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04)
* * *
육전용 모자소포를 탐라공에게 보였다가 실전성이 부족함을 크게 깨달았던 화극은 잠시 좌절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화포의 조종, 화포 만능 주의의 시조로 불리게 되는 화극이 소형 화포의 실전화에 집착한 것은 당연히 탐라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강.
단지 이겼다, 막았다 수준을 넘어,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군대야말로 최강이라 말할 수 있고, 그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탐라군에 붙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미 바다에서는 어느 정도 최강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비단 수전에서뿐만 아니라 육전에서도 최강이길 바란 화극에게 있어, 결국 관건은 명나라를 압도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도 대신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외관부나 탐라 상단을 통해 들어오는 명나라의 사정에 대해 알기에, 그건 대충 비교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지금의 탐라군이라면, 적어도 단기전, 국지전에서만큼은 이길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진정 최강이기 위해서는 상황에 무관하게 반드시 이기고, 일방적으로 승리해야 했다.
그리고 모자포나 개복포 외에도 모든 군병이 화포로 무장하여 싸울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문제는 군병 개인이 쓸 수 있는 화포는 필연적으로 작고 가벼워야 하는데, 그러면 천뢰탄을 탄환으로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저 날아가는 탄환의 질량이 가지는 힘만으로 적을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모자소포를 통해 위력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나, 어지간한 수준에서는 폭죽시가 더 위력적이고 쓰임새가 좋았으니, 군병 개인이 쓰는 화포의 개발은 쓸데없는 짓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다만,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개인 화포가 폭죽시보다 나은 점이 하나는 명백하게 존재했는데, 그것은 화포에 능숙해지는 데 필요한 시간과 훈련량이 폭죽시에 능숙해지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적다는 것이었다.
그 명백한 장점은 순위군과 같이 비정규적이고, 예비적인 전력을 빠르게 훈련시켜 동원할 수 있게 만들 것이고, 나라의 규모에 비해 훨씬 더 막대한 군력을 갖추는 첩경이었다.
하여, 화극은 그만의 고민과 은근슬쩍 주군께 여쭈어 얻은 답으로 개인 화포가 갖춰야 할 기능과 위력의 기준을 정한 후, 소수의 군기청 장인들과 함께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연구를 시작하였다.
먼저 화극이 설정한, 소형 화포가 가져야 할 위력의 기준은 경쟁 무기인 폭죽시의 위력이었다.
폭죽시를 일 회 사격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과 가장 이상적인 피해 상황을 개량적으로 측정하였으니, 오분촌각(약 20초) 내 사격하여 10명을 사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매번 오분촌각 내 다음 사격을 완료하고, 그 폭죽시를 통해 적 열 명을 죽거나 다치게 만드는 사수가 있다면 진정 하늘이 내린 명사수일 것이다.
하나, 화극은 일부러라도 위력의 기준을 다소 높여 정하였으니, 적어도 그 기준은 달성해야 소형 화포의 양산과 전력화를 마음껏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폭죽시의 위력을 개인 화포로 전환하여 따져 보며, 폭죽시의 사정거리 이상의 유효 사거리를 가지면서 오분촌각 내 약 10회 방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로 하였다.
위력 외에 중요하게 여긴 기준으로 몇 가지 기능도 설정했는데, 하나는 조작과 방포가 용이하여 엎드리거나, 웅크려서 방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방포할 때가 아니라도 무기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우천 시에도 방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정한 위력과 기능을 만족하는 개인 화포를 만들 수 있다면, 폭죽시에 비해 월등한 무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사실 한동안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기존의 모자포 형태로는 방포 자세의 용이성 정도만 달성할 수 있을 뿐, 그 외 위력이나 기능면에서는 한계가 역력했다.
하여, 방포를 위한 기초 설계부터 다시 구상하였고, 쉽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화극은 탐라공의 전례를 따라 군기청 내에서 구상을 공모하였다.
그 결과, 아주 뜻밖의 인물이 발상의 전환을 담은 구상을 제시하였는데, 그자는 군기청에 파견된 탐라군 화포병이었다.
