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38)
* * *
간만에 천몽 속 고려와 현대의 한국의 계절감이 비슷했다.
고려도 초여름, 한국도 초여름.
“미안하네요. 우리만 비행기 타고 가려니까요.”
“어쩔 수 없죠. 재단을 너무 오래 비울 수 없다고 한 건 진주 씨라고요.”
“몽주 씨 스케줄이 그렇다는 거지, 나야 오래 쉬면 더 좋죠.”
몽주와 진주는 여름휴가 계획을 짜고 있었다.
거대 범선을 제작하고 있는 터라, 저번 여름에 그랬듯 재단 전체가 함께 휴가를 즐길 수는 없었고, 일반 회사처럼 각각 스케줄을 잡아 휴가를 쓰기로 했는데, 몽주가 필리핀으로 휴가를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상이 조금 바뀌었다.
재단의 중추를 이루는 바당보름 출신들이 휴가 때, 머더버드 호를 이용하여 필리핀까지 항해하길 요청한 것이었다.
현대의 경함선 양진이 호나 양진이 호를 ‘호위’하는 어미새 마더버드 호는 계속 몽린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었지만, 거대 범선의 제작 이후에는 소수의 전담 인원들만 그 배들을 운용하였고, 그나마도 연안 위주였다.
그것만으로도 양진이 호로부터 경함선급 범선 운용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들을 뽑아낼 수 있었고, 몽주가 천몽 안에서 쏠쏠하게 써먹었다.
하나, 아무래도 머더버드 호의 성능을 생각하면 그렇게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아까운 게 사실이었다.
하여, 바당보름 출신들은 이번 휴가 때 머더버드 호를 타고 원양을 나가길 바랐고, 몽주가 필리핀으로 휴가를 가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머더버드 호의 원양 항해 목표는 자연히 필리핀이 되었다.
몽주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머더버드 호를 타고 필리핀의 군도를 돌면서 미리 ‘여송’섬을 느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다만, 몽주도 머더버드 호를 타고 필리핀까지 가는 건 무리가 있어 필리핀에서 따로 만나기로 하였다.
“난 발리에 가 보고 싶었는데.”
“세부도 좋잖아요.”
“세부는 한번 가 봤으니까요.”
세부(cebu)와 발리(bali)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동남아의 휴양지로, 세부는 필리핀 제도 중앙에 위치한 섬이었고, 발리는 인도네시아 소순다 열도에 위치한 섬이었다.
“뭐, 다음 여름휴가 때는 발리에 가 보죠. 아마 충분히 가게 될 거예요.”
당연한 말이지만, 몽주가 필리핀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유는 천몽 속 여송 섬과 관련되어 있었다.
일종의 사전 답사인 셈.
그러니까, 현대의 1년이 천몽 속 약 9년에 해당함을 생각하면 다음 여름휴가 때 인도네시아를 ‘사전 답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사이에 제가 마음이 바뀔 수도 있죠. 몰디브도 멋져 보이던데요?”
몰디브는 인도 아대륙 남쪽 인도양에 있는 제도로, 마찬가지로 유명 휴양지였다.
“아, 몰디브…… 거긴 좀…….”
9년 안에 노려보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다.
“왜요? 어차피 비행기 타고 가는 곳인 건 마찬가진데요?”
“그렇긴 하지만.”
“이상하네요. 꼭 쉬러 가는 게 아니라 무슨 목적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하하, 목적이 있긴요. 그냥 아직은 몰디브가 별로 끌리지 않을 뿐이죠.”
그때, 문득 발소리와 함께 이사장실의 문이 열렸고, 재상과 두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진주 씨도 계셨군요.”
재상과 두신은 진주가 있는 걸 보곤 인사를 하면서도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온 건 천몽과 관련된 회의 때문이었는데, 진주가 있으면 회의를 진행할 수 없었다.
하여, 자연히 몽주와 진주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들은 멀뚱하니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어, 또 작당들 하러 오셨군요?”
그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진주가 말하며 세 남자를 두루 살피며 말했다.
“작당이라뇨. 회의죠, 건설적인 회의.”
“대체 무슨 회의인 거죠? 우리 재단에서 매주 꼬박꼬박 빠짐없이 할 정도로 회의할 일이 있나요? 딱히 세 사람이 같이하는 프로젝트도 없었던 것 같은데…….”
“뭐, 두루두루 여러 가지…….”
“진짜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좀 소외감 느끼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얘기해 줄게요.”
몽주는 최대한 믿음직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답했다.
진주는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남자분들끼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잘 나누세요. 전 이만 가 보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여행 팸플릿을 수납한 진주는 벌떡 일어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방을 떠났다.
