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27)
* * *
서력으로 1388년이 되었지만, 아직은 정묘년인 늦겨울.
봉필은 마침내 눈이 녹아, 초계면에 있는 그의 인삼밭, 아니 그와 심마니 경팔의 인삼밭을 살피는 중이었다.
“어때? 괜찮은가?”
“거의 다 살아 있네. 몇 뿌리가 썩긴 했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휴우.”
인삼 사업에 투자한 후로 두 번째 겨울이 지났다.
봉필이 인삼 회사를 세우겠노라 다짐한 2년 후가 이제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요즘 봉필은 내류 회사의 사원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그간 쌓아 둔 인맥을 통해 인삼 유통 가능성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예상이야 당연히 좋았다.
다들 약효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보장해 준다면 얼마든지 유통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물론, 근데 ‘유통’씩이나 할 정도로 많은 인삼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물음도 덧붙였다.
아직 인삼 재배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얼버무린 채 넘어갔지만, 봉필의 꿈과 희망은 나날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의 인생 절반을 건 도박이자, 나머지 인생에도 큰 여파를 줄 승부에서 승기를 잡은 느낌이었다.
그런 흥분된 마음은 이내 회사를 설립하는 문제로 옮아 갔다.
그가 알기로 아직 일반 탐라 백성들 중에 회사를 세운 자는 없었다.
탐라 상단 소속이 아닌 회사가 있긴 했지만, 모두 탐라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귀한 분’들이 세운 회사였다.
하여, 아무래도 회사령에 대한 그의 판단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석 사이에서 봉필은 다소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회사를 반드시 세워야 재배한 인삼을 판매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점포를 얻어 그곳에서 팔면 되니까.
하나, 봉필은 고작 ‘구멍가게’를 내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그냥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탐라 상단원인 게 더 나을 것이다.
탐라 상단의 대두 이후, 당금 탐라에서는 상단의 의미가 예전과는 달라졌다.
예전에 상단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회사에게 넘어갔고, 상단은 같은 주인을 가진 회사들을 합쳐 부르는 의미가 된 것이다.
고려의 인삼 시장을 주도하고, 나아가 국제적인 인삼 교역의 큰 손이 되고자 하는 봉필인 만큼 회사 창립은 필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필이 회사를 원하는 건 탐라공의 투자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탐라 상단 외 다른 회사들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 탐라공은 새로 설립되는 회사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 지분을 가져가셨지만, 탐라공의 투자를 받으면서 얻게 되는 이익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당장에 큰돈을 융통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회사의 배후에 탐라공이 계신 것 자체가 수많은 유무형의 이점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적어도 감히 회사에 강압을 쓰려는 자는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심마니 경팔과 세 살짜리 인삼을 둘러보면서 속으로 야망을 불태우던 봉필은 문득 의아함을 가졌다.
“한데, 이걸 나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무슨 소리인가? 뭘 생각했는데?”
“아, 아닐세.”
* * *
봉필이 경팔의 물음을 얼버무리고 있을 때, 초계현에서 멀리 떨어진 곳, 인주(仁州) 남쪽의 어느 야산에 몇몇의 인물들이 며칠째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숙 부장님!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한 젊은 사내의 고함 소리에 그가 부른 숙 부장이라는 인물 외에 다른 이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기, 이거 은맥 아닙니까?”
“오오, 그런 것 같은데?”
숙 부장이 진중한 표정으로 파헤쳐진 땅을 살필 동안 다른 이들은 설레발치며 서둘러 은 채취용 장비를 꺼내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 이제껏 여러 번 허탕을 친 적 있기에 숙 부장은 손으로 은맥으로 보이는 흙을 매만지며 심사숙고하였다.
다행히 그의 결론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번 채취해 보지. 적어도 연맥만은 아닌 듯하니.”
어차피 은이란 건 납과 함께 얻게 되어 있었고, 둘 중 하나가 나온다는 건 다른 것도 나온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비중이 어떠냐에 따라 은광이 되느냐, 연광이 되느냐가 달려 있었다.
숙 부장의 지휘 아래 사내들이 은맥을 캐내어 그들에게는 익숙할 대로 익숙한 연은채취법으로 석광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 후, 사내들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은이 많습니다. 팔분지 일은 은인 듯합니다.”
