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12)
* * *
“아뇨. 그냥 옛 고려의 도읍이 그곳에 있었다고 알리고 싶을 뿐이죠. 그냥 역사학적인 지식을 밝히는 의도 정도.”
몽주의 말에 재상이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앞서 고려에서 고구려 국내성 유적을 탐사하게 하였다는 말에 무슨 의도냐며 재상이 물었다.
“물론, 요동국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잘 쓰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죠.”
“근데 고구려에 대해 잘 알려져 있습니까?”
두신의 질문에 몽주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일 유명한 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죠. 이규보 덕에 주몽 설화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고요. 단편적인 수준이랄까요.”
“그래도 고구려가 한반도 북방과 만주 일대에 강역을 가진 건 알려졌겠죠?”
“예, 뭐, 그렇긴 하죠. 근데 역사의 전수를 요즘처럼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인 데다 사람들마다 아주 편차도 아주 크거든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고구려 때 이야기라는 걸 알기만 해도 고구려 역사를 아는 순으로 상위권일 걸요.”
“그런 상황이라면, 1천 년 동안 듣보잡이던 왕이 이룩했던 역사적 진실이 알려졌을 때 제법 충격적이겠군요.”
재상이 끼어들어 실소와 함께 한 마디 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듣보잡왕’이란 광개토대왕이었다.
고구려의 패망 이후 천 년 동안 광개토대왕이라는 한반도 역사 최고의 정복 군주는 역사의 망각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간혹 조선의 유학자들이 ‘담덕’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 봐야 광개토왕이 조부를 죽인 백제에 복수를 한 것을 두고 ‘효’와 ‘불의’라는 시선으로 달리 평가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일본 밀정이 취한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이 연구되면서 그제야 그 이름 서서히 알려졌을 따름이었다.
“내가 이성계라면 광개토대왕하고 고구려라는 이름을 잘 써먹을 텐데 말이야.”
“민족주의적으로?”
두신의 말에 재상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 일단 광개토대왕 때의 고구려를 화려하게 선전하고, 그 고구려가 고려인과 유목 민족의 결합임을 알리는 거지. 은연중에 우리가 힘을 합치면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는 식으로.”
“고구려에 거란족이 있었냐?”
“상관있나? 그냥 유목 민족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되는 거지. 후연하고 다투면서 요서 지방에서 발을 뻗은 적 있으니, 요서 진출 때 명분으로 삼을 수도 있고.”
“아아, 역사여, 너는 늘 이용당하는 운명이구나!”
재상이 어설픈 연기조로 말하곤, 몽주를 바라보았다.
“몽주 씨는 발해를 이용해 볼 생각은 없어요? 저번에 닝구타에 유적이 발견되었다면서요?”
“유적이라 봐야 성터뿐이라서요. 기록이 남은 것도 아니고, 무족들 사이에 전승이 있는 것도 아니라, 굳이 써먹어야 할 필요성이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발해를 강조하면 괜히 요동국만 자극하게 되잖아요.”
“아, 맞네요. 발해도 요하까지 진출했었죠.”
그뿐일까, 요서에서 당나라와 싸우기도 했고, 바다 건너 산동 지방을 급습한 바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동국이 고구려 역사를 들먹이면 동금주를 자극하는 셈 아닌가요?”
두신의 물음에 몽주는 씨익 웃었다.
“제가 신경 안 쓰면 그만이죠. 어차피 현실적으로 요동국이 동금주를 찔러 볼 수도 없고, 무족들이 저를 배신할 리도 없으니까요.”
“아, 역시 이사장님이 똑똑하시다니까. 그렇죠. 역사? 뭐, 이용하려면 하는 거죠. 한데, 중요한 건 현실이죠. 현실이 받쳐 주지 않으면 다 소용없다는 거.”
동금주의 무족들은 탐라국의 일원이다. 이는 단지 행정구역상의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결착이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나날이 결합력이 증가되고 있었다.
물론, 발해나 고구려의 역사를 교묘하게 사용하면 문화적 동화면에서 약간의 이익이 있겠지만, 정작 탐라국과의 동화와는 관련이 없었다.
탐라국이 고려의 일부이고, 몽주가 고려라는 이름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게 동금주는 탐라국의 지방이어야 했다.
