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16)
몽주가 보고만으로도 상당 부분 파악이 가능함에도 직접 여러 공소들을 돌아본 이유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지금 탐라의 기술적 역량을 보다 정확히 가늠하고자 함이었다.
그건 첫 천몽 전이나, 그 이후나 똑같이 반복된 기술 경로의 변화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의 역사에서 똑같이 구현된 기술의 경로임을 생각하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도 있고, 그만큼 ‘경로의존성’이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컴퓨터 키보드의 배열에 더 효율적인 방식이 나와도 계속 qwerty 배열이 쓰이는 것처럼, 더 편한 한글 3벌식 자판이 나와도 계속 2벌식 자판이 쓰이는 것처럼 한번 정해진 경로는 그 자체로 변화를 거부하는 힘이 있는 법이다.
동력 기술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에서 쓰이는 내/외연 기관 및 모터 방식이 수많은 변화를 거침에도 기본적으로는 처음 대세를 이룬 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런 경로의존성 때문일 것이다.
그 덕에 중간에 등장한 수많은, 더 효율적인 기관과 모터 방식들, 예컨대 테슬라 터빈(tesla turbine)이나 베디니 모터(bedini motor) 같은 기술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된 바 있었다.
물론, 그런 기술들도 만약 당대 존재하는 다른 기관이나 모터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면 얼마든지 도입되어 쓰였을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중간에 나온 동력 기술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 내지 약점이 있어, 기존의 동력기와 경쟁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생기는 건, 현대에서 대세로 쓰이는 동력 기술들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매우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그 후에 수많은 시간에 걸쳐, 수많은 투자를 통해 그 기술들을 개량 발전했던 바 있기에, 만약 중간에 등장했던 기술들도 그처럼 똑같이 많은 시간과 비용의 투자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 동력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스털링 기관(stirling engine)이었다.
다만, 스털링 기관이 다른 사장된 동력 기술과 구별되는 것은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몇 번이나 재등장하여 20세기부터는 제한적인 영역에서나마 실제로 쓰였다는 점이었다.
이는 그만큼 스털링 기관이 효율적이고, 기술적으로 숙성시킬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의미였다.
스털링 기관은 증기 기관이 한창 발전 중이던 1816년에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스털링(Robert Stirling)이라는 목사가 고안한 기관으로, 폭발이나 분출 없이, 가열-팽창-냉각-수축의 4행정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당시 많은 사고를 일으키는 증기 기관을 대체하고자 만든 것인데, 증기 기관과 이후 등장한 내연 기관의 발전에 밀려 사장되었고, 장난감 용도로나 쓰였다.
하나, 그럼에도 스털링 기관은 여러 장점들 덕에 끊임없이 실용화 시도가 있었다.
소음과 오염 물질 배출이 훨씬 적고, 다양한 연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더해, 무엇보다 열역학적으로 가장 고효율의 기관이라는 점이 인류 문명으로 하여금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물론, 한 가지 결정적인 단점 탓에 보편적으로 쓰이지 못하였는데, 크기 대비 출력(마력)이 낮은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증기 기관 및 내연 기관과 비교하자면…….
증기 기관이 고용량 – 고출력 – 저효율.
내연 기관이 저용량 – 저출력 – 저효율.
스털링 기관은 고용량 – 저출력 – 고효율인 셈이었다.
그리고 출력이 시간 단위로 계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스털링 기관은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을 이길 수 없었다.
돈을 버는 것에 비유하자면, 스털링 기관이 1백만 원을 알뜰하게 굴려 2백만 원을 얻는 것이고,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은 1억 원을 굴려 1억 1천만 원을 얻는 것이었다.
즉, ‘이익률’이야 스털링 기관이 높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익의 규모’는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이 훨씬 더 큰 것이다.
