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40)
* * *
훅, 훅, 훅.
규칙적인 호흡과 함께 공기를 가르는 소성이 반복되었다.
“……일천! 후아하아.”
한참 후 1천이라는 숫자를 입으로 쥐어짜듯 말한 사내는 손에 든 목검을 떨어뜨리듯 내려놓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다음 순간 벌러덩 드러누웠다.
차귀동의 밤하늘에 박힌 별들이 보였다.
근처에 지펴놓은 모닥불이 아니었다면 더 잘 보였으리라.
“끝났냐?”
“어. 너도?”
“어. 아이고, 죽겠다.”
앓는 소리를 내며 드러누운 왕예 옆에 주저앉은 자는 친우이자 같은 용종인 왕숭이었다.
야밤에 두 사람은 각각 개인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왕예는 검술을, 왕숭은 궁술을 연습했으니, 각각 모자란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하나, 그들이 더 실력이 모자랐을 때도 하지 않았던 개인 훈련을 하고 있는 건 실력을 높이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이 있던데, 식이도 별이 되었으려나.”
“글쎄다. 그래서 별이 저렇게 많은 건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니,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친구였던 왕식이 떠올랐다.
더 어린 시절 세 사람은 함께 자랐다고 할 만큼 친하게 어울렸다. 그러다 왕식의 집안이 기울어 개경 밖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어느 순간 다소 소원해졌다.
그래도 간간이 만남을 가지며 인연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 왕식은 왕예나 왕숭이나 두 번째로 언급할 친구였다.
그런 왕식이 죽었다.
“그때 어떻게든 같이 탐라로 왔어야 했는데 말이야.”
“정신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젊은 용종 사내들이 탐라와 요동으로 끌려갈 때, 왕식은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워낙에 경황이 없어 왕식까지 떠올리지 못했고, 나중에 탐라에 와서야 왕식이 함께 오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그때만 해도 그냥 좀 아쉽다는 정도였는데, 탐라와 요동으로 나뉜 그 운명이 더는 왕식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난 연왕부와의 싸움으로 인한 요동군의 사망자들 중 하나가 왕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최초의 용종 출신 전사자가 되었다.
“용훈(龍勳)이라는 게 추서된다더라.”
“용훈?”
“임금께서 공을 세운 용종 출신 군병에게 내리는 상 같은 거지. 명예로운 상.”
“그거 받으면 가족들에게 뭐라도 득이 있대?”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만 들었거든.”
“에효, 뭐가 있든 본인이 죽고 자식이 죽어서 받은 상이 무슨 소용이냐.”
왕식의 죽음은 상당히 떠들썩한 이야기거리였다. 적어도 개경에서는 그랬다.
금상이 직접 왕식의 부모를 불러 위로하고, 왕식의 공업을 치하하는 방을 붙여 그를 널리 알리게 하였다.
비단 금상만 요란 떠는 게 아니었고, 백성들도 늘 떵떵거리기만 하던, 물론 왕식의 집안은 떵떵거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 편하게만 사는 줄 알았던 용종 중에 군병이 되어 스스로를 희생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신기해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끌려와 군병이 되게 만들고, 그것을 금상이 허한 건 아마 왕식이 같은 경우 때문인 게 분명해.”
“나도 그렇다고 본다.”
“그냥 피흘리고 죽어도 좋고, 진짜 큰 공을 세워 영웅이 되어도 좋고. 기반이 약한 작금의 왕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근데 말이야.”
뭔가 처연한 느낌의 어조로 이어지던 왕예의 말에 왕숭이 문득 끼어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아.”
“……?”
“우리가 일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든가, 왕실이 우리의 죽음이나 부상을 바라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진 않는다고. 솔직히 용종인 덕에 왕식도 서훈되고, 인구에 회자되는 거잖아. 지난 전쟁에서 죽은 그 많은 군병들 중 이름자가 알려진 자가 얼마나 있겠어? 그리고 왕식이 정말 뭔가 공을 세운 것도 아니잖아.”
왕식은 전사했다. 딱 그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임무를 하다가 죽었는지는 그들도 몰랐다.
하나, 그럼에도 임금은 왕식이 큰 전공을 세운 것처럼 취급하였고, 부모님의 서찰 속에서 왕식은 이미 개경 백성들 중에 모르는 자가 없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분명 특별 대우인 셈이었다.
