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34)
* * *
조촐한 야행이었다. 달빛에 의지하여 멋대로 부는 바람 사이로 길을 헤쳐 가는 자들의 수는 대여섯에 불과했다.
그중에 대명의 황자도 있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휘하 장수 구복의 말에 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한 번 와 본 길이라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멀리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장가구.
연왕부가 북방 호인들과의 교역을 위해 진출한 거점.
그리고 시기에 적절한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곳.
장가구가 아니었다면 연왕부는 어쩌면 이제 망하는 길만이 남았을 것이다.
한 식경 후에 닿은 장가구는 멀리선 본 불빛이 무색할 만큼 깜깜했다.
다만 그곳을 관리하는 장씨 세가의 가주와 가솔 몇몇이 연왕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도 상황의 중대함을 알고 있는 만큼 연왕을 맞이하는 예를 생략하고 곧바로 세가의 장원으로 연왕을 안내하였다.
그곳에 들어가서야 연왕도 따뜻한 차와 간단한 다과를 받아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곧장 몰래 연왕부를 빠져나온 이유와 관련된 논의를 시작해야 했다.
“전해 주신 지도에 표시된 곳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중 이곳에서는 며칠 전에 금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장씨 가주는 고려로부터 전해진 지도 중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곳은 장가구 고을로부터 동쪽으로 100리쯤 떨어진 산중 계곡이었다.
“매장량은 많을 것 같은가?”
“조금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결코 적지는 않아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
내내 딱딱하던 연왕의 표정에 온기와 활기가 퍼졌다.
“탐라공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모양입니다.”
도연의 말에도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는 그저 믿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다고 해도 그가 모르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여, 거짓 완패를 당하고 태자 형님에게 구원을 받아 굴욕을 받을 때, 만약 금맥이 발견되지 않고 고려가 배신하여 교역하지 않는다면 그 후에는 어찌 연왕부를 이끌어 갈지 암담할 뿐이었다.
한데, 다행히도 금이 발견되었다 하니, 쉽게 망할 일은 없을 듯했다.
“신통방통하군요. 대체 그자는 이곳에 금이 있음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요? 혹시 왕부에 그자의 세작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장수 구복의 말에 다들 탐라공의 정체와 그의 능력을 떠올렸다. 그러다 도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탐라국으로부터 출입하는 고려인들은 교역소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난다고 해도 우리 군병들을 동행하였습니다. 물론 요동 방면에서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많은 세작들을 잠입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세작이라면 우리 왕부의 사정을 살피지, 이 먼 산중에서 금맥을 뒤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면, 대체 그자는 이런 걸 어찌 아는 걸까요? 우리도 이제야 이곳에 발을 디뎠을 뿐인데.”
“이곳은 아직 호인들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아마도 호인들이 발견한 것을 전해 들은 것 아니겠나.”
연왕이 나름 합리적인 답을 내놓자, 구복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더는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서 금을 얻을 수 있음이 드러났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연왕부가 해야 할 일이란 고려가 제안한 대로 서쪽으로 통하는 교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왕부에서 여러 신료들과 논의한 끝에 고려의 제안과는 다소 다른 경로를 개척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본디 고려에서 제안한 건 안산 산맥 너머의 초원과 황무지를 통하여 서쪽 감숙성에서 고려의 물자를 매매하는 것인데, 이것은 천자의 눈을 확실하게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호인 세력의 위협을 받기 쉬웠고, 중간에 제대로 된 거점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 교역의 최종 도착지인 감숙성은 아직 제대로 된 명나라의 영토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감숙성은 원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저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최근에서야 서서히 명나라의 힘이 통하기 시작하는 곳이었다.
감숙성의 감주에 왕부를 얻은 주영 황자도 이제 겨우 12살로 아직 왕부에 임하지도 않았으니, 그만큼 통치력이 미미한 건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여, 연왕부에서는 서쪽으로 교역로를 뚫더라도 그 소비력을 확신할 수 없는 감숙성만을 바라보는 대신, 중간 교역지를 추가로 얻기로 했다.
안산 산맥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즉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 줄기를 이용하여 타이항 산맥의 서편을 타고 내려가는 교역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중간 교역지로 태원과 서안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서안은 중원과 관중의 중간지인 만큼 감숙성으로 향하기에도 용이한 편이었다.
문제는 서안이 그 교역에 협조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곳은 진왕(秦王) 주상이 왕부를 두고 있는 곳으로, 주상은 연왕의 둘째 형이었다.
