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24)
* * *
아마 고려가 개국한 이래 가장 조촐한 즉위식이었을 것이다.
문무백관이 도열하고, 용종들이 좌와 우를 채우고 있었어야 할 정전(正殿) 앞 조정은 몇몇의 인사들만이 자리를 하고 있을 뿐, 텅 비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인사들 중에 고려의 기둥들이라고 불릴 자들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보이는 규모라는 것도 무척 중요한 자리인 만큼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 분위기란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관들이나 궁녀들, 그리고 거의 끌려나오다시피 한 용종의 몇몇 대표들이 보이는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었고, 뒤늦게 도착하여 즉위식에 참석한 유구공을 포함하여 3공 1후의 안색은 평안했으며, 신왕 왕요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이제 남은 건 오직 개경 왕성뿐인 허수아비 왕의 즉위식이나 다름없었겠지만, 그 네 공후만큼은 이 자리가 고려의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첫 장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 왕요도 자신만 잘하면 고려 왕실의 왕실로서의 가치를 다시 쥘 수 있을 것임을 알기에 실의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대와 각오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날이 가진 역사적 중요성은 왕요의 즉위식보다는 그 뒤에 있었던 대헌장 서명식에 무게가 더 실려 있었다.
훗날 병인 대헌장(丙寅 大憲章), 혹은 고려 초조(初造) 대헌장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시험을 보는 수많은 학생들을 괴롭게 만든 고려 최초의 대헌장이 그날 세상에 나왔다.
“아직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고려의 신제(新制)로 남을지, 아니면 그냥 몇몇 권신들이 왕실을 능멸한 사태의 증좌로 남을지는 더 훗날에야 판가름할 수 있을 겁니다.”
오십 대 초반의 초로인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였다.
대헌장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제 고려 왕실의 근위대장으로 임하게 된 자의 다소 퉁명스런 대답에 몽주는 미소를 띠곤 요동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앞에서 교언영색을 띠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에 이성계도 피식 실소하곤 신임 왕실 근위대장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봤는데 자네는 변함이 없군. 참 다행일세.”
“사람이 쉽게 변할 수야 있겠습니까. 장군은 어떠십니까?”
“음? 허허.”
뼈있는 근위대장의 되물음에 요동공은 살짝 당황했다가 웃음으로 무마하려 하였다. 하나, 변안열이 계속 응시하고 있자, 이성계도 웃음을 거두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고려의 깃발이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걸세. 이것으로 답이 되었는가?”
“…….”
근위대장은 잠시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이성계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사람에게 인생 이상에 대해 말하라 요구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또다시 묻는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몽주에게로 향했다. 그에 몽주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성계의 대답에 대한 그의 소감은, 곧 몽주에 대한 비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대헌장을 통해 몽주가 추구하려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서는 시간에 걸친 고려의 변화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철없는 어린아이 보듯 할 필요는 없소. 세상이란 게 어디 완성을 볼 수 있는 곳이겠소?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노력으로 계속 만들고 쌓아 가는 곳이지. 다만, 대헌장은 그 기초를 이루고자 하는 것일 뿐이오. 달리 본다면 태조께서 고려를 창업하셨던 것처럼, 금상의 시대에 다시금 고려 중흥의 장을 열고자 한다고 보시면 될 것이오.”
“…….”
이번에도 신임 근위대장은 얼마간 눈싸움을 하는 양 몽주를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 눈빛으로 진심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안다고 믿는 사람처럼.
몽주는 문득 그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당장에 고려의 국왕도 갈아치울 수 있는 두 국공이 일개 장수의 채근과 의심에도 성실히 답하고 있는 건 확실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따져 보면 두 국공이 신임 근위대장을 어려워…… 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게 대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왕실의 근위를 맡길 인물이 워낙에 없기 때문이었다.
폐위된 우왕 시절의 고관대신들이란, 궁중후의 평대로 하나같이 싸잡아 죽여도 무방한 자들뿐이었고, 실제로 극소수를 제외하곤 이번 난리를 전후하여 다 목이 달아났다.
