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15)
* * *
“이미 죽였소.”
“…….”
석삼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곳은 홍강 하류 지역의 거점 고을이자, 안남 남부의 군사 중심지인 남정(南定 : Nanh dinh)이었고, 석삼에게 대수롭지 않게 답한 자는 참파의 비나수르 왕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였다고 말한 자는 안남왕 진현(陳晛 : Tran Hien)이었다.
그러니까, 느닷없이 여계리와 더불어 출정하는 바람에 석삼의 골치를 아프게 했던 스물다섯 살짜리 안남왕이 두 번째로 점파의 군대와 맞붙은 전투에서 사로잡혔고, 벌써 목이 달아났다는 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큰 문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석삼이 남정으로 온 건, 점파군이 남정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나수르 왕에게 안남왕의 생포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오자마자 남정을 수복하려는 안남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점파군 사이의 전투가 있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안남왕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혹시 이번 전쟁 중에 고려가 따로 의도한 바가 있었던 게요?”
“…….”
비나수르 왕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석삼을 바라보곤 그렇게 물었으니, 다소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나수르 왕에게 고려의 작전을 밝히진 않았다.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가 달린 ‘비밀성’ 때문이었다.
석삼은 자칫 도와주고 미운 털이 박힐 수 있는 상황임을 인식하곤 표정을 바꿔 웃으며 말하였다.
“딱히 의도라고 할 건 없었습니다. 다만, 저희도 적은 군세지만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왔는데, 이미 안남왕의 목을 치셨다 하니, 다 끝났구나 싶었을 뿐입니다. 좀 김이 빠졌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하하, 그런 거라면 내가 미안하구려. 우리 군이 정예한대다가 고려의 지원으로 싸우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니, 천하무적에 이르렀지 뭐요.”
석삼은 비나수르 왕과 화통하게 웃음을 나누었지만, 속내는 쓰라릴 뿐이었다.
이는 안남왕이 죽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안남의 군대와 함께 있었음을 생각하면, 전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작전의 목적은 왕실 인사들을 데려가는 데에 있고, 죽은 자는 없는 셈치면 그만이니까.
안남왕이 전사할 줄 알았다면, 석삼은 그대로 작전을 결행했을 것이고, 그걸로 족했을 것이다.
하나, 그걸 알 수 없었던 석삼은 고민 끝에 비나수르 왕을 만나러 왔고, 이제 점파왕이 고려의 군대가 비록 적을지라도 안남에 닿아 있음을 알게 되니, 이는 장차 안남 왕실이 사라지면 고려가 한 일임을 의심받을 가능성도 높아진 것이었다.
하여, 석삼은 겉으로는 비나수르 왕과 점파국의 기세등등함을 두고 좋은 말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고려에 가장 득이 되는 상황이 될지를 궁리해야 했다.
그렇게 입과 머리가 따로 놀기를 한참 후, 석삼이 대접받은 점파국의 전통 곡물주인 르어우 껑(ruou can)을 한 모금 하곤 물었다.
“전하께서는 이참에 안남을 병탄하실 각오십니까?”
“물론이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겠소.”
비나수르 왕은 세 번이나 안남의 도읍을 점령하고서도 안남을 복속시킬 수 없었다. 이는 병력의 부족으로 도읍을 점령하는 중에 왕을 사로잡지 못한 탓이었다.
안남왕이 서북부 산악지방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항쟁하면, 여러모로 힘이 부족한 점파로서는 오랫동안 싸울 수 없기에 약간의 영토를 얻는 수준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고려의 도움으로 많은 병력과 군량을 가지고 왔고, 심지어 안남왕을 전장에서 사로잡아 처형하기도 했으니, 이번이야말로 안남을 완전히 복속할 기회였다.
“하면, 진씨 왕실도 처리하시겠군요. 그리고 여씨 가문도 마찬가지겠고요.”
“그야 두말할 것 없지 않겠소.”
왕가를 제거하고, 안남 최대의 권력가인 여씨도 정리해야 진정 안남을 병탄하는 것이었다.
“하면, 여씨 일가 중 여아부라는 자와 그 직계 가족들은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죽어도 무방합니다.”
“흠? 여아부라면 나도 이름을 들어 본 안남의 고관인데, 고려가 그에게 원한이 있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 있어 삼가야 하니, 이해해 주십시오.”
