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21)
“마그나 카르타라…….”
재상이 조금은 어이없다는 양 중얼거렸다. 두신도 쓴웃음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 탓이었다.
보통은 몽주가 한 번 천몽 속에 들어갔다 왔을 때,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큰 변화를 담은 소식을 전해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탐라국이 안정세에 접어든 이후에는 비교적 정확한 예상과 계획 속에서 일을 진행했고, 고려 당대의 사회적인 시간의 속도는 현대에 비해 많이 느린 만큼, 두 달 안에 큰 변화의 흐름이 확정되는 경우는 있기 어려웠다.
“그렇게 급하게 추진할 일이었습니까?”
재상이 섭섭하다는 양 물었다.
하려고 했다면 몽주가 얼마든지 시간을 조절해서 그들과 먼저 상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몽주는 씨익 큰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혹시 반대하시는 겁니까?”
“…….”
“역시 아니죠? 다행이네요. 급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성계나 정도전 등이 받은 충격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밀어붙이고 싶었어요.”
그에 두신은 일리 있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었다.
“어차피 이성계가 받은 충격이 쉽게 가실 만한 건 아니었잖아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건 비단 애정문제에만 국한된 건 아니니까요.”
“오케이. 좋으면 좋았지, 나쁜 상황은 아니죠. 우리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해가 될 것도 아니고요.”
재상도 빠르게 상황을 인정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몽주 씨가 노리는 바가 있는 듯한데…… 아마 고려의 확장에 요동국이 큰 역할을 하길 바라시는 것 같군요.”
“네.”
몽주는 바로 대꾸하곤 회의실의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큰 손이 하나인 것보다는 내 손이 조금 작아져도 여분의 다른 손들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게 애초의 의도는 아니었죠. 하지만 일단 요동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전제하니, 그렇다면 요동국에게도 한 역할을 바랄 수 있겠다 싶더군요. 궁중후는 별 역할을 못하겠지만, 유구국도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보고요.”
몽주는 요동국과 유구국을 언급할 때마다 그 위치를 손으로 아울러 가리켰다. 한데, 그 손짓에 담은 요동국과 유구국의 영역은 지금 그 나라들이 영유하고 있는 크기보다 더 큰 것이었다.
요동국에게는 몽골 초원, 나아가 동시베리아가 있었고, 유구국에게는 북태평양이 있었다.
“그 두 나라를 두 방면의 전담 마크맨으로 사용하시겠다?”
“무모한 일일까요?”
“무모한지를 살피기 전에, 그들이 몽주 씨의 뜻대로 따라 줄지가 문제겠죠? 뭐, 유구공이야 몽주 씨 꼬붕이라 여겨도 되겠지만, 이성계는 쉽게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요?”
“아뇨. 전 가능하다고 봐요. 왜냐하면 제가 탐라국의 실질적인 크기를 알려 줄 테니까요.”
“음, 경쟁심 유발?”
“또 한 번의 위기감이라고 해야겠죠? 안 그래도 질적인 국력 탓에 크게 충격 받은 상황인데, 양적인 국력도 그가 생각한 것을 크게 넘어선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런 중에 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고, 심지어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이성계도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겠죠. 달리 확장할 방향이 그쪽뿐이잖아요. 뭐, 유구공이야 제가 넌지시 알려 주기만 해도 좋구나 하고 따를 테고요.”
몽주의 말을 들은 재상과 두신은 서로 마주 보며 시선으로 의견을 교환했고, 두신이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신 거라면, 이미 어떤 결정을 하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는 지난 것 같네요. 이제는 결정한 걸 어떻게 실행하느냐가 관건이죠.”
재상은 더는 몽주의 결정에 왈가왈부할 생각을 지운 듯했다. 두신도 고개를 끄덕이곤 대헌장에 대해 말했다.
“중요한 건 대헌장의 내용이고, 그 이행이겠죠. 대헌장이라곤 하지만,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같은 거라면 하나마나 한 수준이고요. 물론, 역사적 의미도 있고, 한 400년 흘러서 입헌군주제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아시다시피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는 그냥 잠깐 동안의 이벤트였죠.”
