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05)
입동이 지났지만, 유구섬의 날씨는 아직 온화했다. 본디 소설은 지나야 좀 추워지는구나 싶고, 대한에 이르면 이른 벚꽃이 피는 곳이라 겨울의 존재감이 희박했다.
갑자년(1384년) 절기상 겨울인 어느 날에 한 척의 배가 다다라 상회의 선단과 함께 나하현 포구에 이르렀다.
다다라 상회의 배들이 물자와 사람을 하역, 하선하는 동안 그 배에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는데, 대부분이 군병인 그들은 한 여인과 한 아이를 호위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모자지간을 마중한 자들은 제법 많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나하현의 수령은 물론, 유구국 외관대신이 여러 관리들을 데리고 나와서 여인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참고로 고려에 입조하여 개국국공의 지위를 얻은 유구왕(전 중산국왕)은 탐라를 본떠 조정을 개편하였기에 관제와 그 명칭이 거의 같았다.
무엇보다 탐라와의 관계가 중한 유구국의 입장이기에 외관대신은 유구국의 실세 중 실세라 할 만했지만, 그도 마중 나간 여인 앞에서는 절로 공경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탐라공국의 전당청장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반갑습니다. 또 뵙는군요.”
“저도 몹시 반갑습니다.”
유구국 외관대신은 자신을 기억해 준 전당청장에게 감읍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1년 반쯤 전에 유구 상단의 창립을 위해 탐라국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사절단의 수장이 지금의 외관대신이었다.
그때, 창립 자금을 빌리기 위해 전당청장과 마주한 바 있었으니, 20만 원의 투자와 함께 15만 원의 대출을 받았었다.
“유구 상단이 나날이 번창한다고 들었습니다. 외관대신의 공이 참으로 컸습니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전당청장께서 꼼꼼히 살펴 주신 덕입니다.”
그리 어색하지 않은 고려말로 답한 외관대신의 마음은 절반 이상 진심이었다. 물론, 당시에 그 꼼꼼한 검토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간장이 다 녹았던 기억은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전당청장이 탐라공께 탐라 상단 직원의 파견을 요청하는 진정까지 올렸고, 그렇게 파견 온 탐라 상단원들은 유구 상단이 창립되고 반석 위에 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유구 상단하 두 개의 회사들 모두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니, 유구 상업 회사는 유구와 구주 사이의 유통 중 3분(30%) 이상을, 유구와 이주 사이의 유통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회사인 채광 회사도 이주섬에 철소과 동소를 하나씩 소유, 채광하고 있었는데, 조만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듯싶었다.
전당청장은 나하현 수령과 유구국 외관대신과 함께 마차를 타고 느긋하게 슈리성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나하현에 위치한 기술학교를 볼 수 있었다.
“교사를 증축하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내년부터는 학생들을 두 배 늘려 받을 예정입니다.”
나하현 수령이 자랑스럽게 답하였다.
“전에 교관대신으로부터 듣기로 이곳 학생들의 학업열기가 높다던데, 틀린 말이 아닌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도학교에 진학한 자가 나하현에서 12명, 유구국에서 28명이었습니다. 모두 전하…… 아니, 유구공께서 지원하신 것이지요.”
나하 수령이 본디 유구 사람이라더니, 평소에는 유구왕을 전하로 칭하다가, 전당청장 앞임을 알고 고쳐 답하였다.
청장은 실소하되,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그런 거야 주군께서도 그리 상관치 않으실 테니까.
“인구에 비해 꽤 많이 진학하였군요.”
“나하의 기술학교를 졸한 자들이 관리와 상단원으로서 크게 활약하는 것을 보이자, 유구공께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에 열성을 보이고 계십니다. 지금 슈리성읍에 새로 기술학교를 따로 짓고 있고, 도학생 파견의 규모도 늘리고자 하시지요.”
듣던 대로 유구왕은 어떻게든 자신의 대에 유구국에 승천의 기운을 한가득 퍼뜨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상업과 교육을 택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얼마 뒤, 전당청장이 슈리성에 입성하자, 유구왕이 대전 앞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하였다.