“만약 우리가 진짜 큰 공을 세운다면, 우리는 그 공로 이상으로 세상의 찬사를 받는 영웅이 될 거야. 우리가 바라지 않아도 임금이 그렇게 만들 거고, 대략 보아하니, 탐라공이나 요동공도 그에 협조적인 것 같고.”
“그래도 우리는 강제로 징집되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엄청나게 많은 탐라의 사내들이 매년 탐라군 모병에 응하고 있고, 그중 소수만이 선발된다는 사실도 남아 있지.”
“그거야 그들 인생에는 꽤 매력적인 돌파구이기 때문이지, 우리에게는 아니야. 너도 같이 느꼈잖아. 전쟁을 앞둔 그 무거운 공기 말이야.”
왕예의 말에 왕숭은 남면에서 대기하던 때를 떠올렸다.
연왕부와의 전쟁이 가시화될 때, 탐라육군 근위군에서도 일부가 남면으로 이동하여 고용군 및 순위군과 합쳐져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대략 한달 정도였다. 개편된 대대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출정을 기다리던 시간이.
훈련임에도 실제로 개복포를 방포했고, 탐라군의 신무기라는 화극 소총도 등장하였다.
훈련의 단위도 세 개의 대대와 한 개의 예비대로 이뤄진 연대였다.
2백 명의 장창병들이 3열로 이룬 하나의 벽을 모아 거대한 사각을 이루고, 그 안에 궁병과 포병, 그리고 낯선 총병들이 원거리 타격을 노리며 소수의 검병이 접전에 대비하는 진형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 훈련의 분위기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장으로 출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모두들 가슴을 억죄는 두려움을 훈련을 통해 튼튼하게 만든 기강으로 억누르고 있었으니, 그 분위기란 재에 덮여 숨죽이고 있는 불씨를 보는 것 같았다.
바람이 조금 불어 주면 금방 불길을 일으킬 것 같은…….
다행히 실제 전장을 경험하는 일은 없었지만, 왕예는 실전을 반쯤 경험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종인 탓에 억지로 군병이 돼야 했지만, 용종인 덕에 작은 공으로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더하고 빼면 나쁘다고 할 수 없지.”
왕숭은 문득 등에 매고 있는 활을 손에 쥐곤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팅.
“나는 왕실이 모든 걸 잃었다고만 생각했어. 이제 용종이라는 핏줄도 부담일 뿐, 특권이 아니라고도 생각했고. 한데, 둘 다 아니야. 왕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권력을 잃었을지언정, 새로운 무언가를 쥐게 될 게 분명해. 그리고 용종은 반쯤 영웅인 채로 태어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러니까 두렵고 힘든 것만 보진 말자고. 조금만 노력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일단은 명예뿐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거야.”
뭔가 알고 있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왕숭의 말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었다. 하나, 왕예조차도 그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병인년 대헌장은 분명 왕실에게 일정한 역할을 바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 역할에 기여하는 용종은 분명 대가를 받으리라.
왕예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왕숭이 말한 것처럼 아주 나쁜 건 아니라고 여기기로 하였다.
* * *
비슷한 시간에 왕예와 왕숭이 나눈 이야기와 비슷한 대화가 왕도 개경에서도 있었다.
그것도 왕성 한복판에 있었으니, 금상 왕요와 왕세자 왕석 간의 대화였다.
“꼭 가야겠느냐?”
“이제 막내도 생겼으니, 제가 가서 어찌 된다 한들 대통이 끊어질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 너는 장남이다. 내게 열 아들이 더 생긴다고 해도 너에 비할 수는 없다.”
“단지 태어난 순서로 왕세자의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날,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셨듯 장차 고려의 왕실이 어떤 지위를 가지느냐는 아바마마와 소자가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걸 위해서라도 저는 반드시 군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몇몇 전제들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왕실의 지위와 왕세자의 군복무 사이의 연관에 대해서 금상과 왕세자는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임금이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할 장남이 군병으로 임하는 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탐라든 요동이든 어느 쪽에서도 널 그다지 반기지 않을 것이다.”
“반기고 말고가 문제겠습니까. 어차피 그들은 절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명예는 그들이 한 첫 번째 약속입니다.”
이제 16세. 딱 입영이 가능한 나이였다.