남은 극소수도 그나마 겨우 연명에 성공했다 할 뿐이지, 직위를 주고 중한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자들은 아니었다.
개경과 인근의 재야에서 찾아보고자 하여도, 이미 뜻있는 자들은 모두 요동과 탐라로 입신양명을 찾아 떠나간 탓에 그럴 만한 인물이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요동공이나 탐라공의 수하들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적어도 이제 왕도(王都)이라 불릴 지역, 즉 고려국왕의 직할령에는 어느 제후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대헌장에 명시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근위대장은 이제 고려 국왕이 가질 수 있는 두 관부, 근위소(近衛所)와 내수소(內需所) 중 근위소의 수장인 바, 고려의 깃발로서 자리 잡아야 하는 국왕의 최측근이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아무나 앉힐 수 없기에 여러모로 수소문한 끝에 청해백 이두란의 추천으로 지금 그들 앞에 앉아 있는 자를 찾을 수 있었다.
변안열.
본디 역사에서는 최영과 함께 제주에서 목호를 토벌하고, 이성계와 더불어 황산대첩에서 활약하며,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하는 등 역사에 꽤 굵은 족적을 남겼을 그이건만, 그의 전성기는 역사의 변화와 함께 오지 않았다.
공민왕의 몰락과 함께 잠시 좌천되었던 그는 그대로 기회를 얻지 못하고 한직으로 나돌다가 우왕의 즉위와 함께 개경 도당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내 시궁창 같은 곳임을 알고는 스스로 떠나 개경 근방의 절에서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해백과 과거 교우가 있었던 만큼 이성계도 그와 면식이 있었고, 그의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알기에 몽주에게도 권한 바, 몽주도 역사적 위인으로서 변안열을 알기에 흔쾌히 수락하였다.
실제로 보게 된 변안열은 확실히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자였다.
다만, 원래 성격인지 아니면 그간 중용되지 못한 세월의 부작용 탓인지, 예상보다는 다소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요동공이 그를 보며 변함이 없다고 하는 걸 보면, 원래 성격일 가능성이 더 크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변안열을 상대로 요동공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가까운 궐문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궁중후와 유구공과 그들의 신하들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어디 들어가기라도 하시지 예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선선한 바람을 즐기며 신임 근위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몽주가 상황을 조금 미화하여 답해 주자, 궁중후와 유구공도 변안열을 쳐다보았고, 근위대장이 인사를 올리자 마주하여 인사하였다.
워낙에 촉급하게 인선한 탓에 궁중후와 유구공도 말만 들었지, 실제로 근위대장과 대면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근위대장은 요동공이나 몽주를 대할 때와는 달리, 평범하게 두 공후와 인사를 나누고 말을 섞었다.
금상이 4인의 공후를 배경으로 왕좌에 등극했다곤 하지만, 실제로는 요동공과 탐라공 두 국공의 힘이 전부라 할 수 있었으니, 다른 두 공후와는 굳이 딱딱한 말을 나눌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고, 이어 다섯의 사내들이 왕성의 대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니, 그 뒤로 이십여 명의 신하들이 따르고, 좌우로 다소 떨어져 수십 명의 군병들이 호위하였다.
마치 사극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에 몽주가 슬쩍 웃음을 흘릴 때, 변안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언제쯤 여러 제후분들의 군병들을 왕성에서 물리실 것입니까?”
그 물음에는 자신이 근위대장이 된 만큼, 이제 왕성 안의 군병은 오직 근위소에 속한 군병뿐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에 요동공이 대수롭지 않게 자신이 떠나는 대로 모두 함께 철군할 것이라 답하였다.
한데, 몽주는 문득 변안열이 혹시 착각하고 있겠다 싶은 게 있어 말하였다.
“만약 내가 데려온 군병 중 일부를 물리지 않겠다면 어쩌시겠소?”
“……!”
