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31)
* * *
서성(西城)에는 고려인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거란계 유목민족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있던 곳까지 영역으로 삼은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고려인들은 그렇게 서성이 요동국의 영역에 들어오면서 파견된 관리들 정도였고, 그 외에는 승려들이 있었다.
그 승려들은 서성에 사원을 짓고 있었는데, 그곳의 유목민족들은 사원 건축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일단 요서 방면의 유목민족들은 텡그리가 아닌 밀종(密宗) 신앙을 따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목민족이라 하면 텡그리로 대변되는 하늘신 신앙이 보편적일 것 같지만, 사실 몽골 제국 시절 칭기즈칸에게 오만하게 굴다가 텡그리의 교세가 박살 나 버리면서 몽골 제국의 영향력이 강했던 곳에서는 텡그리 신앙이 거의 사라졌다.
하여, 더 동쪽 무족들이 있는 곳에는 텡그리 신앙이 아직 남아 있지만, 몽골 초원과 가까운 요서에서는 텡그리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그곳 유목민족들이 사원 건축에 호의적이고 협조적인 건 단지 텡그리 신앙이 사라졌고, 밀종이 대신 자리 잡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 불교의 당대적 특수성에 기인한 바라고 봐야 했다.
그 특수성이란 서성에 짓는 사원에, 아니 요동국은 물론 고려 전체 사원들에 새로 짓고, 또 지어지고 있는 화덕진군의 사당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원류를 벗어나 외부로 퍼져 나가면 그곳의 무속 신앙이나, 먼저 있던 다른 신앙과 교접하기 마련이고, 고려의 불교 사원에도 칠성신(七星神)처럼 도교적 원시 무속신앙을 모시는 사당들이 있었다.
그런 것처럼 화덕진군의 사당도 고려 불교가 새롭게 융합한 토착 신앙의 한 류가 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요서 지역에서는 그곳에 있는 밀종 신앙과 반응하면서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밀종은 비즈라야나(Vajrayāna)라고도 하는데, 이를 한역하면 금강승(金剛乘) 불교였다.
금강은 다이아몬드의 한역이기도 하지만, 밀교의 최고신들 중 하나인 인드라의 무기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즉, 인드라는 번개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나 북구 신화의 토르와 같은 위치였다.
한데, 고려 불교 사원에 번개와 불의 신이라는 화덕진군의 사당이 있으니, 자연히 밀교 신자들은 그곳을 인드라의 신전(?)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자기들끼리 인다라전(因陀羅殿) 내지 금강전으로 부르면서 그 건축에 협조하며, 자연히 사원 건축 전체를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를 모시는 고려 승려의 입장에서는 나쁠 건 없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화덕진군을 미끼로 삼아 불자들을 늘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탐라공…… 화덕진군…….’
활기가 넘치는 사원 건축의 현장에서 요동국사 무학은 묵묵한 표정 중에도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고려 사원 전체에 화덕진군의 사당이 지어지고 있긴 하지만, 남쪽에서는 자발적인 경향이 강한 반면에 요동국에서는 무학의 주도 아래 실시되고 있는 불교 사업이었다.
그건 엄연히 탐라공을 의식한 일이었다.
무학에게 있어 탐라공은 불교의 고난을 넘어 신앙의 고난을 불러일으킨 역천자이자 신살자(神殺者)였다.
불승인 입장에서 유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적대자가 탐라공이었는데, 우습게도 그 스스로가 화덕진군이라는 신앙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탐라공이 화덕진군을 자처한 건 아니었다. 하나, 그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백성들에게 벼락공, 화덕진공으로 불리는 것을 묵인하였으니, 지금 고려에 화덕진군의 사당이 널리 지어지고 있는 게 어디에서 연유되는 것인지는 뻔했다.
무학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십 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불교의 적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신살자는 아님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불교가 수용할 수 있는 토착 신앙의 한계 안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니, 불교의 적도 아니었다.
다만, 무학은 여전히 화덕진군 신앙을 탐라공이 수용한 것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처신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일부러 화덕진군의 사당을 널리 짓도록 하여 그가 함부로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무학 아래 있는 불자들 사이에 그에 관해 불만이 없진 않았지만, 요동국의 유목민족들이 화덕진군 신앙에 호의적임이 드러나면서 그들을 ‘예비’ 불자로 받아들이는 데 용이해지자 그런 불만은 사라졌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요동국은 오히려 고려 남쪽보다도 화덕진군 신앙이 더 융성하고 있을 정도였다.
“스님, 스님, 왔습니다!”
사원 건축 현장을 느긋이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제자 지성이 황급히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어찌 그리 경박하게 구느냐? 오면 온 게지. 당장 가기라도 한다더냐?”
