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01)
쌀농사의 비중이 크게 낮아진 탐라국에서도, 추수철은 연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황금빛 논에서 벼를 베고, 알곡을 터는 농부들이 바쁜 건 당연했고, 그렇게 얻은 잉여 쌀의 수매와 유통을 담당하는 탐라 관리와 탐라 상단원들도 손발을 쉴 수 없었다.
비단 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자들도 바빠지긴 매한가지로, 쌀 거래에 쓰인 화폐의 유동도 급증하여 전당이 분주해지고, 쌀을 팔아 얻은 돈으로 구매량도 증가하여 다른 물산의 유통과 소비 또한 급증했다.
한마디로 쌀을 비롯하여 모든 산품들의 유통과 거래량이 치솟는 시기인 것이다.
그 여파는 탐라국 최정점에 선 자에게도 미쳤으니, 탐라공의 앞으로 밀려오는 장계와 녹계의 양도 크게 늘어났다.
그 탓에 몽건이 탐라공의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도 그의 형은 책상 위에 가득한 문서 때문에 머리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잠깐만…….”
몽건의 인기척을 느낀 탐라공은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御) 자 장계를 마저 읽었다.
잠시 후, 그 장계에 무어라 필기하고 접은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아우를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냐? 요새 공부한다고 아주 바쁘다던데…….”
“그 때문에 왔습니다.”
몽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우에게 탁자 쪽으로 자리를 권하곤 자신도 아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공부하는 데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있느냐?”
“제게 그런 게 있겠습니까. 다만, 그저 열심히 궁리해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답답할 뿐이지요.”
“그러냐. 지난번에 종성이와 스친 적이 있는데, 그 아이가 몹시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큰 것을 깨달은 바 있다고 하던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서 답답함이 더 커졌습니다. 그 답답함을 해소할 답을 찾아보았지만, 서책에서 찾고 제 작은 머리로만 따지는 걸로는 더는 힘들 듯합니다. 하여,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여행? 머리를 식히자고 가려는 것 같지는 않고…….”
몽건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의 경제를 구경하고자 합니다.”
“아…….”
“경제라는 말은 처음이나, 이미 세상에는 경제가 널리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둘러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한 여행이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탁하러 온 것입니다.”
경제를 본다는 건 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정확한 통계와 계산 즉 숫자를 통해 가늠할 수 있는 것이 경제니까.
하여, 경제를 확인하러 여행을 간다 함은 그 경제의 수많은 주체들로부터 나온 ‘숫자’를 확인하러 간다는 의미였다.
예컨대, 탐라 내 여러 고을들과 탐라 상단 하 여러 회사들의 재정 및 교역 장부에 적힌 수치들을 말이다.
“그 요구가 얼마나 민감한 요구인지는 너도 짐작하겠지? 이 나라의 경제를 정말 면밀히 확인한 자가 있다면, 그자는 이 나라의 장단점까지 확인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그건 건강 진단서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부검을 옆에서 지켜본 정도일 것이다.
“저로서는 저를 믿어 달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물론, 믿지. 네가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그건 오히려 나와 탐라국을 위한 과잉충성에 가까웠고. 하나, 문제는 네가 홀로 여행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지난날의 잘못을 언급하자, 부끄러운 기색을 띠던 몽건은 형의 이어진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같이 공부하는 종성이와 증표라는 친구를 데려 갈 생각입니다. 증표의 형인 증향 학형은 주저하고 있어, 가급적 동행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몽주도 몽건이 같이 공부하고 있는 3인에 대해 들은 바 있었다.
“종성이야 나도 잘 아는 아이고, 포은 대신의 아들이니, 따로 더 살필 필요는 없겠지만, 증표라는 아이는 살펴봐야 모두 허락할 수 있겠구나.”
“증표도 이해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자세한 조사가 있을 것이고, 그 아이의 집안 전체가 조사 대상이 되겠지만, 아마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탐라공의 아우와 함께 중요한 일을 하러 떠난다는데, 집안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까.
“한데, 무엇을 얼마나 깨우치고 정리했기에 답사까지 나갈 생각이 든 게냐?”
“아직은 미진할 따름입니다. 물론, 형님께서 내주신 문제의 답은 찾은 듯합니다.”
“그래?”
몽주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자, 몽건이 약간 신이 난 표정으로 그가 파악한 ‘비교 우위’에 대해 설명하였다.
“훌륭하구나. 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야.”
몽주가 흐뭇해하며 칭찬하는데, 신이 난 듯했던 몽건의 표정에는 도리어 시무룩함이 더해졌다.
“한데, 그 문제의 어느 곳에서 형님의 심의를 찾아야 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일 따름입니다.”
“하하.”