숙 부장도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면 채산성이 충분했다. 한데, 납이 녹고 난 뒤 남은 은의 빛깔이 그가 익숙한 은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하여, 기쁨을 잠시 미루고 남은 은을 살피는데, 뭔가 누런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혹시……?’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기대감도 들었다. 만약 그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 이상의 성과가 분명했다.
하나, 숙 부장은 차분하게 휘하에게 명하여 은을 조금 더 채취하게 하고는 다른 말은 없이 그곳에서 철수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이런 야산에서는 분석하기 어려울 것이었기에 돌아가 회사의 공소를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회사의 자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건 도의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몰래 쓰면 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고 이러저러한 필요 때문에 회사 내 하급 사원들을 포섭해 둔 것이었다.
지금도 회사 일로 인주에 올 일이 있어 왔고, 잠시 틈을 내 개인적인 일을 처리한 것이기도 하니, 숙 부장은 자신의 훗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마음을 품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쓴 수단과 방법이 돌고 돌아 자신의 발목을 잡지 않게 할 자신도 있었다.
숙 부장은 부하 사원들와 함께 회사 파견단에 다시 합류하였고, 며칠 후 진주의 중업회사 본청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 숙 부장은 회심 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가 인주 인근 야산에서 캐온 은에는 당연히 또 다른 물질들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금도 포함되어 있었고, 결코 작은 양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디 역사에서 더 훗날에 개장되어 금, 은, 납을 모두 채굴하는 채산성 높은 광산으로 이름을 떨쳤던 부평광산이 역사보다 일찍 생길 가능성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숙 부장, 즉 중업회사의 채광부장 중 하나인 숙진석은 기쁜 중에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혼자 해 먹기는 너무 큰 건이겠군.’
혼자 먹기 너무 크면 나눠 먹어야 하는 법이었고, 나눠 먹어야 할 상대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하기야 애초에 숙진석이 다른 곳을 헤매는 일 없이 인주 남쪽에서 은맥을 찾기 시작한 것도 그자가 중업회사에 알려 준 정보 덕분이었다.
‘내 이름을 딴 회사를 가지게 되는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며 숙진석은 입가에 큰 웃음을 띠었다.
1388년의 봄이 멀지 않음에, 여기저기 피어나는 건 비단 초목만이 아니었다.
* * *
외관대신 차현유가 귀환한 것은 그가 떠난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남쪽이라곤 해도, 대한의 추위 속에 바닷바람을 뚫고 온 차현유는 곧장 탐라공 앞으로 달려갔다.
“선박 1백 척?”
“예, 주군. 아무래도 바다로 안남 지방을 치려는 모양입니다.”
“1백 척이면 중함선 빼고 거의 전부로군.”
탐라수군에 속한 경함선의 수가 110여 척이었다.
“태자는 저희가 새로 배를 많이 지어야 할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줄여 말했군.”
“예, 쉰 척이 전부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1백 척을 ‘빌려’ 달라 요구한 것을 보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태자가 믿어 주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나, 어쨌든 태자의 요구는 확인했고, 그 자체가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그 요구를 통해 탐라의 이주섬 진출을 명나라로부터 묵인 받을 가능성이 농후해졌으니까.
물론, 태자가 그리해 준다고 해도 예기치 못한 일로 천자의 시선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태자를 설득하지 못했을 경우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나저나 태자가 상당히 과감한 작전을 세웠군.”
“제 눈에 명 태자가 많이 바뀐 듯했습니다.”
그 말에 몽주가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지자, 차 대신이 말을 이었다.
“일단 겉보기에도 볕 아래에서 많이 돌아다녔는지 피부가 짙어졌고, 그래서인지 천자와 닮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행동거지나 말투에도 권위가 제법 묻어 있기도 했습니다.”
“오만해졌다는 말인가?”
“그…… 렇다곤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대화가 통하는 자였습니다.”
“오, 그래?”
하기야 말이 통하니까, 이번 협상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합리적인 중에 과감해졌고, 황태자로서의 품위도 갖추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으니, 몽주도 문득 태자를 보고 싶었다.