유구왕은 모자를 환대하되, 전당청장의 요구대로 큰 잔치를 여는 대신 소박하게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탐라의 것을 열심히 받아들이는 그답게 과거와 달리 체면 따위는 버리고 신하들과 겸상하기도 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유구왕은 전당청장의 아이에게 잠시 시선을 두며 말하였다.
“이주까지 가신다 하니, 겸사로 지아비를 뵙기 위함이시겠소.”
“…….”
청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전당청장으로서 일부 전당지점들을 시찰하는 중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남편과 해후하기 위함이었다.
“간만에 뵈는 터라, 사뭇 설레겠소이다. 하하. 아이야, 너도 아버지를 뵈려니 기쁘냐?”
“네.”
신선한 생선 구이의 살코기를 오물거리던 남안창이 간단히 답하곤 다시 음식에 열중했다.
어릴 적 창아라 불린 아홉 살 사내아이는 크면서 안창이라는 본명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아비가 남해 남씨라는 성을 받으면서 남안창이라는 성명을 가지게 되었다.
유구왕은 안창이 서툰 젓가락질을 어떻게든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며 푸근하게 웃음 짓다가 다시 청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피곤하신 게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오.”
“다소 그런 감이 있습니다.”
“이런, 원항에 노고가 있는 분을 내가 괜히 급히 보자 하였군요. 식사를 마저 하고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아, 한데, 언제 다시 출항하실 생각이시오?”
“내일 지점을 살피고 모레 중에 떠날 생각입니다.”
“그렇게 빨리……? 하하, 지아비를 볼 생각에 마음이 급하신 게로군요.”
유구왕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청장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만, 어째 조금 씁쓸한 느낌이 감도는 미소였다.
* * *
“드디어! 드디어 끝났습니다!”
“만세!”
이주 가남현의 군정사령부 내에 한 관리가 보고 있던 녹계를 접자, 그를 주시하던 모든 관리들이 만세를 외쳤다.
지난 2년간 그들을 괴롭혔던 이주섬의 인구 조사 및 호적 정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포섭한 고산족들, 정복당한 월인들, 그리고 무릎 꿇고 항복한 평포족들까지.
때로는 환경 때문에, 때로는 비협조적인 분위기 때문에, 때로는 산업으로 인한 단체 이주 때문에 겹치고, 겹쳤던 고생이 모두 끝났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인구 조사가 끝났다는 건 이주섬이 본격적으로 탐라국의 영토가 된다는 신호이기도 했으니, 탐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소란은 사령관실에도 전해졌지만, 정작 군정사령관 남석삼은 그런 분위기와 동떨어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손톱을 물어뜯으며.
“지금쯤 유구섬쯤에 닿았으려나.”
그의 아내 금점녀와 아들 남안창이 이주로 오고 있었다.
2년 넘게 못 본 아내와 아들이 온다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석삼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으으, 어쩌지? 점녀가 화가 많이 났을까?”
석삼이 안절부절못하는 건 지금 여나국의 어린 여왕이 그의 딸이라는 사실이 점녀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본래 더 일찍 고백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주군께서 알고 끝까지 감출 수 없는 일이니, 하루라도 빨리 알리고 사정을 설득하라 했을 때 바로 따랐어야 했다.
하나,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일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반년쯤 전에 주군께서 아직 석삼이 점녀에게 자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빨리 밝히지 않으면 직접 알린다고 하시는 바람에, 서찰을 통해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했다.
“화가 났으니까, 연락을 안 한 거겠지? 으으…….”
그 사실을 알게 된 점녀의 정확한 반응은 알 수 없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서찰을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오가는 배편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꼬박꼬박 주고받던 서신 교환이 끊겼다가, 지난번 탐라 군선 편으로 그녀가 아들과 함께 이주섬으로 찾아가겠다는 통보가 담긴 짧은 서찰이 왔던 것이다.
