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20)
* * *
이번 총무회의의 분위기는 자못 무거웠다.
정식으로 공표한 건 아니었지만, 몽주가 요동국의 사절들과 나눈 이야기에 대한 소문은 관부 내에 돌았고, 그 소문의 내용은 다분히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처럼 중대한 일을 자신들과 별 논의도 없이 결정했다는 것에 섭섭한 마음을 가진 탓도 있을 것이다.
다만, 회의 중에 아직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안남국의 일은 걱정하고 대비했던 것에 비하면 김빠지는 결과로군.”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결과라 보입니다. 남 사령관이 잘 처신한 것 같습니다.”
탁기는 석삼의 결단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 탐라국의 입장에서는 안남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게 가장 나은 것이었다.
충신의 허무한 죽음은 남의 나라 신하라 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후손을 거두어 준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춘 셈이었다.
무엇보다 이주섬의 비밀을 아직은 지킬 수 있으면서 안남국과 연을 끊은 셈이라는 게 가장 기꺼운 결과였다.
언젠가는 결국 알려질 일이긴 하나, 명나라가 아는 건 최대한 뒤로 미뤄야 할 일이었고, 그것이 일단은 가능하게 되었으니까.
몽주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려는데 다시 탁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난번에 권하신 탁가 무예의 군용(軍用)에 대해 어제 가문 내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 그래, 어찌하기로 하였나?”
“기본적으로 가문 전승이고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원칙이 있어 여러모로 곤란함이 있습니다. 다만, 저희 탁가가 탐라군에 투신하였고, 탐라국에 충성하는 만큼, 탐라군에서 유용하게 쓰일만한 일부 무예에 대해서는 널리 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 하면…….”
“예, 권하신 대로 검술과 단련술은 탐라군의 훈련에 접목될 것입니다.”
“오, 잘되었군. 탁가가 또다시 군문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어.”
몽주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탐라군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향후 바뀔 전장의 양상을 생각하면 무예라는 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나, 탁가의 단련술과 검술은 몽주가 나름 탐을 내고 있던 탁가의 유산이었다.
아무리 전장의 양상이 바뀌더라도, 그 두 가지 무예 기술은 군병의 능력을 크게 키워 줄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련술과 검술이라는 이름만 보면, 단련술은 근육 단련 훈련, 검술은 무협 소설 속의 온갖 검법을 떠올리게 하였다.
하나, 실제를 보자면, 단련술은 얼핏 체조와 비슷했고, 검술도 장검이 아닌 단검을 쓰는 지극히 실전적인 기술이었다.
단련술의 경우, 중량을 이용하여 근육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잘 쓰지 않는 근육까지 골고루 단련시켜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도 몸이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체술이었다.
탁가의 무인들이 무슨 내공을 가진 것이 아님에도 굉장한 민첩함과 순발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중 핵심이 바로 그 단련술에 있었다.
또, 탁가의 검술은 탁가 무예의 백미가 창술에 있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여, 창으로 겨뤄, 얽히고설키는 중에 적의 허점을 일거에 노리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탁가의 검술, 정확히는 단검술이었다.
그렇기에 탁가의 검술만 보자면, 마치 현대 특공무술의 단검술과 오히려 닮은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검이라곤 하나 현대의 총검처럼 정말 짧은 검이 아닌, 무인 개개인마다 다르긴 하나, 보통 짧아도 30세미 이상이었고, 모양도 서양의 스틸레토(stiletto)처럼 좁고 뾰족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원로들께 내가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게.”
“다른 무예는 전하지 못하는 것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 두 가지로도 충분히 만족하니, 그런 말은 거두게.”
몽주는 진심이었다.
단련술이야 군병들의 신체를 문자 그대로 단련시킬 것이니 두말할 필요 없고, 탁가 검술의 경우도 현재 순위육군에게 훈련시킬 장창 위주 조합의 진형 및 전법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또, 그 전법이 도태되더라도 단검이야 현대까지 쓰이니 오랜 시간 귀중한 군사적 자산이 될 것이다.
