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14)
“어서 오십시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별일은 없었소?”
“평안했습니다.”
요동공 이성계가 영구 포구에 하선하자, 좌의정 정도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곧바로 요성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잠시 쉬시겠습니까.”
“잠시 쉬는 게 낫겠군.”
요동공의 결정에 같이 하선한 수행원들을 비롯하여 마중 나온 신료들이 영구군 청사로 향했다.
“혹, 탐라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잠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는 중에 몇 번 눈치를 보던 정도전이 물었다.
“좌의정도 함께 탐라에 다녀왔으면 더 좋았었을 것 같구려.”
“……?”
본디 함께 탐라로 가려 했던 정도전이었지만, 국사가 바쁜 중에 삼정승들 중 가장 실세인 좌의정마저 요동공과 함께 자리를 비우는 건 힘든 일이라 함께하지 못했었다.
정도전은 물은 것과 조금 다른 방향의 대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같이 갔다면 내 혼란한 생각을 좌의정과 나눌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오.”
어쩌다 보니, 요동공의 탐라행차에 고위 신료들은 없었다.
모두 4품 이하의 실무진들이었으니, 요동공이 자신의 심란함을 드러내 그 무게를 덜 만한 이가 없었다.
정도전은 더욱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청사에 들어간 뒤에 긴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청사에 들어간 뒤 먼저 말문을 연 건 요동공이었다.
그는 평의자에 털썩 앉아 몸을 기대고는 따뜻한 차 대신 차가운 물을 청하여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곧바로 말하였다.
“탐라국은 내 예상대로 참으로 부유한 나라더군.”
“그야 이미 잘 알…….”
“그리고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부유한 나라이기도 했고.”
“…….”
요동공은 천천히 그가 직접 본 탐라섬의 백성들이 사는 모습들을 늘어놓았다.
그건 엿새 전 혼삿날에 연회장에서 했던 말의 연장선이기도 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기도 했다.
“대저 우리가 탐라공이 부유하다 함은 그가 곧 탐라의 모든 부를 손에 거머쥐고 있음을 말하였고, 탐라국이 부유하다 함은 그런 탐라공의 자비를 얻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이슬을 맞지 않음을 말하였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게 틀렸네.”
“……?”
“탐라공은 분명 부유하지. 하나 그게 그가 탐라의 모든 부를 손에 거머쥐고 있음과 통하진 않아. 오히려 그는 거머쥔 부조차 놓으려 하고 있었네. 이는 탐라국이 부유하다는 말도 마찬가지일세. 탐라공이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사실이나, 백성들 또한 이미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부자일세. 적어도 개경이나 요동의 백성들보다는 훨씬 더 부자인 게야.”
“…….”
심각한 표정으로 주군을 보던 정도전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궁리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신으로서는 쉬이 그 의미가 짐작되지 않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자네도 같이 갔어야 했다는 말이네. 자네가 아니라면 다른 대관들 중 누구라도 같이 갔어야 했어.”
“…….”
“나는 그간 들어왔던 탐라국에 대한 소문의 실체를, 방원이가 보낸 서찰의 진의를 이번 방문으로 깨달을 수 있었네.”
자중하는 중에 은근히 격앙된 느낌마저 담긴 요동공의 말에 정도전은 일단 주군을 쉬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말문을 열었다.
“소신은 일단 탐라국을 그만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
“아니, 아니야! 그 말이 아니란 말이네!”
쿵!
요동공은 기어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터뜨리며 앞에 놓인 상을 내리쳤고, 놓여 있는 빈 잔이 옆으로 쓰러졌다.
데구루루.
상 위를 구르는 잔을 바라보던 정도전은 시선을 돌려 그의 주군을 쳐다보았다.
“저하, 애초에 이번 혼인부터가 견제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한데 말이야, 그건 우리 사정이고 우리의 착각이었을 뿐, 탐라공은 그리 여기지 않았음이 분명해.”
정도전은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화를 누그러뜨리며 이성계는 마른 목소리를 흘렸다.