게다가 발해 유적들의 위치는 무족들의 발원지와 대동소이했다. 발해를 강조할수록 오히려 무족들이 소외감을 느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탐라국은 물론 동금주의 무족들도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몽주는 먼 훗날 그가 바라는 고려의 구도가 완성되었을 때를 위해서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를 남겨 두고자 하였다.
“그나저나 결혼식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이성계도 오나요?”
“예. 뿐만 아니라 고려왕실에서도 축하 사절을 보낸다고 하더군요. 유구공은 직접 오겠다고 하고, 구주의 다의홍도 올 거예요. 동금주 무족들이나 이주의 고산족들도 대표를 보낸다고 하고요.”
방원과 강영의 혼인식은 탐라국의 잔치를 넘어 고려 전체, 아니 일종의 국제적인 회합의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중국 쪽은요?”
“응천부 쪽에서는 별 반응이 없고, 연왕부에서는 몇몇 사절단을 보낼 것 같기는 하더군요. 그쪽이야 방해만 안 해도 족하죠.”
“아오, 준비해야 할 게 많겠네요.”
“근데 혼례식 자체를 너무 거창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우리 집 마당에서, 그러니까 공택 정원에서 치르고,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공원까지 더해서 피로연을 열 생각이에요. 일반 백성들도 어느 정도 수용할 생각이고요.”
규모는 크겠지만, 고려 당대 여염집 혼례식과 같은 식으로 치를 생각이었다.
“하긴 왕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괜히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다 고려왕실의 눈총만 받을 테니까요. 아, 근데, 그건 미리 조심해야겠네요. 요새 탐라 사람들 중에서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괜히 혼례식 중에 만세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고려왕실이나 연왕부의 사절단들이 정색할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도 주의를 주고 있어요.”
혼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몽주가 탐라에서 준비 중인 신물산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황칠액이 어느 정도 모여서 황칠을 시험하고 있어요. 방법이야 옷칠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떤 재료에서 얼마만큼 색이 잘나오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나전칠기 기술하고 잘 조합하면 중국 애들이 좋아할 만한 사치품이 나올 것 같긴 해요.”
“하면, 황금범선이 이제 나오는 겁니까?”
“하하, 배 몇 척에 칠하면 지금까지 모은 거 다 써야 할 걸요. 그래도 추후에 확대 재배한 황칠나무들에서 본격적으로 추출하기 시작하면 탐라 함대가 황금 함대가 될 날이 오겠죠. 한데, 그 전에는 사치품 용도로 써서 돈 좀 벌어야죠.”
돈을 벌기 위한 물산은 더 있었다.
“만년필을 만들 수 있겠더군요. 지난번에 ‘펀칭’ 기계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그걸로 구리합금으로 만든 펜촉을 많이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공관부에서 작은 금속 부품을 많이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선반 외 또 하나의 절삭 기계를 만들었다.
무거운 중량을 올렸다 떨어뜨리면서, 그 위치 에너지로 금속판을 뚫고자 한 것인데, 강철판은 어렵지만 연철이나 구리 등의 연한 금속은 얼마든지 뚫을 수 있었다.
물론, 중량을 올리는 힘은 도르래를 이용한 인력이나 축력이기에 대량 생산이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현대의 만년필처럼 우수하진 않겠지만, 모세관 현상을 이용한 만년필 자체는 많이 만들 수 있을 듯했다.
“만년필이 많이 팔릴까요? 어차피 고무도 없어서 연필도 지금은 지울 수 없는 필기구인데요.”
“지울 수는 있죠. 곡물 반죽을 익힌 것으로요. 물론, 아직 그렇게 하는 건 못 봤지만, 조만간 알려지겠죠.”
“아, 맞네요. 빵 같은 걸로 지웠었죠.”
‘지우개’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대화 주제는 잠시 고무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아직 동남아에 고무나무가 없죠?”
“모르겠어요. 석삼이에게 참파에 갔을 때 한번 알아보라고 했는데 소식이 없더군요.”
현대 천연고무를 생산하는 고무나무는 파라고무나무로 원산지는 신대륙이기에 당대의 동남아 쪽에는 있기 어려웠다.
다만, 고무나무 중 인도고무나무라고 인도가 원산지인 고무나무가 있긴 한데, 당시에 고무액의 쓰임새가 없어 자연적인 확산만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동남아에 인도고무나무가 번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장차 고무를 찾아 삼만 리 해야 할 판이군요.”