하나, 앞서 언급했듯 이와 같은 비교는 오랫동안 발전된 증기 기관(현대에서는 증기 터빈) 및 내연 기관과 좀처럼 연구되지 못한 스털링 기관을 비교한 것이었고, 발전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스털링 기관에게 불리한 비교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간간이 연구되어 힘겹게 발전한 스털링 기관은 더는 저출력이라고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대에서 두신이 몽주에게 14, 15세기에서 노력해 주면 기술의 역사도 바뀐다고 주장한 건, 역사와 반대로 스털링 기관에 먼저 발전의 기회를 주어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게 유도하자는 말이었다.
이는 당연히 효율적인 동력 기관을 이용함으로써 탐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현대인으로서의 욕심이 기인한 바도 컸다.
효율이 좋다는 건, 그것도 높아 봐야 2, 30퍼센트대 효율을 가진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에 비해 두 배 안팎으로 효율이 좋다는 건, 동등한 출력을 낼 수 있을 경우에는 연료를 절반만 소모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자원의 소비량이 적다는 말이고, 연료 소모 시 발생하는 오염 물질의 배출도 그만큼 적을 테니, 현대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자원 부족과 환경 오염을 그만큼 덜 겪게 된다는 뜻이었다.
특히, 환경 오염은 자연의 복원 능력을 생각하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 이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자연히 욕심이 날 만한 일이었다.
몽주도 어차피 천몽이 끝나면 현대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니, 새롭게 바뀐 그 세상의 환경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황으로 바뀌는 걸 바라마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시대가 증기 기관이라도 있는 시대였다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은 가장 초보적인 증기 기관의 등장까지도 1백 년 이상 남은 시대이지 않은가.
그것이 몽주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그 상자에 숯을 담게.”
몽주가 명을 내리자, 장인들 중 하나가 설치된 구조물 한쪽에 달린 철 상자 안에 바짝 달군 숯을 한가득 담았다.
그곳은 철공소 중 한 곳으로, 몽주가 설계도를 내려 만들게 한 철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주 간단한 구조로, 속이 빈 철봉이 연결된 것에 불과했다. 이미 ‘파이프’는 여러 곳에 쓰이고 있는지라, 철봉이나 동봉 같은 건 많이 제작되고 있었고, 90도로 꺾여 있는 연결 부품도 쓰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철봉 구조물은 ‘ㄴ’자와 ‘ㅁ’자를 아랫변에 맞춰 붙이고, ‘ㅁ’자 바닥 봉 중간에 다시 철봉을 연결하여 아래로 빠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래로 빠진 철봉은 물이 가득 찬 큰 통에 담겨 있었다.
“위로 솟은 봉에 반부를 연결하여 물을 끌어올리게.”
몽주가 명하자, 장인들이 준비해 둔 반부를 연결하여 ‘펌프질’을 하자 이내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상태는 철 구조물 안에 물이 가득 찬 상태였고, 몽주는 물통에 담긴 철봉을 들어 올려 물을 조금 빼라고 명하였다.
장인들이 명에 따라 철 구조물을 들어 올리자,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물이 어느 정도 빠지자 몽주는 다시 통에 담으라 하면서 ‘ㄴ’자 철봉의 세로 봉 안으로 미리 준비해 둔 철 구슬을 넣으라 하였다.
그러자 그 세로 봉 중간에 조금 좁게 된 곳에 구슬이 걸리면서 봉을 막았고, 기압으로 인해 철 구조물 안에 절반쯤 물이 찬 상태가 유지되었다.
몽주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게 하는 사이, 숯이 들어 있는 철 상자는 ‘ㄴ’자의 맞은편, ‘ㅁ’자의 세로 철봉에 붙어, 열기로 철봉을 데우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장인들도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의아해 할 때, 갑자기 ‘ㄴ’자 철봉의 끝에서 물이 솟았다.
쭈욱, 쭈욱, 쭈욱…….
마치 반부로 물을 끌어올리듯, 단선적으로 물이 계속 토해지자 장인들이 당황하여 어찌 된 영문인지 알려고 난리였지만, 그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반부 역할을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으니, 그저 작은 구슬 하나와 숯불의 열기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몽주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현대에서 미리 제작해서 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지 한쪽을 가열하여 온도차를 두는 것만으로도 내부의 유체가 움직이는 건 여전히 신기한 일이었다.
