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47)
* * *
“영감, 기침하십시오.”
“…….”
잠을 깨우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리자, 정지는 마치 잠을 자지 않던 것처럼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간단한 질의문답이었지만, 상황 파악은 끝났다.
염지국에 닿은 지 사흘째 새벽.
의심하고, 우려했던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지는 이미 반쯤 의복을 갖춘 채 자고 있었기에 금세 완전 무장을 하고 어둠 속에서 군막으로 향했다.
해안 평지에 위치한 정지 함대의 임시 군진은 조용했다.
“한 시진 전까지 술 취한 목소리들이 떠들썩했으니, 적들이 오판하기 충분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술에 취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파감태 중위는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애초에 술이 센 자들을 뽑아 대취한 연기를 하도록 명한 자가 정 함대장이었다.
그 외 다른 군병들은 삼교대의 형태로 잠을 취하였으니, 이미 이틀째 밤 경계를 강화한 중이었다.
정지가 사령 군진에 들어가자, 이미 장교들 중 많은 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머지 장교들도 직후에 군진으로 속속 모였다.
그들은 군막 안에서 경계 중에 휴식을 취하던 군병들에게 조용히 무장을 갖추도록 지휘하고 오는 터였다.
“대략 몇이나 될 것 같나?”
“첨병이 말하길 삼천 정도로 추정된다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모양이군.”
삼일 간 염지국에 머무는 동안, 정지 함대는 염지국의 사정을 대략 파악하였다.
염지국의 황상이라는 자는 스스로 여송섬의 북부를 다스린다고 하였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정지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앞서 지나쳐 온 고을 중에 염지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은 건 곽진의 배와 조우하기 직전의 마을뿐이었으니, 그처럼 존재감이 없는 다스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 그 허풍 같은 말은 차치하더라도, 염지국은 모든 면에서 나라라 하기에는 여실히 모자랐다.
염지국의 도읍이라고 하는 이곳의 규모는, 다른 마을에 비해 많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탐라국의 일개 시와 비슷할 뿐이었고, 자칭 ‘황성’은 그저 큰 가옥일 뿐이었다.
파이완족 군병을 통해 원주민에게 하문하여 얻은 답에서도 염지국이 일개 고을과 그 주변에 불과한 세력임을 알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염지국의 황상이라는 자가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남쪽에 또 다른 황상이 있다면서 자신과 형제지간이라 내세웠던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황상이 둘이면 어디 그게 황상인가.
“한데, 저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에게 명분을 주는 것 아닙니까?”
문득 장교 중 한 자가 조심스레 물었는데, 정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들이 병력을 움직여 다가오고 있네. 이 새벽에 말도 없이 다가오는 병력을 상대하는 것이야말로 군의 역할이 아닌가. 그리고…….”
정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장교들을 훑어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염지국을 처리하고자 결정을 내린 바, 명분을 두고 왈가왈부할 것도 없지. 저들은 그저 수적일 뿐이야.”
고작 삼 일이었지만, 염지국이라는 게 수적 떼들이 원주민들을 정복하여 만든 세력임을 깨닫기엔 충분했다.
중국인들은 물론, 원주민들도 말을 아끼는 경향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중국계와 원주민들 사이의 지배 관계만 봐도 모를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미 주군께서 명나라로부터 해외의 중국인들에 대한 포기를 명백히 확인받은 바 있으니, 우리로서는 힘을 아낄 이유가 없네.”
정지가 확언하자, 마치 시간을 맞춘 듯 군병이 군막으로 들어와, 염지국의 군사들 중 선두가 1길미 지점을 넘어섰다는 말을 전해 왔다.
“때가 되었군. 곧바로 계획을 실행하게.”
함대장의 명령이 있자, 군막 안에 있던 장교들이 일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조용하던 군진 중에 발걸음 소리와 나직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정지도 잠시 후 군막을 나섰고, 보좌격인 파감태 대위와 함께 해안에서 작은 배를 타고 근처에 정박 중인 함대의 기함에 올랐다.
그리고 그 즈음에 어둑하던 해안 곳곳에 불길이 솟았으니, 미리 나무를 쌓아 두고 기름을 재운 곳에서 피어오른 불이었다.
