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4)
“고개를 드세요.”
신돈은 그제야 허리를 펴 바로 세울 수 있었다.
“명에서 스승님을 권왕이라 부른다지요?”
“……그렇다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성인이 나셨다고 스승을 추앙하고 있고요?”
“그 역시 들은 바 있습니다.”
열기가 맴도는 눈빛으로 던지는 왕의 황망한 질문에 신돈은 담담하게 인정하였다.
권왕(權王)이란 직역하면 권력을 가진 왕이니, 기실 임금이 아니라 신돈이 권력을 가진 진짜 고려의 왕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또 권력이 그토록 높은데, 심지어 일반 백성들까지 성인으로 그를 추앙하고 있었다.
권세와 인심을 모두 가진 자.
왕의 물음에는 신돈이 가진 위상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결코 그것에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님을 알리는 의중이 숨어 있었다.
“오늘도 스승을 내치라는 상소가 여러 권이나 왔지요. 예전에는 요승을 척결하라고 하더니, 이제는 왕좌를 훔치려는 역적을 죽이라 하더이다. 과인은 그 변함이 참으로 재밌더군요. 스승께서 그들에게 있어 얼마나 큰 사람으로 변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나, 동시에 궁금한 것이 있더이다. 그게 무엇인지 스승께서는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찌 폐하의 의중을 함부로 짐작하겠습니까.”
의례적인 대꾸였지만, 뭐가 즐거운지 왕은 껄껄 웃음을 흘렸다.
“저들에게 요승에서 역적으로 변한 만큼 높이 오르신 스승께서는, 과인을 임금에서 무엇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던 것이오.”
“폐하, 소신은 폐하를 두고 평하는 적신이 결코 아닙니다.”
신돈은 다시 고개를 크게 숙였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여느 때보다도 겸양을 보이는 신돈의 모습에 임금은 흥이 돋는 것 같았다.
“폐하라…… 그렇지! 폐하! 잊힌 예를 다시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혹시 그것이 내 의문에 대한 스승의 답이 될 수 있겠소?”
“……원하신다면 그것이 답이 될 것입니다.”
신돈은 폐하라는 칭호에 집착하는 임금에게 순순히 수긍하였다. 본디 폐하라는 칭호를 쓴 건 그저 임금 앞에서 엎드려 빌기 위해 쓴 것에 불과했다.
문득 다시 임금의 말이 들렸다.
“스승이시여, 스승께서는 왕이 되고 싶으십니까?”
“……!”
“말씀해 보십시오. 왕좌에 앉고 싶으십니까?”
“소신은 그저 오래도록 폐하의 발아래 있고 싶습니다.”
“과인의 발아래라 하셨소?”
신돈은 짐짓 황망함을 과장하며 이마를 바닥에 한 번 찧고 말문을 열었다.
“저 먼 중국에서 그저 겉으로만 보아 소신을 권왕이라 부르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들의 안락함을 전하는 당사자에게만 고마워한다 하나, 이 모든 것은 폐하께서 저를 거둬 주신 덕분입니다. 폐하께서 저를 감싸 주시는 것을 시기하는 자들이 떠도는 말귀만을 두고 소신을 음해하나, 소신은 신의 작은 공 하나하나가 폐하의 은총 덕임을 단 한 차례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오니 부디 왕좌를 두고 하는 황망한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하하하!”
침전 가득히 왕의 웃음이 울렸고, 이내 멈췄다.
“아니오! 스승님! 과인은 그런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소. 스승께서는 왕이 되실 수 있습니다. 과인을 진정한 폐하로 만들어 주시고 왕위를 받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 말에 신돈은 진심으로 황망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지금 임금의 말은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모니노를 그리 만들어도 좋고요. 내 아들이 황제가 된다면 과인 또한 추존될 터이니 같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
모니노(牟尼奴)는 아명으로 본명은 우, 왕우였다. 지금 신돈의 집에서 자라고 있는 그가 임금의 하나뿐인 아들임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수문하시중과 오래전에 스승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소. 사방에서 빗발치는 스승에 대한 참소에 어찌할지를 물었던 게지요. 수문하시중이 그러하더이다. 이 나라 모든 것이 과인의 뜻에 달렸으니, 스승이 그 뜻을 따를지를 가늠하고 결정하라고요.”
수문하시중 이인임의 말은 임금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신돈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몽글몽글 솟았다.
그 말을 임금이 자신의 면전에서 인용한 것은, 임금 자신의 뜻을 거스른다면 신돈은 버려질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오한을 느끼던 신돈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일찍이 황제라 함은 중국 전설시대의 황제 헌원씨를 의미함이었습니다. 하나, 오늘에 이르러 황제라 함은 삼황오제를 본따 진의 영정이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이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디 황제는 천자요, 외적 앞에 압도적이고, 백성들 앞에 덕을 보이는 자로서 하늘을 대신함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하나…….”
신돈은 마치 유학자인 양 옛이야기를 들먹이며 말을 하다 잠시 멈추었다.
“스스로 황제라 처음 칭했던 진의 영정은 분명 자신을 받들어 모시지 않는 적들에게 압도적이었으나, 나라 안으로 덕을 비춘 이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황제의 시작으로서 지금까지 입에 오르내리니, 진의 영정 자체가 황제라는 칭호의 부질없음을 증명한다 할 것입니다.”