몽주의 되물음에 놀라거나 표정을 굳힌 건 비단 근위대장만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탐라공?”
요동공이 놀라 물음에도 몽주의 시선은 근위대장에게만 가 있었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듯 변안열은 얼른 표정을 일변하곤 다시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말하였다.
“저는 제 도리를 할 것입니다.”
“그대의 도리는 무엇이오?”
“이 왕성은 고려의 지존이 거처하는 곳. 달리 다른 자의 명을 받는 군병은 떠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탐라공의 군병도 마찬가지여야겠지요. 하나, 그 전에 대헌장에 어떤 제후도 왕도에서는 일말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명시하신 만큼 이곳에 계신 여러 제후들 또한 그를 따르실 것이니, 제가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군병을 보내는 것보다 더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과연 그렇군. 그렇게나 근위대장이 대헌장을 믿고 따르니, 내가 마음이 다 놓이는구려.”
“……!”
몽주가 너스레 떠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그 순간 자신이 어떤 의미의 발언을 했는지 깨달은 변안열의 표정이 일 초 사이에 여러 번 바뀌었다.
그가 대헌장을 빌미로 다른 어느 제후의 군병이 왕성에 들이지 못함을 천명하는 순간은, 곧 대헌장이 그가 지키고 따라야 하는 일종의 기준임을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동공, 그리고 궁중후와 유구공, 보십시오. 우리만큼이나 근위대장이 대헌장에 신임을 크게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참 기쁘지 않습니까?”
그제야 앞서 몽주가 했던 의미심장한 물음이 근위대장을 향해 던진 미끼였음을 깨달은 제후들이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낚시질이었다.
지금 고려의 정국에서 탐라공 같은 자가 왕성에 군병을 놔두겠다고 하면, 그걸 위력으로 막는 건 불가능했으니, 근위대장으로서 탐라공을 막아 내기 위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도는 대헌장을 제시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꼼짝없이 자신이 한 말에 묶여 버린 변안열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려 보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조금 전 한 말을 식언하자니, 눈앞에 떼로 모여 있는 제후들의 가시를 받아 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 자체가 마치 자신이 국왕을 두고 무슨 모의라도 꾸밀 생각을 가진 것처럼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눈앞에서 풀이 죽어 가는 변안열을 보며 속내로 실소를 머금고 있던 몽주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오. 근위대장께서 소임을 충실히 수행해야 고려 왕실이 화려한 깃발이 될 수 있지 않겠소.”
“…….”
몽주의 다독임(?)에 변안열의 표정이 어둑한 중에 다시 딱딱해졌다.
그를 청하여 근위대장을 맡기면서 요동공과 더불어 여러 번 설명했지만, 확실히 변안열은 아직까지도 고려의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속내에서는 제후들, 특히 자신과 요동공을 권신으로 의심하는 마음이 꽤 클 것이었다.
그럼에도 몽주가 그를 근위대장에 임하는 데 동의한 건 그의 충심만큼은 믿을 만했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행이 움직여 정전에 앞에 닿자, 제후들은 금상을 다시 뵈기 위해 들어갔고, 근위대장은 입구에서 물러났다.
뒤돌아 가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몽주는 앞으로 그가 어찌할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역사에서 그는 우왕을 복귀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죽었지만, 그것이 진정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흥미로울 만한 건 그가 역사에서 그를 처형시킨 왕을 이제는 근거리에서 지키고, 모셔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 * *
근위대장 변안열은 정전 앞에서 물러난 후, 곧바로 근위소로 향했다.
“엇, 오셨습니까?”
당번병이 널브러져 있다가 헐레벌떡 일어나서는 그를 맞이했다. 변안열은 그의 툭 튀어나온 배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본래 있던, 그리고 난리 뒤에 살아남은 고려 군병들은 모두 해산되었고, 근위대장으로 임하면서 그가 받은 군병들은 요동공이 개경에서 급하게 모집한 신입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수가 1백 명 남짓에 불과했다.