몽주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깊은 뜻이 있었나 싶으면서도, 경제라는 개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비교 우위에 따른 교역에 의한 상생과 상호 의존은 정말 ‘깊은 뜻’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탓이다.
물론, 몽주가 일단 원하는 건 상생과 상호 의존 이전에 탐라의 헤게모니지만.
“그냥 내가 설명해 주는 건 어떻겠느냐?”
“…….”
혹한 마음이 몽건의 얼굴에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은 속 편하겠지만, 스스로 심의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저는 다시 의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저를 다시 경거망동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런 생각이라면 너를 위한 시간을 충분히 줘도 되겠구나. 음, 그래도 조언은 한마디 하마. 들어 주겠느냐?”
“청하는 바입니다.”
“크게 보고, 작은 것에 휘둘리지 말거라. 사람 하나하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름에도 언제나 조금씩, 때로는 많이 비합리적인 면모를 보여 왔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경제는 항상 합리적이거나 합리에 수렴한다. 참 재밌는 일이지. 알겠지만, 치자는 개개인의 하소연에 반응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전체를 아우를 때야 유의미한 경제는 치자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지.”
“…….”
몽건은 그의 형이 해 준 말을 암기하는 것처럼 입술을 들썩거리더니, 잠시 후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몽건을 비롯한 세 명의 십 대 소년들이 한 척의 경함선을 빌려 탐라를 떠난 건 스무 날 후였다.
* * *
휴일이라는 개념은 고려에도 존재했다. 하나, 별 의미는 없었다.
보름에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어 있지만, 그 휴일을 찾아 쓸 수 있는 자들, 예컨대 권문세가의 족속들은 어차피 매일을 휴일처럼 보낼 수 있었고, 직책이 있어 할 일이 있는 고위 관리들 정도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하급 관리 정도의 위치로는 휴일을 챙기기 곤란할 정도였으니, 일반 백성들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데, 탐라국에서는 그 휴일이라는 게 유의미해지고 있었다.
아직 법령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탐라공이 탐라상단의 주인으로서 휘하 회사에 ‘칠요휴(七曜休)’를 명했던 것이다.
즉, 탐라 상단의 전직원들은 일곱 날마다 하루씩 휴일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현대식 일주일 개념을 가져온 것이지만, 고려의 문화적 정서와 무관한 건 아니었다.
아니, 한주를 칠 일로 정한 것은 기독교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애초에 그것이 널리 통용된 건 다른 문화권에서도 ‘7일’이 매우 상징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수준 있는 문명권치고 해와 달, 그리고 육안관측이 가능한 다섯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중시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천문학적 지식이 종교적 상징과 세계관에 접목되는 당연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교나 도교에서는 그것을 ‘칠요(七曜)’ 신앙이라 불렀으니, 몽주가 그 신앙을 빌려 7일에 한번 쉬게 하고, 그 일곱 날을 한 주라 부르기로 한 것은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뭐, 정서적인 저항감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은 유지한 채 쉬는 날을 주겠다는데, 반대할 자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적 일주일과 다른 건 휴일이 한 주의 마지막이라는 점인데, 이건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탐라 상단의 회사들이 일제히 칠요휴 제도를 시행하자, 자연히 탐라국 전체가 칠요휴를 따르게 되었다.
그건 탐라공의 눈치를 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탐라국 내 탐라상단의 영향력 탓이었다.
탐라국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탐라상단과 연결됐으므로 탐라상단이 쉬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같이 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통 고학교 도학생 기숙소에서 공자를 모시는 데 열중하던 하륜이 처음으로 기숙소에서 먼 곳까지 홀로 나온 날도 휴일이었다.
도학생들이 견학을 떠나 이틀 후에나 돌아오게 된 덕에 그도 발이 묶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고학교 근처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지만, 그의 발걸음이 홍로현의 중심부로 향함에 따라 거리에 점점 많은 이들이 보였다.
그중 대개가 가족이거나 연인들이었으니, 말 그대로 놀러 나온 모습이었다.
하륜은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그가 탐라공과 사상이 맞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백성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게 기분 나쁠 리는 없었다.
아니, 더 솔직한 마음으로 하륜은 탐라공이야말로 가장 배울 게 많은 자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크게 보자면 단 하나만 다름이 있을 뿐이랄까.
‘탐라공은 더 강력한 왕권을 세워야 했다. 비단 탐라공국에서만 아니라, 고려 전체에서. 그리고 그 고려의 크기 또한 더욱 넓혔어야 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위선을 지적한 탐라공이야말로 그만의 위선에 빠져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 위선이 아니었다면, 탐라섬의 풍요로움은 줄어들었을지언정, 고려 백성 전체의 삶은 더 나아졌을 것이다.
‘지금 웃음 짓고 있는 저들에게 있어, 휴일이 없다고 해서, 옷가지 수가 조금 줄어든다고 해서, 끼니에 놓이는 반찬 수가 적어진다고 해서 행복이 사라질 것인가.’