석삼은 전에 고려가 안남에 원한이 있음을 핑계 댄 걸로 다시 둘러대었다.
비나수르 왕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서 보내 달라고 했다면 뭔가 의심할 바 있었겠지만, 죽어도 무방하다 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좋소. 가능한 살려서 고려에서 그를 처리할 수 있게 해 보겠소.”
“이 외신(外臣),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석삼이 비나수르 앞에서 물러난 건 한 시진 정도 더 뒤의 일이나, 용건은 그것으로 끝났다.
탐라의 입장에서 점파와 안남 사이의 일은 결국 안남왕과 여아부가 아는, 탐라의 이주 정복 사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좋은 건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이고, 입을 막는 데에는 죽음보다 더 확실한 건 없는 법이었다.
전에 여아부와의 대화로 짐작하자면, 다행히 안남왕과 여아부만 탐라의 이주 정복에 대해 아는 것 같았다. 그들도 비밀리에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아부만 죽이면 상황이 끝나는 셈이었다.
다만, 너무 대놓고 여아부를 죽여 달라 하면 비나수르 왕이 의심을 갖고 여아부를 먼저 심문하려 할 수도 있기에, 일부러 죽이든 살리든 보내만 달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었다.
나름 이주섬에서 오래 지내면서 몇 번이나 만나 익숙해진 여아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안남왕이 죽은 이상 그와의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대의 이름이 충신으로 남는 걸로 만족하시오, 여아부.’
그날 이후, 고려군 중 일부가 내내 점파국의 군중에 남아 따르니, 열흘 뒤 승룡성이 마침내 떨어질 때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비나수르 왕의 의도대로 이번에는 안남왕가가 도주하지 못하였으니, 승룡성이 떨어지자마자 성을 범한 점파군병들에 의해 왕실 인사와 관리들이 하나하나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여아부도 있었다. 그는 몸도 약한 주제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면서 왕실을 보호하려 했는지 가슴에 칼을 길게 맞아 죽어 가고 있었다.
석삼이 그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고, 쓰러져 누운 채 가물가물하던 그의 눈이 석삼을 확인하는 순간, 크게 홉떠지는 걸 볼 수 있었다.
핏물로 목욕을 한가운데에서도 그는 무어라 말하려고 힘겹게 든 손을 뻗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유언일까, 원망일까.
유언이라면 그의 가족에 대한 것일까, 안남 왕실을 향한 것일까.
원망이라면 약속을 어긴 고려를 향한 원망일까, 아니면 이 모양 이 꼴로 몰락하게 된 모국을 향한 원망일까.
석삼은 잠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다. 하나, 비나수르 왕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걸 느낀 석삼은 고개를 돌려 고용병에게 턱짓으로 명하였다.
스릉, 환도를 뽑은 고용병은 서슴없이 여아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촤학!
쾌속으로 날붙이가 지나간 뒤로, 목이 갈린 자리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하나,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뒤인 탓인지, 핏물마저도 한 차례 뿜어진 뒤엔 그저 줄줄 흐를 뿐이었다.
“여기서 죽여도 되는 거요?”
두 명의 역관이 명나라 말과 고려 말을 거쳐 비나수르 왕의 말을 전해 줄 때, 여아부의 눈빛에서는 이미 생기가 사라져 버렸다.
“이미 죽을 게 확실한 상태인데, 차라리 죽여서 시신을 가져가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하면, 이자의 가족들도 죽여 데려갈 것이오?”
“가족들은 살았습니까?”
“나도 아직은 모르오. 다만, 일반 백성들, 특히 여자와 아이들에게는 가급적 해를 가하지 말라 명하였으니, 너무 반항하지 않았다면 모두 산 채로 잡힐 것이오.”
하나, 성내가 정리된 후 확인한 여아부의 가족들 중에서 산 자는 여아부의 어린 손자, 손녀 둘뿐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겁먹은 큰 눈을 껌벅이면서도, 7살 동생을 뒤로 숨긴 채 자신을 보는 10살 사내아이를 향해 묻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아이가 답하였다.
“저는 레까인이고, 여동생의 이름은 레미툭입니다.”
고려식으로는 여경(黎煚), 여미숙(黎美淑) 남매였다.
“나는 고려에서 왔다. 너희는 나와 같이 가야겠다.”
“…….”
“여기에 남고 싶으냐? 원하면 그리해 주마.”
“아닙니다…….”
여경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답하였다.
