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22)
* * *
광개토대왕릉비를 앞에 두고 몽주는 정작 현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딱히 어떤 특정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오히려 아무런 사건이 없었던 것, 즉 현대에서 광개토대왕릉비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뉴스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무리 광개토대왕릉비가 중국 땅에 있다곤 하지만, 눈에 띠는 비문의 변화가 있다면 충분히 소식이 있을 법하건만 없었다.
그리고 이는 곧 천몽의 법칙에 대한 생각으로 몽주를 빠져들게 하였다.
귀납적인 추론으로 재상이 밝혀 낸 천몽의 법칙들이 명백히 틀린 점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 법칙들이 천몽의 모든 법칙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일단 현대에서 곧바로 구현되는 사물의 변화는 고려 당대와 현대에도 공히 남아 있는 사물에 한해서 일어난다는 건 확실했다.
다만, 현대에서 좀처럼 고려 당대의 유물에 변화가 생겼다는 뉴스를 듣지 못하는 걸 보면 양쪽 시대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사물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
17년에 걸쳐 몽주가 만든 역사적 변화의 크기를 생각하면 현대에 있는 고려 당대의 유물들도 변하거나 사라지는 일이 제법 있을 법한데도 말이다.
고려 당대의 사물들 중 거의 대부분은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의 시대에 존재하는 사물은 그게 무엇이든 대부분이 현대에서는 보물 취급받을 걸 생각하면, 현대에까지 살아남은 것들에 생긴 변화에 대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몽주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고려 시대의 혹은 고려 시대를 거친 유물들이 현대에서 막 사라지고 변해서 난리가 난다면 감옥 속에 있는 어떤 인간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믿는 자들도 나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여, 겉으로는 무신경한 채 있었고, 재상이나 두신과 그에 대해 논의한 적도 없었다.
다만, 속내로는 고민을 조금 해 봤는데, 아무래도 천몽 속에서 쓰는 자신의 손이나 의지 같은 게 변화를 위한 조건 중 하나이지 않나 싶었다.
첫 천몽 때의 예식용 청동검부터 공태수를 엿먹인 중국 보물이나, 철당간까지 현대에서 변화가 드러난 사물들은 모두 적어도 한 번은 몽주의 손을 거쳤거나 변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던 것들임을 생각하면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저 세월의 힘으로 많은 변화들이 걸러졌을 가능성도 남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확실히 편의적이란 말이야.”
“뭐가 편의적이란 겁니까? 하하하.”
“아, 오셨군요.”
생각에 잠겨 있던 몽주는 문득 들린 요동공 이성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그를 맞이했다.
“이거, 먼저 이곳에 청해 놓고는 내가 늦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사돈.”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런 말은 마십시오.”
몽주와 요동공은 잠시 만남의 기쁨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란히 광개토대왕릉비를 바라보았다.
“내 이미 탁본을 받아 보았지만, 이 석비의 주인인 호태왕이라는 옛 고려의 임금은 뛰어난 정복자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예, 제가 봐도 그렇긴 합니다.”
“……?”
대답을 들은 요동공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몽주의 말투에 뭔가 아쉬운 느낌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석비에 뭐 실망이라도 하신 겁니까?”
“호태왕에게 실망이랄 건 아닙니다만, 왜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걸쳐 있던 옛 국가들을 정복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니, 어째 기분이 씁쓸합니다.”
“허허, 하기야 씁쓸할 일이긴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왜구들이 많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니까요.”
이상계의 말을 듣자니, 뭔가 오해가 있다 싶어 몽주가 고쳐 말했다.
“왜구가 쳐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신민으로 삼았다고 적혀 있으니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저 신묘년의 글자들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거의 1,800자에 달하는 글자들 중 역사적 논란의 소지가 된 건 바로 신묘년 기사 32자였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앞뒤로 연결되는 문장이 더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저 훼손된 세 글자가 무엇이냐를 두고 한국과 일본이 다투고, 그 사이에 중국이 간간이 개입하는 꼴을 이룬 시간만 1세기 이상이었다.