그 불로부터 번진 빛이 주변을 밝히니, 곳곳에 화살을 건 활을 들고 조심스레 접근하던 염지국의 군병이자, 수적들이 당황하여 멈칫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개복포의 방포음이 터졌다.
콰과광!
“피해가 없어야 할 터인데 말입니다.”
“피해가 있다면 이 싸움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니겠지.”
그건 단지 정지 함대의 군병이 많지 않아 작은 피해도 큰 타격일 수밖에 없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고, 군병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탐라 군병들의 정예함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 대답이었으니, 고작 흉포함만 앞세운 수적 놈들을 상대로는 일방적으로 승리해야 마땅함을 말한 것이었다.
정지는 개복포의 포탄이 날아가 터지며 생긴 불길을 확인하고, 파 대위에게 함포도 방포하라 명하였다.
이미 선상에 머물고 있던 군병들도 적들의 준동을 전해 받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덕에, 정지의 명령은 곧바로 수행되었다.
쿵! 쿵!
탐라의 군진 너머 평지에 폭발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폭발이 발하는 빛 속마다 사람의 형체들이 날아갔고,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거나 엎드려 벌벌 떠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뭐, 화포를 경험한 바 없는 군세가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방포는 고작 채 한 식경도 이어지지 않았다.
적이 군진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한 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지자, 정지 함대장은 굳이 아까운 화약을 더 낭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라카미를 선두로 진격하라 하게.”
얼마 후, 군진으로 그 명령이 전해지자, 웅크린 채 방포의 끝을 기다리던 탐라의 군병들이 일제히 적을 향해 진격하였다.
명령대로 선두는 무라카미들이었으니, 그들은 해사에 선원을 남기지도 않은 채 모두 군진에서 격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라진 방포음 대신 기성과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무라카미들은 여기저기 수놓인 불길의 빛에 힘입어 적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미 포격에 정신줄을 놓아 버린 자들이 대부분인 터라, 무라카미의 칼과 창끝에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것 외에 다른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근위육군 소속의 탐라군은 횃불 장대와 장창 위주로 이뤄진 방진으로 진군하였으니, 무라카미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탐라군은 일부가 포구를 장악하는 것 외에 모두 염지국의 도읍으로 곧장 향하였으니, 그 마을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거리에는 방포음과 폭발음에 놀란 원주민 백성들이 나와 있다가 탐라군을 보고 놀라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거나,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도망갔다.
‘황성’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황상이라는 자의 엉덩이가 얼마나 가벼운 지, 일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간 모양이었다.
그건 황성 근처에서 잡힌 몇몇 수적 놈들로부터 자백 받은 것으로, 그들은 도읍의 민가에 불을 질러 혼란을 유발하려다가 예상보다 일찍 들이닥친 탐라군에게 붙잡힌 자들이었다.
그 진격을 지휘한 장교들은 일단 황성을 장악하고 도주한 황상을 추격할지를 잠시 논의하였는데, 일단 지리에 대한 정보부터 부족한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무리라는 데 합의하고, 황성과 도읍을 지키는 것에 힘쓰며, 함대장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청하기로 하였다.
황성에서 있는 탐라 장교들은 그것으로 전투가 끝이라 생각했다.
못해도 총 3천은 되는 걸로 추정되는 수적들을 상대로 총 2천에 불과한,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력수는 1천 정도에 불과한 탐라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여겼다.
물론,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다만, 추가적인 전투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음을 몰랐을 뿐이었다.
* * *
“남쪽에 정체 미상의 배들이 보이오!”
그 고함 소리가 들린 건, 정지가 다시 기함을 떠나 뭍으로 향할 참이었다.
뭔 뜬금없는 경호성인가 싶었는데, 막 여명이 트는 하늘 아래 남쪽 바다에 검은 그림자들이 아른 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육지의 전투에 시선이 쏠린 중에도 돛대 위 망보는 군병이 용케도 그 배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즉시 운용 가능한 배들이 몇 척이지?”
“많지 않습니다. 네댓 척에 불과할 겁니다.”
파 대위는 전날 작계를 떠올리며 답하였다.
