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2)
“생각보다 재밌네.”
어느 호프집 안,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두신이 중얼거리듯 소감을 토로하였다.
“그러게. 그저 돈 많은 어린 녀석이랑 말장난이나 주고받으며 빨아먹자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해 보니 재밌어.”
맞은편의 재상도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훔치며 맞장구쳐 주었다.
두 사람은 몽주의 집에서 나온 후,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호프집에서 한잔 마시는 중이었다.
“몽주 씨, 원래 부자였어? 지난번에 나한테 대충 말했을 때는 그렇게 말 안 했었잖아?”
“어…… 그랬지.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부자 티가 안 났거든. 오히려 반대였지. 그런데 아니네.”
몽주로부터 다시 연락이 갔을 때, 그 내용을 기억해 두고 재상에게 전해 준 것이 두신이었다.
뭔가 중요하겠다 싶어 술에 취한 재상을 찬물에 던져 정신을 차리게 하곤 설명해 준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두신에게 몽주의 전화 내용을 전해 들은 재상은 정말 혹시나 싶어, 이 빌어먹을 직장 생활을 끝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에 연락을 했었다.
그리고 몽주의 집이 유명한 고급 빌라촌에 있다는 걸 확인하자 설마가 설마가 아니었음을 직감했었다.
게다가 실제로 고용계약의 내용도 아주 후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주급이 백만 원.
정말이지 로또라도 당첨된 기분…….
“혹시 몽주 씨, 그새 로또라도 당첨된 건가?”
“……그야 모르지.”
“아냐. 요새 로또 당첨되어 봐야 실수령액은 많아도 십억이 넘니 마니 하는 정도잖아. 그 빌라촌의 집은 최소 십억 원은 넘을 테니, 원래 부자였던 모양이네.”
“그렇다면 그런 거고.”
몽주의 부유함에 대한 의문을 두고 주절거리던 두 사람은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근데 말이야. 좀 이상하지 않아?”
두신의 물음에 재상이 표정으로 ‘뭐가?’라고 대답했다.
“그 놀이라는 거 말이야, 몽주 씨는 어째 놀이처럼 하질 않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지하잖아. 굉장히 진지해. 그리고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으면 설정이 아니라 경험을 설명하는 것 같고. 마치 꼭 진짜 자기가 과거 속 현대인인 것처럼 말이야.”
“후후, 그럼 우리가 만나는 그 녀석은 뭐고? 여긴 서울이고 지금은 이십일 세기라고.”
재상은 피식거리며 웃어 넘겼지만, 두신의 의아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 신물 있잖아?”
“신물? 아, 그거.”
몽주가 설정한 신물의 능력 때문에 재상도 잠시 어이없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중에 대항해시대라는 화두가 등장하면서 그 신물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뜬금없이 판타지스러운 설정을 들이미는 게 수상해.”
“수상할 게 뭐가 있냐. 어차피 놀이인데, 그런 식으로 놀고 싶었나 보지.”
“야, 작가가 된다는 놈이 좀 상상해 봐라. 소설을 한번 써 보는 거야. 몽주 씨가 주기적으로 과거로, 고려로 가서 두 달 동안 살다 온다고 가정해 보는 거지.”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데?”
“……그, 그거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가정하면 되고.”
“얘기가 점점 잡스러워진다.”
“하여튼! 그렇게 가정해 보면, 몽주 씨가 거기서 살아남고, 그 놀이의 목표처럼 역사를 바꾸려고 한다면 현대에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하겠지? 우리처럼 조언을 받을 사람도 구하고. 안 그래?”
“그렇겠지.
“어때?”
갑작스런 두신의 물음에 재상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다는 거야?”
“자네, 이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써 볼 생각 없나?”
피식.
“됐다.”
누굴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비웃음과 함께, 재상은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나 맥주를 마시기 전에 멈칫하더니 잠시 무언가에 골몰하였고, 이내 그것을 떨치듯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맥주나 마셔!”
* * *
탐라 혹은 제주.
근대성 혹은 근대화.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 혹은 대항해시대.
몽주는 14세기 고려에서도 21세기의 논의에서 시작된 상념에 여념이 없었다.
제주와 대항해시대라는 두 가지 관점. 이것이 그가 그저 역사를 바꾸겠노라 했던 단순한 다짐에 큰 빛으로 다가옴과 함께 막막함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근대성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성이라는 건 사실 모호했다. 그 구체적인 형태야 선거, 인권, 시장경제 등에 관한 여러 제도의 구현이라 할 수 있지만, 그걸 이루는 가치관은 뚜렷하지 않았다.
꿈속으로 오기 전에 찾아본 사회과학적 정의로는 앵글로색슨형 개인주의, 그러니까 개인을 독립된 주체로 자유선택과 자기책임의 원리를 통칭한다고 하던데, 설명을 보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뜬구름 잡는 소리까지는 아니지만, 명확히 이거다 싶은 부분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몽주가 근대성이라는 개념과 함께 떠올리는 건 한국의 역사적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의 21세기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다.
그 역사에서 한국의 근대성 혹은 근대화는, 맹아론을 따르든 식민지 근대화론을 따르든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니까.
하나, 잊힌 역사 속 고려의 근대화는 조금 달랐다.
당시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이었던 몽주는 공부를 열심히 하던 녀석이 아니었기에 그 역사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았다.