일단 羅(라) 자 앞에는 新(신) 자가 거의 확실하여, 신라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고, 남은 두 글자가 무엇이냐를 두고 일본은 任那(임나)를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그를 두고 한국의 학자들이 다른 해석이나 글자를 주장하고, 급기야 비문변조설까지 나오면서 난장판을 이루었다.
물론, 다른 탁본들의 발견으로 비문변조설은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었지만, 중국인 초균덕이라는 자가 百殘(백잔 : 백제)뒤에 東(동) 자가 있었음을 밝히는 필사 기록을 남긴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혼란의 도가니를 만들었다.
한데, 그 초균덕이라는 자가 광개토대왕릉비 근처에 살면서 비문의 탁본을 팔아먹던 자임이 드러났고, 급기야 그가 보다 명확한 탁본을 위해 석회칠을 마구잡이로 하여 비문을 크게 훼손시킨 당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기록 자체도 의심을 받는 상태에 이르렀다.
1세기 동안 진행된 논란과 논쟁의 결과가 다시 상상의 영역만 남기고 도로아미타불인 셈이었다.
한데, 지금 몽주는 상상이 아닌 진실을 보고 있었다.
‘百殘加羅新羅’
임나는 아니었으나, 대신 가라(加羅).
즉, 가야가 있었으니, 한국의 학자들이 제시하던 해석 중 하나가 맞은 셈이긴 했다.
하나, 해석을 하자면,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되니, 일본에 유리한 해석이었고, 실제로 일본 측이 임나 다음으로 주장하던 해석이었다.
‘뭐, 어차피 현대에서 광개토대왕릉비가 안 바뀌면 어찌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설령 현대에서 비문이 바뀌어 진실이 드러난다 해도, 적어도 임나일본부의 근거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크게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그저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영역이 되었다는 것 기록 자체에 몽주의 기분이 은근히 상했을 뿐이었다.
한데, 요동공 이성계는 그 문구를 다시 살피다가 피식 실소하였다.
“내 탁본을 보면서도 생각했지만, 역시 과장이 심한 기록이군요.”
“예?”
“왜는 저 삼국, 아니 2국과 1지방을 신민으로 삼은 적이 없으니까요.”
현대 역사학자들도 이미 밝힌 바지만, 가야는 단일 국가는커녕, 연방국도 아니었다. 그냥 지역의 명칭이었다.
“하지만, 비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비문이 국사(國史)도 아닌데 좀 과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몽주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과장이라 단정하면 비문의 다른 ‘자랑스러운’ 기록들도 의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 앞으로는 백제, 신라가 옛 고려의 속국이라 쓰여 있고, 저 뒤로는 옛 고려가 백제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지요? 그러니까 옛 고려가 군사를 동원한 게 왜의 침략을 받은 속국을 구원했다는 식으로 명분을 세운 셈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비문에 가득한 정복의 기록 모두 그와 같습니다. 호태왕이 어디를 정복했는데, 그곳의 어느 나라, 어느 세력이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질렀다, 혹은 그쪽 누군가를 구원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게다가 왜가 신민으로 삼은 지 채 5년 만에 호태왕이 백제를 몰아낸 것 같은데, 하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왜가 저 2국 1지방을 제대로 신민으로 삼았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 식이면, 십 년 전에 고려는 왜의 신민이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
몽주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반론의 거리를 찾지 못한 탓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요동공의 자세에서 더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성계의 말을 통해 그 묘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탐라공께 아주 유리한 내용인 듯합니다. 안 그래도 구주의 백성들을 교육함에 있어 구주와 고려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강조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대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침탈했든 경영했든 구주는 그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
“아닙니까? 방원이는 그리 말하던데…….”
아닌 게 아니라,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몽주는 새삼 절감했다. 역사는 해석이고, 그 해석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을.
현대에서 일본의 주장에 대해 한국은 늘 반론하기에 급급했고, 그러다 비문조작설이라는 무리한 주장까지 내세워야 했던 건 현실이 따라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식민지 통치 시절은 물론 해방 후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국력 탓에 학문적인 연구까지도 저절로 수세적인 입장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90년대 이후 한국의 국력이 크게 성장하고, 선진국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에 대한 연구의 결론도 상당히 냉정하게 변했다는 자료를 본 게 떠올랐다.
