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32)
* * *
“어찌 나를 자꾸 힐끔거리는 겐가?”
농사 준비로 바쁜 봄에 바다 위의 포말을 만들며 항주하는 경함선 갑판에서 포은이 문득 그 배의 선장을 향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게 처음이라 그랬습니다.”
선장은 살짝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몸가짐을 바로하고는 사과하였다.
“나를 본 적 있는가?”
그저 탐라섬을 오가는 중에 본 걸 말하는 것 같지 않았기에 그렇게 되묻자,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대신께서 아직 탐라에 귀의하지 않으셨을 때 뵈었습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시려다가…….”
“크흠, 크흠.”
대략 언제 보았는지가 짐작되자, 포은이 이번에는 살짝 당황하여 헛기침을 하였다.
명나라 수군을 수몰시켰던 수전에 참여한 군병인 모양이었다.
“그때 저는 창 선장의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 왜, 홀로 단독 행동을 했던 배 말입니다.”
“아…….”
그 이야기를 듣자, 포은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래도 그때 당시 주군과 크게 부딪혀 마구 비방했던 모습을 그는 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다행스러웠다.
그런 포은의 모습을 보던 선장 파감태 중위는 속으로 그의 심정을 짐작하며 실소를 머금었지만, 겉으로는 잠시 미소만 띤 채 다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게? 해 보시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건 무엇입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포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탐라군 전선의 선장이 할 만한 물음이 아니었던 탓이다.
“요사이 탐라의 장인들과 학생들 사이에 원소라는 개념이 있더군요. 대신께서는 원소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원소라…….”
원소(元素)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물질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였다.
그 시작은 몽주가 시범을 보인 전기 분해였다.
응당 하나의 순수한 물질로 보았던 여러 가지가, 특히 물이 둘로 나뉘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만물의 형질을 물질 자체로 보는 대신, 그 구성원에 대한 의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자연히 개념적으로 원소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었다.
“음, 지금 장인들과 학생들이 말하는 원소에 대해 나라고 특별히 아는 게 있지는 않네. 그리고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다만, 경험적으로 원소의 존재를 추종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쓰이는 데 무리가 없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겠지.”
과거의 유자의 입장이었다면 원소라는 개념은 다소 꺼림칙한 이론이었을 것이다.
특히 당대의 유학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면서 이(理)와 기(氣)의 차별 중에 이를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에 가까운 편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유학에서는 기가 만물 구성의 요소이니, 아무래도 원소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기가 더 중요하게 여기질 테고, 반대로 이를 객관적 실재가 아닌 일종의 법칙으로 전락시킬지도 몰랐다.
하나, 이미 유자적인 입장에서 벗어난 포은은 원소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궁리가 내놓은 작은 실마리를 단지 기존의 관념과 맞지 않다고 해서 배타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저 그것이 세상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실제로 유용하게 쓰이길 바랄 따름이었다.
어쨌든 뜬금없는 선장의 질문으로 인해 포은은 그와 더불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그는 옛 고려 호태왕의 왕릉비를 탐사한 대장이기도 했었다.
포은도 그때 주군과 동행하여 그곳에 갔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기야 수십 날째 벽지에서 옛 고려의 흔적을 쫓느라 몸가짐이 흐트러졌던 때와 탐라군 선장으로서 잘 빼입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혼자가 된 포은은 그가 지금 요동국으로 가고 있음을 떠올렸고, 이어 선장의 질문에서 유추된 자신만의 고민을 떠올렸다.
‘협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외교든 내치든 협상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특히 탐라국에서는 협상이 더욱 보편적이었다.
동등한 관계뿐만 아니라, 상하의 위치가 분명한 관리들 사이에서도 의견을 제시하고 논하면서 서로 상충되는 지점을 확인하여 그에 타협하길 시도하니, 이것이 협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보편적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아직 제한된 행태였다.
아무래도 관리들 사이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변화일 뿐, 일반 백성들은 전보다는 나아졌을지언정, 여전히 관리 앞에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또, 관리들 사이의 협상이라는 것도, ‘신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젊은 하급 관리들의 독특한 의식 혹은 건방진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지 직위의 높음으로 그를 찍어 누르다가는 주군의 일침을 받을 수 있어 어떻게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아래 관리들을 설득하다 보니 그런 문화가 생겨났을 뿐이었다.