태원에 왕부를 가지고 있는 셋째 황자 진왕(晉王) 주강이 연왕부와 가까운 만큼, 일찌감치 연왕이 협조적인 관계를 세운 것에 비해, 서안의 진왕(秦王)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이는 거리가 먼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 둘째 형 주상이 연왕을 멀리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문 모를 일이지만, 그가 연왕을 시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 주상이든 주강이든 모두 성품이 굳세지 못하고 능력과 세력이 약하여 차기 보위를 탐낼 만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건 매한가지였다.
한데, 연왕이 태자 다음으로 보위에 가깝다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주상은 연왕 주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친교의 서찰을 보내도 답장조차 오지 않고 있었다.
“진왕(秦王) 전하가 문제로군요. 그분을 설득하지 못하면, 교역로를 바꾸는 게 무의미할 겁니다.”
“지난번에 보낸 선물은 그대로 되돌아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자기도 부유하니 필요 없다는 전언과 함께 되돌아왔습지요.”
“그것참…….”
연왕은 이맛살을 구기며 혀를 찼다. 어차피 그가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을 시기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자신도 이제는 천자의 자리를 탐내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일단 내가 다시 서찰을 보내야겠다. 내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면 아주 냉정하게 굴지는 않겠지.”
말로 설득할 수 있다면 서찰로 비위를 맞추는 정도는 백 번이라도 할 수 있었다.
진왕(秦王)에 대한 대책은 차후로 미룬 후, 연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씨 가주가 눈치껏 그를 안내하였다.
말까지 타고 그가 안내한 곳은 장가구에서도 북쪽 외딴 곳이었다.
북서쪽으로 너른 구릉지가 보이는 어느 계곡.
그곳에는 얼마 전까지 없던 수많은 군막들이 세워져 있었다.
“낙오된 자는 없는가.”
말을 타고 구릉 위에서 계곡 안에 군막들의 도열된 모습을 보며 연왕이 물었다.
“낙오된 자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패전 당시에 다치고 죽은 자들이 약간 있다고 합니다.”
“몇이나?”
“많지는 않습니다. 수십에 불과하다지요.”
“수십이면 많은 게지. 촉 없는 화살과 철구 없는 화포로 맞이해 주었는데…….”
요동군과의 전투는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날아가고 날아오는 화살은 촉이 없었고,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요란을 떨던 화포들은 그저 소리만 그랬을 뿐이었다.
적진으로 돌격한 군마와 군병들은 싸움 대신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데에 더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멀리서 보면 격전처럼 보이던 그 전투들의 진면목이었다.
하여, 공식적으로 약 1만 5천에 이르는 전사자들도 거짓이었다.
그들은 요동군의 협조 아래 후방으로 이동하여 타이항 산맥의 북쪽을 돌아, 지금 연왕이 내려 보고 있는 계곡에 진주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모두 죽은 자들.
하나, 이제는 교역로를 개척하고 지키는 일을 할 자들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모두 처자식이 없는 자들로만 선별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부모 있는 자들은 많지 않겠나.”
“후에 다시 만나게 해 준다면 오히려 더 반가울 것입니다.”
구복의 위로와 같은 말에 연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실소하였다.
“자네가 날 위로할 줄도 아는군.”
“과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냐.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있어. 차라리 진짜 전장에서 죽었다면 이런 마음이 없었을 터인데, 기껏 열심히 훈련시켜 놓고 가짜 전투에서 가짜 패배를 당하게 만들다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군병들을 향한 미안함이 아니었다. 차라리 본인 스스로의 자존심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갚을 날이 올 것이야. 저 병사들도 가족을 떳떳하게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고.”
“분명 그럴 것입니다.”
연왕이 말허리를 차서 구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군막으로 가득 찬 계곡 안에서 환호와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 * *
일기(一期). 한 시기.
명 태자 주표는 그의 인생 중 한 시기가 끝났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저 황자들 중 장남이기에 태자에 책봉된 것이 아닌, 진짜 태자이자 명명백백한 차기 천자로서 다시 태어났다.
연왕을 구원하고 돌아온 응천부에서 배알한 천자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흡족함이 바로 그 증거였다.
물론, 그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의 마음도 또 다른 증거였다.
“기분이 어떠냐?”
“후련하옵니다.”
“어째서?”
“위선을 버린 덕이라 여기고 있사옵니다.”
“위선? 어떤 위선이더냐?”
“천자 외 그 누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좋은 형제, 좋은 사람이길 꾸미고 있었던 위선이옵니다.”
“후후후.”