“토라진 거 아닙니까?”
두신이 걱정된다는 양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말해 줄 수도 없는데.”
“저희한테도 말하셨는데, 진주 씨에게도 못할 건 없잖아요? 진주 씨도 몽주 씨를 위해 일하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방 이사한테도 말해야 하고, 바당보름 사람들에게도 말해야죠.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잘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다고 해도, 이 일은 아는 이가 적은 게 좋잖아요. 보안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의 삶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훼손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
몽주의 말에 재상과 두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도 몽주의 일을 도우면서 종종 묘한 이질감에 휩싸이곤 했다.
천몽이라는 게 이성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떠올릴 때면 환상에 빠진 기분이고, 천몽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 때면, 지금의 현실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씁쓸한 이야기는 접어 두죠. 우리의 삶은 그대로 다 의미가 있는 법이잖아요. 천몽 이후에 몽땅 바뀔지, 평행세계로 분리되어 각자의 세계가 시간을 이어 갈지 알 수는 없지만, 내일을 모른다고 오늘을 포기하는 짓은 멍청한 짓이죠. 우리가 천몽 속 세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결국 현실을 기준으로, 현실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거고요.”
“음, 말씀 잘하시네요. 그 인터뷰하시지 그러셨어요?”
문득 재상이 실소하며 말했다. 거대 범선을 취재하고 있는 방송국에서 몽주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몽주가 거부한 일이 있었다.
“해 봐야 어떻게 봐도 벼락부자가 돈지랄하는 걸로 보일 텐데요, 뭐. 자, 회의나 시작하죠.”
* * *
“점점 멀어지네요. 남북으로.”
회의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문득 재상이 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한반도에서 투닥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두신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하기야 시간의 흐름차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천몽 안에서 10년 전 이야기가 현대에서는 기껏해야 1년 전이니까.
이번 회의에서 다룰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리석 밀교역이고, 다른 하나는 뜬금없이 나온 초원길의 재구성이었다.
전자는 천몽에서 깨기 거의 한달 전에 전해 들었기에 고려에서 여러모로 알아볼 겨를이 있었지만, 후자는 직전에 전해진 소식이라 더 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둘 다 남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거나, 그럴 예정인 일들이었고, 그렇게나 먼 거리임에도 탐라국의 개입을 원하는 자들이 많다는 점은 그만큼 몽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키타이가 재래하지 않는 이상 초원길이 재건될 리가 있을까요? 요동국이 스키타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초원길은 대항해 시대 전 대표적인 유라시아 교역로 중 하나였다.
문자 그대로 아시아 스텝 지대를 관통하여 흑해로 연결되는 초원길, 파미르 고원을 통해 이란을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 비단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 연안항로들이 이어져 홍해나 페르시아만을 통해 지중해에 닿는 바닷길(혹은 향료길).
이 세 가지 교역로는 전근대 유라시아 교역로의 대표들이었다.
다만, 세 교역료는 모두 시기적으로 전성기가 달랐고, 그중 초원길은 무려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초원을 일통하는 세력이 생기지 않는 이상 초원길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전설적인 스키타이족이 몰락한 이후, 초원을 일통한 세력이 없었고, 초원길도 스키타이와 함께 사라졌음을 생각하면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몽골 제국 시기에 초원길이 다시 부활할 수도 있었겠지만, 몽골 제국은 비단길 또한 장악할 수 있었던 엄청난 제국이었고, 잘 돌아가고 있는 비단길을 놔두고 초원길을 따로 운영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이는 유목민족 국가들이 보이는 국가 운영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비단길이 수없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고, 실제로 무너진 적도 있었음에도 매번 되살아나 오랫동안 유지된 건 당나라, 송나라를 비롯하여 비단길 곳곳에 존재하는 정주민족 국가들의 능력과 노력에 기인한 바였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 일종의 동상이몽이 아닐까 싶어요.”
“동상이몽요?”
“네, 요동국 내에서도 정말 초원길을 통해 교역하길 바라는 자도 있겠지만, 그걸 명분 삼아 요동국의 강역을 확대하는 걸 노리는 자들도 있을 거예요. 또, 동금주의 무족들이 요동국에 호응하는 것도 교역로보다는 과거 몽골족에게 당한 걸 보상받을 속셈이 좀 더 크겠죠.”
초원길 부활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은 요동국보다 동금주를 통해 먼저 전해졌다.
동금주 도집사가 무족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 몽주에게 소식을 전했고, 비슷하지만 조금 늦게 요동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초원길에 대한 조력을 청하는 국서가 전달되었다.