그립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고, 장차 대 명나라 정책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인물일 수밖에 없는 태자에 대해 좀 더 잘 알아 두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 지금에 이르러 몽주는 명나라처럼 마냥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곳에 함부로 가기에는 위치가 너무 무거워졌다.
이는 명나라 태자 주표의 경우에는 더할 것이니, 이제 서로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극히 드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태자의 긍정적인 변모는 몽주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교역과 외교에 있어 중요한 상대국의 차기 보위자가 말이 통하는 자라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장차 경쟁자적인 입장으로 보자면 그만큼 조심해야 할 부분이었다.
또, 차후에 연왕의 야심을 통해 명나라를 일시적으로라도 분열시켜 볼까 하는 마음에서는 언감생심한 일이 될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면도 있었다.
어쨌거나…….
“……음?”
몽주는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문득 스친 생각에 차현유가 가져온 태자의 서찰을 다시 살폈다.
“여기 보면 선박 1백 척이라고 쓰여 있군. 딱 선박 1백 척만.”
“예…….”
별생각 없이 답하려던 차 대신은 몽주가 강조하는 부분을 듣고는 말꼬리를 내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주군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태자는 탐라의 배만 원하는 것이지 않나.”
“예…… 아!”
“이건 탐라의 배를 가져가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지.”
“…….”
차현유는 고개를 숙이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자신이 실수를 범했다 여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리는 자도 없이 그냥 넘어간 배들은 그 전부나 일부를 침몰이나 나포 등의 핑계로 명나라에서 그냥 삼켜 버릴 수도 있음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건 만사에 통용되는 것이나, 외교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법임을 누누이 강조 받았던 차현유로서는 자신에 대해 다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찰을 다시 훑던 몽주는 차현유의 모습을 보곤 실소하였다. 특유의 강단 있는 성품이 맘에 들어 기세가 중요한 외교의 일을 맡겼는데, 그 성품 중에 성급한 부분이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당장 돌아가 다시 협상…….”
“성급함은 일을 시작할 때도 조심해야 하지만, 그 일의 잘못을 고칠 때도 조심해야 하는 법이네. 어차피 이번 일은 한 번의 협상으로 결론을 지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지 않나. 내가 보기에 이건 태자가 슬쩍 장난을 친 것 같아. 확실히 많이 컸군.”
몽주는 서찰에 묻어 있는 태자의 ‘장난기’를 느끼면서 몇 년 사이에 그가 태자로서 많은 일을 주도하며 한껏 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주표도 서른셋이 되어 다스리는 자로서 전성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니, 더는 과거 눈물을 펑펑 흘리던 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면 안 될 일이었다.
“그만 자책하고 돌아가서 쉬게. 이런 류의 일은 심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니, 원양으로 지친 몸을 달래면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게. 며칠 후에 다시 부르겠네.”
“예, 주군.”
차현유를 달래 보내고 난 몽주는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몇몇 곳에 소란함이 보이니, 공택 개축을 위해 임시 거처로 이사하는 준비를 벌써 하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몽주의 시선은 멀고 먼 남중국해로 향해 있었다.
탐라에서 1백 척의 배를 빌린다고 해도 기껏해야 2만 명을 옮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도중에 여러 번 기항할 것을 계획해야 가능할 것이었다.
하나, 명나라가 안남 정벌에 겨우 그 정도 규모만 운용할 리는 없을 터였다.
“군사를 쪼개 육로와 해로로 보내거나, 아니면 명 수군을 총동원할 생각일 터인데…….”
몽주는 예전에 외관부에서 보내온 자료를 떠올렸다. 명 수군의 질적 수준과 양적 규모는 개국 시절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물론, 전선의 수는 많았고, 개중에는 중함선에 비할 만큼 큰 배들도 있었다.
과거 탐라군이 일단의 수군을 전몰시킨 일도 있지만, 외관부의 보고에 따르면, 적어도 배의 숫자만큼은 회복시켜 두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나, 전체적으로 명 수군은 장강에 적합하지, 바다에 적합하진 않았다.
“명 수군을 동원하면 대략 5, 6만 명은 바다로 보낼 수 있긴 하겠지만, 명의 군병들이 그걸 버텨 낼지 모르겠군.”
정보가 부족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긴 어려웠다.