사실 지난날 처음 용종들이 요동군과 탐라군으로 끌려갈 때, 세자도 입영하길 희망하였다.
실제로 왕석이 나이에 비해 덩치가 있어, 나이를 속인 채 입영하길 고집 부려, 탐라군과 요동군의 입영 군관들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나, 결국 나이를 속인 게 들통 났고, 연령 미달로 왕석이 탐라나 요동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그 뒤로, 2년여가 지나는 동안 왕석은 왕세자로서 심신을 연마하였으니, 그중 군병으로서의 자질을 높이는 것에 크게 노력하였다.
“저를 통해 왕실의 명예를 더욱 드높이십시오. 명예를 높이 세울수록, 저들이 나머지 약속들을 지킬 날도 빨라질 것입니다.”
왕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타까운 시선을 놓지 못했다. 아직 조금 더 어린 티를 내어도 될 나이건만, 장남은 이미 자신의 아들이기 전에 왕세자로 거듭나 버린 것이다.
* * *
석삼은 동행인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덕분에 탐라섬으로의 귀환이 두 달 가까이 늦어졌으니까.
하나, 동시에 신기하다 못해 존경스럽기도 했다.
아무리 풍습이 다른 곳이라고 해도, 일국의 왕이 두 달 이상 자리를 비우고 먼 바다 너머로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의 주군 탐라공께서는 두 달이 아니라 두 해라도 탐라를 벗어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 계신다는 소식만 간간이 전해도, 그 누구도 감히 탐라공의 위업에 도전할 수 없을 테니까.
하나, 동시에 무척이나 두려운 상황이기도 할 것이다.
탐라공께서 혹여라도 봉변을 당하시면, 탐라국은 크게 휘청거릴 게 분명하지 않은가.
“썩, 쌈.”
“아이씨…….”
문득 석삼의 이름을 된소리로 부른 자는 주거 쩨종이였다.
그는 그의 주군을 모시고 함께 탐라섬으로 가기 위해 같은 배에 올라 있었다.
“왜 부르시는 게요?”
홀로 느긋이 뱃전에 서 있던 석삼은 주거 쩨종 옆에 역관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퉁명스레 물었다.
“제 주군께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청하십니다.”
“식사? 두 시진 안에 출해군에 닿을 터인데.”
“두 시진 후면 밤이지 않습니까.”
“알겠소. 곧 가겠소.”
석삼은 쩨종을 먼저 보내곤 선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점파왕의 식성이 참 싸…… 아니, 좋다 생각하면서.
생각과 달리, 주거 쩨종이나 그의 주군 비나수르 왕은 바다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아니, 점파국 자체가 바다를 가까이 대하는 나라였다.
물론, 그래 봐야 연안 어업과 상행에 국한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나라의 임금마저도 항해에 이력이 있어 뱃멀미는 오래전에 졸업한 모양이었다.
“우리로선 나쁘지 않지.”
석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측으로 멀리 보이는 구주의 해안을 바라보다가 비나수르 왕과의 식사를 위해 선실로 향했다.
선단이 출해군에 닿은 건 석삼이 말한 대로 약 2시진 후였다. 이미 어둠이 내린 때였지만, 출해군 포구는 불빛이 가득하여 입출항이 어렵지 않았다.
아니, 비단 포구만이 아니라 출해군 고을 자체가, 좀 과장하자면 밤이 더 밝은 곳이었다.
출해군은 탐라 특시를 제외하면 진주 상시와 더불어 탐라국 양대 ‘대도시’였다.
적게는 인구 100만이 넘는 구주의 중점 고을이자, 크게는 1천만 인구에 이를 걸로 보이는 대(對) 왜국 교역의 중심지이니 그럴 만했다.
아마 조만간 구주에도 지방행정제도 개편이 진행되면 곧바로 상시로 지정될 것이고, 어쩌면 진주보다도 빨리 특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잠정적으로 상시와 특시로의 승급은 인구 10만과 50만을 기준으로 하였다.
진주 상시나 출해군이나 두 곳 모두 인구 30만에 육박하는 큰 고을들이지만, 인구의 증가세는 출해군이 더 강한 걸로 알려져 있어 탐라 특시 다음으로 출해군이 특시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음, 나하 포구도 좋다 했건만, 출해 포구는 실로 대단하군.”
입항 중에 비나수르 왕은 휘황찬란한 포구를 보며 감탄하였다.