어쨌든 적어도 관리들 사이에서 협상이 보편화된 건 사실이었고, 내관대신으로서 포은은 그런 행태를 눈여겨보며 협상이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를 고민했었다.
사실 답 자체는 쉽게 찾아내었다.
명분과 실리.
다만, 처음 그 답을 찾았을 때와 지금에 다른 점이 있었으니, 명분과 실리의 입지가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이기론에 빗대자면, 명분이 이(理)요, 실리가 기(氣)라 여겼던 것이 이제는 실리가 이요, 명분이 기라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왜 그 둘의 입지를 혼란스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유자였던 포은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명분은 곧 도리(道理)이니, 그것을 추종하는 유자들에게 명분이야말로 핵심이었다.
도리를 따르면 당연히 실리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개념하에서 실리는 이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 탐라국에 와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온갖 세력과 이해관계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고, 탐라국 내부적으로도 널리 확인할 수 있는 협상을 보면서 결국 그 협상을 만들고 결론을 짓는 건 실리임을, 명분은 그 후에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 유자적 입장의 포은으로서는 다분히 꺼림칙한 부분이었으나, 그런 협상의 자세가 지금 탐라국의 번영을 만들어 내었으니, 이제는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기는군.”
포은은 문득 북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본디 명나라와 고려가 얽힌 작금의 상황에서 연왕부에 대한 탐라국의 처분은 연왕부에게 명분을 주고, 고려가 실리를 챙기는 것이었다.
하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으니, 연왕부에게 실리를 주고 명분은 명나라 태자에게 주기로 하였다.
고려나 탐라국은……?
‘양쪽에서 실리를 챙길 수 있겠지.’
* * *
포은이 요동국으로 가기 보름 전에, 탐라 외관대신 차현유는 명나라에서 태자를 알현하였다.
이미 며칠 전에 와서 한 차례 ‘면담’을 하고 두 번째로 만난 것으로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오히려 첫 면담 직전의 분위기가 좋았다.
차 대신이 태자에게 그가 제안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탐라공의 이름을 빌려, 차 대신은 태자의 ‘밑천’을 다 뽑아내고자 하였다.
때문에 먼저 태자가 먼저 제시한 ‘대가’에 대한 문서화를 요구했다.
태자가 보위에 오르는 걸 조건으로 하여, 이주섬에 대한 고려의 종주권을 확정하고, 고려와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약계를 문서로 남기길 바란 것이었다.
이는 태자가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교역은 그렇다 쳐도, 이주섬에 대한 천자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데, 만에 하나 그곳을 고려에 넘기겠다(?)고 약속을 해 준 문서가 세상에 드러나면 천자가 대로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탐라 측의 요구는 더 있었다.
우선, 태자의 연왕군 구원 작전은 구원으로 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가 패배를 감수하되, 요서에서 물러나진 않겠다는 의미로, 태자의 승리는 연왕부를 구원하는 결과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는 앞서 요구한 차후에 태자가 등극하였을 때, 고려와의 국경을 확정 짓는 걸 문서로 약속하는 것과 유관하여, 산해관을 양국의 국경으로 삼자는 요구도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요구로는 해외 명국인(?)에 대한 포기였다.
