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
예전 부족장의 장남으로 시작할 때는 아예 말을 못 알아들었다.
동기화 후에도 알아듣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 만큼 현대 한국어와는 거리가 먼 언어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야에 들어온 방안 풍경이나 부모님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어딘가 익숙했다.
사극에 나올 법한 복장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선 시대는 아닌 것 같군.’
몽주는 잠시 눈을 감고 침착하게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동기화가 되었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이 본래 육신의 주인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진 않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머릿속에 데이터가 저장되었을 뿐이다. 그 데이터를 떠올리고, 활용하는 건 자신의 의지와 집중이 필요했다.
‘어디 보자, 아버지의 성함은 석해민(昔諧珉). 어머니는 엄주이(嚴株理).
그는 일단 부모님 두 분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떠올린 자신의 이름은 석몽린(昔夢麟). 17세이며, 남양 석씨의 3대손이자, 3대 독자였다.
‘남양 석씨?’
처음 듣는 성씨였다.
하기야 그가 아는 성씨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석씨라는 희소한 성씨면 더욱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3대손이라는 게 다소 걸리는군……. 게다가 3대 독자는 또 뭐람.’
“으음!”
“왜 그러느냐?! 또 어디가 아픈 게야?!”
여전히 몽린의 아버지 석해민은 작은 신음에도 기겁하며 하나뿐인 아들, 그러나 몽주가 대신하게 된 몽린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아니에요.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대체 왜 그랬느냐? 네가 신음할 때마다 내 심장이 두근거려 죽겠구나.”
“그게…… 아버님께서 절 너무 세게 안으셔서…….”
“으응? 아, 내가 그랬느냐? 이런…….”
몽주의 거짓말에 해민이 당황하며 살짝 떨어졌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해민에게 안기는 것이 다소 불편했으니까.
그제야 몽린의 어머니 주이가 다가오며 말문을 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네요. 자내(중세 부부간의 호칭)가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이제 그만 일어서세요. 우리 새끼가 깨긴 했지만, 아직 몸이 성치는 않으니, 조금 더 자게 두어야지.”
“아, 알았네.”
해민은 주이의 재촉에 몸을 일으키면서도 몇 번이나 몽주, 아니 몽린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미련 어린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오히려 몽린의 어머니는 쉬라는 한 마디만을 남길 뿐이었다.
부모님들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몽주는 여전히 누운 채 눈을 감고, 머릿속을 부유하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이맛살을 구겼다.
‘말을 나누는 게 어째 부부간 관계가 만만하다 싶었는데 역시 고려 시대였군. 근데 하필 왜 이 시기람.’
몽린의 기억 속엔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알 수 있는 아주 확실한 단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신돈이라는 이름이었다.
영공 신돈(令公 辛旽).
환속한 승려 출신이라는 정보도 기억 속에 있었으니 동명이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공민왕 시절이며, 고려 시대 말이라는 의미였다.
‘잠깐 생각해 보자…… 조선 건국이 1392년이고, 공민왕 다음에 우왕, 창왕, 그리고 공양왕이었지. 세 왕의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던 것 같으니, 넓게 잡아도 1350년에서 1380년 사이겠군.’
사실 고교 시절 역사 교과서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원래의 역사와 바뀐 역사가 뒤섞여 있었으니까. 덕분에 남들보다 힘들게 배워야 했고, 힘든 만큼 기억에 남은 게 꽤 있었다.
그 가닥으로 시기를 짚어 보긴 했는데, 사실 그가 이 시기에서 정확히 시점을 알고 있는 주요 사건은, 조선 건국과 그 전에 일어난 위화도 회군 정도였다.
‘공민왕이 1380년까지 재위하진 않았던 것 같긴 한데…….’
몽린이라는 녀석, 17살이나 되었으면서 시사에 별로 상식이 없었다.
해금(奚琴) 타는 게 특기이자 취미인 걸 보아하니, 음악이나 즐기는 한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보니 쓸 만한 정보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몽린이 태어난 이래 왕이 바뀐 적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공민왕이 재위한 지 적어도 17년은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십여 분 정도 지나자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왕비, 그러니까 그 유명한 노국 대장 공주가 이미 4년 전에 죽었고, 임금이 그 때문에 크게 슬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몇 년이라는 거지.’
여전히 그걸 모르겠다. 노국 공주의 사망했던 년도를 기억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공민왕 재위 기간이나 신돈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만 알고 있었어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1370년 안팎일 듯싶긴 한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군.’
그의 추측이 맞다면,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많아야 20여 년 남았다는 것이다.
하나 지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시기가 왜구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던 시절이라는 거지.’
망국의 기운이 감도는 나라의 면면에 당연히 좋은 게 있을 리가 없겠지만, 이 시기 왜구의 창궐은 어떻게든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려 했던 이들을 좌절시켰을 만큼 최악의 사건이었다.