하륜에게 백성들이란 안전과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행복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였다.
삶의 질을 높이는 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일 뿐, 치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신경 쓸 건 안전과 생존을 보장받는 백성들의 수를 최대로 늘이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탐라공은 자기 눈에 보이는 백성들에게 과한 선물을 주느라 다른 많은 고려 백성들을 외면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저 광경도 그렇지.’
수많은 백성들이 모인 곳 가운데 사롱의 악단 중 한 곳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낯선 곡조가 울려 퍼지고, 흥겨워하는 백성들의 콧소리가 뒤섞인 와중에 하륜의 귀에는 보이지 않는 먼 곳, 또 다른 고려의 백성들이 삶에 허덕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노을이 짙어질 무렵, 하륜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탐라 관부 청사였다.
십여 개의 2, 3층짜리 건물들이 놓인 곳 중 몇몇 곳은 일반 백성들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도서관이었다.
탐라국에 속한 인쇄소에서 내내 찍어 내는 책들뿐만 아니라, 고려 전역 나아가 명나라나 왜국에서 낸 책들도 들어와 놓인 곳으로, 신원만 명확하면 누구나 회람이 가능하고, 일부 책들은 대여도 가능했다.
그간 소문만 듣고 언제고 찾아가 봐야지 다짐했던 곳이었는데, 하륜은 커다란 삼 층 건물 안에 빼곡하게 책장이 놓여 있고, 그 책장마다 책들이 가득한 걸 보곤, 학자로서 절로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도서관이 크고 넓은 것에 비해, 이용자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는데, 탐라의 책값이 싼 편이고, 각 학교마다 따로 작은 도서관이 있어, 책을 읽을 만한 자들은 제각기 더 가기 편한 곳을 이용하기 때문인 듯했다.
어쨌든 덕분에 하륜은 요동 공자의 보좌 신분으로 회람을 허락받고 여유롭게 책을 구경하였다.
그러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으니, 포은 정몽주가 일행인 한 사내와 함께 창가에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하륜은 처음에는 포은의 시선에 들까 얼른 멀어졌지만, 먼 곳에서 힐끗 살필 수 있었던 포은의 표정을 보곤 문득 의아함이 생겼다.
표정이 밝은 것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 다양함이나 태도의 자유분방함은 지난날 그가 알고 있던 유자 포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륜은 내내 경흥에만 있었고, 쉬이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몸이었지만, 나름 요동 관계에 떠도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그중 포은에 대한 것들도 있었다.
포은이 탐라로 건너간 지 2년쯤 흘렀을 때, 요동국공이 관인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건 단지 더는 요동국의 관리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를 넘어, 아예 요동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포은이 다시 요동국에서 관리가 되길 희망하여도, 포은은 탐라국의 사람이기에 믿을 수 없다는 뜻인 것이다.
요동의 관리들 사이에서는 포은의 선택을 두고 여러 말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어리석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요동에서라면 가만히 있어도 문무 양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을 터인데, 괜히 유자를 높이 사지도 않는 탐라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그 후에 포은이 탐라의 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니, 상인, 군인, 장인 출신은 물론이고, 아예 도적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자와 함께 대신이 되었다 한들 제대로 뜻을 펼칠 수나 있겠느냐는 비웃음마저 남아 있었다.
물론, 탐라가 나날이 성장하여, 요동국의 관리들도 탐라를 부러워하고, 경계하게 되면서 그런 이야기는 점차 사라졌다.
하나, 그건 탐라공을 높이 사는 것일 뿐, 포은이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여기는 건 아니었다. 그저 줄을 잘 탔다 정도였을 뿐.
하륜은 요동의 관리들보다는 포은의 선택을 두둔하는 편이긴 했지만, 유자로 반평생을 산 포은이 탐라에 만족하리라곤 여기지 않았다.
한데, 지금 하륜의 눈에 비친 포은의 모습은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사는 이의 것이 아니었다.
동행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웃음을 보이기도 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까 거리에서 본 백성들의 행복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백성들이야 먹고 사는 것만 충족하면 행복하겠지만, 높은 지성을 가진 포은이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을 것임을 감안하면, 포은은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저 사내는 교관대신 길도였던가?’
포은을 살피던 하륜은 그와 동행하고 있는 자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그저 일개 하인으로 온 탐라가 아닌 터라, 알아 둬야 할 사안은 미리 알아 두었기에 곧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하륜은 천천히 서가를 빙빙 돌아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그사이 여러 번 눈치를 보니, 두 사람의 대화 주제가 뭔가 진지한 것으로 바뀌었는지 더는 웃음기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륜은 두 사람과 서가 하나를 사이에 둔 곳까지 다가가서는 등을 돌려 반대편 서가의 책을 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 전까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는 뜻밖에도 요동국이었다.