몽주가 선보인 건 플루다인 펌프(fluidyne pump)라는 것으로, 스털링 기관의 일종이자, 더 정확히 말하면 스털링 기관의 원리를 이용한 펌프였다.
봉 안의 물이 스털링 기관의 피스톤 역할하는 것이니, 만약 플루다인 펌프의 원리를 깨우친다면, 자연히 스털링 기관의 원리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다들 궁금한가?”
몽주가 미소 띠며 묻자, 장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숙이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자, 이제부터 내 원리를 가르쳐 줄 터이니, 잘 듣고 이해하려 애를 써 보시게.”
몽주는 종이 위에 연필로 플루다인 펌프의 구조를 그리고 물과 공기가 가열됨에 따라 어떻게 팽창하고 수축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이론은 간단하나,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사이에도 철봉 구조물에서는 연신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야, 여기!”
“이쪽! 오! 잘 찼어!”
사내아이들이 소리치며 움직이는 사이로 축국공이 오고갔다.
하굣길에 공을 차 서로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건 10살짜리 사내아이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 한 무리의 사내아이들 중에는 홍구도 있었다.
그도 나름 열심히 움직이며 자신에게 공이 올 걸 대비하였다.
하나, 그에게는 좀처럼 공이 오지 않았다.
“야, 나도! 나한테도 좀 차 봐!”
연신 소리치지만, ‘개발’로 공인된 그에게 공을 전달하려는 아이는 없…….
“자, 홍구! 받아!”
그때, 한 아이가 아까부터 홍구의 말에 귀 기울이더니 홍구 쪽으로 공을 툭 밀어 주었다.
곱게 굴러 오는 공은 차기 딱 알맞았다. 하나, 홍구는 고대하던 공이 자신에게 온 탓에 긴장했는지, 아니면 자타공인하듯 ‘개발’의 운명 탓인지, 힘껏 휘두른 그의 발에 맞은 공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날아갔다.
“으…….”
“아, 홍구 저 개발 자식……!”
“얌마! 저기로 차면 어떡해?!”
“…….”
홍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름 연습도 했는데, 이놈의 발은 왜 제 주인의 명령대로 움직이질 않는지…….
그사이 아이들이 몰려와 홍구에게 왜 멍청하게 가만히 있냐고, 얼른 가서 공을 주워 오라고 난리였다.
공은 길가 담장을 넘어 어느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집은 하필 엄청 고약한 성격을 가진 옛 토호 노인의 집이었다.
하여, 홍구는 공을 찾아오고 싶으면서도, 혹시 그 토호 노인이랑 마주칠까 무서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진정해. 무슨 큰 일이 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홍구 때문에 저 집…….”
“자자, 홍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까 너무 타박하지 마. 홍구야, 나랑 같이 공 찾으러 가자.”
“우웅…….”
홍구는 다들 무시하는 중에 자신에게 공을 차 준 학우가 나서 비난을 막아 주자, 자연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고, 그를 따라 공이 들어간 집 대문 쪽으로 향했다.
“홍구야, 이 집 할배가 혹시 뭐라 해도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죄송하다고 말하면 돼. 겁 먹을 필요 없어.”
“응.”
앞서 가는 학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인 홍구는 그 학우의 뒷모습을 보며 안정감을 느꼈다.
다 비슷한 또래인데, 이상할 정도로 이 친구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기운이 있었다.
‘아버지가 벼락공이라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홍구는 아니라고 보았다.
강중이는 그냥 사람이 좋았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외모가 아주 잘난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들 그를 좋아했고, 그의 주변에 모였다.
탐라의 공자님이라고 어려워하는 것 없이, 친구처럼, 형처럼, 동생처럼 그를 좋아했다.