“아휴, 그러고 계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요동공께서 스님께 맡기신 일인데 마냥 태평할 수는 없지요.”
“어허…….”
계속 제자를 타박하면서도 무학은 지성의 채근에 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향한 곳은 서성 고을 성채 남문 밖이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티가 역력히 남은 성벽을 지나니, 일단의 무리들이 큰 천막을 치고 무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연왕부에서 온 자들로, 그 수장은 도연이라는 법호를 가진 승려였다.
* * *
명 태자는 태감들에게 일러 어린 마씨 환관에 대해 조사하게 하였다.
특별한 게 나오진 않았다. 이미 알려진 것에 더 추가된 건 없었다.
그저 그 환관이 도왔다는 궁녀들이란 그야말로 황성 안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이들로, 그들을 돕는다고 해서 뭔가 이득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기 어려웠다는 점 정도가 태자의 이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마씨 환관이 대내총관태감의 환심을 산 것도 크게 보면 궁녀를 도운 것이 눈에 든 덕이지만, 그 계기는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새로 들어온 어린 궁녀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정원 구석에서 울고 있는 걸 본 마씨 환관이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걸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대총관이 들으면서 그로 하여금 마씨 환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없다고 했던가.
태자는 어쩌면 그 어린 환관의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했다.
“네가 노래를 곧잘 한다 들었다. 내게도 한 곡절 들려주겠느냐.”
마씨 환관을 부른 태자가 나름 정중하게 노래를 청하자, 마씨 환관은 한 차례 겸양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궁서//正月放馬喔魯魯的正月正喲
趕起馬來登路的程
喲嗬 登路的程
정월에 목장 밖에 말을 풀어 놓네. 말이 마음껏 달릴 수 있게 하네.
大馬趕來喔魯魯里山頭上喲
小馬趕來隨后跟
喲嗬 隨后的跟
큰 말이 산꼭대기로 달려가네. 작은 말도 곧 따라서 달려가네.
二月放馬喔魯魯的百草發
小馬吃草深山里跑
喲嗬 深山里跑
풀이 흐드러지게 핀 둘째 달에도 말을 목장 밖에 풀어 놓네. 작은 말들이 먹을 풀을 쫓아 깊은 산으로 달려가네.
馬無夜草喔魯魯不會胖
草無露水不會的發
不會的發
喲嗬
야생초가 없이는 말들이 살찌지 않네.
이슬이 없이는 풀들이 피어오르지 않네.//
흥이 나는 노래였다.
곡조가 빠르고 신나는 건 물론, 노랫말 사이에 있는 재밌는 추임새들이 더욱 신명나게 만들었다.
태자는 앉은 자리에서 팔걸이를 퉁퉁 손바닥으로 때리며 흥에 박자를 맞추다가 노래가 끝나자 마씨 환관을 치하했다.
“네 고향의 노래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말몰이 때 부르는 노래이옵니다.”
훗날 방마산가(放馬山歌)라는 이름으로 운남 지방의 대표적인 민요로 자리 잡는 노래였다.
“재밌는 노래로군. 덕분에 내 기분도 좋아졌다.”
“황공하옵니다.”
한껏 웃음을 띠고 있던 명 태자는 다음 순간에 표정을 일별하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번에 네가 해 준 조언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
“내 시야를 넓혔다고 할까?”
“소인은 그저…….”
“아니, 변명할 일은 아니다.”
정말 좁았던 시야가 확 트인 느낌이었다.
안남 정벌은 천자의 명인 듯하면서 아닌 일이었다. 태자에게 일임한 일이자, 태자에 대한 시험이었다.
말로는 누구도 넘볼 수 있는 태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 하나, 천자가 확실하게 천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태자의 지위를 그런 식으로 스스로 쟁취하게 만든 건 분명 그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태자는 안남 정벌에 거의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그것만이 오직 태자의 좌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던 탓인데, 마씨 환관의 한마디에 자신이 천자의 권위에 눌려 시야가 좁아졌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천자는 냉정하고 단호하나, 그렇다고 태자의 자리를 핏줄이 아닌 다른 자에게 물려줄 리 없었다.
이는 곧 태자가 태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의 기준은 결국 다른 황자들보다 그가 낫다는 것.
아니, 그가 장자이고 이미 태자임을 생각하면 그저 부족하지 않다는 것만 증명해도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태자로서의 공고함은 절대적인 기준을 능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황자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에서 뒤지지 않음에 있는 것이었다.
“네가 보기에, 나 이외의 황자들 중에 차기 보위에 대한 욕심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자가 또 누가 있을 것 같으냐?”
“…….”
그제야 지난번에 보고 싶었던 마씨 환관의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요구받은 답은 실상 다른 황자에 대한 비방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태자를 모시는 환관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는 소문이 새어 나간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횡액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리라.