하나, 아주 널리 알려진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예컨대 고려 근대화의 기수이자 입헌혁명가 장수완 같은 이는 당시의 몽주도 알고 있었다. 그를 모른다는 건 지금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현재의 역사와 비교하자면 실학자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성공함은 물론, 거기에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고나 할까.
그런 장수완의 업적 덕에 고려는 근대국가로 발전했고, 입헌왕국으로 전환되었으며, 유럽의 팽창에 저항할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워낙에 존경받는 위인이라 몽주도 알 수밖에 없던 인물인 것이다.
그의 업적은 18세기 중반, 지금의 아무르강인 흑하(黑河)중류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낸 것을 비롯하여, 러시아를 통해 유럽의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시작한 것, 그리고 구태로 가득한 고려 조정에 무력시위하여 무혈 혁명으로 입헌군주제의 고려를 탄생시킨 것 등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후 서세동점의 시기에 한국도 서구열강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회과학적 정의 속 근대성이라는 것의 가시적인 현상들이 곧 장수완의 업적인 셈이었고 그런 장수완의 업적은 결국 러시아와의 충돌에 따른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가 없다. 이 시기에 러시아가 러시아인지, 아니면 아직 모스크바대공국인지는 나중에 확실히 알아 봐야겠지만, 어쨌든 동양에서 러시아는 없다.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도 없다.
즉, 외부 자극에 의한 근대화의 시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근대성을 갖추려 한다면 그건 고려 스스로 자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고, 몽주 자신이 그 촉발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하아, 힘들겠네.”
보료 위에 주저앉아 있던 몽주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또 다른 생각에 빠졌다.
“벌써 역사가 바뀌기 시작하는 건가.”
지난 꿈, 고려 도당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몽주는 깜짝 놀랐었다.
그 소문이란 경시서를 승급하여 경시감으로 하고, 예하에 별시를 여럿 두게 한다는 것이었다.
경시서(京市署)는 개경의 시전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으로 영(令) 1명, 승(丞) 2명과 그 외 하급 관리 5명 정도로 이뤄진 작은 관청이었다.
그런데, 개경만 담당하던 경시서의 범위를 넓혀 삼경과 한양부까지 관장하게 한다는 소식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 고려의 권력을 신돈이 장악하고 있으니, 경시서의 변화 역시 신돈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 봐야 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 고려로 와 추가로 들린 소식을 확인하니 분명했다.
확대될 경시감의 장(長)인 경시감 상시(常侍)로 현재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인 이인임이 겸직 임명될 거라는 것이다.
이인임은 사극을 통해 현대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정적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이인임이 신돈의 심복이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공민왕의 심복이었고, 공민왕과 신돈의 뜻이 같은 동안은 공민왕의 명에 따라 신돈의 정치를 적극 도왔다.
실제로 고려에서 살펴본 도당 인물들에 대한 여론에 비춰 보면, 이인임은 신돈의 인맥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돈의 개혁 정치에 대한 평가처럼 양민들에게는 박수를, 세족들에게는 비난을 사고 있었다.
역사의 기록에, 훗날 권문세족으로서 온 고려의 토지를 다 긁어모으던 이인임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쨌든 수문화시중인 이인임이 경시감까지 관리하게 되었다는 건 경시감의 권한이 강력하다는 의미이며, 그런 행정적 변화가 신돈에 의한 것이라는 인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역시 나 때문에 바뀐 건가.”
과소평가하려고 해도, 지난날 그가 신돈에게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상업을 도적질쯤으로 생각했던 신돈이 상업을 관장하는 기관을 키운다는 건 확실히 대단한 변화이고, 예상치 못한 변화라고 할 수 있으니까.
“방향은 영 잘못 잡았지만 말이야.”
경시서가 경시감으로 확대되고 그 범위가 삼경(개경, 서경, 동경)에 한양부까지 넓어진다는 건, 시전이 그만큼 확대 강화된다는 의미.
이는 반대로 난전이 억압받게 된다는 뜻이 되니, 실제로는 상업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올 게 분명했다.
정확한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략 시전이 정부주도형 계획경제라면 난전은 자유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으니, 몽주가 신돈에게 했던 주장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행보인 셈이다.
하나, 그렇게 보는 건 지극히 현대인적인 관점이었다.
전근대 국가는 행정 체계의 미비와 기술적 한계로 국가 내 역량을 끌어 모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했다.
상업이라는 면에 국한하여 보더라도, 오늘날처럼 상거래를 통한 수익을 적절한 수준에서라도 파악하여 그에 조세를 매길 수 없으니, 높은 곳의 권력자가 보기에 난전(亂廛)이라는 건 지난날 신돈이 폄하했듯 도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반면 시전(市廛)은 사실상 어용상점으로서, 국가 감독 하에 국고의 잉여품을 처분하고 관수품을 조달하게 하며 그 와중에 이문을 챙길 수 있었다.
즉, 신돈의 입장에서는 난전을 치우고 시전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상업을 발전시키는 일.
실제로는 난전을 억제하면서 시전을 확대하고 보호하는 행위가 신돈이 비웃은 도적과 같은 상인을 보호하는 행태이건만, 그의 시선과 이 시대 지배층의 상식선에선 그것이 상업을 우대하는 처분인 셈이다.
“게다가 경시감을 통해 자기 사람들까지 챙겼고 말이야.”
경시감의 확대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경시서 때보다 다섯 배는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경시감에 새로운 관직이 많이 생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