그저 비문일 뿐 국가적 기록이라 볼 수 없으니, 그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가늠하는 건 무리라는 주장을 하거나, 임나가 적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임나는 그저 가야에 속한 작은 지방의 명칭이나 국명에 불과하기에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될 수 없다면서, 오히려 가야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임나일본부, 즉 교역과 외교를 위한 창구인 임나일본부를 조작하여 일본식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은 것을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과거 가야에 임나라는 지역명이 쓰인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임나일본부와 연관이 될까 싶어 한국 학계에서조차 임나에 대해 언급을 꺼려 했었는데, 한국의 발전과 더불어 ‘그래서 뭐? 아닌 건 아닌 거지!’라는 자신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하하!”
몽주는 문득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의 입장이야말로,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대응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국력이 이 시기에 고려의 국력을 넘어섰다는 역사와 무관하게, 고려는 왜국을 내려다보았고, 이제 몽주로 인해 역사가 바뀌면서 실제 국력도 왜국은 고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 왜국에서 누가 옛날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면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일본이, 일본 중 어디라도 한반도와 얽힌다면, 몽주는 오히려 그걸 명분으로 삼아 그 지방에 영향력을 침투시킬 것이고, 나아가 아예 병합해 버리면 그만이다. 구주를 그랬듯이.
탐라식 ‘임나일본부’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옛날부터 얽히고설켰어.’
전쟁의 명분과 무관하게 지배의 명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은 고려가, 탐라가 더 강하니까 말이다.
“어찌 그리 웃으시는 게요?”
몽주가 한참이나 웃다가 겨우 진정하자, 그걸 보던 요동공이 물었다.
“하하, 후우후우, 아, 죄송합니다. 그냥 문득 후련한 마음이 들다 보니 웃음까지 터졌습니다.”
“…….”
그래도 계속 요동공이 이상하게 바라보자, 몽주는 조금 무안한 기색을 띠며, 탐라 군병들이 미리 펼쳐 놓은 군막으로 그를 안내하며 말을 돌렸다.
“옛 흔적은 그만 보고, 이제 고려의 새로운 질서를 논하려 가시지요.”
“새로운 질서요?”
“네, 고려의 품에서 탐라국과 요동국이 얽히고설키는 질서 말입니다.”
* * *
사실 집안은 국가 원수들 간의 만남 장소로는 그리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야루강 하류도 아니고 200길미가량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곳.
과거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 도읍을 못 찾아 헤매다가 겨우 발견하고는 이런 촌구석에 도읍을 세웠냐며 욕설을 내뱉었을 만큼 외진 곳이 집안이었다.
물론, 강변 평야의 넓이가 좁지마는 않았다.
하나, 도읍의 입지 조건에서 평지의 크기 이상으로 중요한 게 사통팔달(四通八達)임을 생각하면, 야루강 줄기를 제외하고 사방으로 산에 꽉 막힌 집안 지역은 방어 요새를 세울 곳이지, 도읍이 설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마 요동공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저 먼저 돌아간 무학 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가진 중에 불현듯 만남의 장소로 제안했을 것이다.
접선 장소로서 집안의 유일한 장점은 협상이 지지부진할 때, 이리저리 다니며 마음을 식힐 만한 곳이 많다는 점이었다.
집안에는 능묘가 가득했고, 특히 북쪽 계곡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능묘가 솟아 있어, 그야말로 왕가의 계곡이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하나, 그럼에도 가장 큰 능묘들은 모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야루강 북안에 위치해 있었고, 그중에서도 현대에서 ‘장군총’, ‘태왕릉’이라 부르는 두 능묘는 가장 웅장한 것들이었다.
그 두 능묘는 모두 4세기 후반 5세기 전반에 지어진 것이기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능묘라 불렀는데, 사실 어느 쪽이 누구의 능묘인지는 명확히 판가름되진 않았다.