천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아우의 것을 빼앗아 왔다.
이미 알맹이는 취하고 있었음에도 그가 가진 알량한 껍데기까지 모조리 빼앗아 왔다.
고려와의 싸움에서 승전한 대가로 태자가 얻은 건 고려와의 교역이었다.
전리품이라는 게 싸운 상대와의 교역이라니 우스웠지만, 이번 싸움의 진정한 상대는 고려가 아닌 연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연왕부는 이제껏 승승장구했던 동력을 잃게 되었다. 감히 태자의 지위를 탐하던 연왕도 더는 기를 펴지 못하게 되었다.
그를 살릴지 죽일지는 시간이 결정해 줄 것이다.
“네가 정녕 태자답게 변했음에 기쁘다. 하나, 너는 나를 설득하며 약속한 바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찌 잊겠나이까. 오히려 이번 기회에 고려를 가만 두어서는 아니 됨을 더 깊이 깨달았나이다.”
전날에 천자를 삼 일 동안 세 번 배알하였으니, 고려와의 싸움을 통해 진정한 태자로 거듭날 것임을 천명하였다.
외인들과의 교역에 근심이 많으신 천자를 설득한 주요 근거는 그들로부터 얻는 이문으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겠다는 약조와 계획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그 약조에 작게나마 죄책감 같은 게 있었다.
고려나 탐라공과의 인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번 전쟁에서 요동군이 거짓 패배를 위장하면서도 정작 전투만큼은 진짜로 치렀고, 덕분에 태자가 이끌고 간 명군 중 삼분지 일 가까이를 잃고 말았다.
물론, 고려가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었다. 그들은 서성이라 이름붙인 고을까지 후퇴하였고, 그곳에서 패전을 시인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군병들이 사상됐음을 알고 태자는 종전하는 자리를 뒤집어엎어 버릴까도 잠시 고민했었다.
하나, 차후에 있을 고려와의 교역을 생각해서 애써 참아야만 했다.
대신, 그만큼 원한을 깊이 백골에 새겨 잊지 않게 되었다.
오래전 명군을 수몰시킨 것과 함께 이제 태자에게 있어서도 고려는 복수하고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진정으로 그리할 수 있겠느냐? 생각보다 고려의 힘이 강성한 모양이던데.”
“연왕군이 싸운 것이 요동군이라곤 하지만, 실상 요동군은 고려의 다른 제후들로부터 지원을 얻어 싸운 것이니, 고려 전체와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실제로 제가 개입하여 고려를 밀어내었으니 고려는 고작 연왕부를 조금 능가하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제법 대단한 것이니 마냥 하찮게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천자께서 마음에 품을 만한 우려는 결코 아닐 것이옵니다.”
태자는 천자를 향해 차근히 답했다. 천자는 태자가 고려와 미리 통하여 승전을 약속받았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천자가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러고도 1만이 넘는 군병들이 죽고 다친 것에 대로하였을 터였다.
천자가 고려에 관심을 크게 가지면 후에 탄로 날 가능성도 있기에 가급적 천자의 시선을 돌리고자 하였다.
“고려는 소자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감히 말씀드리건대, 소자가 대명을 이끄는 날에 고려는 대명의 영광을 위한 재물이 될 것이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손에 쥐실 천자께서 그 하나만큼은 남겨 두시옵소서.”
“하하하!”
천자는 대소하며 앉은 옥좌의 팔걸이를 퉁퉁 두드렸다.
“좋군, 좋아! 내 그 말대로 해 주마. 아니, 너를 위해 내가 미리 이 나라를 평탄할 것이다. 네가 다른 신경 쓸 필요 없이 고려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하하하!”
태자는 머리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탐라 외관대신에게 들은 탐라공의 천자에 대한 평가가 떠올랐다.
그가 돌려 말한 건 결국 이기심일 것이다.
천만다행인 건 천자가 생각하는 이기심에 태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 *
요성에서 영구군으로 향하는 길은 세망으로 포장되어 제법 번듯하게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 사이에는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나는 다소 걱정이네. 괜히 명 태자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서 말이야.”
“또 그 이야기인가?”
“또가 아니라, 자네가 탐라국이 아닌 요동국의 신하였다면 나랑 똑같은 마음이었을 걸세.”
“글쎄, 태자가 고려로 쳐들어온다면 뭍이 아닌 바다가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으로 태평하군.”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겠나. 어차피 태자는 지금 고려를 칠 수 없어.”
“나도 당장이 아니라 훗날을 말하는 거네.”