“탐라공은 그저 요동국을 포용하고자 할 따름이었어. 방원을 통해 요동을 획책하려는 의도 같은 건 있으나 마나한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
이성계가 말한 획책이란, 방원을 요동국공 차기 보위자로 만드는 걸 의미했고, 탐라공의 의도가 그것이라 짐작했기에 국혼이 견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방원이가 말…… 후우.”
말문을 열다 한숨을 내쉰 요동공은 쓰러진 빈 잔을 잡아 세우곤 손수 주전자의 물을 따라 입안을 다시 축인 뒤, 재차 말을 이었는데, 하려던 말과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좌의정, 자네라면 탐라의 회사령에 대해 알고 있겠지?”
“예,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 회사령의 문장과 달리, 다들 탐라공의 상단을 위한 것이라 단정 짓고 있지. 하나, 아니었네. 나도 몰랐는데, 이미 탐라 구주에도 회사가 있고, 멀리 유구에도 회사가 있다더군. 모두 탐라 상단에 속한 게 아니었네.”
“그랬습니까? 한데, 그 이야기를 왜……?”
“탐라공이 방원이에게 회사를 세워 주려는 모양이네.”
“회, 회사요?”
“아직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논한 건 아니지만, 회사 설립 자체는 이미 약조를 받았다고 하더군.”
혼인 전후로 요동공은 아들 방원과 당연히 여러 번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덕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탐라의 진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도 있었다.
탐라는 하나의 백성들부터가 나라를 이루는 진정한 조각이고, 탐라의 조정은 그 조각을 한데 아울러 큰 그림을 펼칠 줄 알며, 탐라공은 그 그림의 크기를 나날이 넓혀 가고 있었다.
탐라의 물산은 더 했다. 여인들의 손에 쥔 바늘부터 군병들이 지닌 활까지 얼핏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그 하나하나의 물산이 모두 요동에서는 구현할 수조차 없는, 그런 수준에 닿아 있었다.
“그러면서 방원이 말하길, 그렇게 널려 있는 물산조차도 그러한데, 숨기고 지키고 있는 기물의 위력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하였지.”
“…….”
“나더러 그러더군. 요동국의 살길은 탐라국을 견제하는 데 있지 않고, 탐라국을 배우는 데에 있다고.”
“저하…….”
정도전은 문득 요동공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좁아 보임을 느꼈다. 고려 제일의 장수였고, 요동을 개국한 일세의 영웅에게서는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었던 처연함이었다.
“내가 실망스러웠던 건, 방원이의 그 말에 절로 설득이 되었다는 것이었네.”
“저하, 너무 실의하지 마십시오. 요동과 탐라는 서로 다른 곳에 있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입니다. 탐라가 바다에 있어 교역하기 유리하고, 큰 배를 내세워 뽐낼 수 있으나, 뭍에서는 감히 우리 요동을 따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
나름의 위로였으나, 정도전이 말을 마칠 때쯤 그를 바라보는 이성계의 시선에는 일말의 동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탐라섬을 떠나기 전전 날에, 결례를 무릅쓰고 탐라공에게 청하였네, 탐라에서 가장 큰 전투함을 보고 싶다고. 무척 곤란해 하더군. 대신, 탐라의 육군을 보여 주겠다며, 반나절 후 나를 청하였지.”
그날, 이성계가 본 것은 고용병들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수군과 육군을 나눈 건 아니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기에 탐라공은 고용병을 내세워 탐라의 육전 능력을 은근히 자랑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그래도 육전만큼은 요동국이 압도하리라 여겼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고, 여차하면 비웃어 주어 무너졌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세울 생각이었지만, 반나절 만에 준비한 3만 고용병들의 위력 시범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정예함과 잘 갖춘 무장은 요동군에 가져와도 가장 앞설 만한 수준이었네.”
설마 하는 심정이되, 의심하는 기색을 숨기며 정도전은 일단 격동하신 주군을 쉬게 하여 심정을 다스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전에 요동공이 말문을 열었으니, 그가 정도전을 보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나왔다.