이는 그만큼 동금주 무족들이 요동국의 초원길 재건에 크게 호응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초원길도 정치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 같군요.”
정치적으로 결정한다는 건, 초원길 재건이라는 사업이 가지는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 사업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정치적인 결실을 이유로 그 사업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초원길의 경제적인 유인은 몽주도 그렇고, 재상이나 두신도 부정적이었다. 탐라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고.
초원의 상황은 현대의 역사적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몽주도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지의 영역.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해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그 수많은 세력이 십수 개일지, 수십 개일지, 혹은 수백 개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몽주가 단번에 거절하지 않은 건, 초원길 재건이라는 경제적 명분의 사업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동국과의 동업을 통해 대헌장 이후의 질서를 보다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점, 과거 나하추를 놓아준(?) 이후, 남아 있는 무족들의 몽골에 대한 반감을 풀어 줄 기회가 된다는 점이 대표적인 정치적 이익이었다.
‘우루무치’쯤에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진 나하추 세력에 대한 정보를 비롯하여 언제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워 등장할지 모르는 유목민족 세력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다는 점도 몽주에게는 중요한 이점이 될 수 있었다.
“요동국이 강역을 넓히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질 수만 있다면 경제적인 유인도 충분히 유의미하겠죠?”
“유지하는 데 무리만 없다면 영토야 넓으면 넓을수록 좋겠죠. 근데 첫 천몽 전의 한국도 그 정도로 영토가 넓지는 않아서…….”
몽주가 기억하는 첫 한국의 북방 영토는 ‘만주’에 더해 오호츠크해 남단까지의 영토였다.
어찌 보면 이미 몽주의 고려가 첫 천몽의 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오호츠크 해까지의 영토는 하려고만 하면 무족들을 앞세워 언제든 도모할 수 있고, 거기에 구주와 이주섬 등 남방 영토가 추가되었으니까 말이다.
“근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죠? 개혁의 기수라고 표현했던…….”
“아, 장수완요?”
되묻고 난 몽주는 이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름은 알고 아주 기초적인 건 알았지만, 자세한 약력은 그도 아는 게 없었다.
‘아, 책 좀 읽지 그랬냐, 중2 몽주야.’
“그 사람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지 못했다면 첫 천몽 전의 한국도 그 넓은 영토를 유지하지 못했을 거 아니에요?”
“음, 아마 그랬겠죠. 기적과 같은 업적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당시 서구 세력 중에서 러시아가 후발 주자이긴 했어도, 아직 전근대적 체제 속에 있던 동양 국가가 홀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낸 건 분명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쓴 자 본인이 그 업적을 기반으로 삼아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하고, 개혁의 성과까지 얻은 건 기적이 두 번 겹친 셈이었다.
“이번 천몽에서도 나중에 그 장수완 같은 자가 있어야 되는 걸까요?”
두신이 묻는 말에 몽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들어야죠. 제가 고려에서 어떻게든 남방 진출을 하고,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하는 건 단지 경제적인 이유에만 국한된 게 아니잖아요. 세계의 껍질을 부숴, 고려를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면 제가 사라진 후에도 고려는 계속 변모하고,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중화사상이 규정한 좁은 세계 속에 파묻혀 외부의 변화에 눈이 가려지지만 않아도 고려의 미래는 전혀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물론, 몽주가 당장 고려에서 하고자 하는 건 그 이상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초원길도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네트워크라는 게 본래 하나만 있는 것보다는 두 개가 있는 게 더 낫죠. 설령 교역로 설립에 실패한다고 해도 강역은 얻을 테니까요. 그 강역이라는 게 영토로 확정될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높잖아요.”
“문제는 강역을 일단 얻으면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적 방향성이 생기고, 그에 따라 많은 국력이 소비될 거라는 거지. 강역으로부터 얻는 이익과 그 강역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간의 격차가 어떨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고.”
“그러니까 어차피 이익일지 손해일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이건 판단보다는 판단 이후의 행동에 달린 일이라고 봐야 해.”
두신이 결론이 난 것처럼 말했지만, 재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민망하네요. 갈수록 저희가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두신이나 저나 불확실을 줄이고, 확실성을 늘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건데, 이제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뭐라고 확실한 이야기를 해 드리기가 어려워졌네요.”
두신이 초원길에 대해 판단보다 행동의 문제라고 말한 것처럼, 앞서 논의한 대리석 밀교역 또한 판단보다는 행동의 문제라고 결론 지어졌다.
