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30)
* * *
“정말 이길 수 있습니까?”
“글쎄요, 붙어 봐야 알죠. 근데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피식.
두신의 물음에 몽주가 답하자, 반대편 옆에 있던 재상이 실소하였다.
“그렇게 말하시는 걸 들으니, 진짜 붙을 만한가 보군요.”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신이 건네준 쌀과자를 와그작 씹어 먹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들린 휴게소에서 산 건데 무척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계속 입맛을 당기게 만들었다.
그 세 사람이 있는 곳은 조선소였고, 그들 앞에는 커다란 도크 안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대형 범선이 건조 중에 있었다.
물론, 워낙에 대형 선박을 만들던 도크인 터라, 그 범선이 작아 보일 뿐, 범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는 초대형일 게 분명했다.
“근데, 저거 만들면 태평양 건널 수 있을까요?”
“태평양 건너는 거야 경함선도 가능하겠죠. 문제는 바람과 해류를 모른다는 거고요.”
“현대의 해류 지도는 별 쓸모가 없겠죠?”
“아예 쓸모가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마냥 믿기는 어렵겠죠.”
지구의 기온이 0.X도만 차이가 나도 해류가 바뀐다. 대륙과 가까운 곳의 해류는 지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그나마 비교적 일관적이었지만, 600년 전 대양의 해류는 현대의 정보를 통해 확신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바람은 일정한 편일 테니 가능하겠죠. 무풍지대도 알고 피할 수 있고요. 근데 태평양 건너가서 어쩌려고요?”
재상의 물음에 몽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대륙이잖아요.”
“지금으로서는 크게 소용이 있진 않을 텐데요. 파라파라 고무나무 묘목을 구하는 정도가 소용있을까.”
“신대륙의 작물들도 있잖아요.”
“그것도 옥수수 정도죠. 감자나 고구마는 좀 더 개량해야 할 거고. 솔직히 옥수수도 장담 못해요. 15세기 말에 재배되던 옥수수도 돌연변이의 기적을 거친 지 얼마 안 된 거라고 하니까요.”
옥수수의 원형은 대부분의 식용 작물이 그러하듯, 이게 정말 옥수수란 말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질적인 시각으로 한순간에 오늘날의 옥수수와 비슷하게 크고 풍요로운 작물로 바뀌었으니, 학자들은 신대륙 원주민들을 위한 신의 선물이라 평할 정도였다.
그 덕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옥수수 재배를 통해 흥했고, 그와 함께 멸망했다.
옥수수는 지력을 크게 소모하는 작물이라 대책없이 옥수수를 재배하고, 그 식량에 마냥 의존했다가는 온 토지가 황폐되면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뭐, 신대륙의 영토를 선점할 수 있는 건 변함없잖아요.”
“아직 한 백 년은 여유 있잖아요. 고려의 역량을 더 키운 후에 진출해도 충분하고, 그래야 이점도 확실하게 얻을 수 있죠. 지금 가 봐야 발견했다는 의미만 있을 뿐이에요.”
하기야 신대륙의 영토와 자원을 탐하기에는 아직 고려 안팎의 영토와 자원도 확실하게 챙기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신대륙 원주민과 교역하기에는 그들의 소비력이 미약할 게 뻔했고, 신대륙 자원에 대한 구대륙의 소비력도 그 먼 거리를 격하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못했다.
역사에서도 유럽의 신대륙 진출 초창기에는 금은을 가져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점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신대륙으로부터 가져온 은과 함께 나라의 성쇠를 결정 지은 스페인의 경우를 생각하면 무작정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금은이라면 일부러 남겨 둔 것들도 고려와 그 주변에도 많았다.
어쨌든 신대륙의 진짜 자원들과 노동력을 기반으로 교역의 이득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더 훗날이었다. 그것도 노예를 통한 삼각 무역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얽히면서 말이다.
그런 만큼 대서양보다 더 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고려와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신대륙으로부터 충분한 이득을 얻기 위해선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신대륙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메리카 대륙보다는 호주 대륙부터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고려가 건설할 해양 네트워크와도 가깝고, 남태평양의 섬들을 개척하면서 징검돌 삼아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는 게 여러모로 이점이 있을 테니까요.”
두신이 살짝 주제의 방향을 돌렸다.
“베링해 쪽이 고려에서는 가깝잖아요.”