군기청 내 화포 방포 실험에 참여하던 그 화포병은 자신이 방포 때 종종 사용하던 ‘꼼수’에서 착안한 구상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토대로 여러 장인들이 새로운 구상들을 더 더했고, 그 결과 화극이 설정한 위력과 기능의 기준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화극과 군기청이 자랑스러워할 만했고, 심지어 몽주마저도 대경하게 만들 만한 ‘총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말도 안 돼!’
방포 시험장에서 10발의 연속 사격을 하는 총을 본 몽주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 놀라워하다가, 방포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가가 총의 구조를 살폈다.
두 개의 커다란 철 부품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중 하나는 원통 형태로 중심부에 있고, 다른 하나는 직육면체 형태로 뒤쪽, 현대 소총으로 치면 개머리판에 해당하는 위치에 붙어 있었다.
아직 견착한다는 개념이 없었기에 개머리판 같은 건 없었다.
중심부에 있는 원통형 부품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리볼버(revolver).
권총에 많이 쓰는, 여러 개의 약실을 갖춘 회전 실린더였다.
몽주가 리볼버에 눈길을 주자, 화극이 장인에게 눈짓하여 리볼버를 떼어 내게 하였다.
흔한 권총의 리볼버처럼 옆으로 젖히는 대신, 완전히 떼어 내는 형식으로 분리된 그 리볼버 안에 열 개의 약실이 있었고, 이미 방포되어 빈 그 약실에는 흑색 화약 특유의 찌꺼기와 함께 재 같은 것도 많이 남아 있었다.
“회전 자포라 부르는 놈이지. 자포를 여러 개 묶어 회전하여 차례대로 모포에 들어갈 수 있게 한 게지. 그리고 이게 탄환일세. 신기하게 생겼다 생각하겠지만, 사실 아주 간단한 걸세.”
화극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한 채 보인 것을 본 몽주는 절로 웃음을 지었다.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 현대에서 많이 봤던 것이니까.
다만, 탄피가 구리나 구리합금이 아닌 종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몽주가 익숙하다는 걸 모르는 화극은 그 자리에서 종이를 뜯어 내부를 보여 주었다.
유선형의 조그만 탄두 뒤로, 같은 두께의 고형 화약이 있었고, 마지막에 약간 더 두꺼운 코르크 덩이가 있었으며, 그것을 종이로 감싼 게 탄환의 구조였다.
“이렇게 감싼 뒨 다시 기름을 먹여 물이 스며들 수 없게 만들었네. 소나기가 내리는 중이 아니라면 장약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걸세.”
“그렇군요. 대단합니다.”
몽주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물론, 이미 화극이 언급했다시피 리볼버를 착안해 낸 것도 모자포를 운영하다 보면 얼마든지 나올 만한 것이긴 했다.
모자포의 자포가 약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니, 약실을 따로 분리한다는 개념에서 회전을 더하면 대략 리볼버의 모양일 테니까.
그렇기에 몽주가 진실로 경악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총기의 후미에 달린 리볼버와 달리,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품.
종이 탄피 탄환을 개발하든, 리볼버를 개발하든, 후장식 총기의 연속 방포를 위해서는 격발부가 꼭 필요했다.
그 격발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뇌홍이고.
한데, 뇌홍은 아직 만들 수 없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재료는 뇌홍보다 더 얻기 어렵다.
실제로 종이 탄피 탄환에도 격발부는 없었다. 코르크가 격발할 리도 없지 않은가.
몽주는 총기의 뒤쪽에 달린, 어른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철 부품이 연속 방포를 가능케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얼굴을 가까이 하여 살피자, 그 철 부품과 리볼버 사이에 가느다란 바늘 같은 게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포 중에 그 철 부품이 연신 앞뒤로 움직였었다.
“조심하게. 그 안에 숯이 들어 있네.”
“……?”
화극이 몽주의 어깨를 잡으며 더 가까이 가는 걸 막는 순간, 몽주는 방포 후라 총기로부터 은근히 전해지는 열기 중에 유난히 더 강렬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숯이 들어 있는 철통, 그 철통과 연결되어 리볼버의 약실 쪽으로 뻗은 바늘.