석삼이 두 남매를 데리고 다시 배에 올랐을 때, 비나수르 왕은 도망친 여계리를 쫓는 한편, 정복한 안남 땅을 다스릴 준비로 몹시 바빴다.
* * *
몽주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 있었다.
오랜만에 탐라섬의 여러 공소를 돌아다니며 시찰하니, 공소마다 가득한 활기에 전염된 덕이었다.
물론, 비단 활기나 보람 같은 무형의 가치뿐만 아니라, 새로운 물산이라는 유형한 가치도 확인한 덕이기도 했다.
일단 만년필의 시제품이 나왔다. 주재료는 황동으로, 작은 용수철에 쓰인 강철을 제외하면 기본 재료 전체가 황동이었다.
기본 구조는 먹통과 연결된 축과 필촉(펜촉)이 모세관 현상을 통해 먹물을 스며들게 하고, 필기 압력으로 필촉과 축 사이가 벌어지면 먹물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마차 ‘쇼바’(쇼크 서스펜션)에 쓰인 판막 공압 기술을 응용한, 용수철 탄성에 의한 작은 반부(펌프)가 달려 있으니, 펜촉을 먹물에 담아 먹통을 눌렀다 떼면 먹물을 먹통 안으로 빨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검은 ‘잉크’도 개량되어 철가루와 황, 그리고 오배자(五倍子)라는 옻나무에 기생하는 벌레의 집을 말린 가루 등을 섞어 만들었는데, 그렇게 나온 푸른색이 감도는 그 검은 액은 후에 ‘오귀액(烏鬼液)’, 까마귀 귀신물이라 불렸다.
몽주도 직접 그 만년필을 시험해 보았는데, 고무나 플라스틱이 없는 탓에 다소 무거운 느낌은 있지만 이내 익숙해질 수 있었다.
어쨌든 다음해부터 장부를 포함하여 관부와 탐라 상단에서 쓰이는 모든 녹계의 최종 기록은 반드시 오귀액을 쓰는 만년필로 하게 명함으로써, 기록의 조작이나 훼손을 어렵게 함과 동시에 만년필의 시장성을 키우고자 하였다.
여러 공소를 돌아보는 중에 몽주에게 기대치 않은 기쁨을 준 건 두 가지 야금 기술로, 굳이 분류하자면 ‘리벳’과 용접에 해당하는 기술이었다.
리벳(rivet)은 금속을 결합시키는 막대 모양의 금속체를 말하는 것으로, 두 개의 판에 구멍을 낸 다음, 그 구멍으로 리벳을 넣고 망치질하여 구멍에 꽉 차게 변형 및 고정함으로써 판을 결합하는 식으로 쓰였다.
다리 철강 구조에서 보면 마치 나사와 볼트로 조인 것처럼 보이는 게 바로 리벳 결합이었다.
물론, 당대에 구현한 ‘쇠막질(리벳 결합)’은 상당히 난이도 있는 야금술이라 널리 쓰이지는 못하고, 주물로 한계가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용접도 마찬가지로 전기나 가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가운데, 당대 고려의 용접은 쇳물이나 발갛게 달군 얇고 작은 금속 조각으로 금속물을 붙이는 식이었다.
본디 예전 대장간에서 무쇠를 직접 숯불에 달궈 붙이는 방법이 쓰이긴 했지만, 강철을 그런 식으로 하면 달궈진 부분이 주철화되어 쉽게 깨지기 때문에 따로 강철 쇳물이나 달군 강철 조각을 이용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쓰기 힘든 방법이지만, 이 또한 ‘쇠막질’처럼 제한적으로나마 강철 구조물의 결합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기술이었다.
사실 그 두 기술이 흥미로웠던 건 몽주에게도 보고가 되지 않은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결과물 자체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 아닌 터라, 그저 공소의 장인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퍼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흐뭇해하는 몽주가 지금 발길을 옮긴 공소는 유리 공소였으니, 아주 기대가 큰 곳이었다.
왜냐하면 ‘렌즈’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오호, 이것들인가?”
“예, 저하, 이쪽이 볼록 유립고, 저쪽이 오목 유립지요.”
공소장이 영광 어린 표정으로 얼른 볼록 유리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고운 천으로 감긴 원형 ‘볼록 렌즈’의 크기는 직경이 약 10세미였고, 양쪽이 아닌, 한쪽으로만 볼록한 유리였다.