심지어 동물들도 강중이를 좋아했다. 그들이 다니는 기술 학교 뒷마당에 사육장이 있어 돼지며, 소며, 닭까지 키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똑같이 먹이를 가져다줘도 가축들은 이상하게 강중이 쪽에 많이 모여들곤 했다.
한 번은 두무악 중턱까지 교사님이랑 같이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강중이가 풀피리를 불어 준 적이 있었다. 많이 능숙하진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강중이의 뒤쪽 적당히 떨어진 곳까지 사슴 한 마리가 다가와 한동안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마치 풀피리 소리를 감상하는 듯했고, 실제로 풀피리 소리가 끝나자 다시 일어나 멀어져 갔다.
교사님도 그렇고 학우들도 모두 참 신기하다 여긴 일이었다.
“계십니까?”
홍구가 생각하는 사이, 두 사람은 공이 넘어간 집 대문 앞에 서 있었고, 강중이 대문의 손잡이를 두드리며 방문을 청하였다.
한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강중이 두 번 더 불렀음에도 대답이 없자, 조심스레 문을 밀어 보았다.
삐그덕,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린 대문 안으로 넓은 마당이 보였는데 그 구석에 홍구가 차서 넘긴 공이 보였다.
“아무도 없나 보네. 저 공만 얼른 가지고 나가자.”
강중의 말에 홍구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슬그머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곱게 깎인 잔디 마당은 별채에 닿아 있었는데, 별채에도 역시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두 사람이 얼른 공으로 다가갔고, 홍구가 그 공을 집어드는데, 먼저 몸을 돌린 강중이 멈칫하였다.
별채와 본채 사이의 작은 쪽문 안으로 이 집 하인들이 모여서 본채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홍구도 같은 곳을 보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모여 있는 곳을 생각하면 아까 강중이 외쳤을 때, 충분히 소리를 들을 법하기 때문이었다.
“홍구야, 먼저 나가 있을래?”
“응? 어…….”
강중이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나직이 하는 말에 홍구는 얼결에 답하고는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귓가에 작은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새액, 탁. 새액, 탁.
그 소리에 쪽문 안을 들여다보려던 홍구는 강중이 그쪽으로 다가가며 그에게 다시 시선을 보내는 걸 느끼곤 대문 밖으로 나갔다.
‘누구 매 맞는 소리 같은데?’
홍구가 그런 생각을 하며 대문을 나설 때, 강중은 쪽문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낄 수 있는 건 공포였고, 그 공포의 정체는 이내 강중의 시야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사내아이가 기둥에 묶여 있었고, 누군가가 그에게 연신 매질을 하고 있었으며, 하인들은 그것을 벌벌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이 하인을 매질하는 건, 그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었음에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로 인한 소송도 종종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나, 지금 일어나는 일은 그런 것을 감안해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매질을 하는 자는 어느 여인이었는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른 손으로 사내아이를 향해 힘껏 매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회초리는 얇고 긴 전형적인 회초리였다.
하나, 그 회초리질을 당한 사내아이의 모습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았다.
얻어맞는 곳도 종아리 같은 곳이 아닌, 벌거벗은 상체였고, 얼마나 오래 맞았는지 상반신 전체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으며, 피멍이 든 위로 핏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마당에 한 노인이 호상을 두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집의 주인인 토호였다.
“어허, 어찌 점점 약해지는 게냐? 자식이 잘못했으면 부모가 매질을 해서라도 고치게 하는 법이거늘, 그래서야 훈육이 되겠느냐?”
문득 그 토호의 말이 들렸고, 눈물범벅이었던 여인의 회초리질은 다시 거세졌다.
“어흐…….”
기둥에 매달려 축 처져 있던 사내아이가 놓았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는지 매질에 신음하였다.
“끌끌끌…….”
이어 귓가를 파고드는 토호의 마른 웃음소리에 강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동시에 상황 파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쪽문 안으로 크게 한걸음 디디며 크게 외쳤다.
“멈추십시오!”
“……!”