“아……!”
몽주는 격발의 원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숯으로부터 전도된 열이 바늘을 달구고, 그 뜨거운 바늘이 전진하여 리볼버 안의 종이 탄피 탄환의 뒤쪽 코르크를 꿰뚫고 들어가면, 바늘의 열기에 화약은 쾅!
“이거야 원…….”
몽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단순한 원리였기 때문이다.
총기의 발전사와 현대식 총탄의 구조에 얽매여, 격발을 위해서는 무조건 뇌홍이 있어야 한다고만 여겼던 자신이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숯의 내부 온도는 무려 3천 도.
그 숯을 담은 철통이나 철통에 연결된 바늘의 온도는 적어도 수백 도는 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때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화약을 격발시킬 온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숯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죠?”
“보통 한 시진은 너끈하고, 좋은 나무로 만든 숯이라면 두 시진도 가능하네.”
생각해 보면 꼭 숯일 필요도 없다. 석탄도 좋고, 정 없으면 불붙은 나무를 넣어도 그만이다.
“이걸 누가 생각해 낸 겁니까?”
“군기청에 파견된 군병이 제안한 거네. 화포 시험 때 화승 대신에 달군 꼬챙이로 방포하곤 했나 본데, 거기서 착안한 게지.”
화승 구멍에 달군 꼬챙이를 찔러 넣었다라…….
“꾀를 부렸던 모양이군요.”
“하하, 그 군병이 편하려고 부린 수가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네그려.”
하기야 원래 모든 발명이 어떻게든 조금 더 편하려고 애쓴 결과물이지 않은가.
사실 화포의 화승 구멍에 꼬챙이를 찔러 넣는 건 무척 위험한 짓이었다. 큰 폭발력과 방포 시 후퇴하는 힘을 생각하면 꼬챙이가 부러지거나 튕겨져 포신을 상하게 만들 수 있고, 꼬챙이를 쥔 이나 주변에 있는 자들이 다칠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몽주는 자신을 놀라게 한 총기의 원리를 파악하자, 마음을 진정하고 조금 더 이성적인 시선으로 총기를 살폈다.
원리에 놀란 건 놀란 거고, 총기의 성능은 또 다른 법이다.
일단 20미쯤 떨어진 곳에 설치한 과녁에 남은 탄착군은 엉망진창이었다.
사실상 조준한다는 행위가 의미 없을 정도의 결과였다.
하나, 몽주의 눈에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강선(rifling)만 적용시킬 수 있다면 탄착군은 급격히 작아질 테니까.
제대로 강선의 효과를 받으려면 탄두를 총열에 우겨 넣는 과정이 필요하기에 리볼버를 쓰긴 애매해지리라.
보통 총구의 구경보다 탄두의 크기가 조금 더 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컨대, 5.56밀리미터 나토탄의 실제 탄두 지름은 5.7밀리미터인 것도 총열에 탄두를 우겨 넣어 강선에 최대한 밀착시키기 위함인데, 리볼버 구조로는 탄두를 우겨 넣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리볼버, 안 쓰면 그만이지.’
하려고 하면 볼트 액션 정도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었다.
‘아, 아니네. 탄피가 종이면 힘들지.’
생각해 보니, 탄피가 종이면 총열에 탄두를 우겨 넣을 때 힘을 감당하지 못할 듯했다.
‘구리 탄피를 대량 생산할 수 있을까?’
납 탄두의 대량 생산은 충분히 가능할 듯한데, 구리 탄피는 제작이야 가능하겠지만, 대량 생산을 하자면 현재 탐라의 생산 기술로는 무리일 듯했다.
‘볼트 액션은 힘들까…….’
안 되면 그냥 리볼버 구조로 가도 좋다. 강선의 효과를 덜 받아도 지금보다는 탄착군이 안정될 것이고, 화망을 만드는 데에는 문제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강선보다도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게 많았다.