“뭐, 언젠가는 얻겠죠.”
참고로 고무 성분, 즉 라텍스(latex)를 얻는 건 다른 식물들에게서도, 대표적으로 민들레로부터도 가능하지만, 채산성이 없었다.
고무나무에서 고무액을 추출하는 것도 상당히 노동 집약적인 산업인데, 얇은 민들레 줄기에서 일일이 유액을 짜내는 건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고, 그렇게 나온 고무는 금값일 수밖에 없었다.
고무를 쓸 곳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싸고 적은 양의 고무는 차라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아, 근데 우리들의 멋진 숯총은 완성되었나요?”
“돌아가면 최종 논의가 있을 거예요. 근데 저격 용도로는 포기했어요.”
재상이 말한 ‘숯총’은, 2년여 전에 등장한 화극의 회심어린 소포(小砲)를 말하였다.
그걸 기반으로 연발 라이플 소총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껏 애써 왔고, 많은 발전과 개선이 있었다.
다만, 숯통의 움직임 때문에 정밀한 사격은 구조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있었다.
“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굉장한 무기죠. 한데 대량 생산은 역시나 어렵겠죠?”
“동력 기관을 만들기 전에는 어렵죠.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논의한 그거…… 한번 해 볼까요?”
그러자 두신이 화색을 띠며 말하였다.
“해 보세요. 아니, 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시간도 몽주 씨의 편이잖아요.”
그에 몽주는 재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의견도 말해 달라는 시선이었다.
“당장 대량 생산 대결을 해야 할 시대는 아니니까, 시간은 충분하겠죠. 근데 어쩌면 몽주 씨가 죽을 때까지도 제대로 된 놈이 안 나올 수도 있어요. 또, 몽주 씨가 10만 원 놓고 20만 원 벌고자 노력하는 사이에 누군가 100만 원 놓고 110만 원 벌기를 시작할 수도 있고요. 역사는 바뀌었고,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거참, 10만 원 놓고 20만 원 벌기가 아니라니까. 소비되는 자원량의 차이랑 환경 오염으로 인한 피해 같은 걸 다 감안하면 10만 원 놓고 100만 원 벌기라고 해야 해.”
“그래, 크게 보면 네 말이 맞겠지. 하지만 돈의 유혹은 엄청 센 법이야. 당장 더 큰 이익이 있는데, 나중에 오고, 꼭 나한테 올 피해도 아닌데 그런 걸 신경이나 쓰려 하겠냐?”
재상의 비유에 두신이 발끈하였으니, 예전에 논의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두신은 재상의 말에 재수 없다는 듯이 주먹을 쥐어 보이곤, 몽주에게 고개를 돌려 설득조로 말하였다.
“몽주 씨, 천몽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게 중심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상 전체를 바꾸는 기회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게 몽주 씨의 선택에 달려 있고요. 몽주 씨가 14, 15세기에 노력해 준다면, 현재 기술개발의 역사 또한 바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반응이 즉각적이어야 하는 용도는 제외하더라도, 그 외 다른 동력원들이 그처럼 효율적인 방법을 채용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게 남을 겁니다.”
몽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름다운 탐라섬이 스모그(smog)에 뒤덮이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 * *
요동공 이성계가 출항한 것은 단오 다음 날이었다.
요동수군의 함선에 올라 바다로 나서고 사흘 만에 탐라에 닿았으니, 예성강 하구에서 하루, 나주에서 하루를 묵으며 천천히 항해하여 온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 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잘 지내셨소, 포은 선생?”
요동공은 조금은 씁쓸한 시선으로 포은과 인사를 나눴다. 그의 주군이 될 수도 있었던 인연이었지만, 지금은 탐라의 대신이 된 자였기 때문이었다.
“저야 무탈합니다. 탐라공께서 몸소 마중 나오셔야 하는데 혼례 준비로 바빠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은 없으셨는지요?”
“내가 물이 낯선 탓이지, 다른 건 불편할 게 있었겠소? 예성강부터 탐라군이 호위해 줘 마음만큼은 편안했소.”
“하면, 마차에 오르시지요. 공택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이성계는 포은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랐다. 잠시 표정이 다소 굳었지만, 맞은편에 포은이 앉자 다시 미소를 애써 띠었다.