“하면, 스승께서는 과인에게 그 부질없는 자리에 연연치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여전히 존대하는 공손한 어조였지만, 임금의 표정 구석에는 못마땅함이 숨어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 할 것입니다. 진의 영정 이래 수많은 이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 황제들을 칭송하며 그 자리의 존귀함을 두고 온갖 미사어구를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 시끄러운 짓들은 단 하나의 목적에만큼은 일치했으니, 중원의 왕만이 황제를 칭할 수 있다는 강요된 이치가 그것입니다. 그들의 땅만이 황제를 얻을 수 있으니, 호인(胡人)들은 감히 황제를 칭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왕은 앉은 자리에서 무릎을 치며 옳은 말이라 소리쳤다.
“이제 와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황제라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단 하나뿐이라 할 것입니다. 황제라 선언하고 그 선언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연 스승이십니다! 제 속내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신돈을 향해 달려온 임금이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신돈의 이마에 닿는 후끈한 열기는 왕의 입김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원이 넓다 하나 어찌 그 땅의 주인만이 황제라 하고 천자라 하겠소. 허구한 날마다 옛 중국의 예법을 따르라고 잔소리를 해 대는 유생들은 그걸 알 턱이 없지요. 역시나 과인의 맘을 짚어 주는 이는 스승뿐입니다.”
“황공하옵나이다.”
신돈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임금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달 수문하시중과 동북면의 상만호가 오녀산성을 점령한 걸 스승께서도 잘 아실 것이오.”
“그러하……!”
신돈은 대답을 하다 문득 놀라 하마터면 고개를 바짝 들어 왕을 직시할 뻔했다.
수문화시중 이인임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동북면상만호 이성계 상장군이 압록을 넘어 요동성 방향으로 150리나 들어가, 옛 고려의 첫 수도라 전해지는 오녀산성(졸본성 혹은 홀본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상장군의 가별초(加別抄, 사병)에 중앙군을 더하여 오녀산성을 공격한 것은 여전히 부원배들을 보호하고 고려를 압박하는 원의 세력 중 일부를 분쇄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명이 건국하여 중원에서 원나라는 사라졌지만 북으로 도망친 지금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반원 정책을 기조로 하는 현 임금에게 있어 원의 세력을 멀리 쫓아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 이러한 명분은 표면적인 것이었고, 그 아래로는 옛 고려(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명이 완전히 얻지 못했으면서도 원의 세력이 약화된 요동을 이참에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지간한 고위 관리들이라면 다 아는 것이었다.
다만, 도당의 분위기는 섣부르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아래로는 왜구의 창궐로 인해 나라 재정이 위태롭기 때문이고, 위로는 명이 요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훗날 큰 난리를 불러 올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여 임금은 요동 정벌의 명분 대신 부원배들을 감싸고 있는 원의 세력을 쫓는다는 명분으로 하여, 명에 사신을 먼저 보내고 이어 오녀산성을 점령케 한 것이었다.
한데, 임금이 황제를 운운하던 이 자리에서 오녀산성을 언급하였다.
황제를 선포하기 위해 필요한 나라의 힘이란 궁극적으로 가진 영토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으니, 더 큰 힘을 위해 요동을 얻고 싶다는 마음을 내보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신돈이 무어라 할 말을 찾기도 전에 임금의 말문이 다시 열렸다.
“부원배 기철의 아들 기사인테무르가 요동에서 군사를 모아 고려를 노리고 있다지요.”
“……그러하옵니다.”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고려 출신의 김백안이라는 자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려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는 신돈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과인은 그것이 기회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원의 품에 기생하여 지난 부원배 시절을 되돌리려는 무리들을 도륙하고, 나아가 옛 고려의 고토를 되찾아 이 나라의 기반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과인은 이 일에 스승께서 발 벗고 나서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스승께서 진정으로 과인을 폐하라 칭하신 것이라면 말이지요.”
“……여부가 있겠나이까.”
신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임금의 뜻을 따르고 삶을 더 영위하든지, 아니면 죽든지. 지금의 그는 양자택일만이 선택의 전부였다.
그의 말에 왕이 웃었다. 시원한 웃음이었으되 듣는 신돈으로서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경시감의 일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과인은 아주 기대가 큽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러한 속내를 절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막대한 물자가 필요로 한 군사(軍事)인 만큼 새로이 확대되는 경시감을 통해 얻을 세수에 임금이 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만큼 신돈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신돈이 침전에서 나온 건 얼마 뒤였다. 침전 건물의 입구를 나오는 그의 다리는 힘이 풀린 듯 후들거렸다.
단지 임금 앞에서 오래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몸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중압감을 견뎌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신돈은 침전을 나서 몇 걸음 더 옮기다 문득 뒤를 돌았다.
“왕이 되고 싶으냐 하셨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도 듣기 힘들 만큼 작았으나, 속에 담긴 미묘한 감정만은 결코 작지 않았다.
“소신 또한 언젠가 폐하께 선택할 시간과 기회를 드리지요. 진정 스스로 황제로 높이시며 소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실 기회 말입니다. 부디 선택을 잘하시길…….”
신돈은 중얼거림을 멈춘 후에도 잠시 침전을 더 노려보았다. 슬슬 침전 주변의 위병들이 그가 멈춰 서 있는 것에 신경 쓸 쯤에야 신돈은 다시 몸을 돌려 가던 방향을 잡았다.
“…….”
한데, 몸을 돌리자마자 몇 걸음 앞에 수문하시중이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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