“……한글이 요동에까지 퍼지다니 신기한 일이군.”
“상인들 사이에 상문이라 하여 널리 쓰이니, 요동국의 상인들도 그것을 배운 게지요. 요사이 탐라의 한글책을 구매하길 청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하더군요.”
“우리로서는 좋으면 좋지, 나쁘진 않은 일 같군.”
“그렇습니다. 요동국도 고려니까요.”
그 말이 있은 직후, 포은과 길도 사이에 웃음이 잠시 흘렀다.
“요동의 그 공자는 요새 잘 지내나?”
“잘 지낸다 하더군요. 소문과는 달리 점잖은 면이 많은 모양입니다.”
점잖은 게 아니라, 요사이 방원 공자는 기가 다소 죽은 모습이었다.
탐라국의 사정이 요동국보다 좋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왔지만, 그 실상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차이라고 느낀 탓이었다.
얼마 전에는 정말 탐라국을 배우고 탐라공을 속일 수 있을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묻기도 했었다.
“별일이 없으면 국혼이 진행되겠군.”
“어지간한 별일이 있어도 진행되겠지요. 서로 원하는 게 있는 혼사 아닙니까?”
“한데 말이야, 만약 국혼이 성사되고, 서옥살이가 시작되면, 그때는 주군의 사위가 되는 거 아닌가? 그때는 그도 지금까진 출금하고 있는 지역에 출입할 수 있게 되지 않겠나?”
“어차피 갑종 보호 구역의 출입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저희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할 건 없지 않나.”
“뭐, 요청하면 곧바로 허가를 받을 수 있으니 그렇긴 하죠. 하나, 어쨌든 제도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걸 알려 주면 주군의 부마라 해도 감히 떼쓰진 못할 겁니다. 떼써 봐야 의심만 살 테니까요.”
탐라섬에 비관계자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 많은 건 탐라에 오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곳에 와서 출입 통제 구역에도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모두 3종으로 갑을병의 구분을 두고 있었다.
병종 보호 구역은 개별적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라, 사실 남의 집을 방문하는 정도의 어려움에 불과했다.
하나, 을종 보호 구역부터는 탐라군병이 관할하는 터라 하나 이상의 관부가 허가를 내주어야 방문이 가능했다. 그리고 갑종과 을종 보호 구역이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포은과 길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륜은 조금 움찔했는데, 공자와 함께 혼인이 성사된 후에 출입 통제 구역을 서서히 들어가 보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역시나 그 정도의 수작은 탐라 조정에서도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전 사실 명나라나 요동국이 우리 탐라의 기술이나 장인들을 훔쳐 가는 게 두려우면서도 반면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자들이 집권한 나라가 탐라의 기술과 장인들을 얻는다고 해도 제대로 쓰이리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죠.”
포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면이 있긴 하지. 하나, 다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생기는 법이지 않겠나. 지금 요동국의 양모 산업 또한 유자가 통치하는 나라임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 않나. 그러니 조심해야지.”
포은의 말에 하륜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길도의 말도, 포은의 말도 옳았기 때문이다.
하륜은 그쯤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겨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멀리 돌아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얼마 전에 방원 공자가 기가 죽어 그에게 하소연했을 때, 하륜은 자신이 공자에게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이때까지 하륜은 방원 공자와 무수히 많은 대화와 필담을 나누면서도, 주로 공자의 생각과 주장을 들어 주고,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인지시켜 주는 역할만을 해 왔는데,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배우고, 알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개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요동의 백성들이 탐라의 백성들보다 뒤떨어지진 않습니다. 오직 탐라공이 특별할 뿐이니, 탐라공이 아니라면 결국은 다 대동소이할 따름입니다. 탐라공은 분명 하늘이 내린 기재지요. 그렇기에 공자께서 탐라공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탐라공이 모든 면에서 만인에 앞서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공자께도 탐라공보다 나은 면이 분명 있습니다. 공자의 장점에서 앞장서고, 탐라공이 나은 부분은 본받아서 뒤를 따르면 되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탐라공이 요동국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테니까요. 뭐, 이는 탐라공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위로와 같은 그 말에도 공자는 요동국의 사정이 그가 활개를 펼치지 못하게 할 것을 두려워했다.
오남으로서 아직 요동국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건 차치하고, 하륜은 그 부분에서만큼은 방원 공자에게 즉답을 줄 수 있었다.
“유자가 없는 요동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명색이 이색의 제자였던 하륜이고, 지금도 유자로 여기는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공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생각에 잠겼고, 어느 순간부터 표정이 밝아졌다.
과거에 급제한 공자임을 생각하면 그도 유자라 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유자가 치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상상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탐라를 본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전제이자, 방도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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