“하면, 잘 대비하면 그만이지, 뭘 그리 걱정하는 겐가.”
“거참, 같은 명나라를 두고 나누는 말이긴 한 건지 궁금하군.”
“후후후.”
티격태격한 끝에 포은은 실소하였다.
친우 삼봉의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고, 명나라 태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도 태평할 만큼 변한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요동군은 공식적으로 약 1만의 군병들이 사상당했다. 하나, 실상은 그 반의반에도 못 미쳤고, 그 대부분도 다친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태자의 명군이 1만 5천에 이르는 군병이 죽거나 다치는 동안 요동군은 2천여 명만이 다쳤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것이 요동군이 명나라 군대에 비해 일방적으로 강력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요동군이 치열하게 싸울 줄 몰랐던 명나라 지휘부의 무방비에 힘입은 덕이었다.
패배를 약속한 걸 아는 명나라 장수들은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가장 우두머리인 명 태자부터가 마음 놓고 있었으니, 요동군의 반격은 일종의 기습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태자의 명군에 별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응천부에서 태자에게 계속 진격하라는 명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니, 적당한 수준에서 피해를 강요하기로 하였지. 또, 그걸 태자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그가 그걸 받아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고.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이미 다 설명했고, 요동공께서도 동의했던 바였네. 태자가 얻은 승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장차 고려와의 교역으로 얻을 이익 때문에 한동안 고려에 성난 이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는 데에도 다들 동의했지.”
삼봉도 다 아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명 태자가 종전의 협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기어이 협상을 마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러니 자네도 그만 걱정하고 요동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이나 하게.”
“어째 동생에게 충고하는 형님과 같은 모습이군.”
“우리가 망년지교이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내가 자네보다 형이라네. 그것도 세 살이나.”
“예, 예, 알겠습니다. 형님.”
“하하하!”
포은이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며 같이 웃음을 짓던 삼봉은 문득 포은을 진득하니 바라보며 말하였다.
“고맙네. 자네도 탐라국도.”
진심이었다. 탐라국이 요동국을 도운 게 삼봉을 위한 것도 심지어 요동국이나 요동공을 위한 것도 아닌, 고려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었다.
만약 탐라국이 아니었다면 연왕과의 싸움조차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왕군과 거짓 패배를 꾸미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연왕의 장수들이 훌륭하고, 그 군병들의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가짜 싸움이라고 하지만, 수만의 장정들이 세 번에 걸쳐 거칠게 엉켰기에 희생자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고, 만약 어느 쪽이라도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군병이었다면 그 규모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하나, 실제로 희생된 자들은 수십에 불과했고, 가까운 곳에서 연왕군이 혼란을 연출하는 중에도 질서와 명령을 좇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연왕군은 분명 강병이었다. 진정 싸우기 꺼려질 정도로.
미리 탐라국이 태자를 끌어들이지 못했다면 연왕부와의 싸움에서 상당히 큰 희생을 치렀어야 했을 것이고, 애초에 탐라국의 도움으로 군력을 향상시키지 못했다면 요동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니 요동국 좌의정으로서 삼봉은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쑥스럽군. 나나 탐라국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다 요동국이 잘 해낸 것이지.”
포은은 내관대신의 신분으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요동국에 머물러 있었지만, 사실 그의 역할은 단지 관전이 아니었다.
혹시나 태자가 약속을 어기거나, 명군의 피해에 대한 분노를 못 참고 복수하려 할 경우에 대비하여 바다를 통해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탐라군 2만이 후방에 집결해 있었다.
포은은 바로 그 탐라군을 불러들일지에 대한 판단을 하는 최종 결정권자였다.
다행히 탐라군을 호출할 상황은 없었지만, 그런 조력이 뒤에 있다는 자체가 요동국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삼봉과 포은은 내내 대화를 나누며 영구군에 닿았고, 마침내 석별의 시간을 맞이하였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군.”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걸세. 특히 요동국과 탐라국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이들이 왕래할 것이고, 나도 마찬가지이겠지.”
“내내 하는 말이 탐라국과 가까워지라는 소리로구먼.”
“그게 서로에게 좋은 길임을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귀에 딱지가 앉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하하, 미안하네. 그럼 이만 가 보겠네. 강녕하시게.”
“살펴 가시게.”
일행 중 마지막으로 포은이 경함선에 오르자, 잠시 후 배가 움직여 포구를 떠났다.
멀리 떨어져 얼굴을 구분하지 못할 거리에 달할 때까지 두 사람은 포구와 배 난간에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