바다를 통해 안남에 간다고 해도,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상륙할지에 따라 수송로의 길이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장강하구에서 출발한다 치면 2천 길미나 되는 먼 거리일 것이고, 해남도 근처에서 출발하면 3백 길미에 불과했다.
하나, 몽주가 보기에 태자는 제법 먼 곳에서부터 병력을 수송할 생각인 듯했다. 아니라면 명나라의 수군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태자가 바다를 통해 안남 정벌을 도모하고자 함은 필경 육로로 진격함에 난관을 예상하는 탓일 것이다.
그것이 지리적인 영향 때문임을 짐작한다면, 제법 거친 지형 속 빼곡한 수림과 함정 같은 늪지를 넘어 남중국해 해안까지 가는 건 그냥 안남으로 바로 진격함만 못했다.
그렇기에 태자는 장강에서부터 바다를 통해 수송하는 방안을 강구한 것 같은데, 그가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다도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님은 몽주와 탐라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틈에 나도 장난을 칠 가능성이 있는 듯하고 말이야.”
문제는 그 장난을 치느냐 마느냐였고, 어느 쪽이 탐라에 더 유리하느냐는 것이었다.
아직 태자와 명군의 의중을 확신하지 못하니, 그 대응의 유불리도 판단하기 힘들었다.
문득 시야에 창밖으로 강영과 방원이 나란히 산책을 나온 게 보였다.
둘이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는데, 가끔 강영이 약하게 쥔 주먹으로 방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수줍게 웃는 걸 보자니, 그 말괄량이 딸이 맞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딸의 모습에서 묘한 ‘데자뷔(deja vu)’를 느끼면서 절로 시선이 방원에게로 향했다.
“설마 방원도……. 아이고, 딸아이를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험험!”
* * *
일군이 연왕부로 들어서니, 가장 앞선 깃발은 연왕의 것이었다.
왕부의 신료들이 이미 마중 나와 도열하고 있다가, 연왕이 말의 걸음을 늦추자 모두들 읍하며 연왕의 무사귀환을 축하하며 인사하였다.
짙은 피부를 가진 이십 대 중반의 사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하마하여 신료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가신 일이 잘되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도연 대사 요광효의 말에 연왕 주체는 한껏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이 잘되었어. 이제 칼간을 장가구라 칭할 것이야. 하하하!”
주체의 입에서 나온 칼간(Kalgan)은 지명으로, 몽골어였다. 그 의미는 성문(城門)이었으니, 즉 만리장성의 문을 뜻했다.
연나라의 북서쪽에 놓인 대행산맥이 북동에서 서남으로 뻗어 몽골 지역과 연나라를 나누었는데, 그 대행산맥의 기세가 죽은 곳으로 건너가면 칼간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에 연왕부가 힘쓴 것이 바로 칼간 지역으로의 진출이었고, 이번 연왕의 행차를 통해 최종적으로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연나라 군사가 몽골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북쪽으로 몰려 있던 원나라의 숨통을 끊은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러, 명나라 백성들 중에 만리장성 너머로 진출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몽골 민족과의 교역을 위함이었다.
원나라가 무너졌다곤 하지만, 그곳의 몽골족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 삶을 개척하면서 명나라와의 교역을 희망하였으니, 명나라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하여, 연왕부는 그런 교역의 수요를 알고 몽골족과의 교역장을 두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칼간이었다.
칼간을 확보하면서 연왕은 그곳의 이름을 장가구(長家口)라 정하였는데 이는 교역을 위해 그곳에 먼저 나가 있는 명나라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장씨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연왕은 장씨 가문의 가주에게 벼슬을 내려 그곳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장가구를 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원래 역사에서도 그곳의 지명은 장가구, 즉 ‘장자커우’였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필연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연왕부는 장가구를 얻음으로써 몽골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의 물산을 얻기 위한 교역선을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비단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북방 초원 및 황무지에 대한 전반적인 영향력도 높일 수 있었다.
“이번 일에 협조한 상인들에게 큰 상을 내려야겠다. 그들이 힘을 써 주어 일이 아주 쉬웠어.”
장가구를 확보함에 있어, 거의 대부분 일을 상인들이 했다고 무방했다.