“포구가 아주 크고 정비가 잘되어 있소.”
“여러 번 확장을 하고 시설을 세워, 이제는 어디에 비해도 남부럽지 않은 포구가 되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요동공의 눈에 비친 홍로 포구는 그가 상상했던 수준 이상이었다.
큰 배도 댈 수 있을 만큼 바다 쪽으로 쭉 뻗은 부두는 어떻게 공사를 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어선은 대지 않는 곳인지, 포구라면 응당 있어야 할 비린내도 별로 없었고, 덕분에 부두 주변도 그만큼 깨끗했다.
또 부두마다 두 개의 철 구조물이 서 있었으니, 대략 생김새로 추정컨대, 배에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장비인 듯했다.
“대충 봐도 우리 수군의 배 마흔 척 정도를 동시에 댈 수 있을 듯하군.”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중함선 20척을 동시에 대고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단순 정박이라면 서른 척도 가능했다.
잠시 후, 마부의 호령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자 요동공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허어, 이처럼 편안하다니, 이 마차는 대체 어떻게 만든 것이오?”
“하하, 저도 이쪽으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공관부에서 늘 물산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니, 이 마차도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요동공은 연신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마차의 ‘비밀’을 알아내려 애를 썼다.
그 편안함은 판판히 닦인 도로 덕이기도 하겠지만, 마차 자체의 움직임 또한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아무리 살펴도 요동공이 마차에 담긴 기술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용수철을 만들고, 포가의 주퇴복좌에 쓰고자 한 이래로, 수없이 많은 구상을 통해 개선한 기술이 마차에 적용된 것으로, 어지간한 장인들도 일견에 알아채기 어려운 구조였다.
용수철만 달면 특유의 튕김 때문에 포가와 포에 충격을 주기에 그것을 방비하고자 여러 ‘아이디어’가 동원된 끝에 구멍이 한쪽으로만 열리는 원통인 ‘공압’ 장치를 개발하여 적용한 것이었다.
이는 심장의 판막과 구조가 같은데, 용수철이 늘어날 때는 원통의 구멍이 활짝 열리고, 다시 줄어들 때는 원통의 구멍이 공기의 압력에 의해 오므라들어 공기가 천천히 빠지는 힘으로 용수철이 급하게 튕기는 걸 막은 것이다.
그 기술은 포가에 먼저 적용되었고, 비슷한 용도로 다른 곳에도 쓰이기 시작했으니, 마차와 같은 탈 것에도 무척 유용했다.
물론, 탐라의 모든 마차에 그와 같은 기술이 적용된 건 아니었고, 아직은 탐라공가에서 쓰는 고급 마차에만 달린 것이었다.
얼마간 마차를 살피던 요동공은 결국 포기하곤 고개를 들어 도로 주변을 살폈다.
이미 배를 타고 홍로 포구에 접근할 때부터 감탄하였던 바지만, 안으로 들어와 살피니, 홍로현은 진실로 굉장한 고을이었다.
깨끗이 정비된 모습은 이곳에 20만이 넘는 인구가 밀집된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초가지붕을 인 집은 하나도 없었고, 모든 집이 기와를 단정하게 얹고 있었다.
대략 대여섯의 집들이 모여 있는 사이로 길이 널찍하게 닦여 있었으니, 포구에서 봤던 세망길이 구석구석까지 다 퍼져 있었다.
그걸 본 요동공은 자신이 요동의 도로를 정비하게 한 후, 나름 만족했던 것이 머쓱해졌다.
요동의 길은 회반죽을 깔고 판석을 박은 방식으로 말을 타고 다니기에는 나쁘지 않으나, 사람이 타는 마차는 어림없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요성부터 가까운 포구까지만 그러할 뿐, 나머지는 아직도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흙길이었다.
“저 솟대가 벼락공 이야기에 나오는 그것인가?”
“예, 탐라공께서는 피뢰봉이라 하나, 백성들은 벼락봉이라 부릅니다.”
간간이 솟아 있는 철봉을 보며 물은 이성계는 포은을 향해 재차 물었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탐라공이 벼락을 소환하여 받은 게 사실인가?”
“하하, 탐라공께서 벼락을 맞으신 건 맞습니다. 물론, 건강하시지요.”
요동공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자, 포은은 다시 웃음 지으며 말하였다.