마그나 카르타라는 이름의 유명세와는 무관하게 13세기 잉글랜드의 마그나 카르타는 당대에 거의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마그나 카르타 제정 직후에 당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던 교황이 으름장을 놓자마자 마그나 카르타는 무용지물이 되었던 탓이다.
또, 이후 다시 일어난 내전에서 왕당파가 승리하면서 마그나 카르타를 강요한 반란 귀족들이 말 그대로 박살났고, 당연히 마그나 카르타도 존재감을 상실했다.
물론, 전제 왕권의 시대가 지나 왕권이 약화되면서 마그나 카르타는 다시 부활하였고, 본래의 역할을 넘어 평등사상의 전파와 법치주의의 형성에 기여하기에 이르렀으며, 수차례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는 특별한 헌법이 없는 현대 영국에서 헌법으로서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마그나 카르타는 그것을 만든 시대에만 국한하자면, 아무런 역할도 못했고, 그 역할마저 단지 당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특권을 주장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 생각에 고려의 대헌장은 봉건적인 질서와 차후 미래적인 질서를 적절히 섞어야 할 듯한데요. 잘될까요?”
“사실 그게 지금 약간 문제예요. 요동에 간 외관대신이 보낸 장계가 제가 꿈에서 깨기 직전에 도착했었는데, 요동국 쪽에서 곤란해 하는 조항이 꽤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물론, 협상에 앞서 일부러 엄살을 부리는 면도 있긴 하겠지만요.”
이미 정도전 편으로 요동공에게 몽주가 바라는 고려의 모습에 대한 언질을 넣어 두었고, 이후 외관대신과 내관대신을 요동공과 궁중후에게 파견하여 몽주가 정리한 대헌장의 주요 사항을 전하였다.
그 양 제후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하면서도 차이가 있었다. 곤란한 반응의 크기는 비슷했지만, 그 곤란한 이유는 달랐던 것이다.
“요동국 쪽은 경제와 관련한 부분에서 곤란해 하고 있고, 궁중후의 경우에는 역시나 그가 금상의 장인이라는 점이 곤란해 하는 주된 이유죠.”
“그 말을 들으니, 궁중후가 더 반대할 것 같은데요? 임금의 외척이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는 꽤 큰 힘……. 흠, 지금은 그 경우가 아니겠군요.”
두신이 말하다 말고 외척에 대해서는 반론을 접었다. 당대 고려는 금상의 외척으로 정권을 잡는다는 게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염흥방의 성격이나 판단력을 생각하면 그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죠. 뭐, 그의 딸이 왕우와 결혼한 거야 일 치르기 전에 이혼시키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요. 궁중후의 딸이면 재가하는 것도 문제는 아닐 테니까요.”
“궁중후 쪽이 별문제가 아니라면, 요동국 쪽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겠죠?”
“어렵게 생각하면 그런데, 쉽게 생각하면 또 쉬울 수 있다고 봐요. 저한테는 강철 화포가 있잖아요.”
“무력시위요? 음, 아니군요. 선물이겠군요.”
두신이 잠깐 놀랐다가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초기에 제작된 화포들 대부분이 퇴역해서 비축 물자로 쌓여 있는데 그걸로 꾀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요동국에서도 나름 화포를 만들고 있다곤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커다란 청동 화포 외에는 소득이 없거든요.”
당연한 말이지만, 탐라군이 선보인 화포의 위력을 경험한 나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화포 개발에 열중하였다.
요동국은 물론, 고려 왕실도 그렇고, 일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탐라국을 제외하고 화포의 기술이 가장 앞선 나라는 여전히 명나라였다. 한눈 팔지 않고 청동 화포에만 집중하고 있는 덕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나라, 다른 세력들은 몽주의 강철 화포를 여실히 체감한 터라, 어떻게든 그걸 따라 해 보고자 노력하다가 실패를 맛보는 중이었고, 대안으로 일단 청동화포나 일반 철제화포를 만들어 전력화하는 중이었다.
“요동국이 지정학적으로 군사력 확충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만큼, 제가 제시하는 화포가 요동공에게는 크게 매력적일 거예요.”
“그렇게 전해 준 화포가 차후에 탐라군을 향해 발포될 수도 있을 텐데요?”