“회전을 이용해서 만들었다지?”
“네, 그렇습니다. 밑이 둥근 그릇에 녹인 주석을 넣고, 그 위에 유리를 부은 후, 회전시키면 원심력으로 바깥으로 몰리면서 아래로 볼록한 형태로 유리가 성형됩니다요.”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해 보면 절대 쉬울 리가 없는 작업일 것이다.
원심력을 골고루 보내기 위해 기계적으로도 정밀해야겠지만, 장인의 솜씨도 좋아야 했다.
특히 원심력을 이용하면 가운데가 절로 파이게 되니, 이를 막기 위해서 녹은 유리가 굳는 내내 일일이 손을 봐 줘야 했다.
“하면, 저 오목 유리는 어찌 만들었는가?”
“똑같이 원심력을 이용했습지요. 다만, 오목 유리의 경우에는 미리 굳힌 밑이 평평한 주석통에 유리액을 붓고 원심력으로 가운데를 오목하게 만든 후, 다 굳으면 그때 다시 아래에서 가열하여 주석과 유리를 분리했습죠.”
“아, 그랬군. 장하네.”
몽주가 공소장의 어깨를 두드리곤 주변에 모인 공소 장인들을 둘러보며 상찬하자, 모두 허리를 숙이며 황송해하였다.
그 직후에 한 장인이 조심스레 무언가를 가져오니, 비단에 쌓인 걸 풀자, 몽주가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물건이 있었다.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요. 건너편 목공소 바치 녀석들하고 합작한 게지요.”
“이런, 아주 감격스럽군.”
방긋 웃음 지은 몽주는 손에 쥔 물건을 조작하였다. 두 개의 크고 작은 원통이 연결된 그 물건은 ‘망원경’이었다.
볼록 유리를 대물렌즈 삼고, 오목 유리를 접안 렌즈 삼은 기초적인 망원경.
몽주는 공소 입구 쪽을 향해 망원경을 겨누고 눈으로 살폈다.
“음, 허허허.”
입구 바깥쪽에 놓인 수레가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략 7, 8배율쯤일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현대에서 소위 ‘해적 망원경’이라고 팔리는 3단 망원경이 15배율이니, 처음 제작한 것치곤 쓸 만했다.
다만, 품질이 좋은 건 아니었다. 역시나 렌즈의 곡면이 완벽하지 않아 피사체가 일렁거리거나 부분적으로 초점이 흐려졌고, 지금 생산할 수 있는 가장 질 좋은 유리액을 썼지만 여전히 불순물이 많아 선명함이 떨어졌다.
“어르신도 좀 써 보시죠.”
“하하, 나야 이미 해 봤지. 자네가 해 보게.”
내내 조용히 따르기만 하던 화극이 건네받은 망원경을 군관대신 탁기에게 건넸다.
그는 기대 어린 표정으로 주군이 한 것처럼 눈에 붙여 겨누다가 뭐가 잘 안 되는지 원통을 앞뒤로 움직이더니, 이내 ‘오!’하는 감탄과 함께 즐겁게 여기저리 망원경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거 대단하군요. 고작 몇 배 더 커 보인다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군사에도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아이쿠, 자네 콧구멍도 크게 보이는군. 흉해.”
탁기가 보이는 인상과 달리 상당히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면서 망원경을 가지고 놀자, 몽주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망원경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에 몽주는 유리 공소의 장인들에게 ‘렌즈’에 대해 물었다.
“아직은 곡면이 일정하지 않은데, 개선의 여지가 있겠나?”
“지금으로서는 손기술이 좋아지길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유리 표면을 갈아서 손을 보면 조금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저하께서 바라시는 방법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공소장의 말대로 완전 수작업은 원치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이미 망원경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역사에서 그랬듯 질 좋은 수정을 구해 갈아서 만들면 되니까.
하나, 그건 몹시 구하기 어려운 것일 터, 몽주가 바라는 탐라의 물산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생산량을 갖춘 것이었다.
“가능한 최대 수준까지 기능을 높일 수 있도록 해 주게.”
장인들을 격려 한 몽주는 화극과도 상의하여, 망원경 외 돋보기 형태의 물산도 만들 것을 요청했다.
이 시대 사람들의 시력은 현대인에 비해 좋았지만, 노인성 원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돋보기나 외줄 안경 등으로 그들에게 편리를 주고자 하였다.