무라카미의 해사들은 비어 있을 테고, 경함선들도 기함을 포함하여 절반만 운용 인원을 수용하였을 뿐, 다른 배들은 화포를 다루는 군병만 머물게 했었다.
“일단 움직일 수 있는 배들이라도 출진하도록 하게.”
함대장의 명이 있자, 함포 방포 이후 조용했던 바다 위에 이내 고함 소리들이 가득했다.
탐라수군은 낮에는 깃발, 밤에는 불빛을 반사시키는 동경으로 수신호를 하도록 훈련되어 있지만, 모여서 정박 중이었기에 육성으로 명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함이 닻을 올려 움직임과 함께 즉시 출진할 수 있는 배들이 기함의 뒤를 따르니, 모두 다섯 척이었다.
“방포를 준비하라.”
정지는 전투를 준비하게 하였다.
남쪽에서 오는 배들이 어디에서 오고, 무슨 목적으로 오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송섬에서 탐라국과 우호적인 세력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양 선단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여명의 하늘 아래 서서히 시야가 넓어졌다.
어느 순간 남쪽에서 다가오는 선단에 달린 깃발들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양(梁)과 정(鄭)이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남쪽에 있다는 또 다른 황상의 무리들인 모양입니다.”
“결국 또 다른 수적 떼라는 말이겠지.”
가볍게 결론을 내린 정지는 문득 감태를 향해 물었다.
“저들을 공격하고자 하면 어찌해야 할 것 같은가?”
그에 감태는 적 선단을 바라보며 대답을 생각했다. 물론, 이런 때도 자신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는 정 함대장이 너무 한다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 답은 해야 했다.
“풍향을 보건대, 한 식경으로 침로를 변경하여, 이대로 사진으로 진격, 적의 좌현을 따라 방포한다면 적은 방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좋아. 그대로 실시하게.”
정지는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곧바로 시행하게 하였다.
식경이란 시간의 단위지만, 탐라 수군에서는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탐라공의 제안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실상 현대에 쓰이는 ‘시 방향’을 따라한 것이니, 결국 한 식경이란 한시 방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바람의 방향이 동풍에 가까운 북동풍이었으니, 한 식경 방향으로 조타하면 탐라수군의 배가 바람을 한껏 받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 그보다 맞바람에 가까운 적 선단은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도의 차이는 정지 함대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적과 교전할 거리를 마련할 것이고,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없는 거리에서 탐라수군이 화포를 통해 일방적으로 적 선단의 좌현을 때릴 수 있게 만들 것이었다.
아직 환하지 않은 탓에 동경에 방사된 빛을 통해 명령이 전해졌고, 이미 사진(蛇陣)의 형태로 항주하던 정지 함대는 속도를 높여 적 선단의 좌측으로 쇄도하였다.
적 선단은 정면으로 접전하게 될 거라 짐작했는지 오히려 속도를 줄이던 중에 정지 함대가 자신들의 좌현으로 미끄러지듯 빠지자, 그제야 다시 속도를 높여 정지 함대 쪽으로 선수를 돌리고자 하였다.
하나, 그때는 이미 기함을 시작으로 화포들이 불을 뿜고 있었다.
뻐뻥! 콰광!
100미도 떨어지지 않은 터라, 방포 직후에 명중탄이 적선을 타격하는 소리가 있었고, 얼마 뒤 적선을 파고든 천뢰탄이 다시 폭발하였다.
아마 이미 염지국에서 방포음이 있는 걸 듣고 온 덕에 방포 자체에 놀라지는 않는 듯했던 적 선단은 하나, 이어 배를 파고든 명중탄이 다시 또 터지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방포음에 놀라는 것과 무관하게 첫 방포에 가장 가까웠던 적선이 불길 속에 두 동강이 나는 걸 보는 순간 그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단의 진형은 일거에 무너졌다.
다시 선수를 돌려 정지 함대로부터 멀어지려고 난리를 치느라 그들 배끼리 충돌하기도 하고, 일부는 무슨 생각인지 출노(出櫓)하여 제자리 선회하려고도 하였다.
그렇게 적 선단의 진형이 난장판이 되니, 정지 함대는 더욱 화포를 운용하기에 수월해졌다.