“나중에 탐라공의 오른손을 살펴보십시오. 벼락인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겝니다.”
그렇게 말하니, 요동공도 더는 의심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구경을 계속하였다.
“흠, 그러고 보니 이곳 백성들은 꽤 배짱이 있나 보오. 이 마차를 보고도 아무도 예를 갖추지 않아.”
요동공이 탄 마차에는 당연히 탐라공의 문장이 달려 있었다.
“고개를 잠시 숙이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게 다인가?”
“하하, 탐라공께서는 다들 바쁜데, 단지 마차가 지나간다 하여 걸음을 멈추고 길에서 부복하거나 읍하지 말라 하셨지요. 사실 백성들이 소임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게 오히려 진정한 충심이 아니겠습니까?”
“…….”
그 말에 이성계는 탐라공이라면 그럴 만하다 싶음과 동시에 포은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태도에 주목하였다.
과거 경흥후 시절 받아들였던 포은이라면 이런 반응일 리가 없다 싶었으니, 사람이 그만큼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마차가 경사진 길을 오르다 잠시 평탄한 길에 이르니, 그 순간 좌우로 꽤 번잡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곳이 장터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본디 이보다 많이 작았지만, 나날이 복잡해져 두 번이나 확장을 했습니다. 원래는 남쪽 절반쯤은 민가가 위치했었죠.”
“흠, 한데 저 위가 공택 아니오? 장터와 너무 가깝군.”
이성계는 장터의 왁자지껄한 소란함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문득 공택이 멀지 않음을 알고는 물었다.
“그래도 그리 시끄럽지는 않습니다. 하하.”
시끄럽고 복잡한 것이 싫어 요성 근처에 장이 서는 걸 막은 바 있던 요동공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장터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니 공택의 입구가 가까워졌다.
그러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제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홍로현 일대가 시야에 넘치게 들어왔다.
언젠가 아들 방원이 보낸 서찰에 홍로현의 모습에 감탄한 글을 본 적 있었으니, 아들이 너무 과장한다 싶었던 게 절대 과장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홍로현을 가르는 두 개의 하천에 수차가 가득히 들어선 건 이질적인 와중에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음……?’
그때, 홍로 포구 앞바다에 있는 어느 작은 섬에 배가 반쯤 가려져 있는 게 보였다.
섬의 크기가 정확하진 않지만, 그 배는 아무리 봐도 포구에 정박해 있던 경함선들보다 훨씬 커 보였다.
‘저게 그 배인가? 방원이 말했던…….’
그러다 다시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으니, 아마 선소인 듯했다.
그곳에서는 몇 척의 배가 건조 중이었는데, 그중 두 척 정도는 멀리서 봐도 주변의 다른 배보다도 훨씬 커 보였고, 주변에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자연히 엄청난 크기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성계는 그 선소를 더 유심히 보고 싶었지만, 마차가 공택의 입구로 들어서면서 그 광경을 더 볼 수 없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조금 더 마차를 타고 있자, 얼마 뒤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중 나가지 못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탐라공이 모습을 드러내어 공손하게 인사하였다.
“아닙니다. 마차를 보내 주어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사돈지간이 되었기에 요동공도 예전보다는 탐라공을 조금 더 공대하였다.
“들어가시지요. 요동성에 비하면 너무 작고 누추하기 그지없어 부끄럽습니다.”
“하하, 탐라도가 곧 탐라공의 성이 아닙니까. 요동의 성들을 다 합쳐도 탐라도에 비할 수는 없지요.”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요동공의 눈에 비친 공택은 정말 작다 싶었다.
게다가 문을 하나 지나,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북쪽에 위치한 탐라공이 거주하는 가옥을 보곤, 솔직히 요동공도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여염집보다야 크지만, 개국국공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고려에서 가장 부유한 자인 탐라공의 집이라기에는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요성은 물론이고, 함주에 있는 그의 본가 규모보다도 훨씬 작았다.
“하하, 역시 너무 작지요? 민망할 따름입니다.”
“아, 아닙니다. 검소하고 청렴하신 성품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제가 거하실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앞장서는 탐라공을 한 걸음 뒤에서 따르며 요동공 이성계는 떠나기 전까지 탐라섬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홍로현의 번화함에 감탄하다가, 위신을 갉아먹을 크기의 공택을 보니 다소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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