사실 탁가의 무예 외에도 몽주가 아는 무인들이 적진 않았다. 당장 부인 앵도도 있고.
하나, 당금 고려의 무예들 중 비교적 널리 알려진 건 수박을 비롯한 맨손 무예 즉, ‘레슬링’이나 격투기의 형태였고, 무기를 쓰는 무예들은 비인부전의 얽매인 개인전승일 뿐, 체계가 없었다.
하여 가문을 타고 내려오면서 체계가 잡힌 검술은 탁가의 것이 사실상 유일했고, 특히 탁가 무예의 조종인 척준경 본인 스스로가 군문을 경험했던 바, 군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탁가 무예가 최선인 방안이었다.
“그건 잘될 것 같은가?”
문득 몽주가 탁기에게 물으니, 다른 대신들도 이내 뜻을 짐작하곤 흥미로운 표정으로 탁기를 쳐다보았다.
그 질문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탐라군의 전술 진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진형에 소폭 변화를 주며 시험하는 중입니다.”
탁기는 확답을 피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제가 보기에 지금 당장은 진형이나 전술보다는 순위군의 실력과 기강을 높이는 데에 더 주력해야 할 듯싶습니다.”
“순위군이 그렇게 형편이 없나?”
“격차가 아주 크다는 보고가 많습니다. 제대로 하는 자들 중에는 정규군으로 데려오고 싶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방만한 자들 중에는 당장에라도 참해 버리고 싶을 정도인 자들도 있다 합니다.”
“흠, 하기야 순위군은 창설부터 다소 방만한 경향이 있었지.”
“예, 제 생각에 삼분지 일가량은 축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진형에 대해 물었건만, 순위군에 대한 지적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는 전혀 엉뚱한 대답은 아니었다.
애초에 새로운 진형이나 전법을 도입하려는 것 자체가 순위군을 잘 쓰기 위한 궁리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능과 기강 그리고 사기 등 모든 면에서 출중한 정규군에 비해 순위군은 많이 부족했고, 그런 순위군에게 정규군과 같은 식으로 싸우기 바라는 건 과욕일 게 뻔했다.
그래서 그들을 유용하게 쓸 수 있게, 좀 더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전장의 공포에 질려 도망치지 못하게 할 방법을 찾는 중이었는데, 암만 그래도 기본적인 실력과 기강은 필요한 법이었다.
순위군은 애초에 경찰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창설되었고, 빠른 규모를 키우고 조직화하기 위해 군무의 경험이 있는 자들은 일단 받아들여야 했다.
하여, 과거 고려군이 가지고 있던 폐습과 부정이 많이 남아 있어 정규군의 시선으로 보자면 아주 형편없는 집단이었다.
그런 중에 포도청 설립을 준비하면서 쓸 만한 자들을 추려 갔으니, 그 수준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순위군의 확대를 목표하는데, 반대로 먼저 수부터 줄여야 할 판이군. 음, 어쩔 수 없지. 썩은 건 도려내야지.”
이래서야 일차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순위군의 확대가 언제 가능해질는지 암담했지만, 무턱대고 규모부터 늘리는 것보다는 먼저 ‘수술’을 하고 그 후에 ‘체격’을 키우는 게 맞다 싶었다.
몽주는 군무에 관한 이야기를 일단락하곤, 대신들을 둘러보다가 실소를 머금었다.
모두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표정에 다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괜히 장난기가 솟아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음, 공택의 확장에 대한 건의가 지난번에 있었는데, 그에 대해 논할까 싶네.”
“…….”
대신들이 ‘이거 왜 이러십니까?’라는 말을 표정으로 보냈다.
“뭐, 이건 급한 게 아니니, 다음에 하지. 음, 지방 행정제의 개편이 필요하다는 건의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데, 포은 대신께서 다분히 급하다며 건의하셨지요?”
몽주가 포은을 보며 ‘낚싯줄’을 던지자, 포은이 곤란한 표정으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지방 행정 제도 및 구역의 변화가 급하다고 건의한 바가 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었다.