그저 태왕릉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 쓰인 명문전이 있어, 태왕을 호태왕, 광개토대왕으로 추정하면서 장군총도 장수왕의 능묘라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태왕릉이 장군총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지어졌다는 고고학적인 결과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하나,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꼭 광개토대왕릉을 말한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전혀 다른 고구려왕의 능묘일 수도 있어 그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혼란은 그 능묘로부터 유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능묘의 입구가 명백히 드러나는 형태의 고분인 터라 도굴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고려 당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힌 수묘인들이야 나라가 있을 때나 능묘를 지켰을 터, 이후에는 먼저 털어가는 자가 유품의 임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수묘인들이 오히려 도굴범이 되었을 수도 있고.
태왕릉 앞에서 그 무너진 적색 석총을 바라보던 몽주가 문득 말했다.
“난 죽으면 화장할 것이네만, 혹시 다른 누가 나에게 큰 무덤을 쓰려 한다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자네가 꼭 말해 주게.”
“네, 네?!”
얼결에 답했다가 당황한 자는 광개토대왕릉비의 탐사대를 이끈 감태였다.
명에 따라 호종에 나선 일개 중위의 입장에서는 듣기에 따라 너무 무거운 말이었다.
“……군관대신과 재무대신에게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잠깐의 당황 끝에 감태는 겨우 그가 떠안을 책임을 그 자리에 없는 군관대신과 재무대신에게 넘겼다.
그 둘은 집안에 함께 왔지만, 지금 요동 측 실무진과 더불어 대헌장의 조문을 두고 한창 입씨름 중이었다.
“농담일세. 요새 누가 이처럼 큰 능묘를 쓰겠는가.”
“예, 그렇습니다!”
군기든 목소리에 몽주는 감태를 돌아보았다. 오래전에 석삼과 함께 본 적 있던 어린 군병은 이제 늠름한 장교가 되어 있었다.
“자네 성이 파(波)씨라 하였던가?”
“네! 탐라를 미는 물결이 되고자 그리 지었습니다!”
“멋지군. 많이들 노렸을 성씨인 듯한데, 잘 정했어.”
“감사합니다!”
그쯤에서 감태와의 대화를 끝내며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려 나온 답청을 마치고자 몽주가 발걸음을 옮기는데, 군막 쪽에서 이성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반 시진 전쯤에 협상이 평행선 상태를 이루자,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머리를 식히고자 하였는데, 이성계가 먼저 몽주를 찾아온 것이었다.
“묻고자 하던 걸 잊고 묻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몽주 앞에 오자마자 이성계가 입을 열어 물었다.
“왕요를 택한 이유가 특별히 있었습니까?”
“그자에 못마땅한 점이 있으십니까?”
몽주가 되묻자, 이성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못마땅한 건 아닙니다. 이미 나도 동의한 인선이기도 했으니. 다만, 내 생각보다 더 영민한 자더군요.”
지금 요동국에 납치(?)된 왕요는 당연히 차기 고려국왕 감으로서 탐라공과 요동공이 합의하여 택한 자였다.
왕요를 택하기로 합의하는 과정은 순식간이라 할 정도로 빨랐다.
탐라공이 택한 왕요에 대해 살폈던 요동공은 그가 왕실에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장사치나 다름없음을 알게 되자 곧바로 동의했던 것이다.
얼핏 허수아비 왕으로서 적합하다 여긴 것이었다.
한데, 막상 요동국으로 데려와 만난 왕요라는 자는 두려운 중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기에는 너무 똑똑했기에, 요동공은 인선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나,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똑똑한 인물이죠. 그래서 그를 택했고요.”
“그래서 그를 택했다고요?”
마치 몽주의 의도를 깨내려는 듯한 시선으로 요동공이 묻자, 몽주는 실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사돈, 좌의정을 통해 제 이야기를 잘 전해 들으셨다면, 내가 고려국왕을 고려의 상징으로 삼고, 높은 곳에 세우길 바란다는 걸 이미 아실 것입니다.”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건 높이 솟아 펄럭이는 깃발과 같은 것입니다. 한데, 높이 세우는 건 우리가 할 수 있지만, 크고 화려하게 펄럭이는 건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 해야 할 일이지요.”