“설마 이혼하자는 건 아니겠지?”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석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당한 일이라고 해도, 심적으로 죄지은 마음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점녀가 정말 이혼을 요구한다면, 석삼은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기라도 할 참이었다.
주군께 혼나는 건 차치하더라도, 그런 사고(?) 때문에 정이 깊은 아내와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석삼은 근심 걱정에 애간장이 타들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바깥에 소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누군가 사령관실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사령관, 무라 수군으로부터 전언이 왔습니다! 안남에서 온 배를 나포했는데, 그 배에 탄 안남 관리가 고려와 친교를 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소란을 피울 일인가? 아니, 무라 수군은 대체 내 명을 뭘로 알고……! 그냥 평소대로 처리하라 하……?”
석삼은 속이 편치 않은 중에 짜증을 터뜨리며 애초에 접근하는 모든 배를 침몰시키거나, 나포한 후 선원을 노예로 만들라 명한 걸 지키지 않는 것에 화를 내려다가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그들이 먼저 고려라고 칭했단 말이냐?”
“네, 우리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온 것이라 합니다.”
“……!”
석삼은 놀라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하였다.
당장 무라 수군의 거점인 팽호섬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았지만, 시간상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아내가 가남현에 닿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라면 바쁜 공무인 만큼 이해를 바랄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입장이 아니었다.
“음, 무라 수군에 일러 남부군의 진지로 그 관리를 데려오게 하라.”
“예, 알겠습니다.”
지금 탐라군은 이주의 동북쪽 구석 가남현에 군정사령부를 두고 있기에, 원활한 군정을 위해 파이완족의 중심지였던 곳에 남부군진을, 그리고 명인 세력의 거점이었던 곳에 서부군진을 두어 관리를 하고 있었다.
본디 외부인을 절대로 들여서는 안 되는 곳이었지만, 어차피 안남이 이주에 고려인이 진출한 걸 알고 있다 하니, 주저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또, 조금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라도 중간쯤에서 보는 게 가장 나을 터였다.
물론, 오가는 시간을 줄여 아내가 가남현에 닿기 전에 돌아올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 * *
“글쎄, 자기네 성을 통통으로 정하는 자마저 있지 뭔가.”
“통통이라고요? 허허, 어찌 그런…….”
“그뿐일까, 군병이라고 활씨며, 화포씨도 있었고, 어부라고 멸치씨를 가져온 자도 있었지. 아, 거북씨도 있었지, 아마?”
“하하하!”
연이은 몽주의 말에 동금주의 도집사 허호필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동금주 녹둔군에 방문한 몽주가 허호필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지금까지 진행 중인 창씨(創氏) 사업에 얼토당토않은 성씨를 신고한 자들에 대해 말해 주었던 것이다.
“내 본디 한자가 아닌 성도 허가해 줄 생각이었네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한자로 된 성만 받기로 했네. 그러다가 똥씨, 오줌씨 다 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하하하! 아이고, 주군, 배가 너무 당깁니다.”
허 집사는 배를 부여잡고 웃다 찡그리다를 반복하며 괴로워했다.
금년 봄에 몽주는 노비를 제외한, 아니 노비 중에서도 솔거 노비만 제외하고 외거 노비를 포함한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성씨를 가지도록 명하였다.
본디 벼슬을 한 자와 그 후손만 가질 수 있었던 게 성씨였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변화였다.
이는 단지 현대인으로서의 몽주 개인적인 판단으로 결정한 건 아니었다.
백성들의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그 재산의 상속과 증여에 있어 가족 및 친인척 관계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직계 가족 관계야 호적과 인구 조사 자료를 통해서 대부분 파악, 입증이 가능하였지만, 친인척 관계는 성씨가 없으면 애매하거나 입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하여, 사유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는 솔거노비를 제외한 모든 가장들로 하여금 친척과 논하여 성씨를 지어 가져오게 하되, 기존의 성씨와 중복되지 않게 하여 기존 성씨 가문의 반발을 최소화하였다.