재상의 물음에도 몽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요동국과 탐라국이 전쟁을 한다는 말인데, 절대 그런 지경까지 이르면 안 되겠죠. 근데 지금 진행 중인 탐라군의 개혁이 완료되면 어느 세력에게도 질 것 같지는 않아요. 심지어 요동국이 명나라를 불러들여도 방어만큼은 가능할 것 같고요.”
거만한 말일 수도 있지만, 몇 년만 더 지나면, 적어도 군사에 국한해서는 명나라와의 충돌도 별로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두려운 건 명나라라는 거대 시장을 잃는 것뿐이었다.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 후에도 자칫 고려 물산에 대한 배타심이 크게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에서 찾아보면 중국인들은 적대 세력과 충돌 중에도 그 세력과 교역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몽골이나 여진이 북중국을 점령하고, 남중국 침략을 도모할 때도, 남중국에 몰린 송나라나 명나라의 상인들은 대운하를 통해 북중국에 식량을 매매하였다.
역시 중국인들은 타고난 장사꾼이다 싶은 면모였다.
하나, 몽주는 그런 사례를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바로 적용하긴 어렵다 여기고 있었다.
그 사례들은 어쨌든 중국 안에서 이뤄진 교역으로, 따져 보면 결국 중국인들이 생산한 걸 중국인들이 소비하는 행태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고려는 명나라는 물론, 이전 이후 모든 중화제국들이 속국 내지, 신하국 정도로 낮춰 보던 나라로, 이는 비단 외교적인 관계를 넘어 중국인들의 심리 자체에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심리가 고려와의 싸움에서 한두 번 이기지 못한다고 꺾일 리는 없고, 오히려 격앙되어 고려의 모든 것을 배척하는 심리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서 중국과 한국이 국지전에서 맞붙어 한국이 이긴 경우를 가정해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중국인들은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쳐 적개심을 극단적으로 표출할 것이고, 한국 상품을 중국 시장에서 철저하게 내쫓을 것이다.
전쟁에 이긴 한국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될 게 분명했고, 이는 천몽 속 상황에서도 같았다.
하여, 명나라와 싸운다는 건 명나라 백성들의 기마저 꺾어 줄 만큼 압도적으로 이겨, 애초에 종전협정 때 굉장한 이문을 뜯어내야 한다는 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응천부를 점령하는 위업 정도는 거둬야 할 것이다.
‘그게 언제쯤 가능하려나.’
문득 생각해 보면 아직은 멀었다는 결론만 남았다.
어쨌든 몽주는 단지 구식 화포 몇 문을 요동국에 전하는 것에는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고, 재상과 두신도 그것을 요동국이 탐라국을 이길 수 있는 변수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여나 싸우면 요동국에 강철 화포가 있는 것과 아닌 것은 탐라군의 피해 규모도 다를 텐데요?”
“그게…….”
몽주는 답하려다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몇 년 후에 10만 정도는 동원할 수 있겠다 싶으니까 몇 천 명 정도는 슬슬 숫자로 보이더라고요.”
그것도 아군이 당하는 규모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적의 피해는 별다른 감정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이주섬에서도 어느 정도 깨달은 부분이었다.
화포를 미끼로 쓰는 부분에 대해서 세 사람은 가급적 요동국에 양도하는 양을 줄이자는 데에서 합의하곤 다시 대헌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주가 대헌장에 들어갈 조문을 구체적으로 알리면, 그것을 재상과 두신이 살펴 빈틈이나 오류를 고치는 식이었다.
그러다 문득 몽주는 그의 생각을 한 가지 제시했다.
“이 참에 공공선(公共善)의 단어를 써볼까요?”
“벌써요?”
두신이 놀라 반문하였다. 그가 놀란 까닭은 그 개념의 등장이 뜬금없기 때문도 아니었고, 역사에 비해 너무 이른 탓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이 몽주와 더불어 세운 계획에 비해 상당히 빠르게 등장하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몽주는 대헌장에 들어갈 조문들 중 일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조문들은 사실 사회 계약이라고 봐도 무방하잖아요. 물론, 사회 계약론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지만요.”
“하긴, 국가 구성원 개개인들과의 계약이란 건 어차피 추상적인 개념이죠. 이건 권력자들 간의 계약이긴 하지만, 그 내용이 인위적인 합의로 공동의 사회를 이룩하려는 거니까, 공공선이나 공공의 이익 같은 말을 써 볼 만하네요.”