어차피 장가구를 얻음으로써 생기는 이득 중 가장 큰 건 결국 교역의 이익인 만큼, 그 이익을 탐하는 상인들도 열성적으로 연왕부의 일을 도왔던 것이다.
사실 정작 연왕 본인이 한 일은 이번에 가서 얼굴을 비치고, 말을 몇 마디 한 것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준비해 둔 군병들도 그냥 행군만 하고 온 것에 불과했다.
과거 연왕부로 온 이후, 연왕이 상업을 육성하기로 마음먹었던 건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탐라와 교역하면서 직접적으로 획리하지 않고 모조리 태자 형님께 보냈음에도 연왕부의 힘은 나날이, 그리고 빠르게 성장했으니, 상인들이 몰려와 연나라가 상업의 중심이 되면서 생긴 활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지금 연왕부의 영향력은 이미 연나라의 영역을 넘어 가히 회수 이북 북중국의 동편 전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 또한 상인들을 부림으로써 얻은 이득이었다.
연나라 경계 밖의 지방 관리들 중에서도 응천부보다 연왕부에 기대고, 연왕부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연왕을 따르고 그의 활동을 조금 돕기만 해도 ‘쥐꼬리’만한 봉록보다 훨씬 많은 ‘상금’을 얻을 수 있으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비단 별 볼 것 없는 지방 관리들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기쁨에 흥겨운 연왕을 자제시키고 왕부 깊숙한 곳으로 가서 도연 대사가 꺼낸 말도 그 덕에 얻을 수 있었던 정보에서 비롯되었다.
“고려가 이주섬에 발을 뻗은 모양입니다.”
“이주? 흐음, 혹시 저 남쪽에 있는 큰 섬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은 고려에서도 상당히 먼 곳일 터인데?”
“물론, 그렇지요. 하나, 그걸 가능하게 할 만한 자가 고려에 있지 않습니까.”
“흠, 또 탐라공인가?”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가 진출했다기보다 탐라가 진출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왕 주체는 그때만 해도 그렇구나 싶었다. 이주섬이라는 곳이 있음을 그도 알고 있긴 하지만, 그저 있다는 것만 아는 게 전부일 정도로 관심이 없는 곳이었다.
하나, 도연 대사 요광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태자 형님께서 이주섬을 문제 삼으셨다?”
“예, 사실 이주섬은 시비를 걸고자 하면 걸 만한 곳이지 않습니까.”
연왕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천자나 태자의 입장, 즉 명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달리하자, 이주섬의 고려가 조금 더 껄끄러워졌다.
“한데, 이후 태자께서 고려의 이주섬 진출을 묵인하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합니다. 아무래도 고려와 협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연왕은 요광효의 말이 맞다면, 천자께서 태자 형님께 격분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사실을 천자께서 알게 된다면 말이다.
하나, 연왕은 천자의 반응을 떠올리자마자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지난날 자신에게 반쯤 협박을 하시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번 일에 끼어들어 그 사실을 천자께 고했다가 오히려 자신만 미운털이 더 박힐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알겠네. 다만, 그 일을 두고 내 허락 없이 어떤 조치도 취해서는 아니 될 걸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만, 요사이 고려 쪽 움직임이 사뭇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음, 그렇긴 하지. 요동국도 요하를 넘었다지?”
“그러합니다. 산해관에서 오백 리 안쪽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산해관은 위국공 서달과 함께 요동 공략을 준비하던 시절에 지은 방어 거점이자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으로 연나라 강역의 동쪽 끝이었다.
“지금에 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난번 고려국왕의 교체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보통 그 정도의 일이 벌어진다면 이곳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큰 소란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한데, 전혀 모르다가 대뜸 통보만 받았으니…….”
게다가 고려의 제후국들끼리 약계를 맺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연왕도 일단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어 보여 특별히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주섬까지 탐라공이 손을 뻗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제법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고려 쪽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군. 이제 장가구의 일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고려 쪽을 더 신중하게 살펴보게. 어쨌거나 우리로선 여러모로 중요한 상대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이후, 연왕은 함께 돌아온 상인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다.
장가구에서 들어올 금전적 이득에 더해, 아직 뚜렷한 중심 세력이 없는 몽골족을 포섭하여 군사적인 이점까지 얻을 생각에 연왕은 절로 흥겨울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