“단지 빨리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다는 점만 보자면 그게 낫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북아메리카 북부는 한 몇 백 년 동안은 쓸모없는 땅일 뿐이니까요. 그에 비해 남태평양 쪽은 구아노 때문이라도 진출할 필요가 있고요.”
비료와 화약 등에 쓰이는 구아노는 남태평양의 섬들과 남아메리카 연안에 많았다.
“아아,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명나라랑 싸우는 거에나 집중합시다.”
남태평양 방향이든 베링해 방향이든 아직은 어느 쪽이라도 시선을 둘 때는 아니었다.
“일단 안남 정벌에 참여하는 건 사실상 폐기된 거죠?”
“안남 정벌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는 셈이니까요.”
고려에서 세 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온 외관대신 차현유를 통해 몽주는 많은 사실들을 알아내었다.
연왕부가 요동국을 압박하는 건 천자의 윤허에 기반한 명 중앙 조정의 결정임이 분명했다.
명 태자가 몹시 당황하고, 분개해 하는 중에도 감히 반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건 그 일의 배후에 천자가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명나라는 총력전을 치를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안남 정벌에 동원된 명군에 대한 회군 명령도 없었고, 따로 중앙에서 군병을 동원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그 이야기는 곧 요동국에 대한 압박과 그 이상의 행동에 대해서 일단 연왕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하자면 연왕부에 엄청난 부담을 전가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연왕부가 교역을 통해 축적한 힘을 소모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고, 동시에 고려의 사정에 대해 명나라든 연왕부든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즉, 요동국을 압박한다고 해서 탐라국이 요동국을 돕지 않거나, 돕더라도 소극적일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말이었다.
“연왕부 정도로는 고려를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명나라도 고려에 참 관심이 없었나 보네요.”
“일단 고려 전체가 아니라 요동국만을 상대하는 걸 가정했겠죠. 물론, 요동국도 예전의 요동국이 아닌 걸 모르고 있긴 하지만요.”
필시 명나라 천자와 신료들은 연왕부가 요동국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본래도 연나라 지역의 힘이 요동 지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게 그네들의 상식이었고, 지금 연왕부는 교역을 통해 크게 성장했으니, 요동국의 사정이야 어떻든 당연히 요동국을 압도할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 요동국도 그 성장세가 연왕부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부족하진 않았다.
연왕부가 당산 지방의 철광석 외에는 탐라국과의 교역에 있어 중계 무역적인 위치만을 점한 것에 비해, 요동국은 탐라국을 통해 교역을 통해 이득을 얻은 건 물론이고, 육양 및 양모 산업을 크게 육성하고, 밀농사를 확장 전파함으로써 산업적인 면모에서는 오히려 한발 앞서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1년여 사이에 요동국은 탐라국의 화포와 화포술, 그리고 전투 교리를 얻고, 배움으로써 군사적인 역량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군병의 수에서도 별로 차이가 없는 가운데 그런 변화는 군사적 우열에서도 요동국의 손을 들어 주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연왕부와 요동국 간의 싸움은 굳이 탐라국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요동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예, 전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전쟁이라는 게 스카우터로 찍은 숫자로 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탐라국은 무조건 개입할 겁니다.”
몽주는 이미 요동국을 돕기로 결론을 내렸다. 대헌장 덕에 명분을 찾는 일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서전에서 최대한 일방적인 승리를 취하게 만들 겁니다. 연왕부의 존폐 여부마저 흔들릴 정도로요. 그리고 그다음에 협상을 할 겁니다.”
몽주는 그다음 계획에 대해서도 두 사람에게 말해 주었다.
“허어, 명나라 입장에서는 되게 약 오르겠네요.”
“약이 오르든 아니든 어쩌겠어요? 그렇게 해서 위신이라도 챙겨야 할 걸요? 준비도 안 하고 지레짐작으로 덤빈 업보인 거죠.”
“근데 그렇게 하는 건 중국 시장 때문인 건가요?”
몽주의 계획에 대해 두신이 끼어들어 말했다.
“네, 할 수 없죠. 아직은 명나라의 소비력이 필수이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중국 시장이 무섭네요.”
“후후후.”
씁쓸한 웃음이 세 사람 사이에서 감돌았다. 그러다 재상이 문득 진지하게 몽주의 계획이 낳을 파장에 대해 말하였다.