탐라가 장차 진출할 루손(필리핀)에는 이미 중국인들이 상당수 자리 잡고 있었는데, 차후에 그들과 충돌할 때, 그들이 중국인인 것을 두고 명국인으로 취급하여 그 명분으로 명나라가 개입하는 걸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이 요구는 태자에게는 그리 곤란한 건 아니었다. 이주섬에 명국인을 두고 그러했듯 함부로 바다 건너로 이주한 명국인은 그저 도망 백성이고, 죄인일 뿐이라는 게 명나라의 기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부 곧바로 수용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태자에게 곤란한 면이 많은 탐라의 요구였기에 두 번째로 만난 자리의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태자는 어떻게든 차 대신의 기세를 꺾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생각으로 무게를 잡았는데, 차현유는 다시 만난 자리에서 뜬금없이 천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제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천자께서 바라시는 태자의 모습은 아마도 천자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 하셨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천자를 천자로 여기지 마시고, 아버지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그것도 자신이 창업한 가업을 이어받을 장자에게 바라는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과 똑 닮은 자를 바란다는 게냐?”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천자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 중원을 일통하셨으니, 스스로 그것을 가능케 했다 여기시는 무언가의 가치를 중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면, 천자께서는 자신의 후계자도 그 무언가를 쥐고 있길 바라실 것은 당연합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
“외신이 어찌 그에 답하겠나이까. 다만, 제 주군께서 천자를 우러러 말씀하시길, 실리를 쫓는 데 거리낌이 없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에 대한 몽주의 평가는 그러했다. 물론, 그건 다소 정돈된 말이었고,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주원장은 지극히 이기적인 자였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최대의 이익을 되도록 움직였고, 그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는 과감하게 정리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 이기심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지만, 만백성은커녕 그를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마저도 포용하지 않았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지위와 왕실의 힘을 키워 대명천하를 세우고 그 위에 높이 서고자 할 뿐.
“하면, 나 또한 천자와 같이 실리를 추종한다면 천자께서 흡족해 하실 것이라는 말이냐?”
“물론, 그것이 천자의 실리와 부딪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만…… 제 주군께서는 그리 보고 계십니다.”
태자는 차 대신을 통해 들은 탐라공의 생각을 곱씹어 검토하였다.
분명 일리가 있는 분석이었다. 그 또한 더 어린 시절 천자의 공신들에 대한 너무 냉정하고, 단호한 처단을 보며 괴로워하였을 때, 그것이 왕실의 힘을 키우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자위한 바 있었다.
물론, 그 고육지책이라는 평가는 그가 천자의 아들이고, 천자가 그의 아비인 관계로 애써 포장한 것에 불과함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천자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길이라면, 그것을 막는 무엇이라도 부숴 버렸다.
그것이 정리(情理)이든 예법이든 무엇이든 간에.
한데, 만약 천자가 자신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바라고 있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태자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그 눈매가 제법 매서웠다.
“하나만 묻지. 만약 내가 천자의 모습을 따른다면, 고려 또한 냉정한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은 생각하지 않는 겐가?”
“만약 태자께서 실리를 추종하신다면 고려는 태자께 실리를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실리를 추구하는 그 마음을 굳건히 하실 것을 오히려 제 주군께서는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차현유는 몽주로부터 받은 방침의 핵심을 말하였다.
태자가 천자가 되어 천자라는 무게 속에 포함된 어리석은 명분에 얽매이지만 않는다면, 명나라와 고려는 함께 이득을 나누며 근린 친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더 말을 나눠 봐야 무의미하다.”
차현유는 곧바로 인정하고 물러났다.
만약 주군께 들은 대로 오늘 나눈 대화가 태자의 입장을 바꾼다면 그다음에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물러났던 차 대신이 다시 태자를 만난 건 열흘이나 지난 후였다.
그날은 태자가 며칠간 고민 끝에 천자를 배알하여 삼 일 동안 세 번에 걸쳐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나온 그다음 날이기도 했다.
* * *
요동국에 와 있는 탐라 판무관 굉장이는 목소리가 큰 자였다.
하여, 성을 지을 때도 울릴 굉(轟)이라 지을 정도였는데, 그런 목소리가 주는 편견에 비하면 상당히 지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본디 마적이 될 뻔한 자였다. 그러니까 외관대신 차현유와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그는 차현유가 교리로 등용될 때 글월을 좀 안다는 이유로 그의 서리가 되어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어느새 십여 년이 흘러 청장급인 판무관으로 임하기에 이르렀다.
판무관이 되면서 오래도록 몸담고 있던 외관부를 떠나 내관부에 속하게 되었으니, 내관대신 포은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하면, 이제 연왕에게 남은 건 다른 황자들처럼 웅크리는 것뿐이겠군요.”