아니, 내심 그에 대해 논의하고 싶어도, 그랬다가는 나중에 다른 대신들에게 꽤 핀잔을 받을 것 같았다.
“주군, 말씀하신 대로 지방의 제도를 살피는 건 중하고, 급한 일입니다. 다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방 행정의 문제도 그와 연관되는 것이니, 그것을 먼저 논의하셔야 합니다.”
“그거? 그게 뭐죠?”
싱글벙글하며 묻는 몽주를 보며 대신들의 표정에 얄미운 기색이 띠자, 그제야 몽주가 껄껄 웃음을 흘리며 말하였다.
“하하, 다들 알겠네. 장난은 그만 하지. 다들 내가 지금 요동공, 궁중후와 더불어 논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군. 하나, 논의할 건 별로 없네. 가부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미 확정하였으니, 내 결정이 바뀔 리가 없음을 알려 주고 싶군.”
그러자 화극이 나서 말했다.
“우리가 어찌 가부를 두고 논하려 하겠는가. 우리가 궁금한 것은…….”
“아아, 그 또한 저는 이미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마 내가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궁금할 텐데…… 나는 왕실의 성씨를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
화극을 보며 말했지만, 모두들 가장 궁금히 여기던 문제에 대한 주군의 단호한 답을 듣자 저마다 생각이 많은 표정을 보이면서도 입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가장 관건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몽주가 논의의 여지없이 확정해 버린 탓이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주군이 가려는 길은 왕위 선양을 위한 징검돌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왕위 찬탈이라는 게 단순히 가능하냐 아니냐를 두고 판단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결론을 모두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탁기가 어째 조금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물었고, 몽주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관대신 홍길도가 나서서 말했다.
“요동국 좌의정에게 하신 말씀이 진심이시라면, 고려는 상당히 불안한 체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불안?”
“그렇습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실세를 가졌음에도 주군께서 고려 왕실을 위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근본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주군께서 고려왕을 교체하고 왕실을 고려의 상징으로 삼고자 하신다 하더라도, 왕실의 족속들은 늘 다른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왕실은 주군을 무너뜨리고, 통치력를 복원하려 작당할 것이니, 이것이 불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꽤 설득력 있는 반론이었고, 대신들 중 많은 이들이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몽주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게 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나와 대신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고려의 왕좌를 뒤집어엎는 것을 여반장인 양 취급하고 있지 않나? 이미 힘의 우열이 그와 같은데 우리가 뒤집은 걸 왕실이 다시 뒤집고자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크고 많은 실정을 저질러야 하겠는가? 그 정도로 실정을 많이 한다면 나나 대신들 모두 이미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상태일 걸세. 그러면…… 죽어야지.”
꽤 섬뜩한 말로 마무리한 몽주는 싱긋 웃으며, 이어 금상을 퇴위시킨 후 왕실을 어찌 처리할지에 대해 말하였으니, 그 속에는 명예와 존경, 그리고 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것이 내가 왕실의 생리를 바꾸고자 하는 바이니, 나라의 상징으로 서기에 충분하되, 나라를 지배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네. 물론, 고려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도 열심히 노력해야겠지. 혹시 자신이 없는가?”
그건 아니었지만, 대신들 사이에서는 뭔가 아까워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고, 그 점을 탁기가 지적하며 말하였다.
“주군의 뜻은 이해합니다만, 어찌 쉬운 길을 두고 어렵게 가시려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쉬운 길이라면 내가 스스로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군. 이보게, 탁기. 나는 나나 내 후손이 내가 고려 왕실에 허락하려는 수준의 명예, 존경, 돈에 만족하길 바라지 않네.”
“……?”
탁기와 다른 대신들이 무슨 소린가 싶어 멍한 표정을 지을 때, 교관대신과 내관대신은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하였다.
몽주가 한 말에는 두 가지 가정이 있었으니, 하나는 남양 석씨가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양 석씨 왕가가 지금의 왕씨 왕가처럼 몰락하는 것이었다.