나하현은 신행정구역식으로 구분하자면 시급에 불과했다. 유구 제도의 전체 인구가 아직 30만에 이르지 못한 중에 그곳의 일개 포구 고을로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나, 나하의 포구만큼은 점파국 도읍 비자야의 포구에 못지않았다.
나하현은 탐라국의 고을이지만, 유구국의 중심인 유구섬의 출입항 역할도 하기에 현의 인구에 비해 포구가 발달한 것이다.
물론, 나하 포구도 출해 포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특히 유흥가가 발달한 덕에 더욱 휘황찬란하게 느껴지는 출해군이기에 시각적으로는 더욱 큰 차이였다.
“오, 하면 오늘 밤은 고려의 풍속을 경험해 봐야겠군.”
석삼의 수하 중에 한 자가 출해군에 대해 설명하는 중에 유흥가가 발달해 있음을 알리자, 비나수르 왕이 반색하였다.
“내일 아침에 곧바로 출항해야 하니, 자중하시지요.”
“걱정 마시오. 출항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니.”
입항 후 곧장 유흥가로 직행한 비나수르 왕이 돌아온 건 새벽이 밝기 시작했을 때였다.
감시 겸 안내 삼아 따라 보낸 석삼의 수하는 피곤한 얼굴로 돌아와, 자고 있던 석삼을 깨워 비나수르 왕이 무사히 귀환하였음을 알렸다.
“음, 이제야 왔나?”
“예. 아주 혈기왕성하더군요.”
그러면서 수하는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던 석삼은 이내 깨닫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잡색꾼이었군.”
좋게 말하면 영웅호색이었다.
어쨌든 비나수르 왕은 장담한 것처럼 출항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대신 배에 오르자마자 선실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지긴 했지만, 아침까지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대취한 중에 흔들리는 배에서 멀쩡하게 잠을 자는 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점파왕이 잠을 자는 동안 선단은 탐라로 직행하였고, 탐라 포구가 가까워짐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비나수르 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으아아아…….”
갑판 위에서 기지개를 펴는 비나수르 왕의 모습은 왕이기보다는 한량 같았다.
“오, 저게 그 거선이로군.”
문득 시야에 들어온 큰 배를 본 비나수르 왕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하였다.
“들은 적 있습니까?”
중함선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없었기에 석삼이 물었다.
“어제 출해에서 만난 창기(娼妓)가 말해 주더군. 이 배보다 다섯 배는 더 큰 배도 있다고. 소랑 말도 수십 마리씩 싣고 다닐 수 있다던가? 과장이 심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사실이었어.”
비나수르 왕의 표정에는 어느새 놀라움을 사라지고, 기대감이 물들어 있었다.
“저것이 명나라와 대등하게 교역할 수 있는 고려의 힘인 겐가?”
“상징적이긴 하죠.”
중함선은 아직 그 실체를 선보인 적이 없었다. 군선은 물론 상선도 주로 동금주, 구주와 이어지는 동부 삼각 교역에 쓰일 뿐이었다.
실제로 명 태자도 중함선의 존재를 아직 알고 있지 못했다. 소문은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실체를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도 탐라 백성들의 입장에서 중함선은 바다를 지배하는 힘의 상징이었고, 탐라군이 적어도 바다에서는 무적불패 할 것이라 믿는 근거였다.
“저처럼 큰 거선이 몇 척이나 있소?”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열 척은 넘을 겁니다.”
“오…….”
석삼도 탐라군 개편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있었기에, 탐라수군이 일차 목표 중에 중함선 스무 척을 보유하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비나수르 왕이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점파 측 역관이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통역하지 않은 건지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통역의 표정이 일순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비나수르 왕이 다시 선실로 들어가 몸 단정하였고, 그사이에 선단은 홍로 포구에 입항하였다.
포구에는 탐라공이 국공 부인과 더불어 마중 나와 있었다. 전날에 미리 선편을 보내 비나수르 왕이 곧 탐라에 닿을 것임을 알려 두었다.
석삼이 서둘러 하선하여 주군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직접 마중 나올 만한 인사였습니까?”
“자네가 점파와 얽히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건 아네. 하나, 그래도 일국의 임금이지 않은가. 마땅히 마중 나와 예를 갖춰야지.”
석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나며 곧 하선할 비나수르 왕을 주군과 함께 기다렸다.