“나 또한 회사령을 반포할 생각이네. 방원이의 회사를 요동에 세울 것이야.”
“좀 더 심사숙고를…….”
“방원이 말하길, 회사가 탐라가 가진 부를 모은 갈퀴라 하였고, 그나마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라 하였네.”
정도전은 머릿속으로는 급히 서둘지 말라 청하고 싶었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위기감 탓에 뭐라 조언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의 주군이 가진 심상이 어느새 그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 * *
“즈언하-! 궁중후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개경 왕성 대전 바닥에 한 남자가 부복하여 울고불고 난리 중이었다.
그는 예관시랑 김판술이었으니, 앞서 궁중후와 더불어 탐라행을 완수했음을 보고하고 물러났는데, 얼마 뒤 다시 돌아와 자신이 궁중후에게 얻어맞았다고 이르며 처벌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 귀한 자가 어찌 함부로 손찌검을 할 수 있는 것이옵니까? 게다가 소신은 그저 사실만을 전하였을 뿐인데, 그를 두고 탓한 궁중후를 어찌 전하의 신하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궁중후가 이미 탐라공의 신하임을 드러낸 것이니, 전하께옵서도 그의 역심을 추궁하셔야 하옵니다!”
“시랑은 그만 울고 고개를 들라.”
금상이 옥좌에 조금 삐딱하게 앉아 김판술의 언행을 보다가 명하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며 은근히 좌우로 돌려 보였다.
확실히 그의 양쪽 볼에는 붉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다만, 손찌검 자국처럼 보이진 않았고, 실제로도 따귀를 맞은 건 아니었다. 손에서 벗어 낸 가죽 장갑을 채찍처럼 휘두른 것에 맞은 것이었으니까.
“정녕 궁중후가 그대가 짐에게 고한 것을 탓하며 그리 만들었다는 겐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흐음…….”
체통도 없이 울고불고하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김판술이 얻어맞았다는 게 확실해지자, 금상도 기분이 언짢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앞서 궁중후와 김판술을 알현하는 중에 나눈 대화에서 금상은 김판술의 손을 들어 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궁중후가 김판술의 따귀를 때렸다는 건 곧 금상의 위신을 상하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었고, 대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탐라공의 오만과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나이다.”
“남쪽 변방을 지켜야 할 임무를 수행하는 자가 그저 장사치의 마음으로 고려 전체를 수탈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먹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목민관이고, 어찌 귀한 자로서의 다스림이겠습니까?”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은 응당 전하의 것이고, 모든 영광이 전하 앞에 바쳐져야 함이 마땅하건만, 탐라공은 그저 적선하듯이 적은 양의 공물만을 바치고 있었사옵니다.”
“탐라섬에서 그는 왕이었나이다. 아니, 왕을 넘어서고 있었나이다. 탐라의 백성들이 만세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고, 탐라의 신료들 또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으니, 이것이 전하를 경시하는 행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그에 반해, 궁중후는 분명 탐라공을 두둔한 바 있었다.
“탐라공의 공훈을 잊지 마시옵소서. 그는 요동공과 더불어 고려를 안정시켰고, 전하를 높이 세운 자이옵니다.”
“탐라가 부유한 것은 사실이나,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백성들 또한 풍요를 누르고 있는 것이 진실이옵니다.”
“탐라공이 바치는 공물은 정해진 바가 없는 것으로, 오롯하게 그의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옵니다. 이는 호의이며 충성이지, 의무이거나 강요할 바가 아닌 줄 아뢰나이다.”
“탐라의 일부 어리석은 백성들이 만세를 외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탐라공의 충심을 의심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소신은 탐라의 신료들이 만세를 창하는 백성들을 꾸짖고, 자제시키는 것을 보았으니, 이는 그저 탐라공이 전하를 대신하여 잘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금상은 앞서 있었던 궁중후와 예관시랑의 전혀 다른 말들을 회상하며, 짧게 난 턱수염을 매만졌다.
일그러진 인상은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함을 피력하고 있었다.