일단 구경이 1세미에 이른 탓에 아직도 ‘소총’으로 쓰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워 사용하기 불편하고, 그만큼 탄두도 크고 무거워 유효 사정거리가 짧은 편이었다.
게다가 방포의 편이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개머리판도 없고, 숯이 들어가는 열통 때문에 눈으로 조준하는 것도 불가능할 듯했다.
열통과 바늘을 전진후퇴시키는 방식도 방아쇠의 형태로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몽주가 한창 총기를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문득 화극의 시선이 느껴졌다.
“흠흠, 사실 좀 문제가 있네.”
“……?”
“그 바늘 말일세. 여러 번 방포하다 보면 휘어지거나 부러지곤 하네.”
“아…….”
하기야 약실 안으로 찔러 들어가 화약을 터뜨려야 하는 부품이었다. 게다가 구조상 얇고 길어야 하니 충격에 더 취약한 형태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열통에서 전해지는 열기로 인해 내구성이 떨어져 있는데, 화약의 폭발로 인해 더 뜨거워지고, 계속 충격을 받아야 할 테니, 결국에는 변형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화극의 자백(?)까지 있자, 몽주는 더욱 고민이 생겼다.
확실히 놀라운 총기이긴 했지만, 수정 보완해야 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 기본적으로 열통 자체가 단점이기도 했다. 적의 기습을 당했을 경우엔 열통이 가열되어 있지 않았을 테니,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고, 총과 탄환 외에 숲이나 석탄 혹은 나무 등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아마도 주로 진지 방어 용도로나 쓸 수 있을 듯싶었다.
‘생각해 보니, 강선을 제대로 깎을 수 있을지도 애매하네.’
축받이공(볼 베어링) 제조 때에 알았듯, 의도적으로 고강도 합금강을 만들지 못하는 당대에서 강철 총열을 제대로 깎을 ‘칼’을 만드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모자대포의 포신을 만들 때처럼 가열하여 내구성을 떨어뜨린 상태에서 시도해야 할 듯한데, 필연적으로 포신보다 훨씬 더 가늘고 길게 뽑아야 하는 총열이기에 제조 과정에서 망가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쓸 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별로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닌 듯하네만?”
화극이 몽주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 왔다. 몽주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대 이상입니다. 물론, 실전에서 제대로 쓰려면 고쳐야 할 게 많군요.”
“하면…….”
“계속 개량해야죠.”
단순하게 생각할 때, 분당 30발을 쏠 수 있는 총기를 만들어 전투에서 스무 자루를 쓸 수 있다면, 분당 600발짜리 기관총을 쓰는 셈이다.
폭죽시와의 경쟁 같은 것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탐라군이 폭죽시를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 그만큼 많은 훈련을 거친 덕이었다.
강력한 탄성을 가진 강철 합성궁의 시위를 당기는 와중에 폭죽시의 지연 폭발까지 제어하는 건 어지간히 훈련해서는 해낼 수 없는 ‘무예’였다.
고르고 고른 재목을 연병하여 수천의 정예병을 만드는 건 가능할지라도 수만 명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아무리 역사가 바뀌어도, 결국 소총을 비롯한 각종 화기가 활이나 다른 냉병기를 대체하는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저 시기가 문제일 뿐이고, 아마도 당대에는 그 시기가 더 앞당겨질 것이다.
몽주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총의 개발에 임하기로 하였으므로.
* * *
궐 안을 드나들면서 어느 날부터 위화감이 있었다.
그게 뭔가 싶었는데, 오늘 문무백관이 조정에 들어선 걸 보니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살쪘군.’
그냥 보아도 절반은 비만하기 그지없었고, 나머지도 전에 비해 살집이 생겨 있었다.
이는 비단 신하들만 그런 건 아니었다.
금상이야말로 가장 비대해진 자였다.
보령이 열여덟에 이른 금상은 위로 성장하는 건 관두고 자꾸 옆으로 퍼지고만 있었다.
우습게도 염흥방 본인만 살이 찌지 않았다.
‘거, 사탕물 좀 작작 마시라니까.’