처음에 근위소에 최대 1천 명만 둘 수 있다는 말을 듣곤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보다도 더 엉망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근위병을 모집하고 그들을 제대로 된 군병으로 훈육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지 암담했지만, 변안열을 그에 대한 고민을 뒤로 미뤘다.
대신 그의 책상 위에 대충 둘둘 말린 채 놓인 종이를 펼쳐들었으니, 그것은 한 장의 방문(榜文)이었다.
지금도 개경 거리 곳곳에 붙어 있고, 앞으로 고려 전 고을에 붙게 될 그 방문의 내용은 대헌장에 관한 것이었다.
어찌 임금과 제후들 간의 약조로 이뤄진 내용을 이처럼 자세하게 천하에 알리는가 싶을 정도로 방문은 길었고, 그 안에 가득히 글자가 채워져 있었다.
이는 아무래도 두 가지 글자로 쓰인 탓도 있었다.
하나의 조문마다 한자로 먼저 쓰이고, 그다음에 한글, 속칭으로 상문이라 더 많이 불리는 글자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변안열은 눈도 제대로 깜빡거리지 않은 채 방문에 적힌 대헌장의 내용을 두 번 정독하였다.
이미 앞서 몇 번 읽어 둔 터라 이제는 몇몇 조문은 외울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글자 하나하나에 시선을 꼬박꼬박 주며 읽었다.
“후우, 모르겠구나. 어찌 보면 두 권신들이 홀로 고려를 차지하지 못해 나눠 갖는 것 같고, 어찌 보면 고려를 더욱 튼튼히 세우기 위해 기둥을 늘리는 것 같고…… 훗날 역사에서는 이것을 어찌 판단할꼬.”
변안열의 말마따나 역사는 대헌장을 엄밀히 판단했다. 고려사 전체를 대상으로 보아도 대헌장과 그 전후의 정치 사정보다 더 많이 연구된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몽주의 사후에 곧바로 기이할 정도로 많이 쏟아진 ‘탐라공’에 대한 정치 및 역사 논문 중 대헌장을 연구하지 않은 논문은 없었다.
그 후로도 수백 년에 걸쳐 수백, 수천 번이나 정치와 역사 연구의 주요 소재로 쓰였으니, 대헌장보다 더 엄밀한 역사의 판단을 받은 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당히 치열한 학문적 논쟁의 주인공도 되었는데, 가장 큰 논쟁거리는 바로 탐라공의 의도에 대한 것으로, 대헌장에 담긴 탐라공의 의도에 진정 왕위 찬탈의 욕망이 일말도 없는 게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그건 비단 학문적 논쟁거리만은 아니었다. 수백 년에 걸쳐 탐라공을 소재로 쓰인 수많은 노래와 소설에서 대헌장 정국 장면에서 보이는 탐라공의 모습은 저자마다 다 달랐고,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들 또한 각자의 생각에 따라 반응하면서 때로는 저잣거리 술집에서 생기는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결국 다수설은 있기 마련이었고, 훗날 학생들이 배우는 공식적인 역사에서 주된 논조로 쓰이게 되는 내용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수설의 백미는 의외로 이른 시기에 등장했는데, 몽주의 사후 50여 년 뒤에 ‘요동국’의 ‘영구 대학교’의 문리 학장이 펴낸 논문이 바로 그 다수설의 기원이었다.
그 논문의 내용 중 몇몇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궁서//대저 의도라 하면, 사람들은 심중을 꿰뚫어 짐작하거나, 전후의 사정을 알아보고 그를 통해 짐작하는 것이라 여긴다.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맞는 말이겠으나, 대헌장과 관련하여서는 그른 말이다.