가장 못마땅한 건 궁중후가 탐라공을 심히 두둔했다는 점이었다.
작위의 칭호부터가 그는 왕실을 위해야 할 자였고, 사사로이는 그의 장인인 자였다.
설령 김판술의 고함에 과장과 곡해가 있다고 해도, 그의 앞에서 대놓고 탐라공을 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맘에 들지 않는 처사인 것이었다.
한참이나 턱수염을 매만지며 골똘하던 금상은 옅은 한숨과 함께 김판술을 향해 말했다.
“너의 억울함은 잘 알겠다. 내 소상히 살펴 불편부당하게 처리할 터이니, 일단은 물러나라.”
“황공하나이다.”
김판술이 젖은 눈매를 훔치며 물러나자, 금상은 판내시부사 포승을 불렀다.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이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 * *
그저 수풀만 가득했던 구릉지에 변화가 있었다. 일단의 군병들이 초목을 정리하고 군막을 세웠으니, 그 군막의 곁에는 크고 높은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석비 또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본래 이끼가 가득히 앉아 뭐가 뭔지 구별이 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깨끗하게 닦여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석비의 주변에는 나무 구조물이 세워져 여러 군병들이 오르내리며 석비를 청소하고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꽉 잡으시게. 구김 없이 평평하게 붙여야 하네.”
석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무학은 탁본을 뜨기 위해 애쓰는 군병들을 향해 연신 잔소리를 해 댔다.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으니, 그저 크고 높은 석비에 놀랄 뿐이었던 그는 석비가 정돈되어 새겨진 글자를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이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석비의 표면 중 일부에 물을 뿌리고, 한지를 반듯하게 붙이자, 무학이 다시 소리쳤다.
“먹물을 꼭 짜내게. 너무 많이 묻으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야.”
군병이 무명으로 싼 솜뭉치에 먹물을 적시고, 무학의 잔소리대로 양손으로 꼭 짜내었다.
이어 그 솜뭉치로 석비에 붙어 있는 한지 위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는 탁본의 방법 중 습탁(濕拓)이라는 것으로, 탁본할 물건에 직접 먹물을 바른 후 종이를 덮어 모양을 뜨는 건탁(乾拓)에 비해 대상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 이끼를 떼어 내고 청소를 하는 중에 몇몇 군데 표면이 떨어져 안타까워하는 중이었으니, 모두들 그 석비를 더 이상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탁본 작업을 진행 중인데, 문득 발자국 소리와 함께 감태가 수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이곳에 온 뒤로, 주변을 수색하며 묘를 찾고 있었는데, 그 성과가 대단했다.
지금 석비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150미쯤 떨어진 곳에 거대한 석총이 있었으니, 풀과 이끼 때문에 그냥 큰 바위 언덕이라 여기던 것을 능묘라 밝힌 것도 그의 공이었다.
“더 발견했소?”
“네, 엄청 많이 발견했죠.”
“대단하이.”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돌아다니다 좀 뜬금없다 싶으면, 혹은 뭔지 모르게 모여 있다 싶은 언덕이 있으면 대개가 능이었으니까요.”
고려 마을이 있는 곳 주변에 있는 강변 평지나 계곡마다 크고 작은 석총과 능묘가 가득했다.
이번에 다녀온 고려 마을의 북쪽 계곡 안에서도 수십 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녕 이 모든 묘와 비가 전부 옛 고려 왕실의 묘와 비인 게요?”
“그렇습니다. 이미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그 믿기지 않는 사실은, 지금 탁본 중인 석비로 증명되었다.
탁본을 떠서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이미 그 석비가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는 자의 왕릉비이고, 그의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임을 확인했다.
무학은 알지 못하던 왕이었지만, 석비에 그의 선대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었기에, 그 석비의 주인이 추모왕(鄒牟王), 즉 옛 고려의 시조인 고주몽의 17세손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함께 석비와 탁본 작업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무학이 한마디 하였다.
“이 석비에서 내가 새삼 감명 받은 게 무엇인지 아시오?”
“……?”