그렇게 마 환관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고만 있자, 태자가 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네 이름이 삼보(三寶)라더군. 맞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그래. 삼보야, 너는 누구의 신하이더냐?”
“저는 태자 전하를 모시며 따르고 있사옵니다.”
“하면, 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있는 게냐? 천자께 욕되게 하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태자의 압박이 있자, 마삼보는 결국 마른침을 크게 삼키고 입을 열어야 했다.
“황궁에 흘러 다니는 이야기에, 태자 전하 외 다른 황자들 중에 용상을 탐하고, 그럴 수 있는 이는 오직 사황자뿐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네 생각을 듣고 싶다.”
“제 생각도 다르지 않사옵니다. 태자 전하의 아우분들 중 주상 황자와 주강 황자는 대가 약하여 황상을 노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주숙 황자는 세가 부족하며, 영민함 또한 사황자와 비교되지 못합니다.”
6황자 이하의 황자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세가 부족함은 물론이거니와, 천자가 태자의 자리를 논함에 있어 오직 돌아가신 효자고황후(마황후)의 아들들에 국한함은 하나의 철칙이었으니까.
그렇게 태자의 아우들 중 2, 3, 5황자들을 평하고 나자, 태자는 눈짓으로 4황자 주체에 대해 말하라 재촉하였다.
삼보 환관으로서도 이미 내친김이었다.
“주체 황자는…….”
마삼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크게 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천자께서 사황자를 불러 친히 경고하셨던 일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옵니다.”
“……?!”
묵묵히 듣고 있던 태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자께서 주체 아우를 불러 경고하셨다는 건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정녕 사실이더냐?”
삼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사실이라 답하였다.
그러면서 연왕이 원나라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응천부에 왔던 때 있었던 일이라 답하며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하니, 태자도 그 당시 천자가 연왕을 따로 부른 일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그 시기라면 아직 삼보가 응천부에 오지 않았을 때이거나, 막 끌려왔을 때인데 어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도 했지만, 태자의 머릿속은 그보다는 새롭게 떠오르는 ‘계획’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태자가 더 어렸을 적, 나약하여 일찍 죽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황성 안에 돌아다닐 때, 건강한 아우들이 얄미우면서도 스스로의 나약함을 먼저 탓했었다.
하나, 이제 그 또한 어느 누구 못지않게 건강해졌고, 태자로서 대명을 통치할 이상을 꿈꾸고 있었다. 하여, 더는 아우들이 얄밉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그들이 얄밉든 아니든 그 문제를 떠나, 태자는 그들을 굴복시켜야 마땅했고, 그들이 반항한다면 강제로라도 복종시켜야 했다.
그중에서도 연왕 주체.
뒤로는 손을 잡고 고려와의 교역을 추진한 ‘동료’이기도 했지만, 그가 천자의 경고까지 받았다면 속으로 오만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었던 게 확실하리라.
‘그러고 보면 천자께서 연왕부에 요동국을 압박하도록 명하신 것도 연왕부의 힘을 빼기 위함일 터.’
천자의 의도마저 그렇다면, 태자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야 마땅했다.
태자 주표가 고민에 빠져 침묵을 지키자, 삼보는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태자 앞에서 물러났다.
태자전을 나온 삼보는 환관의 처소로 곧장 가는 대신, 비빈원(妃嬪院)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비빈원의 서쪽 담장 바깥에서 한 여인을 만났으니, 그 여인은 비빈원에서 일하는 궁녀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무탈하지요. 태감 나리는 어떠십니까?”
궁녀는 삼보를 꼬박꼬박 태감이라 칭하였다. 아직 정식으로 임명되지 않아 삼보로서는 민망한 호칭이었지만, 궁녀는 곧 그리되실 것이니 미리 부른다 해도 과하지 않다는 이유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 태자 전하의 아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삼보는 궁녀에게 태자와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해 주었고, 그녀는 그에 기쁜 낯을 보였다.
연왕이 천자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도 이 궁녀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는데, 그녀가 요즘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현비(賢妃) 이씨의 궁녀인 덕이었다.
현비 이씨가 미모와 말재간을 갖추어 천자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입이 사뭇 가벼워 말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천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궁녀들에게도 곧잘 말해 버리곤 했던 것이다.
“나리께 도움이 되었다 하니, 소녀 너무 기쁩니다. 앞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삼보는 고맙고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궁이 아니라면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 그 마음을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궁녀였고, 삼보는 사내도 아닌 환관이었다.
“고맙습니다. 내 반드시 태감이 되고, 총관이 되어 크게 보답하겠습니다.”
궁녀는 삼보가 위로의 노래를 불러 주었던 바로 그 궁녀였다.