“…….”
비유가 섞인 말을 곱씹으며, 이성계는 삼봉으로부터 전해 들은 탐라공의 생각 중 하나를 떠올렸다.
명예, 존경, 돈.
고려 왕실에게 쥐어 줄 것들이라 하였다.
펄럭이는 깃발의 비유에 다시 빗대자면, 그것들이 깃발을 휘날릴 바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명예와 존경, 그리고 돈으로 힘찬 바람을 만들 자는 분명 똑똑한 자여야 했다.
하나, 그럼에도 똑똑한 자가 고려 국왕이 되는 것이 꺼림칙한 이유는 남아 있었다.
“너무 똑똑한 자는 결코 깃발로 남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잘하면 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지요.”
“…….”
“깃발을 높이 세우려면 땅에 튼튼히 박아야 할 것이고, 땅에 튼튼히 박힌 깃발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 화려한 깃발을 뽑아내어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요? 요동공께서 그러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혹시 제가 그럴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저는 아닙니다.”
“나도 아니지요.”
“그럼 고려의 누가 가능할까요?”
억지를 부리자면, 누구라도 가능하겠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탐라와 요동에 반해서는 그 누구도 가능하지 않았다.
혹, 탐라와 요동이 힘을 잃었을 때를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그냥 고려가 망했을 때이리라.
이성계는 한참이나 몽주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끝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양 한마디를 던졌다.
“대체 어찌 그리 왕좌를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몽주가 이상할 정도로 고려의 왕좌를 멀리하고 있음을 깨달았기에 한 말이었다.
고려 왕실을 끝끝내 남겨 두고, 심지어 높이 세우려는 그 의지를 매번 더 크게 느끼게 되니,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심리적인 경계심 탓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만큼 탐라공이 요동국을 두고 음험한 생각을 하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과도 맞닿았기 때문이다.
깃발은 홀로 높이 세울 수 없는 법이니까.
홀로 높이 세운다 한들 누가 깃발을 보겠는가.
지난날 신돈이 그랬듯 권왕(權王)으로서 그 깃발을 홀라 세운 자를 쳐다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탐라공은 그가 권왕이 되는 것조차 꺼리고 있었다.
어쩌면 요동국을 남기려는 이유가 그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동공은 왕좌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
“전 두렵습니다. 제가 잘하더라도, 언젠가 내 후계 중에 엉망진창인 놈이 왕좌에 올라 나라를 파탄 낼 테니까요.”
“그거야 탐라공이 탐라공으로 남는다 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다르지요. 요동국에도 똑같이 엉망진창인 놈이 요동공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이상은요.”
“…….”
“그러니까 요동국도 지금보다 더 부강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얼마간 홀로 고려를 지탱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물론, 탐라국도 마찬가지겠고요.”
‘맙소사.’
이성계는 속내로 신음하였다. 문득 탐라공의 시야가 너무나 넓고, 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탐라공은 자신의 영광, 가문의 영광을 넘어 고려의 영광을 시야에 담고 있었고, 그의 삶을 넘어 천세만세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대체 어찌 그렇게 멀리 보려 하시는 게요? 당장 백 년 뒤의 세상도 어떻게 변할 줄 모르건만…….”
몽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로 인해 역사 변화의 규모는 점점 커질 것이니, 확실히 훗날을 정확히 예견하기는 어려워졌다.
하나, 적어도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몽주는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몸이었다.
“세상은 변하겠지만, 아무렇게나 변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 현실의 노력과 경주(傾注)의 결과인 법이지요. 그러니 백성들로 하여금 천세를 부르고, 만세를 부르게 하는 자라면 응당 천세만세를 바라보고 치세하려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몽주의 되물음에 이성계는 잠시 더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말머리를 돌렸다.
대헌장의 조문을 두고 탐라국과 요동국 사이에 합의가 성사된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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