왜구들은 한반도 해안가 전역은 물론,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왔고, 수도 개경마저 털릴 뻔한 적도 있었다. 아마 현대의 서울, 즉 한양도 몇 번 털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 근데 여긴 어디지?’
바로 답이 나왔다.
여기가 한양부였다.
그러니까 몽린의 가족은 먼 훗날 서울이 될 땅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위치나 지명은 모르겠지만, 한강 이북인 것은 분명했다.
‘그럼 왜구가……? 설마 당장은 아니겠지?’
찜찜했지만, 지금은 그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몽주는 계속 기억을 뒤지며 시대 상황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어릴 적 홍건적 때문에 세상이 난리가 났던 기억도 있었고, 최근에는 무도한 왜구 때문에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도 속속 떠올랐다.
최영과 이성계의 이름도 떠올랐다.
최영 장군이야 고려 최고의 장수로 기억에 남아 있었고, 이성계는 이제 막 떠오르는 신진 무장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이성계는 왜구를 무찌르고, 북원의 장수인 나하추의 침입을 막으면서 서서히 유명해지기 시작…….
‘아! 이제 알겠다, 지금이 언제인지.’
계속 국내 상황만 생각하다가 나하추를 떠올리고 북원을 이어서 생각하자, 곧바로 명이 작년에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명이 건국된 시기는 1368년.
그러니까 지금은 1369년이었다.
그가 배운 역사대로라면 이제 고려의 멸망까지 23년 남았고, 위화도 회군까지 19년 남은 시점이었다.
* * *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꾼다. 한 번 꿈을 꾸면 꿈속 시간으로 거의 두 달 정도 흐른다.
몽주는 예전의 꿈이 그러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판단했다.
어쨌든 새로운 꿈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몽주는 적어도 석몽린이라는 원래 인물이 아는 만큼은 시대적 상황을 파악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입춘이 막 지난 1369년 2월.
꿈속 시대에 호불호는 없었다. 그간 다시 기회를 얻을 경우에 대해 많이 상상해 왔고, 그 상상은 대부분 이전 꿈처럼 기원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긴 했지만, 고려 말이라고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냐는 것이고, 그건 여러모로 운에 달려 있었다.
여기서 장수한다고 해도 15세기, 즉 1400년대 중반에 불과할 테니, 21세기까지 5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현대에 끼칠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남게 하려면 어떤 면에서는 까마득한 기원전 시대보다 고려나 조선 시대가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니, 좋다 나쁘다 할 바는 아닌 것이다.
사실 아쉬운 게 있다면, 새로운 꿈속 인생의 시점보다는 몽린이라는 인물 자체였고, 그의 집안이었다.
석몽린의 아버지 석해민은 추대현이라는, 한양부 내 속현의 향리로, 호장(戶長)이나 장리(長吏)로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었다.
속현(屬縣)은 주현(主縣)에 대비되는 현으로, 고려에선 관리인 수령이 파견된 현이 주현이라 불렸고, 그렇지 않은 현들이 속현이었다.
이전 통일 신라나 후의 조선과 달리, 고려 시대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고, 향리들이 알아서 다스리는 현이 꽤 많았은데, 바로 추대현이 그런 속현이었고, 아버지 석해민이 바로 향리였던 것이다.
향리라는 말이 흔히 조선 시대의 이방 같은 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고려 시대에는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은 위치이긴 했다.
일종의 하급 관리이자, 현대로 치면 지방 공무원이었고, 석해민은 그중에서도 면장이 공석인 면의 면서기(面書記)인 셈이었다.
공식적인 부분만 따져도 예전 꿈속에서 부족장의 장남으로 시작해, 부족장으로서 철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게다가 속사정까지 생각하면 더욱 비교할 만한 배경이 아니었다.
사실 조부 석공수 때까지만 해도 석씨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이 없었다.
원래 벽란도에서 대대로 장사를 하던 집안이었는데, 몽골 침입 시기에 재산을 정리하고 피난 갔다가 고려 왕실이 항복한 후에 돌아온 조부 석공수는 이제 부원 세력의 세상임을 깨닫고, 부원배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왕실에서 발부한 공명첩을 대거 사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석씨 성을 하사 받고 한양부의 향리가 된 것이었다.
향리는 보통 그 지역의 토착 가문들이 담당하던 것이었지만, 대몽항쟁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 덕에 굴러 온 돌이었음에도 딱히 박힌 돌을 뽑을 필요 없이 순탄하게 정착할 수 있었다.
아마 주변의 같은 향리들과 그들의 가문에 뇌물을 잔뜩 뿌린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양부에 뿌리를 내리면서 아버지 석해민에 이르러선 향리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호장까지 차지할 정도가 되었지만, 결국 돈으로 산 지위에 불과했고, 고려의 권력층과 별 관계도 없는 집안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석씨 가문이 무척 부자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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