명나라 지배하의 운남 지방과 그 남부의 라오족, 그리고 점파국까지 작당한 대리석 밀교역은 솔직히 얼마나 이익이 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무거운 돌덩이를 엄청난 거리에 걸쳐 운반하는 비용을 생각해도 그랬고, 자칫 명나라에게 발각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인 문제점도 대리석 밀교역이 낳을 결과의 불확실성을 가중시켰다.
아니, 그런 걸 차치하고, 생각보다 명나라에서 대리석에 대한 선호도가 높지 않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물론, 대리의 돌에 대한 명성은 명나라에도 많이 퍼져 있었고, 상류층의 호기심을 끌만한 물건이긴 했지만, 생각만큼 고가를 받아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탐라 상단을 통한 예측 결과였다.
동북아시아의 건축 양식이 목조 위주인 탓도 있었고, 대리석을 좋게 본다고 해도 차라리 그 비용을 들여 금은으로 치장하는 게 낫다고 보는 이유도 있었다.
사실 그에 대해 재상과 두신이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긴 했다. 한데, 그 해법도 잘하면 통한다는 정도지, 반드시 통할 방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킬 수도 있었고.
결국 경제적인 이해는 판단하기 어려웠고, 북방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해가 오히려 몽주의 판단에 영향력을 미쳤다.
“근데, 일이 잘 풀려서 언젠가 고려가 명나라와 제대로 맞붙을 때까지 대리석 밀교역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함께 명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해 줄까요? 어쩌면 그 참에 명나라 쪽에 붙어서 그들이 대리석을 명나라와 정식으로 교역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라오족은 모르겠지만, 운남의 백족이나 점파국은 명나라에게 지배되고 있거나,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 세력이라 명나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얼마든지 일어설 거예요. 물론, 고려에서 여러 도움을 줘야겠지만요.”
두신의 우려에 몽주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이어진 재상의 우려에는 몽주도 다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탐라에서 파는 대리석이 대리국의 것이 아니라고 속인다고 해도, 만약 대리석이 잘 팔리게 된다면 자연히 명나라 측에서 운남 대리 지역에 시선을 돌릴 거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밀교역이 어려워질 수 있고, 자칫 탐라로부터 들어온 대리석이 운남의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 날 수도 있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이 문제엔 해법이 없어 보이는데요.”
“흐음…….”
몽주가 살짝 당황하고 있는데, 의외로 두신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였다.
“그럼, 고려의 대리석도 미리 팔고 있으면 되잖아요. 알아보니 그 정선에서 캐낸다는 대리석이 비록 색감이 좀 떨어지긴 해도, 재질 자체는 좋다던데요? 안 그래도 태백 쪽을 개발할 생각이라니, 대리석을 기반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네요.”
“대리석이야 그렇다 해도, 운남, 라오족, 점파국으로 이어지는 우방의 확보는 불가능해지잖아요?”
“그 넓은 땅에서 교역할 게 대리석뿐일까요? 대리석을 시작으로 신용을 쌓으면서 다른 것도 교역해야죠. 당장 보이차도 있잖아요. 그건 아직 별로 유명한 차도 아니니까, 탐라의 산물로 유명세를 얻어도 명나라가 쉽게 눈치채진 못할 걸요.”
보이차(普洱茶)는 중국어로 푸얼차라 불리는 후발효차로, 원래 운남 소수민족의 차였다가 근대 이후에 서서히 유명해진 차였다.
물론, 그 이야기는 아직 보이차가 상품성이 약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하, 그렇게 보니, 초원길 쪽도 나중에 명나라를 상대할 때에 대한 대비로 삼을 수도 있겠네요. 명나라 북쪽의 유목민족들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이야기는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며 계속 진행되었다.
중구난방 같은 말들의 잔치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세 사람 모두 명나라를 상대함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역이든, 전쟁이든, 뭐든 말이다.
* * *
조석양구는 본디 양랑촌부곡(陽良村部曲)의 백성이었다. 현대의 수원과 용인 사이에 위치한 그 부곡은 나라와 근방 사원을 위한 석조(石造) 사업에 동원되었고, 그 덕에 부곡민들 중 태반이 돌을 다루는 데에 이력이 있었다.
부곡이 해체되고 시대가 변하여 탐라국 남면의 백성이 된 조석양구는 배운 석조 기술을 십분 발휘하여 명장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 지금 그가 탐라에 초대받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과연 대리의 돌이 돌질하기에 최고로 좋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손금을 조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범 삼아 대리석 한 덩이를 가지고 돌질을 해 보았더니, 그들이 보통 다루는 화강암에 비하면 세밀한 묘사를 하기에 너무나 편리했다.
“하하, 하면 이참에 부처님 손금도 새겨볼까?”