“이사장님의 계획대로 된다면, 명나라는 더는 고려를 우습게 보지 못하겠죠. 그리고 그건 고려에게 장점이자 단점이 될 테고요.”
명나라가 고려의, 탐라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면, 더는 고려를 손 안에 쥔 장난감처럼 함부로 취급하진 않을 것이다.
하나, 반대로 그만큼 고려를 경계하고, 고려에 앙갚음하려 들 것인 바, 더 이상 명나라의 어리석은 선택을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아 참, 참파왕에게 곧 명나라가 공격할 거라고 말해 주라고 했거든요. 근데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더라고요.”
“거기 왕도 알고 있었나 보죠?”
“예. 뭐, 안남 정벌을 두고 명나라 내부에서 진통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소식이 새어 나갈 수밖에 없었겠죠. 그리고 일전에 참파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비나수르 왕의 등극과 국교 승인을 요청했는데, 거기에 확답 없이 돌려보낸 것도 눈치채게 만든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흠, 비나수르 왕이 알고 있고, 준비할 시간도 늘어났으니, 명나라의 안남 정벌이 어쩌면 역사보다 더 힘들어질 수 있겠네요.”
역사에서 안남의 호 왕조를 열었던 여계리가 죽고, 그 자리에 참파의 영웅왕이 안남마저 집어 삼킨 채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면, 명나라의 안남 정벌은 역사보다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주원장이 고려를 건드리기로 결정한 건 여러모로 실책입니다.”
“근데 연왕은 그런 천자의 실수를 전혀 모르는 걸까요? 그냥 같이 실수하는 건가?”
재상의 평에 같이 고개를 끄덕이던 두신이 연왕을 떠올리며 물었다.
역사에서 영락제로서 명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연왕 주체라는 인물을 감안하면, 그가 고려의 상황에 대해 오판하는 건 그렇다 쳐도, 연왕부의 힘을 소모시키려는 천자의 의도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저도 궁금하네요. 다만, 천자의 의도를 안다고 해도 당금 연왕부가 그에 정면으로 반발할 수는 없었겠지요.”
“흠, 만약 그렇다면 연왕의 처지도 참 불쌍하네요.”
그 즈음에 도크 안이 문득 소란스러워지더니, 일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도크 밖을 향해 움직였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아직 한 4년 정도는 더 걸려야 완성되겠네요.”
슬슬 모양을 갖춰가는 대형 범선은 완성까지 아직 5개월은 더 필요했고, 그걸 천몽 안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4년에 이르렀다.
* * *
연왕부.
드디어 밤의 길이가 낮의 길이보다 짧아진 시기에 왕부에도 따사로움이 감돌았다.
하나, 햇살의 포근함과 무관하게 연왕부에는 아직 살얼음이 끼어 있는 듯했으니, 연왕을 뵈러 걸음을 옮기는 도연 대사의 표정은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대전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이들이 연왕과 더불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은 대부분 장수들이었고, 장사치 출신도 두어 명 있었다.
모두 제 방면에서 뛰어난 자들이긴 했다. 하나, 아무래도 ‘머리’의 역할을 하는 자는 없어 보였고, 굳이 찾자면 도연 대사가 유일했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여러 소식을 취합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괜찮네. 어서 들게.”
도연은 왕부의 신료들을 지나 연왕의 가장 가까운 곳 좌측에 섰다.
그렇게 모일 만한 자들이 다 모이자, 연왕은 좌우를 둘러보며 미소를 보였다. 담담한 미소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뭔가 씁쓸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보다 큰 똥을 받은 것 같소.”
연왕의 첫 마디부터가 상황이 여의치 못함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천자께서 내리신 명이 있어 요동국을 요서에서 쫓아내야 할 판인데, 앞뒤로 우리 왕부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고, 오히려 방해하려는 자들만 득실거리니 말이오.”
처음 천자로부터 요동국을 물리치라는 명을 받을 때만 해도 그저 흥성한 연왕부를 통해 고려를 압박하라는 정도로 이해했다.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 융성해진 왕부의 힘을 소모시키려는 의도 역시 파악했고, 그 정도라면 감수할 만하다는 평을 내린 바 있었다.