사실 석삼은 점파국을 통해 대리석을 밀교역하는 것을 비롯하여 남만의 제국(諸國)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걸 반대하는 쪽이었다.
대리석 밀교역이 얼마나 큰 이문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엄연히 명나라를 기만하는 행위인 만큼, 차후에 들통 날 경우 큰 위험을 감수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전쟁일 수도, 교역의 축소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대리석 밀교역을 통한 이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큰 손해일 게 분명했다.
하나, 결정은 탐라공이 할 바였고, 석삼은 탐라공도 함부로 점파왕과 손을 잡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주군의 판단력을 믿음은 물론, 점파국왕 자체가 그다지 신뢰를 줄 인물이 아니라 보기 때문이었다.
함께 이주섬에서 탐라 특시까지 오는 중에 본 점파왕은 호호탕탕하고 털털한 인물이긴 했지만, 신중이나 진중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기밀함이 중요한 이번 일에 있어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님을 주군께서도 곧 깨닫게 되시리라.
석삼은 속내로 점파국을 비롯한 남만 제국과의 밀교역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비나수르 왕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어 하선하였다.
“별로 지친 기색이 없군.”
“바다에 나름 이력이 있다 들었습니다. 약소하나마 수군도 구색을 갖췄다지요.”
“그래? 반가운 소식이군.”
몽주는 석삼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겨 비나수르 왕에게 다가갔다.
점파국왕도 마주 다가오니, 양간의 거리가 급히 좁혀졌다.
그렇게 3미 안으로 가까워졌을 때, 문득 비나수르 왕이 돌발 행동을 하였다.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양손을 모으며 몽주를 향해 무어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엇, 왜 이러……?!”
깜짝 놀란 몽주가 허리를 굽혀 비나수르 왕을 일으키고자 하며 역관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 빨리 알려 달라는 눈빛이었다.
“점파국왕이 살려 달라 말하고 있습니다.”
“……!”
“자칫 이러다가 안남은 물론 점파 전체, 아니, 그 주변 모든 나라들이 명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면서 부디 고려의 구원을 바란다고 합니다.”
두 명의 역관을 통해 전해진 비나수르 왕의 말에 몽주는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점파국왕의 눈빛은 참으로 애처로웠다.
물론, 그 눈빛을 마주 응시하는 몽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기를 제법 잘하는구나.’
점파 역사 일세의 영웅이면서도, 그 자신과 점파국을 위해 체면을 불사하는 모습은 감탄할 만하지만, 아직 점파의 상황이 이처럼 무릎까지 꿇으며 누군가의 구원을 애원할 때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제아무리 대단한 중화제국이라고 해도 안남 지방을 완벽하게 제압한 적은 없었고, 비나수르 왕 개인적으로 보아도 쉽게 두려워하거나 좌절할 인물이 아니었다.
또, 점파국의 안위를 넘어 남만의 제국들 전체를 걱정하는 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러니까, 비나수르 왕이 지금 보이는 행동은 엄연히 ‘오버 액션’이었다.
하나, 몽주도 그 자리에서 그런 비나수르 왕의 속내를 지적할 수는 없었고, 좋은 표정과 말로 비나수르 왕을 위로하며 일어서게 하였다.
“우리가 이미 인연을 맺은 만큼 서서히 믿음을 주고받으면 좋은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만 일어나시지요.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져 탐라공과 비나수르 왕의 만남을 지켜보는 백성들이 많이 있었다.
비나수르 왕도 그제야 그들이 있음을 알고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마차에 오르십시오. 거처에 가서 피로를 푸신 후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몽주가 비나수르 왕을 마차로 안내하며 말하자, 그도 배를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였다.
“오는 길에 좋은 대리석을 가져왔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비나수르 왕이 마차에 올라 먼저 거처로 향하자, 석삼이 몽주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알고 있네. 점파왕은 여러모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같군.”
“어째 좋은 평 같습니다.”
“얽매인 게 많은 자보다는 낫겠지. 물론, 점파국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느냐는 저 사람 하나만을 두고 판단할 순 없지.”
포구를 빠져나가 더는 마차가 보이지 않자, 몽주는 아내를 챙기며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그나저나 다들 치열하게 사는군. 그렇지 않나?”
몽주의 푸념 같은 말에 석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삶이란 그 자체가 치열함과 같은 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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