굉 판무관의 말에 포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실소하였다.
분명 평범한 어조의 말이었는데, 낮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자체가 너무 커서, 얼핏 들으면 화를 내거나 크게 놀란 것처럼 들릴 정도였던 탓이다.
“하나, 우리는 그를 그렇게 둘 생각이 없네.”
“방법이 있습니까?”
“연왕이 하기에 달렸지만, 적어도 기회를 쥐어 줄 만한 방법은 있네.”
포은이 그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자, 굉 판무관도 이내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큰 걸 빼앗는 대신, 그보다 작지만 모자라지는 않은 두 가지를 주고자 하시는 거군요.”
“그것들을 크게 키우는 건 연왕이 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
“한데,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연왕부의 힘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으신지요?”
주어는 없었지만, 탐라공의 의도를 묻는 질문임에 틀림없었다.
그에 포은은 미소만 지었다. 사실 그도 확실히 들은 건 없었다.
그저 예전에 명나라의 분열을 두고 잠시 말이 나왔던 게 있어 그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미래에 대비하여 연왕이 어느 정도 힘을 갖추게 만드는 게 낫다는 점에는 그도 동의하고 있었다.
“자네가 제법 영민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었는데, 그런 짐작까지 하는 걸 보면, 그 소문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일세.”
“어허허, 민망한 말씀이십니다. 어허허.”
울림통에 대고 웃는 것처럼 너털웃음이 폭소처럼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연왕이 자기 운명에 중요한 순간이 왔음을 이해해야 할 터인데 말이야.”
“살길을 찾고자 거짓 패배까지 제시한 자입니다. 상황 판단은 할 줄 알겠지요.”
“곧 만나 보면 알겠지.”
포은이 요동국까지 온 건 연왕과의 협상 때문이었다.
연왕부가 요구한 거짓 패배에 대한 공식적인 대답과 더불어 고려가 새로운 제안을 할 것인 바, 요동국 좌의정 삼봉 정도전과 탐라국 내관대신 포은 정몽주가 연왕과 직접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 * *
만남의 장소는 연왕부가 새로 축성 중인 곳으로 이미 며칠 전부터 공사가 중단된 채 일꾼들을 멀리 물리고, 넓은 곳에 군막을 크게 지어 둔 상태였다.
다행히도 연왕은 확실히 상황 판단에 밝은 자였다. 아니, 너무 밝다 못해 근심에 짓눌린 중이었다.
단지 요동국, 아니 고려와의 싸움만이 위기의 모든 것이었다면 훨씬 더 대범해질 수 있었을 테지만, 응천부의 비협조를 통해 천자의 가시 돋친 의도마저 느끼게 되자, 연왕은 침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포은은 우선 ‘한 방’ 먹였다.
“고려는 연왕군에 힘껏 맞설 것입니다.”
“……혹시 뭔가 오해하는 것 아니요? 내가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상호 간에 세력을 낭비하지 말자고 한 것이지, 결코…….”
연왕이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반발하려고 하자, 포은이 양손을 내밀어 자제시켰다.
사실 지금 그가 뭘 주장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압니다. 다만, 작금의 상황이라는 것에서 연왕부는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
포은은 그 말과 함께 굉 판무관으로부터 받은 두루마리를 연왕에게 건네었다.
그 두루마리에는 고려와 명 태자 간에 맺은 약계에 대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연왕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 내용은 연왕부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려와의 교역을 태자에게 빼앗긴다면 연왕부는 지금의 기세를 일시에 잃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이번 전쟁을 거짓 승리와 패배로 태자의 위엄을 높이는 데 쓰고자 하니, 이는 연왕이 본디 하려던 계획조차 빼앗기는 셈이었다.
하나, 그 내용들 자체보다 연왕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건 따로 있었다.
가장 끝 부분에 태자는 그 약계가 천자로부터 위임을 받아 태자가 약속함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약계의 내용 모두를 천자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라는 의미였으니, 연왕은 절로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경고할 때부터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천자는 태자 형님을 태자로서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 형님을 시험하려는 듯한 천자의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던 연왕으로서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었다.