그 가정은 결국 몽주가 왕이 된다 하더라도 끝내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였다.
“주군께서는 왕의 천명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왕좌의 운명은 결국 그런 것이라 여기시는 겁니까?”
홍길도와 포은이 나란히 물었다.
그 또한 다른 대신들 대부분으로 하여금 도통 이해 못할 표정을 짓게 만들었지만, 몽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명이 진정 있다면 세상에 어찌 그 많은 암군과 폭군들이 있었겠나? 암군과 폭군은 몰아내야 하는 바, 훗날 힘을 가진 백성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명군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암군과 폭군이 나올 가능성 자체를 지우는 게 낫다 여기지 않겠소?”
홍길도와 포은을 차례로 보며 답하니, 다른 대신들도 서서히 그 뜻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의 주군은 단순히 누가 고려의 패권을 가지고, 누가 더 높은 곳에 서는 지를 두고 논하는 게 아니었다.
왕이라는 존재의 성질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진행된다면, 대신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있는 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니, 기대와 우려가 섞여 회의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느낀 몽주는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재밌는(?) 건 지금 회의실에 있는 대신들보다 훨씬 유자적 정치 체제에 매몰된 삼봉과 우재가 지금 탐라의 대신들이 보인 반응보다 훨씬 더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탐라를 떠난 그들은 몽주의 서찰을 가져가면서 일을 성사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겼으니 말이다.
그것은 비단 삼봉의 재상정치론을 몽주가 자극한 탓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몽주가 구현하고자 하는 체제가 요동국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받는 체제라는 점이 주요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요동국이 고려를 석권하거나,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탐라국의 도움을 받아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몽주의 계획에 찬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스스로 밝혔듯 그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요동공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고려를 주도할 수 있는 탐라국의 대신들임에도 이들이 머뭇거리는 건 몽주가 고려의 왕위를 노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삼봉이나 우재보다도 훨씬 더 과격한 사상, 즉 역성혁명마저 권하는 그들이건만, 정작 그들의 주군인 몽주가 덜(?) 과격한 결정을 내린 것에 미련이 남는 것이었다.
물론, 몽주는 그가 바라는 고려의 체제가 덜 과격하다고 보지 않았다.
왕실의 성씨를 갈아치우는 것보다 왕좌의 가치를 갈아치우는 게 훨씬 더 과격한 법이다.
하나, 그건 고려는 물론, 당대의 동아시아 정치 문화에서 말로써 이해할 만한 게 아니었고, 그래서 탐라의 대신들에게는 몽주의 판단이 결정적이어야 할 때 우유부단을 택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짐작하였기에, 몽주는 요동국의 생존과 발전이라는 이름 하의 이권으로 요동국을 설득하되, 탐라의 대신들은 그동안 쌓아 올린 탐라공의 위명으로 억눌러 강행했던 것이다.
총무회의를 마친 몽주는 집무실로 돌아왔고, 오자마자 책상의 서랍을 열어 문권을 꺼내 펼쳤다.
그 문권의 이름은 ‘대헌장(大憲章)’이었으니, 영어로 하자면 ‘The Great Charter’였고, 라틴어로 하면 ‘Magna Carta’였다.
1세기 반 전에 잉글랜드에서 선례가 있던 역사가 유라시아의 반대쪽 끝에서 다시 재현될 것인 바, 그 양상이 잉글랜드의 ‘마그나 카르타’보다 더 광범위하고, 파격적이길 몽주는 바라고 있었다.
* * *
정창군(定昌君) 왕요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늦은 밤, 그가 땀을 흘리는 이유는 하지(夏至) 무렵의 밤더위 탓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금 힘껏 끌어안고 있는 아내의 체온 탓도 아니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리.”
“…….”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다분히 온화한 목소리에 실렸음에도 왕요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에 눈 주위 빼고 온통 시커먼 옷을 입은 자들 수십이 들이닥쳐 일순간에 사택 전체를 장악했으니, 만약 이들이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의 가족은 물론 가복들마저 모조리 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또 다른 흑의의 사내들에게 이끌려 왕요의 자식들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장남 왕석과 더불어 어린 딸들이 울상을 지으며 달려드는 걸 아내와 더불어 품에 안고는 달래 주었다.