“영락이라는 연호였소. 옛 고려가 요동의 넓은 땅을 다스렸다는 건 알고 있지만, 중국의 것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썼음을 확인하니, 어쩌면 옛 고려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대한 나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감태도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도 소감을 한마디 뱉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혔을지가 궁금합니다. 이곳도 궁벽한 곳이라곤 하나, 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올 수 있고, 이미 그러하듯 사람들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곳이건만, 이곳에 옛 고려의 묘역이 있음을 수백 년 동안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야루강 너머 깊은 산중에 혹은 그 너머 드넓은 요동 벌판에 우리가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있던 역사가 많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태는 어린 시절 석삼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탐라군병 생활을 힘겹게 시작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시절에 탐라공께서 군사를 위해 내려 주신 지도를 보며 세상은 넓되, 자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음을 아쉬워한 바 있었다.
언젠가 그 지도의 끝자락은 물론, 그 너머에까지 이르러 그 아쉬움을 달래길 바랐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마저도 알지 못하고 있던 게 많았다.
“탁본을 떠서 살핀 후, 그 내용을 세상에 널리 알려……? 어찌 그리 웃으시는 게요?”
“아, 아닙니다. 옛 생각이 잠시 나서요.”
감태는 어린 시절의 각오(?)를 떠올리자니, 자연히 석삼이 아저씨도 생각났다.
어느새 고관대신이 되어 먼 이주섬을 다스리고 있을 그가 문득 보고 싶었다.
* * *
“하면, 삼 일 후 출정이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이주 가남현의 관사에서 석삼은, 점파국에 다녀온 자의 보고를 받고는 눈매에 힘을 주었다.
그들이 점파의 도읍 비자야를 떠날 때, 보름 후인 유월 오 일에 출정한다 하였고, 이주섬까지 오는 데 열두 날이 흘렀음을 감안하니, 이제 때가 되었다 싶었다.
“정지 소령, 출항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오?”
“아닙니다. 내일이라도 출항할 수 있습니다.”
출정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했기에 미리 배에 실어 둘 수 있는 건 다 실어 둔 상태였다.
석삼은 고개를 끄덕여 만족한 반응을 보인 후, 시선을 돌려 한 무족 출신 고용병을 바라보았다.
“야고부 대장(隊長), 고용병들의 상태는 어떤가?”
“아까 정오에 확인한 바로는 세 명을 제외하면 모두 출정에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흠……. 하나, 다시 열흘 이상 선상 생활을 해야 할 테니, 심신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작전에서 제외해야 하네. 괜히 억지로 나섰다가 배 위에서 탈이라도 나면 오히려 짐만 될 뿐이야.”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다시금 철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고용병대를 이끄는 야고부의 대답을 들은 석삼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교들을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내일 준비되는 대로 출항할 것이오. 탐라공께서 원하시는 것은 안남 왕실의 인사들을 모조리 이주로 데려오는 것이고, 그 과정에 우리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오. 이미 시계가 세워져 있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장교들의 임기와 응변이 요구될 것인 바, 이에 모두들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사시 정각에 가남현에서 탐라 함대가 출항하니, 12척의 경함선으로 이뤄진 함대에는 고용병 1천 명이 승선하였다.
이후, 열흘 가까이 항해하여 홍강 하구 근방의 깟바 섬에 닿았고, 그곳에서 첨병을 보내 점파와 안남 간의 전황을 살펴보았다.
전황의 대개는 예상과 같았다.
비나수르 왕이 이끄는 점파의 군대가 초전부터 여계리의 안남 군대를 박살 내었고, 안남군이 다시 군세를 추스르는 사이에 점파군은 홍강 하류의 평야 지대를 휩쓸며 약탈하는 중이었다.
다만, 한 가지 예상과 다른 게 있었으니, 그것이 석삼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었다.
“아니, 안남왕이 갑자기 미쳤나?! 지금까지 안 그러더니만, 왜 이번에는 직접 출정하고 지랄인 게야!”
안남의 왕이 승룡성에 머무는 대신, 여계리와 함께 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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