은근히 기존 성씨가 많다 보니, 일자(一字) 성씨를 짓기 어려웠고, 이자(二字) 성씨와 한글 성씨를 허가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신청된 성씨 중에는 마치 장난하듯이 정한 것들도 많았다.
하여, 그런 성씨는 반려하고 한글 성씨를 다시 금한 후, 관리들로 하여금 성씨를 짓는 걸 돕도록 하였다.
그 탓에 탐라 관리들은 퇴근 후에도 작성(作姓) 문제로 찾아오는 백성들의 상담을 받아 주느라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아후아, 동금주에서도 작성케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렵군요.”
웃음을 겨우 정돈한 허 집사가 이번엔 걱정된다며 엄살을 부렸다.
지금 창씨 사업은 탐라섬과 남면에서 먼저 진행되고 있었고, 차후에 구주와 동금주 등에서도 차차 이어질 예정이었다.
아마 구주나 동금주에서의 작성은 더욱 어려울 것이니, 아무래도 탐라섬과 남면에서 먼저 성씨를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내 한 가지 수를 주자면, 자네가 미리 부족장들에게 성씨를 하사해 두게나. 기존의 성씨로 말이야. 내 이름을 빌려 하사하여도 좋아. 그러면 그들은 나로부터 성씨를 받은 셈이니 영광일 테고, 부족장의 가솔들이 많을 것이니, 그만큼 많은 자들의 작성을 일괄로 처리한 셈이지 않겠나. 기존 가문의 반발도 없을 것이고.”
“알겠습니다. 차근차근 진행하겠습니다.”
“음, 좀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네.”
“……?”
대략 알겠노라 답하고 넘어가려는데, 주군의 반응에 묘한 어감이 있었다.
그에 몽주는 미소를 띠며 속내를 밝혔다.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네만, 나는 자네를 조만간 동금주에서 해임할 생각이네. 아마 길어도 내년 안에는 말이야.”
“…….”
다분히 충격적인 말에 허호필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자네가 내게 밉보이거나 잘못한 일이 있어 내가 그런다고 여기지는 말게. 자네는 충분히,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으니까. 또, 도집사에서 해임한다고 해도 자네를 그냥 놀게 놔둘 생각도 없고.”
“하면, 어찌 저를 동금주에서 물러나게 하시려는 겝니까.”
좌천이든 영전이든 무관하게 허 집사에게 동금주는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다.
“제게 녹둔군과 동금주는 제2의 고향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제가 탐라의 영역으로 일군 곳입니다.”
“알고 있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네를 해임하려는 걸세.”
“……?!”
“동금주는 탐라의 땅이어야지, 자네의 땅이어서는 아니 되니까 말이야.”
“주군! 혹시 소신이 삿된 야망을 품었다 여기시는 것입니까?”
조금 전까지 웃다가 한순간에 표정이 심각해진 허호필이 경기하듯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몽주는 그의 오해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동금주의 어사대나 사롱, 혹은 탐라 상단에서 언질이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일세. 자네가 충직한 걸 알기에 그리하려는 것이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나는 동금주가 탐라국의 지방이길 바라지, 또 다른 나라나 세력이 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네. 자네의 충심은 의심하지 않으나, 자네가 동금주를 오래 다스릴수록 동금주는 탐라국의 지방이기 전에 자네의 나라, 자네의 세력이 될 수밖에 없어. 물론, 이는 비단 동금주뿐만 아니라 도집사나 그에 준하는 지방관이 나가 있는 모든 곳이 마찬가지라네.”
“……하면, 저로서 본을 세우고자 하시려는 것입니까.”
적당한 표현이었다. 본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동금주를 시작으로 남면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집사를 교체할 것이고, 가장 민감할 수 있는 구주도 바꿀 것이며, 2, 3년 안에 이주의 군정을 해제하고 새로 도집사를 파견할 생각이었다.