염 궁중후는 괜히 짜증이 났다. 물론, 그런 투덜거림은 신하들을 향한 것으로, 감히 금상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살이 쪘다고 타박하는 건 아니었다. 너무 비만해진 자가 아니라면 풍채가 좋아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제 할 일만 잘하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 조정에 모인 자들 중 절반가량은 그냥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국정에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하는 일이 없었다.
고려는 커졌으나, 실상 커진 건 탐라국이고, 요동국일 뿐이지, 지금 금상이 가진 영역은 과거에 비해 삼분지 일에 족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금상의 영역 중 서경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많은 곳의 절반이 염흥방의 봉지임을 감안하면 나랏일은 육분지 일로 줄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벼슬아치들은 그대로이니 자연히 해야 할 일이 확 줄어드는 가운데 일하는 자들만 하고 안 하는 자들은 더 안 하는 풍조가 생겨 버렸다.
‘밥 먹고 똥이나 싸지르는 작자들.’
염흥방이 다시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 물론 금상을 향한 마음은 결코 아니었다.
한데, 그렇게 ‘무임승차’하는 벼슬아치들이 많음에도 국정은 나름 잘 굴러 갔다.
언젠가부터 개경과 왕실의 살림은 흉작이어도 평작인 것 같고, 평작이면 풍작인 것 같으며, 풍작이면 요순시대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적어도 개경에서는 배를 곯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있는 자들은 어지간히 사치를 부려도 흉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팔관회는 나날이 화려해지고 있으니, 지금 논하는 금년의 팔관회 준비 또한 지난해보다 더 흥성하게 진행될 듯했다.
그래서일까, 금상은 가끔 너무나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치세가 가장 태평세월인 듯하다며 은근히 우쭐거리기도 했다.
신하들은 그때마다 그러하다며 아첨의 말을 끝도 없이 늘어놓곤 했다.
염흥방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긴 했다. 기준이 선왕이나 그 전 임금들의 시대라면 확실히 그랬다.
‘눈앞밖에 못 보는 인간들.’
아, 이 또한 감히 금상을 향한 불손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는 신하들을 향한 비웃음일 뿐이었다.
아마 이곳에 모인 백관들 중 그들이 자랑스레 누리는 사치가 탐라국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것임을 아는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서 사육당하는 돼지가 배부르다고 우리를 대궐로 착각…….
“이보오, 염 후.”
문득 들린 금상의 얇은 목소리에 염흥방은 짙어지던 냉소를 얼른 지우곤 한발 나서 응하였다.
“예, 전하.”
“오늘 이렇게 말한 김에 국혼에 대해 밝히는 것이 어떻겠소?”
“……뜻대로 하소서.”
염흥방이 동의하자, 금상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본디 짐의 혼사는 나라의 근본을 잇는 중임이기에 널리 살피고, 또 살펴 택해야 하나, 운 좋게도 왕실의 안주인으로 삼기에 자질과 자격이 넘치는 여인을 알게 되어 옛 예법은 생략하고자 하오.”
금상의 말에도 백관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미 소문이 널리 퍼져 그 중에 금상이 어느 여인과 혼인하려는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나의 정비(正妃)로 궁중후 염흥방의 차녀를 택하고자 하고, 국혼의 예식을 팔관회의 첫날에 겸하고자 하니, 공경들은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모두가 읍하여 금상께 축하를 올렸다.
물론, 그 축하의 일부는 염흥방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환하지 않았다.
금상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허락하였지만, 속이 쓰라렸다. 심지어 지난날 비록 음험한 계략의 일환이었음에도, 혼사를 논했던 탐라공의 아우를 놓친 일마저 아쉬울 정도였다.
‘그때, 그냥 모른 척하고 혼사를 강행할 걸 그랬나.’
그건 궁중후로서의 아쉬움이기도 했고, 늦게 낳아 곱게 기른 막내딸의 아비로서 가지는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임술년도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의 하늘은 아무리 군왕이 무치(無恥)라지만, 여색에 빠져 궁녀란 궁녀는 다 품에 안고 다니는 금상에게 시집가 마음 고생할 여식의 아비의 마음속 근심만큼이나 드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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