“말이 그렇다는 게지요. 하하하.”
그곳에는 일곱 명의 석조 장인들이 있었으니, 두 명은 본래 탐라섬의 백성이었고, 네 명은 남면에서 왔으며, 한 명은 구주에서 온 자였다.
탐라국 각지에서 온 그들은 탐라공이 선물을 받은 대리석으로 범선 등탑에 올릴 부처상을 조각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수십 개의 대리석 덩어리들을 대충 쌓고 ‘견적’을 내 보니, 대략 높이 7미에 이르는 거대한 부처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 모두들 신나게 어떻게 조각을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그들 중 어린 축에 속하는 조석양구가 말문을 열어 모두 주목하게 하였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대리의 돌들을 우리에게 내리시며 탐라공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공께서 저희에게 당부하시길 구식에 얽매이지 말고 기예의 혼을 불태워 달라 하셨지요.”
“음…….”
“한데, 전국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을 모방하는 것에 그친다면, 탐라공의 당부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 그렇다고 특별한 수가 있겠나? 등탑에 올릴 것을 생각하면 더욱 수가 좁아질 수밖에.”
“기존의 불상을 생각하면 그렇지요.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둘 중 하나뿐이겠지요. 하지만, 등탑의 구조를 생각하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석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면서 양구는 그들에게 전해진 등탑의 ‘설계도’를 펼쳐 보였다.
“등탑 위에 올린다고는 하지만, 사실 등탑의 가장 위에는 불을 지피는 곳이 있고, 그 아래에 석불이 놓이게 됩니다.”
“그러네만.”
“하면, 달리 생각하면 부처께서 등불을 짊어지신 것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부처께서 등불을 짊어지신다고?”
“그렇습니다. 등탑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밤에 바다 위의 배를 인도하는 게 등탑입니다. 이는 마치 혼란한 속세에서 희망을 전하며 만민을 구도하는 보살과 같은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하면, 그 불빛을 받드는 일이야말로 부처께서 감히 감당하실 일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양구의 말은 서서히 다른 장인들도 달리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그저 단순히 입상이나 좌상의 형태로 만들고자 하였는데, 등탑의 의미를 생각하니, 그렇게 일반적인 형태로 만드는 게 오히려 실수하는 것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한데, 자칫하면 유치한 모습일 수도 있네. 손을 들어 불을 들어 올리신 모습이라면 말이야.”
“저는 역경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역경?”
“네, 역경입니다. 등탑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어떤 때라도 꼿꼿이 서서 밤마다 불빛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람의 일이라 생각하면 어찌 역경이 아니겠습니까? 그 괴로움을 오직 구도를 위한 일념으로 버티는 부처의 모습은 단지 가벼이 불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내려놓고 편해지고 싶은 유혹을 이겨 내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등탑에 어울리는 부처의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기점으로 장인들의 상상력은 크게 폭발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상상으로 그려낸 부처의 모습을 설명하였고, 그런 의견들을 취합하여 서서히 등탑에 올라갈, 아니 등탑 그 자체가 될 부처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게 구체화되기 시작한 등탑 부처의 모습이 완전히 결정되기 전에, 등탑 부처상 사업은 일시 정지되었다.
그건 탐라공의 방문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장인들 앞에 등장한 탐라공은 비서원 관리를 통해 한 장의 그림을 건네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밝혔다.
“그 그림 속 인물의 석상을 먼저 만들어야겠네. 물론, 대리석으로.”
당황한 표정으로 모든 장인들이 그림을 주목하였다.
“이건…….”
“당금 명나라 황제일세.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그 그림과 꼭 닮으면서도 좀 더 영웅적인 모습을 담아 줬으면 좋겠군. 솔직히 말해서 아부하는 용도로 쓰일 것이라서 말이지. 다만, 너무 과하면 황제가 자신을 비꼰다고 여길 수도 있으니, 그 점은 유의해 주게. 이런, 내가 말을 하면서도 참 어렵겠다 싶군.”
“하면, 등탑에 올릴 부처상은 대리석으로 만들지 못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네. 조만간 다른 대리석이 올 걸세. 그 또한 최고의 품질일 테니, 염려하지 말게.”
그것만으로도 장인들은 안도하였지만, 이내 명나라 황제의 석상을 만드는 것에 대하 고민을 시작했다.
명나라 황제의 변덕에 관한 소문은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어, 자칫 애쓰고도 화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인들로 하여금 고민과 걱정에 빠지게 만든 홍무제 석상은 몽주가 현대에서 조언을 받은 대로, 대리석 교역을 위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주원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대리석은 또 하나의 사치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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