재상이 대략 동의하자, 몽주는 그가 제시한 것을 다시 부연하며 강조했다.
“그리고 바로 이 조항들이 요동공 측이 곤란해 하는 부분이거든요. 제가 보기에 공공선을 명분으로 삼으면 설득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실질적인 설득은 실리에 기인하겠지만, 저들도 이 조문들에 합의하기 위해서라도 명분을 찾아야 하니, 공공선이라는 말 자체가 꽤 그럴싸한 명분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공공선이라는 개념보다는 그 단어 자체를 먼저 쓰자는 말이군요.”
“그렇죠. 어차피 개념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정해지고, 알려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째 집을 짓기 전에 문패부터 내거는 느낌이지만, 뭐…….”
재상과 두신은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몽주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더 대헌장에 대해 논의하였고, 대헌장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된 후에는 다른 사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전에 시작된 회의는 저녁 무렵이 되어야 끝이 보였다.
“후우, 안남 쪽은 잊어도 될 것 같고, 구주 도집사 교체도 다의홍이 대략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고, 일본 내전도 별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고…… 고려 안에만 집중해도 될 것 같군요.”
재상이 논의된 사안들을 정리하곤 만족스레 말하였다.
안남의 일은 고려의 이주섬 진출을 확실히 알고 있는 안남왕과 여아부가 죽으면서 이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 구주 도집사 교체의 경우는, 방원 강영의 혼인식 때 방문한 다의홍에게 몽주가 넌지시 언질을 주었는데, 그 반응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도집사 해임 이후 탐라에서 청장급에 임명하겠노라 제안한 게 의외로 꽤 매력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상업 회사를 운영하면서 구주에서의 입지에 크게 자신감이 붙은 덕이 큰 것 같았다.
일본의 상황은 별 변화가 없었다. 남북조 간 간헐적인 전투에 화포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는 게 근래에 가장 주목할 점이었는데, 일본의 철제 화포의 무게와 성능이 여전히 하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어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었다.
재상과 두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몽주가 말했다.
“숙제 꼭 해 주세요.”
“하하.”
숙제라는 말에 재상과 두신이 웃음을 흘렸다.
몽주가 그들에게 내준 숙제란 방원에게 어떤 회사를 운영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몽주가 다시 천몽 속으로 가기 전에 그에 대한 의견을 이메일로 보내게 하였으니,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함주에서 방원이 돌아오면 한번은 논의할 것이기에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재상과 두신이 회의실을 나가며 문이 닫혔다.
“후우.”
몽주도 이야기를 나누느라 지친 몸을 소파에 푹 담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헌장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성공과 실패를 나눠서 예상하자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외 다른 부분에서도 문제 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다음 천몽까지는 푹 쉬어도 되겠다 여기며 몽주는 스마트폰을 들어 진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밤에 뭐해욤?
* * *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소서(小暑)에 서경의 날씨도 무덥기 그지없었다.
다만, 탐라섬 특히 남부 홍로현의 여름 날씨에 익숙해진 포은에게는 참을 만한 정도였다.
“개경 방어군은 1만 3천에 이르지만, 진실로 금상이 부릴 수 있는 수는 5천에도 미치지 못하오. 그간 군병의 수는 많아졌지만, 늘어난 숫자 대부분이 실상 고관대신들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오. 사실 이 사람을 따르는 군병들도 제법 많고.”
연신 부채질을 하며 궁중후 염흥방이 말하자, 포은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도당에서는 단지 1만 여의 군병을 믿고, 탐라공께 대서는 건 아니오. 내가 가진 군병에다가 징집병까지 싹 끌어모을 생각을 하고 있소. 그러면 5만 가까이 늘어날 것이오. 더구나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근자에 왕명으로 청동 화포의 수를 늘리고 있소. 지난번에 파악하기로는 20문 정도였으니, 그보다는 많아질 것이오. 물론, 다 쓸데없는 짓이겠지. 대체 도당의 그 머저리들은 내가 하는 말을 믿으려 하질 않으니……. 화포가 크고 무겁다고 위력도 큰 게 아니고, 군병의 수만 많다고 군력이 세지는 것도 아님을 내 누누이…… 어찌 그리 보시는 게요?”