“안 그래도 나도 볼록 유리를 보니 나 같은 노인네에게 좋겠다 싶었네.”
“……눈이 침침하십니까?”
“요새 좀 그렇더군. 하기야 내 나이가 벌써 몇인가?”
작년에 환갑잔치를 했으니, 역사대로라면 이제 살 날이 10년 정도 남았을 뿐이었다.
“왠지 슬프네요.”
“허허, 슬프긴, 다 그런 거지. 자, 여기 다 봤으면, 이제 내 새끼 보러 가야지.”
* * *
화극 어른의 ‘내 새끼’는 물론 연발 강선 소총이었다.
처음 화극이 자랑스럽게 선보인 이후 2년여의 시간 동안 개량된 그 화기는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리볼버가 있고 숯통이 있는 건 여전하지만, 방포를 위한 기계적 장치와 방포 편의성을 더하다 보니, 생김새는 근대식 라이플총과 유사해졌다.
참고로 총(銃)이라는 용어와 총과 포의 구분도 이미 지었다.
기본적으로 구경이 큰 것은 포, 작은 것은 총이라 하고, 그 기준을 20밀미로 삼은 것이다.
다만, 기준을 넘더라도 목표를 직접 겨눠 직사 형태로 공격하는 무기는 총, 탄도를 계산하여 곡사 형태로 공격하는 무기는 포로 부르기로 예외를 두었다.
다소 애매해질 수도 있는 기준이었지만, 당대에서는 어차피 구경에 따라 나뉘게 될 일이었다.
더불어, 지금 개발하는 총을 소총(小銃)이라 분류하였는데, 본디 더 큰 구경의 총을 개발하던 걸 작게 만든 탓에 화극도 소총이라는 분류에 쉽게 동의하였다.
몽주, 화극, 탁기, 세 사람은 마차를 타고 군기청의 비밀 공소로 향했으니, 그 소총의 개발을 위해 따로 두무악 중턱 산중에 새로 만든 곳이었다.
화극이나 몽주는 물론, 탁기도 개발 과정에 참여하면서 그 소총의 원리나 장단점 등은 모두 파악한 상태였기에 소총을 보고 요란스러울 자는 없었다.
세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공소 내 시험장에서 최종 방포 시험이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안전성에 대한 의심 탓에 사람 대신 기구에 고정시켜 놓고 멀리 떨어져 방포하였는데, 지금은 사실상 최종 완성된 상태인 터라 차출되어 시험 방포를 전담하는 군병 두 명이 직접 방포하였다.
탕! 탕! 탕!
몽주 일행과 군기청 장인들의 관람하에 소총은 대략 1초 간격으로 10발이 연속 방포되었고, 직후에 보조하는 군병이 미리 장약해 둔 회전 자포(리볼버)로 빈 자포를 교체해 주었다.
다시 방포.
탕! 탕! 탕!
두 번째 연발 방포가 끝나고, 세 번째, 네 번째 방포가 이어진 후 다섯 번째 방포에서 드디어(?) 총에 문제가 발생했다.
역시나 가장 취약한 부품인 공이(가열된 바늘)가 부러진 것이다.
이제껏 시험 방포하면 대개가 50발 안팎에서 문제가 생겼다.
맨 처음 겨우 2, 30발 정도 견딜 때보다는 발전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공이를 두껍게 만들면 더 버티겠지만, 그만큼 가열되는 시간이 길어져 교체 후에도 한동안 방포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어느 정도 향상한 수준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여분의 공이를 소지하게 하여 필요할 때마다 빨리 교체할 수 있게 하기로 하였다.
유효 살상 거리도 500미에 이르러 만족할 만했다. 다만 탄두가 1세미로 여전히 큰 만큼 500미 이후에는 급격히 위력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본래 탄환을 더 작게 만들 생각도 있었지만, 당대의 전장에서 쓰이는 갑옷이나, 군마를 생각하면 지금은 탄두 하나의 위력을 높이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어 더 소형화하는 건 피하였다.
“그 강선이라는 게 이처럼 탄도를 안정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탁기는 시험 방포하는 전방에 놓인 과녁에 시선을 두며 말하였다.
대략 100미 떨어진 곳에 세워진 과녁에는 총탄 자국이 오순도순 모여 있었다.
