다른 점령을 향해 쾌속 전진한 만큼 뒤에 남겨둔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했다.
이주섬 남부 도처에 있는 중국인들의 고을로 흩어진 탐라군병들이 보낸 수많은 녹계에는 난장판이 된 중국인들의 삶에 대한 내용들이 녹아 있었지만, 너무나 바쁜 석삼에게는 그중에 들어 있는 숫자만이 보일 뿐이었고, 그 숫자들의 계산이 정확한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아, 좀 얄밉네.”
사국에 세운 군진 안에서 서류 작업에 정신이 없던 석삼은 근처 바다에 떠 있는 경함선에서 속 편하게 있을 주군이 원망스러웠다.
근처에라도 없으면 일을 좀 천천히 할 수도 있을 터인데,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웃전이 바로 옆에 있으니,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주군께서 이주섬에 남아 계신 게 공개된다면, 주군이 오히려 바빠지실 것이건만 공식적으로는 안 계시니 일은 모조리 석삼의 몫이었다.
“악명이 아니라 고됨을 미루신 거였……. 또 뭔가?”
투덜대는 중에 보좌가 새로이 두 건의 문서를 가져왔다. 살펴보니, 하나는 현 점령지의 북쪽에 있는 바부자 부족이 보낸 것으로, 그들의 지역으로 도주한 호안야 부족민들을 추포하여 보낼 수 있다는 내용이자, 그를 통해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집어치우라고 해.”
석삼은 그 서찰을 집어던졌다. 그가 보기에 탐라군이 주도하는 이상 이주섬의 원주민 특히 평포족들은 더 이상 중요 변수가 아니었다.
고산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바다를 봉쇄한 이상 평포족은 잡아 놓은 먹이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문건은 조금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아미스 부족, 루카이 부족, 파유마 부족이 연서하여 보낸 그 서찰에는 지금 탐라군이 점령한 지역이 그들의 몫이니, 약속대로 보상 협상을 서두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에 고산족들을 회유하면서 평포족을 쫓아낸 후 그들의 땅을 고산족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했고, 그 땅을 탐라국이 사들이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이행해 달라는 요구였다.
“아, 급하기도 하네.”
짜증 섞인 말투였지만, 그 서찰을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그 고산족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기 때문이다.
파이완 부족의 침략에 먼저 맞서느라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그 복구를 위해서라도 탐라국이 약속한 보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건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고…….”
그러면서 석삼은 그가 있는 군막의 밖을 살폈다.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는 시간이었다.
너무 자주 찾아오면 들통나니, 하루에 한 번 저녁 이후에만 오라는 명을 떠올리며, 석삼은 고산족들이 보낸 서찰을 옆에 두고 다른 문건을 다시 펼쳤다.
* * *
한 식경쯤 더 지난 후에야 석삼은 선실에 늘어져 잠을 자고 있는 몽주를 찾을 수 있었다.
“흐아암, 왔나? 음, 배가 고픈데, 밥이나 같이 먹지.”
“팔자가 참 좋으십니다요.”
“허허, 다 자네 덕이지.”
얼마 뒤, 몽주는 석삼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분위기는 어떤가?”
“지금이야 고분하죠.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원 파악은 언제쯤 끝낼 수 있을 것 같고?”
“탐 고을과 사국 고을은 많이 진행되었습니다만, 작은 고을들까지 다 마치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게다가, 다른 평포족이나 산중으로 도주한 자들도 꽤 되니까요.”
중국인 및 중국인과 결탁한 평포족들은 모두 노예로 삼고자 한 바, 40만이 넘는 그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건 꽤나 골치 아픈 일이었다.
“청장년 남성부터 파악하게. 그들부터 노예로 삼고, 그들을 통해 확인받아 그 가족들을 파악하는 거지. 같이 지낼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면, 협조해 줄 걸세.”
“예, 이미 그리하고 있습니다.”
노예로 삼되, 가족 단위로 함께 있을 수 있게 한 건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청장년 노예들이 섣불리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반항심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식사하는 중에도 이야기는 계속 오갔고, 추산치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사망자 수나, 부상자 및 손목이 잘리는 벌을 받은 자들의 치료 상황, 그리고 현재 식량 상황 및 배급 상황에 대한 이야기 끝에 석삼은 고산족들이 보낸 서찰에 대해 보고했다.
“일단 그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알려 주게. 식량, 무기, 철, 노예 같은 거 말이야. 그러면 그중에서 뭘 얼마나 요구하는지 답이 오겠지.”
“고산족에게 보내지는 노예들은 꽤나 고생이 심할 겁니다.”
“어차피 악당이 된 거,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말게. 결국 조만간 다들 탐라의 백성이 될 자들이지 않나.”
밥을 가득 넣고 씹으며 몽주가 쉽게 말하자, 석삼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지금 상황이 일단락되면 고산족들도……?”
“아니, 고산족들에게 화포를 쏘고 싶진 않아.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흡수해야지. 안 그러면 이 섬 전체가 예비 반란자투성이가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석삼은 숟가락으로 크게 밥을 떠서 입에 가져가다가 멈칫하곤 웃으며 말하였다.
“과감하신 주군을 뵈니, 제가 기분이 다 좋습니다.”
“이미 저지른 일인데 어쩌겠나.”
몽주의 입가에 쓴웃음이 잠시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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