궁중후는 고려 도당의 상황을 설명하며 투덜대다가, 문득 포은의 시선을 느끼곤 물었다.
“아, 그냥 옛 생각이 났소. 과거 급제한 초년 시절에 궁중후를 선배로서 뵙지 않았소?”
“허, 뜬금없지만, 확실히 그때는 훗날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소이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의 사이는 애매한 면이 있었다.
염흥방이 과거에 장원 급제한 후 3년 뒤에 포은이 장원 급제했으니, 염흥방이 선배인 셈이었으나, 그 후 워낙에 포은이 유자로서 명성을 떨치자 염흥방은 포은을 대하기 어려워했었다.
그러다 탐라공이 등장하고, 두 사람 모두 탐라공과의 인연으로 얽히면서 염흥방은 궁중후가 되어 탐라공의 동료(?)이되, 신하 같은 존재가 되었고, 포은은 문자 그대로 탐라공을 모시는 신료가 되었다.
“괜찮으시오?”
포은의 물음은 사실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염흥방의 인생 자체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소?”
궁중후의 첫 대꾸는 다소 퉁명스러운 것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담긴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탐라공께서 역성혁명을 일으킨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여겼소. 그에 비해 고려 왕실을 남겨 두고 금상만 퇴위시키고자 결정하신 것은 지극히 너그러운 처사일 것이오. 게다가 내 입지까지 계속 생각해 주시니, 지금까지 여러 번 도움과 은혜를 받았음을 생각하면 탐라공은 내 평생의 은인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그저 안타까운 건 작금의 상황에 내몰린 내 막내딸의 운명이지만, 어쩌겠소? 내가 어리석어 금상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한 허물의 대가인 것을.”
“원하면 나라도 나서 재가를 돕겠소.”
“아, 내 푸념일 뿐이니, 걱정 마시오. 이번에는 정말 사람만 보고 내 딸에게 가장 훌륭한 사내를 남편감으로 안겨 줄 것이오. 내가 그 정도 애비는 되오. 후후.”
사실 지금의 정국에서 탐라공이 궁중후와 관련해서 약간의 우려를 한 점은 그가 금상의 장인이라는 점이었다. 하여, 포은으로 하여금 궁중후의 속내를 살피라는 명을 내린 바 있었다.
확실히 처음에는 궁중후가 곤란해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며칠 사이에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조금 전까지 포은이 궁중후와 논의한 것이, 하극상의 명분을 만들고 개경을 점령하는 방안과 관련된 것이니, 각오를 다지지 않았다면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한 나라의 주인이 되시겠소이다.”
“나라라고 하니, 부끄럽소. 그냥 다스리는 땅이 약간 넓어지는 것이지,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하오.”
하나, 말과는 달리 궁중후의 표정에는 내심 만족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대로 다스리는 땅의 넓이가 조금 넓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다스린다’와 ‘소유한다’는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후국(侯國)이라는 지위로 궁중후는 이제 왕실의 대리인을 넘어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요동공은 나보다 생각할 게 많을 듯한데, 어찌 일이 되고 있는지 아시오?”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릴 참이었소. 아무래도 쉽지 않아 주군과 요동공이 서로 만나 담판을 지으시려는 모양이오. 하여, 주군께서 요동공을 만나러 가시는 길에 이곳에도 잠시 들리실 것이오.”
“그렇소? 하면, 언제 오시는 게요? 내 미리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아마 사흘 뒤에 배에 오르실 것 같소. 그 전에 선편이 먼저 닿을 것이니 바로 알려 드리겠소.”
궁중후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포은과 함께 논의에 열중하였다.
“아, 한데, 탐라공께서 직접 요동공을 찾아가시는 것이오?”
“그렇긴 한데, 요성에서 만나는 것은 아니오. 집안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다고 전해 들었소.”
“집안? 어느 집안을 말하는 게요?”
“그게 집의 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지역명이 집안이오. 나도 잘 몰랐는데, 옛 고려의 묘역이 있는 지역을 주군께서 집안이라 칭하셨소.”
“아, 집안이 그 집안이 아니구려. 한데, 그 집안이라는 곳은 또 어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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