연왕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큰 충격에 그 자리를 벗어나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십여 년에 걸쳐 번성시킨 연왕부가 천자의 결정 앞에서 그저 일개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 난 이제 어찌해야 하는 것이오?”
연왕은 흔들리는 마음을 토하듯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물음을 던졌다.
“천자의 뜻을 거부할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런 게 있었다면 그처럼 충격 받았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하면, 다른 황자와 같은 길을 걸으셔야겠지요.”
다른 황자들과 같은 길.
천자의 아들로서 왕부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다 흐지부지 죽는 길.
하나, 연왕은 그것조차 쉽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태자가 이처럼 천자마저 설득하였다면, 연왕에 대한 경계심 또한 크게 품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니, 아무리 지금부터 연왕이 굴복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을 쉬이 받아 줄 리가 없었다.
그 굴복의 길을 밟은 지 얼마 안 되어 숙청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쯤에서 삼봉이 끼어들어 한마디 하였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고려는 그간 맺었던 연왕부와의 인연을 쉽게 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
“연왕부의 번성함이 고려와의 교역에 있다곤 하지만, 그것이 꼭 바다를 통할 필요는 없지요.”
“하나, 고려와의 교역을 태자 형님이 직접 취급하신다면 연왕부에게 그것들을 교역할 수 없지 않소?”
“방법이 꼭 없다고는…….”
삼봉이 말을 흘리며 포은을 바라보자, 포은이 헛기침을 한 차례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하시기에 따라 지금의 흥성함을 유지함은 물론, 더욱 융성해지실 수도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포은의 입에서 먼저 나온 건 아주 긴 교역로에 관한 것이었다.
현대 내몽골 지역의 황무지와 초원을 따라 이어지는 교역로이자, 하북부터 감숙까지 아우르는 교역로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리 천자께서 명나라 천하를 아우르신다고 해도 안산 산맥 너머 북방 호인들의 땅까지 내다보실 수는 없으시겠지요.”
처음 연왕부가 고려와 교역할 때와 마찬가지로 천자의 눈을 피하는 것이었다.
요동국을 통해 육로로 교역하고, 그 물산을 하북이 아닌 더 서쪽에서 유통하는 것이 고려가 연왕부에게 제시하는 계획의 핵심이었다.
확실히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지만, 연왕은 이내 문제점을 알아내었다.
호인들의 땅을 통해 물산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대한 확실한 장악력이 필요한데, 연왕부로서는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그간 축적한 연왕부의 힘과 자금만으로는 얼핏 봐도 계산이 나오지 못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투자에 대한 수익이 나오기도 전에 투자할 여력을 모두 탕진할 가능성이 컸다.
“저희도 그에 대해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포은이 이어 고려의 두 번째 제안을 밝혔다. 그건 앞서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연왕의 구미를 당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장가구에 진출하셨더군요. 연왕께 운이 따르는 모양입니다.”
현대에서 장자커우(장가구)는 하북성 금광 산업의 중심축 중 한 곳이었다. 특히 장가구의 동북쪽에 있는 적성(赤城 : 츠청) 지역은 2백 톤이 넘는 매장량을 자랑하는 금광 지대로, 본디 청나라 대에나 그 사실이 알려진 곳이었다.
포은이 장가구 근방이 몇몇 광구가 표시된 작은 지도를 건네며 금광 개발을 권하자, 연왕은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거짓이 아닙니다. 추후에 확인해 보시지요.”
포은은 탐라공의 말을 절대 신임하였기에 자신만만하게 답하였다.
“금광 개발을 통해 수익을 얻으시면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위세를 유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정도로는 결코 훗날을 장담하실 수 없겠지요.”
대신 그 금력을 바탕으로 북방 교역로를 확보한다면, 명나라 북동부에 국한한 연왕부의 영향력을 서쪽으로 크게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포은은 그것을 넌지시 알렸으니, 연왕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위인은 아니었다.
우울한 미래와 태자에 대한 천자의 신임을 확인한 충격으로 크게 그늘져 있던 연왕의 얼굴에 새로운 희망이 비추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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