모든 도집사들이 분도(分道) 혹은 분주(分州)의 집사를 하나씩 겸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자연히 집사의 교체도 연달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런 도집사와 집사들은 업적에 따라 차후에 중앙직으로 옮겨 일하게 할 것이고, 장차 그런 식으로 중앙직과 지방관직을 각각 최소 1, 2회씩 경험한 자들 중에서 대신과 청장의 지위를 허락할 생각이니, 나아가 정기적인 임기를 가진 지방관 제도를 자리 잡게 하려는 의도였다.
즉, 허호필을 동금주 도집사에서 해임하는 건 탐라 중앙 및 지방 관제의 변화를 꾀하는 시금석인 셈이고, 그런 교체의 축적이 탐라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단련이라 여겼다.
9.5//“중앙집권의 핵심은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교체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 지방관은 취임과 함께 실세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요.”//
오래전, 아마 몽주가 구주와 동금주를 한창 개척할 무렵에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논의하면서 얻은 조언이었고, 동의하는 바였다.
사실 이미 탐라국은 충분히 중앙집권화된 나라였다. 지방관을 파견하고 있고, 전라와 경상도의 모든 지방관은 몽주의 말 한 마디에 당장 교체가 가능했다.
다만, 한창 권역 작업 중인 이주는 차치하더라도, 구주 및 동금주의 경우에는 다소 민감한 면이 있었다.
동금주는 워낙에 허 도집사가 동금주 무족과 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구주의 경우는 다의홍이 고려인 출신이 아니라 자칫 민족주의적인 반발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호필이든 다의홍이든 몽주가 강권 내지 강요한다면 얼마든지 자리에서 물릴 수 있지만, 선례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 과정에 소음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몽주의 대에는 단지 중앙집권화를 위해서 도집사를 교체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 몽주가 언제까지 탐라를 다스릴 수도 있는 건 아닌 만큼, 미리 정치 제도적으로 공고하게 다듬어 둘 필요가 있었다.
몽주가 이런 점들을 설명하자, 허호필의 표정도 조금 풀렸다. 여전히 동금주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남아 있긴 했으나, 그는 자신이 한 지역의 맹주가 아닌 탐라의 관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자네를 불러들일 건 아니니, 남은 기간 동금주의 초석을 다진 이로서 유종의 미를 남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한데…… 만약 탐라섬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제게 무엇을 맡기실 생각이신지요?”
“아직 확정할 수는 없으나, 내가 보기에 자네가 고용병사령부를 맡아 주면 좋을 듯싶네.”
“다시 군무를 맡기시려 하십니까?”
“군무라면 군무겠지만, 고용병사령부의 사정상 행정적인 역할에도 뛰어나야 하겠지. 고용병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 탐라인이라는 자각이 부족하니까.”
“아…….”
생각해 보면 고용병들 중 절반 정도가 동금주의 무족들이었다. 그런 만큼 무족의 지지를 받고 있던 그가 고용병사령부를 담당하는 건 꽤 괜찮은 선택일 듯했다.
그리고 직책 자체도 도집사보다 나으면 낫지 모자란 게 아니었다.
규모로만 보면 탐라군 사령부보다 더 큰 상비군을 지휘하는 직책이 아닌가.
이제 심각함이 모두 사라진 허호필은 새삼 그의 주군께 감격해야 함을 깨달았다.
자신을 높이 사 장차 사령부를 담당케 하시려는 건 물론, 지금 나눈 대화와 설득이 바로 주군께서 뜬금없이 동금주를 방문하신 주된 이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은 주연의 분위기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그렇게 마무리를 할 참에 허호필은 문득 생각이 난 것을 물었다.
“듣기로 공녀께서 곧 혼인을 하신다더군요.”
“그러네. 나는 한 일 년쯤은 더 두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요동공이 자꾸 채근해서 말이야. 뭐, 방원 공자와 강영이 사이도 많이 바뀐 것 같기도 하고.”
몽주는 지금 탐라섬에서 가장 유명한 선남선녀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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