강중의 어리지만 큰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그저 매질을 지켜보느라 정신없던 하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고, 그들 사이로 토호 또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저 사사로이 처벌하는 일이 국법으로 금지된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런 몰상식한 짓을 벌이는 것입니까!”
10살 어린아이의 외침에 잠시 어이없어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내 누군가 공자라며 강중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모두들 기겁하였다.
한데, 정작 토호는 나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돌려 어느새 매질을 멈추고 주저앉아 울음을 삼키고 있는 여인을 향해 말하였다.
“어찌 멈추는 게냐? 그래서야 자식 훈육을 제대로 하였다 하겠……?”
“멈추라 하였습니다!”
다시 강중이 소리치며, 하인들 사이로 들어가 토호 앞에 서자, 그도 이번에는 짜증이 묻은 얼굴로 강중을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 이 무슨 행패시오?”
“이미 말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처벌은 나라에서 금한 범죄입니다!”
“사사로운 처벌이야 주인과 노비 사이의 문제일 뿐,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것과는 무관하오.”
“설마 지금 이 모습을 자식 훈육이라 변명하시려는 겝니까?”
“왜 아니 그렇소? 여봐라, 누가 저기 저 아이에게 매질을 하고 있는 여인이 그의 어미라고 공자께 알려 드려라.”
그러자 대략 토호의 심복쯤 되어 보이는 털북숭이 사내가 조심스럽게 강중에게 말했다.
정말 저 사내아이는 저 여인의 아들이라고.
하나, 강중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얄팍한 수작으로 국법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자로 하여금 벌하는 것 또한 금지되었음을 아셔야지요!”
“끌끌.”
강중이 거듭 주장함에도 토호는 비웃음만 흘리더니, 강중을 무시하곤 다시 매질하라 소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강중은 발걸음을 쿵쿵 옮겨 사내아이가 묶여 있는 기둥 앞에 섰다.
그러곤 여인을 향해 말하였다.
“묶인 것을 풀어 주십시오.”
“……흐흑.”
금방이라도 통곡할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그 여인은 토호의 눈치를 보며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아주머니와 아드님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그러자 여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경기하듯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곤 벌벌 떨리는 손을 놀려 아들이 묶인 것을 풀기 시작했다.
그사이, 강중이 몸을 돌려 토호를 바라보니, 냉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의 토호는 강중과 여인이 하는 행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윽…….”
묶여 있던 몸이 풀리자, 사내아이가 앞으로 쓰러졌고,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아 바닥에 처박히는 걸 겨우 막았다.
강중도 얼른 그를 부축하여 함께 발을 옮기니, 또래 사이에서 키는 크지만, 아비를 닮아 기운이 별로 세지 않은 10살 아이로서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사내아이의 어머니와 함께 피투성이 사내아이를 부축하여 움직이는데, 토호의 앞을 지날 때 그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공자가 저지르고 있는 행동이 무슨 짓인지 아시는 게요? 내 것인 노비를 강탈하는 짓이오.”
“노인장도 자신이 한 짓거리가 뭔지 잘 아셔야 할 겁니다.”
강중이 힘겨운 중에도 토호를 향해 대꾸하자, 토호는 다시 콧방귀를 끼었다.
“흥! 국법 타령을 하더니, 정작 본인이 국법을 어기고 있음을 모르시는군.”
“예, 국법이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 줄 겝니다.”
강중은 기어이 사내아이를 구하여 그의 어미와 함께 그 집을 나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우들이 몰려와 부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후, 공택으로 그 모자를 데려가자, 한바탕 난리가 났고, 기술 시찰 후 대촌현 행재청에 가서 업무를 보고 있던 탐라공이 급히 돌아왔으니, 그 밤에 강중은 아버지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 * *
판내시부사 포숭은 곤란한 표정으로 궁중후 염흥방 앞에 앉아 있었다.
“상께서 나더러 예관시랑에게 사과하라 하셨다 했소?”
“예…….”
“하아…….”
궁중후는 긴 숨을 내쉬며 속내의 화를 달랬다. 호가호위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뭐, 어명이 있으시면, 강아지에게도 사과해야겠지요. 하나…….”