지금 시험 방포하는 총열의 안에는 3조의 강선이 있었다. 그리 깊게 파이진 않았는데, 이는 강선을 파는 기술의 한계 탓도 있지만, 탄두를 총열에 꽉 물릴 수 없기 때문에 강선의 파임으로 폭압이 새어 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었고, 화전 자포에 빠져나간 탄환이 총열에 진입할 때, 강선홈과의 마찰로 부서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물론, 몽주의 시선에서 그 소총의 정확도는 아주 아쉬운 수준이었다.
정확도를 더 높일 수 있는 기술이 얼마든지 있고, 그 대부분이 구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총열을 총열 덮개와 분리시켜서 방포 시 폭발 진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다.
몽주도 소총에 대한 자료를 보고 익히면서 알게 된 건데, 현대의 총기는 기본적으로 총열과 그 덮개가 서로 붙어 있지 않게 되어 있었다.
총열에 무언가 붙어 있거나 닿아 있으면 발포 시 총열의 진동에 장애를 주어 순간적으로 총열이 휘는 효과를 야기하고, 그로 인해 탄도가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 몽주는 그런 기술을 밝히는 건 나중으로 미루었으니, 그것을 구현한다고 해서 정확도를 낮추는 다른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강선의 효과를 크게 보지 못하는 것이나, 숯통의 진퇴로 인한 흔들림 등이 그런 한계였다.
하여, 차라리 그냥 좀 더 쉽게 제조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다시 50발 가량의 방포가 있은 후, 세 사람은 직접 그 총의 곁으로 다가갔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건 숯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100발이나 연달아 쏜 탓이었다.
“방아쇠의 느낌은 어떤가?”
몽주가 시험 방포를 한 군병에게 물으니, 그가 부동자세를 취하며 답하였다.
“여전히 묵직한 편이나 필요한 힘은 줄었습니다.”
“고장은 없었고?”
“없었습니다. 최근에 고장을 경험한 건 공이뿐입니다.”
처음 화극이 그 총을 선보였을 때는 방아쇠 대신 ‘레버’를 앞뒤로 움직이는 식이었고, 회전 자포도 따로 손으로 돌려 맞추어야 했다.
그걸 1차로 개량하여 방아쇠 대신 타륜형 손잡이를 돌려 회전자포와 연결되어 움직이게 하였는데, 기계적인 작동성은 좋았지만, 조준과 견착 등 방포 용이성은 떨어졌다.
하여, 방아쇠의 형식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무거운 숯통의 진퇴와 커다란 회전 자포의 회전 전부를 방아쇠를 당기고, 미는 손가락 힘에만 의존해야 해서 연달아 쏘면 손가락이 뻐근할 정도였다.
하여, 지렛대의 원리와 용수철의 힘을 빌리도록 다시 개조했으니, 이제는 방아쇠를 밀 필요는 없이 당기기만 하면 회전 자포와 숯통이 움직여 다음 방포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그만큼 부품이 많아지고, 제작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지만, 여러 번 섬세하게 다듬은 결과, 고장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한 정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화극을 향해 묻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하길 한 달에 20정 정도가 한계라고 하였다.
“음, 좀 느리긴 하군요.”
“물론, 내가 말한 건 현재 인력을 늘리지 않는 선에서 그렇다는 말이네.”
“현재 생산에 투입된 인력이 몇이나 되죠?”
“전담하는 장인이 스물에, 다른 공소에 있는 자들이 열다섯 명쯤 되지. 물론, 그 열다섯 명 모두가 이 총의 제작에만 열중하는 건 아니네.”
거기다가 따로 종이 탄피 탄약까지 제작하는 걸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할 판이었다.
“생산 속도도 그렇고 위력도 그렇고, 모든 군병에게 쓰게 하기는 무리인 듯싶습니다.”
탁기의 말대로 처음에는 지원 화기 형태, 즉 기관총의 역할로 써야 할 듯했다.
사실, 애초에 소총의 크기와 무게부터가 혼자 쓰기에는 다소 버거웠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소총은 아니었다.
“한데, 이 소총의 명칭은 뭐로 정하겠나?”
“화극이라고 하죠. 화극소총.”
그에 화극이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너무 좋아하진 마십시오. 나중에 어린 군병들이 어르신 아호(雅號)를 막 부를 테니까요. 야, 화극 가져와. 빌어먹을, 화극이 또 고장이야. 뭐, 이런 식으로요.”
“…….”
“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