일단 자식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왕요는 조금 용기가 생겨 물었다.
“저, 정말 탐라공의 수하들이요?”
“그렇습니다.”
“하면, 대체 탐라공 저하께서 왜 이런……?”
“저도 구체적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정창군 나리의 사택을 장악하고, 나리를 가족과 함께 모시라는 명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나, 나를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게요? 타, 탐라섬이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왕요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신이 탐라공께 무슨 잘못이라도 했었나 싶었지만, 면식조차 없는 사이에 실수할 게 있을 리가 없었고, 탐라상단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그때, 안방에서 그의 가족을 포위하고 있는 흑의인들의 수장이자 그와 대화를 나누던 흑의인에게 어느 수하가 다가와 무어라 귓속말을 하였다.
“수고했다. 가급적 들키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모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예.”
직후에 수장 흑의인이 왕요을 돌아보았다.
“이제 일어나시지요.”
“…….”
왕요는 막연한 두려움에 선뜻 응하지 못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흑의인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저는 정창군 나리를 반드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항하더라도 기어이 데려 갈 것이니 괜히 힘 쓰게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고이 가시면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 알았소.”
허리춤에 매인 짧은 검의 자루를 엄지로 튕기며 검날을 슬쩍 보이는 것에 놀란 왕요가 아내와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설령 혼자라고 해도 그의 주변을 에워싼 십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떨치고 도망치는 건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서 마당으로 내려가자, 달빛 아래 또 다른 흑의인들에게 둘러싸여 마당 한편에 모여 있는 심복들이 보였다.
그중 노옹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한 걸음 옮기려다 흑의인의 제지를 받는 게 보였다.
왕요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반항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몇 걸음 움직이자, 아무리 생각해도 탐라공이 자신과 가족들을 해칠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 섰고, 뭔지 모르지만 이 마당에 저항한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포기하는 마음에 편안해졌다.
흑의인들이 먼저 살핀 후 나간 대문 앞에는 마차가 서 있었다.
흔히 보던 짐마차가 아닌,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
흑의인 수장이 등을 떠미는 대로 그 마차에 올라탔고, 아내와 아이들도 이어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혀 어둠 속에서 손으로 짚다가 그제야 비단천에 가린 유리창이 달려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우리를 해치려는 건 아닌 모양이구려.”
아내를 보며 말하니 어둠 속에서 얼핏 아내 노씨의 고개가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유리창 밖을 계속 볼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흑의인이 유리창을 도로 가리라는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이 더 편해진 왕요는 순순히 유리창을 가렸다. 마차는 바로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 지 확인하진 않았지만, 왕요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을 보면, 예성강 포구로 가는 것이 분명했다.
방향을 느꼈다기보다는 마차를 타고도 이렇게 편히 갈 수 있는 길은 탐라 상단이 닦아 놓은 포구 쪽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밤에는 닫혀 있는 개경 서문을 통과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도 쉬지 않은 마차는 그대로 포구까지 내달렸고, 그곳에서 왕요 가족들은 어느 경함선 위에 올랐다.
많이 본 경함선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상선이 아닌 군선이라는 점이었다.
그 정도야 예상하던 바라 침착하게 있던 왕요는 배가 출항하여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포구에서 멀리 나오자 선실 밖 출입이 가능해졌기에 갑판으로 올라와 주변을 살피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방향이 북쪽이군.”
예상과 달리, 탐라섬이나 남면이 있는 남쪽 대신 뱃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혹시……?”
심적으로 지친 아이들을 재우고 따라온 부인이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양 말문을 여니, 왕요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리를 납치…… 데려가는 게 탐라공 홀로 계획한 일이 아닌 듯하오.”
금상을 보위에 세운 두 기둥이라는 탐라공과 요동공이 손을 잡고 그를 데려가고 있었다.
왕요는 자신 또한 용종임을 무겁게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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