염흥방은 말꼬리를 늘리며, 그늘진 표정으로 포숭을 바라보았고, 그도 염흥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하기에 똑같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탐라에 사헌을 파견하시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부사께서는 아실 터.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하는 일이오.”
“하나, 금상께서 워낙에 확고하신 터라…….”
“상황을 잘 설명하실 수는 없었소?”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기에 돌려 말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판내시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궁중후는 고개를 들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금 고려 조정에는 사헌부(司憲府)가 있으니, 감찰을 담당하는 관부로, 원나라 부마국 시절에 사라졌다가, 금상 대에 다시 설립되었다.
부패를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관부가 세워지는 것 자체는 합당한 일이나, 사실 금상이 새로 세운 관부의 대부분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사헌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찰을 해야 할 자리에 ‘돼지’들이 가득 모여 있는 게 현실인 것이다.
문제는 금상이 그 사헌부의 관리를 감찰의 명목으로 탐라국에 파견하고, 나아가 탐라에 분사(分司)를 두려고 하신다는 것이었다.
물론, 명분상 국왕 된 자가 자신의 신하를 감찰하고자 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할 수는 없었지만, 실상을 짐작하자면, 탐라공이 생각보다 많은 부를 거머쥐고 있음을 전해 듣고 그것을 탐하기 위함임에 틀림없었다.
“탐라공께서 이를 어찌 받아들이실 것 같소?”
“…….”
공중후가 물으니, 부사가 할 말이 궁한 양 고개만 숙였다.
“내가 보기에 탐라공께서 분개하여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소만.”
“…….”
설마 그러겠냐는 표정을 짓는 포숭을 보며, 염흥방은 그나마 상황 판단이 되는 소수의 조정 인사들 중 하나인 그조차도 제대로 아는 건 아닌 것 같아 속이 터졌다.
“이보시오, 판내시부사. 탐라공은 애초에 금상을 세운 두 기둥 중 하나였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홀로 왕성을 받치는 주춧돌이 되었소. 부사도 아시지 않소. 근래 요동국과 탐라국에서 바치는 공물의 차이를 말이오.”
정한 바는 없지만, 탐라국이든 요동국이든 고려 왕실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공물을 보냈으니, 최초에도 탐라국이 요동국보다 거의 두 배가량 많았다.
한데 최근에는 비교하기도 무색할 만큼 탐라국이 압도적이었으니, 요동국이 조금씩 공물을 줄인 것에 비해, 탐라국은 매년 양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개경 시전에 들어오는 물산 중 삼분지 이가 탐라국이나 탐라 상단을 통한 것이니, 그것까지 감안하면, 왕실을 받치는 유일한 주춧돌이라는 표현도 결코 과장된 게 아니오.”
“…….”
“상께서 간신의 혓바닥에 현혹되어 오해하고 계시지만, 이미 탐라공은 그가 가진 부유함 중 많은 부분을 상께 바치고 있다는 말이오. 아무것도 안 하는 자들이 조정에 가득함에도 개경이 풍족한 것만 봐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오.”
“……하면,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어쩌긴, 상을 설득하시오. 절대 금상께서 탐라공과 부딪치게 하여서는 아니 되오.”
포숭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게 금상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렇게까지 탐라공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마땅치 않은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 염흥방은 마지막으로 강하게 말하였다.
“판내시부사께서 좌승직이던 시절, 나를 설득하여 탐라공, 요동공과 더불어 신돈을 물리치게 하려 했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
“……!”
포숭은 인상을 굳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에 없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말고, 그저 대접받는 임금으로 족하게 하라. 아니라면, 나도 금상을 지킬 수 없다.’
가히 불측한 발언이었음에도 그 기억마저 떠올리게 한 염흥방의 태도에 포숭은 그제야 상황의 심각함을 절감했고, 돌아가 금상을 다시 설득하고자 하였다.
하나, 그러기에는 금상의 곁에는 간신들이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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