왜냐하면 대헌장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 그 내용에 혼란이 없고, 대헌장을 처음 제시한 탐라공이 병인년 이후로 대헌장에 대해 발언한 것이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 ‘요동성’에서 ‘영구군’으로 올 때 121번 도로를 통해 갈 것이라 말하고, 실제로 121번 도로를 통해 영구군에 도착했다면, 애초에 그자가 가진 의도는 바로 121번 도로임에 분명하지, 122번이나 123번 도로가 그자의 의도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헌장 또한 마찬가지니, 그 내용에 고려의 신체제를 담았고, 그 후 그러한 체제가 정착되었으며, 그에 탐라공의 기여가 크게 높은 걸 다 아는 만큼, 대헌장에 대한 탐라공의 의도는 대헌장에 나온 그대로라 여기는 것이 합당……
(중략)
……이처럼 대헌장의 서문에 해당하는 국헌조(國憲條)에서부터 고려의 정체성을 명백히 밝히고 있고, 특히 ‘왕요’와 제후들이 자신들은 이 헌장에 준수할 것이고, 자신들의 영속적인 후계자들 또한 대헌장을 따를 것이며, 만약 그러하지 않은 자는 정당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천명한 부분은 대헌장이 결코 일시적인 정국의 고수를 꾀함이 아닌, 지속적으로 유지할 체제임을 선언한 것이다.
만약 탐라공의 마음속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결코……
(중략)
국왕헌조(國王憲條)는 고려국왕의 지위를 규정하면서, 고려의 근본이되, 고려의 주인이 아닌 왕도의 주인임을 따로 밝히고, 왕도를 개경이라 칭하며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송악산으로 경계를 확정함으로써……
(중략)
제후헌조(諸侯憲條)는 고려의 제후에 대한 지위를 규정하면서 각 제후가 각각의 영지에서 모든 통치권을 행사함을……
(중략)
사실 더 중요한 건 제후헌조의 뒷부분으로 제후들 간의 군사적 협조 방침은 마치 맹방 간의 군사 조약처럼 보일 정도이고, 이는 비단 각 제후들의 안전 외 왕도의 안전까지 범위를 두고 있는 바, 장차 제후들이 고려의 정체성을 잃지 못하게 설계라도 한 것처럼……
(중략)
……그 의도가 확실히 드러난 것은 제후들이 다른 모든 권한은 가지면서도 작위 수여의 권한은 가지지 못하고, 기존의 작위는 당대로 종료됨을 명시했다는 점인데, 이는 고려 국왕을 직접 모시는 제후들 외 대헌장에 각인(刻印)되지 않은 다른 귀족으로 인해 대헌장의 공고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
(중략)
마지막 선헌조(善憲條)야말로 대헌장이 단지 권세 있는 제후들 간의 권력 분배가 아님을 확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1조 제후국 간의 무관세 원칙이나, 제2조 상단 및 회사의 상업 행위에 대한 침탈 방지 및 상행 이동의 자유 원칙 같은 경우는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탐라국의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기에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존재할 것이다.
하나, 제3조 백성들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나, 제4조 연좌제 폐지에 대한 결의는 각 제후국 간 법적 문화와 사회 제도의 통합을 유도함이 분명하다.
특히, 제5조 사노비 해방에 대한 결의 조항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으로, 비록 각 제후국마다 유예 기간을 정해 두긴 했지만, 그 조항에 제후들이 동의하고, 결의를 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후에 있던 변화를 생각하면 분명히 드러난다.
또, 제5조에는 하나 더 주목할 부분이 있으니, 사노비 해방을 결의한 이유로 공공선(公共善)을 명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나, 당시에는 없었던 말임을 생각하면, 공공의 이득과 정의를 두고 탐라공을 비롯한 제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의했는지를 공공선이라는 말의 창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중략)
……탐라공은 대헌장으로써 고려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고, 그 길로 고려를 힘껏 밀었다. 도중에 지치거나 헤맨 일이 전혀 없다곤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탐라공은 결코 멈추거나 다른 길을 곁눈질한 적도 없었다.
그 의도와 노력의 결과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고려’임을 생각할 때, 탐라공의 의도에 제대로 된 근거 없이 함부로 속된 상상을 덧붙이는 건 자제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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