또, 요서까지 영역을 넓힘으로써 잃어야 할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을 계산하여 손해는 아닐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게 연왕이 천자의 명을 받들겠다고 순순히 답을 보낸 이유였다.
한데, 그렇게 답을 하고 요동국과의 충돌을 대비하면서 여러모로 상황을 파악하다 보니,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위태로움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여러모로’라 함은 크게 요동국의 사정과 고려의 사정, 그리고 명나라 조정 내지, 천자의 사정 등을 의미했다.
“요동국의 군력은 저희가 예상한 것을 넘어섰음이 분명합니다.”
도연이 나서 지금 연왕부가 맞닥뜨린 곤란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요동 북부의 정벌을 같이 도모하며 파악한 요동국의 군력과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일단 군병의 수부터 거의 갑절로 늘어나 8만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왕부가 총력으로 모을 수 있는 수와 별반 차이가 없는 셈이지요.”
기존의 요동군은 기본적으로 고려 출신의 군병들이었다. 하나, 거란계 유목 민족들을 끊임없이 회유하고, 포섭한 결과, 그들을 군력의 기반으로 삼게 되었으니, 그들로부터 꽤 괜찮은 기마군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요동국이 부유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알아보니, 요동국을 드나드는 탐라국 상선의 수가 우리 왕부로 오는 탐라 상선의 수에 절반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에 장사치 출신 신하들이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반응하였다.
연왕부에 요동국보다 탐라 상선의 드나드는 것이 두 배 많다는 계산은, 사실 결코 많다고 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연왕부와의 교역이라곤 하지만, 실제로는 명나라 전체와 탐라국과의 교역이 연왕부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요동국은 요동국뿐이었다. 그것도 호구수도 얼마 안 되고, 그중 절반은 심지어 호인들인 그런 나라였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보건대, 두 배가 아니라 열 배, 스무 배는 많아야 마땅하다는 게 장사치 출신 신료들의 생각이었다.
도연은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당장 얻은 정보에는 탐라와 요동의 교역 규모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요동국이 규모에 비해 월등한 군력을 가진 것부터가 요동국이 부유함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다른 신하들을 향해 요동국의 사정을 간단히 마무리한 도연은 다음 말을 잇기 전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다른 문제들에 비하면 요동국이 생각보다 부강하다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고려의 제후들이 생각보다 더 긴밀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들려온 고려 제후들 간의 약계는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요동국에 보낸 세작이 전하길, 지금 요동국에는 다른 제후들의 관리가 파견 나와 있어 군사와 교역을 비롯하여 모든 부분을 서로 논의하는 체계가 갖춰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 일이 있은 직후에 모든 제후들이 요동국에의 협력을 논의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제후들은 별문제가 아닙니다만, 탐라국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라국이 그 규모에 비해 부강함은 연왕부가 가장 잘 아는 바였다. 그런 만큼 탐라국이 만약 요동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게 된다면 연왕부는 그야말로 대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탐라국은 비단 당장의 군사(軍事) 외에도 연왕부와의 교역 상대라는 점이 더욱 껄끄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탐라국과 싸우게 되면 교역은 중단될 것이고, 그건 곧 왕부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비단 지금뿐만 아니라, 향후 교역에 있어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하나, 교역을 통해 이득을 얻는 건 오히려 탐라국이 더하다 볼 수 있는데, 그런 탐라국이 감히 우리 왕부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도 장사치 출신 신하들이 도연의 정보에 의문을 품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하나, 도연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그것이 가능할 수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승전을 의심하지 않고 요동국을 압박하기로 한 것처럼, 탐라국도 승전을 확신하고 요동국을 도울 수도 있지 않소? 승전의 이득으로 교역의 축소로 인한 피해를 상쇄할 수 있다고 본다면 탐라국이 반드시 참전을 꺼리리라 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신료들까지 말도 안 된다며 난리통이었다.
요동국을 도와 탐라국이 참전한다면, 연왕부도 천자께 힘을 빌리면 되고, 그리된다면 결코 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탐라국도 명나라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애초에 참전할 가능성도 없다는 주장도 계속되었다.
그런 분위기는 도연으로 하여금 마지막 문제에 대해 말하게 만들었다.
“만약 천자께서 우리를 도울 성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다면 어찌할 것이오?”
“…….”