같은 운남성 출신으로 어여쁜 얼굴을 가진 탓에 이곳 응천부까지 끌려온 소녀.
삼보는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궁녀들로부터 소소한 도움을 얻고 있었다. 아니, 그가 주었던 도움에 대한 보답을 받고 있었다.
그걸 바라고 궁녀들을 도운 건 아니었지만, 그녀들이 스스로 보답하는 걸 거부하진 않았다.
삼보도 이제 그의 인생을 설계할 나이에 이르렀고, 그 설계의 기반은 태자에게 달려 있었다.
* * *
두 개의 소신이 나흘의 간격으로 몽주에게 도착했다.
하나는 북쪽에서, 하나는 서쪽에서.
“아주 주군을 졸로 보는 것 아닌가?”
“졸이 아니라 대장으로 보는 것이겠죠.”
화극의 퉁명스러운 말에 몽주 대신 답한 건 포은이었다.
“그런가? 내가 보기에 주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같은데?”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인 것이지요.”
“부탁? 허허, 명 태자와 연왕이? 허허.”
화극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흘렸다.
몽주도 그 웃음에 미소를 띠며, 그 두 가지 소식에 담긴 요구 내지 부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다시 고민했다.
북쪽 요동국에서 판무관을 통해 보낸 소식에는 요동국이 연왕부와 접촉한 사실에 대해 담겨 있었다.
전쟁도 곧 외교인 만큼, 아무리 싸움의 분위기가 진해졌다 하더라도, 양국 간에 대화가 오가는 것이야 응당 있을 만한 일이었지만, 그 대화의 내용은 확실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져 달라.’
그것이 일방에 몰린 연왕부가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고의로 패배해 준다면, 그래서 일시적으로 요서에서 물러나 준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실질적으로 요서에 진출할 수 있게 해 줄 것이고, 훗날 천자께서 승하하시면 그때는 요서까지 요동국의 영토로 확정지어 주겠다는 ‘거래’ 요청이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그걸 어찌 믿을 수 있느냐 등의 여러 말이 나올 만한 이야기였지만, 그런 논란이 커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서쪽 응천부의 태자로부터 서찰이 전해졌다.
‘이겨 달라. 그 다음에 져 달라.’
명 태자는 고려가 연왕부와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가 구원군으로 도착하면 자신에게 패배하길 바라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해 준다면, 이주섬 통치에 대한 천자의 승인을 받아 줄 것이고, 명나라와의 교역을 공식화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쪽도 신빙성과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없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대가가 너무 작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건 그렇고, 태자는 안남 정벌을 포기한 것 같군요.”
포은의 말에 몽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까지는 몰라도, 확실히 안남 정벌에 맹목적이던 자세는 버린 모양입니다.”
사실 몽주가 보기에도, 태자가 굳이 안남 정벌에 그처럼 애탈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장자였고, 이미 태자로 책봉된 자였다. 아무리 주원장이라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태자를 갈아치울 수는 없었다.
물론, 안남 정벌의 공훈마저 얻는다면 차후에 태자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 황권의 강대함이 더욱 단단해지겠지만, 그런 거라면 굳이 안남을 정벌해서 얻을 필요는 없었다.
예컨대, 지금 연왕부를 통해 고려와 교역하는 걸 태자가 스스로 챙길 수만 있다면 오히려 더 나은 방법이리라.
그리고 태자도 마침내 그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연왕부가 고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신이 그것을 구원하게 된다면, 태자의 위엄은 일시적으로라도 높아질 것이고, 그 힘을 통해 고려와의 교역을 자신의 아래에 직접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천자도 연왕부가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 힘을 키운 것에 못 마땅해 하는 면이 분명 있을 것이니, 고려와의 교역을 아예 막을 작정이 아니라면, 차라리 태자의 손에 맡기는 게 낫다 여길 가능성이 컸다.
“한데, 어느 쪽을 택할 생각인가? 그 둘을 다 택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단 몽주가 본래 생각해 두었던 계획과 더 맞아떨어지는 건 태자 쪽의 제안이었다.
연왕부와 싸움에서 크게 이긴 후, 공식적으로는 패배하여 명분은 연왕부와 명나라에게 주고, 실리는 챙기고자 했던 것이 몽주의 생각이었다.
하나, 지금의 상황은 조금 더 멀리 봐도 될 것 같았다. 태자가 연왕부를 객체로 두고 모의를 꾸민다는 건 그만큼 태자와 연왕 사이에 균열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자, 몽주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당장 조금 물러나도 명나라의 분열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택해도 될 것 같았다.
하나, 그 전에 일단 밟아야 할 절차가 남아 있었다.
“급할 것 없지요. 일단 판돈을 키우는 게 우선입니다.”
태자든 연왕이든 아직 모든 판돈을 내건 건 아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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