열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 응천부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남 정벌을 위해 남쪽으로 간 명군도 그대로 남아 있고, 다른 곳의 명군도 마찬가지. 심지어 신병을 모으는 일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응천부를 지키는 군병들이 있긴 하지만, 그 군병들이 응천부를 떠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장 연왕부에서 지원군을 요청하고 응천부가 그에 화답한다 하더라도, 군병을 준비하는 데 한 달, 다시 연왕부까지 오는 데 또 한 달이 걸릴 판국이었다.
왕부의 신하들이 설마 하는 표정 속에서 상황의 위급함을 깨닫는 가운데, 연왕 주체는 표정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
도연의 보고는 기본적으로 연왕께 올리는 보고의 형식이었지만, 이미 주체도 알고 있는 바였기에 이 자리에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짝.
문득 연왕이 손뼉을 한 번 쳐서 주위를 환기한 후 말문을 열었다.
“자! 지금 우리의 사정이 이와 같소. 도연 대사의 말 중에 과장되거나, 기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무시하고 후에 당하는 것보다 미리 대비하는 게 나을 것이오. 하면, 이제 우리가 강구해야 할 것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이오. 다들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
그러나 좌중은 조용했다. 도연도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 * *
새로 들어온 어린 환관들 중에 마(馬)씨 성을 가진 아이는 꽤 영민했다.
본디 운남에 있던 양왕국 어느 관리의 자식이라고 하는데, 양왕국이 몰락하면서 그곳의 어린아이들 모두가 거세를 당하였다.
그들 중 일부가 응천부에까지 와서 환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후 황족들에게 나뉘어졌으니, 어린 마씨 환관은 명 태자의 환관이 되었다.
“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밤에 차를 가져온 그 환관에게 물으니, 그가 응천부의 말투로 말하고자 힘쓰며 천천히 답하였다.
“열일곱이 되었사옵니다.”
“내 듣기로, 궁녀들이 무슨 문제가 생기면 네게 도움을 청했다고 하더구나. 맞느냐?”
처음 응천부에 와서 환관으로 일할 때, 그는 궁녀들의 뒤치다꺼리를 감수하면서 평판을 얻었고, 그 결과 태자의 환관이 될 수 있었다.
“그저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어째서? 꽤 귀찮은 일일 터인데.”
“귀찮다 여긴 적은 없사옵니다. 그저 사람이 서로 돕는데 달리 이유가 필요 없다 여길 뿐이옵니다.”
“사람이 서로를 돕는다라…….”
꽤 순진한 말에 태자는 근래 처음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아마 궁녀에게 잘 보임으로써 대총관의 눈에 들고자 했을 것이다.
아직 어린 환관이라곤 하지만, 벌써 환관으로 몇 년째 살고 있는 마 환관이니, 그런 식으로 속내를 치장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에는 충분했으리라.
문득 태자는 장난기가 동하여 이 어린 환관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내가 요사이 고민이 있구나. 내 고민도 한번 들어 보겠느냐? 네가 도울 수 있으면 좋고.”
“귀를 활짝 열고 듣겠사옵니다.”
그에 태자가 실소하며 그의 고민을 말하였다. 태자가 가진 고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고민은 역시나 안남 정벌에 관한 것이었다.
천자의 의중에 따라 연왕부가 요동국과, 나아가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고, 태자는 기껏 세운 바다로의 진격을 포기하게 되었다.
게다가 안남 정벌의 일정도 기약 없이 밀렸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내 사정이 이와 같다. 천자의 명이 계시니 움직일 수도 없고, 군병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자금이 말라 가고만 있다. 내가 어찌해야겠느냐?”
태자 주표는 그와 같이 묻고는 마 환관의 얼굴을 살폈다. 해답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일개 어른 환관이 감당할 고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당황해 하는 표정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굳이 안남을 정벌해야 하는 것인지요?”
“음? 그게 무슨 말이냐?”
“태자 전하께옵서 안남을 얻으시려는 연유는,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태자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다지시기 위함이 아니온지요. 그것이 맞다면, 스스로를 높이는 것보다 다른 황자들을 낮추는 것이 더 쉬운 길이 아니겠사옵니까.”
“으응……?”
본의와 달리 당황스런 표정을 짓게 된 건 명 태자 주표였다.
양왕국이 빠르게 무너지고, 연왕이 일찌감치 응천부를 떠나면서 생긴 또 하나의 역사적 변곡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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