침로를 열 식경으로 돌림으로써 받는 바람을 줄여 속도를 낮추고, 화포를 연신 방포하니, 잠깐 동안이지만, 마치 학익진의 형태가 되어 가운데 몰려 있는 적선들을 반쯤 포위한 상태로 두들길 수 있었다.
물론, 범선으로 그 진형을 길게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반포위 상태는 채 일 각도 지나지 않아 다시 풀렸지만, 그사이에 두어 번 더 실시된 방포에 적 선단 중에 포탄을 맞지 않은 배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렇게 운 좋은 배들만이 힘겹게 선수를 동쪽으로 돌려 육지로 도주하기 시작하니, 정지 함대의 입장도 다소 불리해졌다.
공격을 받을 수 있어 불리해진 건 아니었고, 적을 공격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었다.
맞바람으로 속도가 느려졌는데, 적선이 노를 발출하여 그 힘으로 속도를 높이니, 안 그래도 방포 각도가 좋지 않은 중에 거리 또한 더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여, 자칫 적 중 일부를 놓칠 상황이었는데, 적선들에게 사신이 들이닥쳤다.
염지국의 포구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길쭉한 무언가가 급하게 쇄도하였으니, 뒤늦게 출진한 해사 네 척이 등장한 것이었다.
적선이 나타나 함대가 출진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무라카미들 중 일부가 배로 돌아와 출진한 바, 그들은 상황을 보자마자 육지로 도주 중인 적선들을 향해 돌진, 충파를 감행하였다.
꽈직!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름 끼칠 소리와 함께 해사의 튼튼한 선수가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자, 몇 척은 그대로 침몰하였고, 한 척만이 해사와 얽혀 돈좌하였다.
물론, 그 한 척마저도 곧이어 선수 위를 따라 달려서 들이닥치는 무라카미들의 습격에 갑판을 내주고 백병전을 벌여야 했는데, 무라카미들의 전투 실력이 수적 떼들에게 밀릴 리도 없을뿐더러, 이미 기세가 기운 터라, 일부가 죽어 나가자 다들 항복을 청하여 살려 달라 애원하기 바빴다.
남은 건 전후 정리였다.
정지 함대장은 소속 전선들로 하여금, 침몰하지 않은 적선을 나포하고, 바다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구원을 청하는 수적들을 구하도록 하였다.
열다섯 척 정도였던 적선 중 멀쩡한 건 없었고, 그나마 떠 있는 배도 다섯 척에 불과했다.
그렇게 나포한 배와 사로잡은 수적들을 데리고 한 시진 후 다시 포구로 귀환하니, 이미 아침이 밝은 중에 포구 근방에 염지국의 백성들이 일부 모여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가 수적들을 처단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군.”
“그렇습니다.”
환호는 없었지만,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는 걸로 보건대 충분히 짐작할 만 했다.
그 뒤로 며칠 동안은 사로잡은 중국 수적들을 취조하느라 바빴다.
그리 의리 있는 집단은 아니었는지, 약간의 훈계(?)가 있은 뒤에는, 모든 수적들이 충실히 답하기 시작했으니, 이내 여송섬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거야 원, 주군의 말씀이 이처럼 꼭 들어맞을 줄은 몰랐군.”
정지 함대장이 감탄하고 탄식하였으니, 여송섬은 진정 수적들의 소굴이었다.
* * *
작금 여송섬을 장악한 세력은 인도계 세력이었다.
북서부 해안 일대에 중국계를 허락한 것을 제외하면 여송섬 전체가 인도계 세력 아래에 있었으니, 특히 현대의 마닐라 시에 위치한 톤도(Tondo, Tundo) 왕국은 가장 강력한 인도계 세력으로, 사실상 그 외 모든 인도계 세력을 지방 정권으로 삼았다 할 만큼 여송섬의 주인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계 세력이 여송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톤도 왕국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송섬의 인구 태반이 몰려 있는 ‘마닐라 만’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상, 북서쪽 해안 지방 정도야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허락이자 양보 또한 그저 아량에 기인한 건 아니었다.
여송섬 남쪽 여러 제도에 있는 ‘라이벌’ 인도계 세력이나, 근래에 세력을 뻗어 오고 있는 무슬림 세력과의 다툼에 중국계 세력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일단 여송섬만 좁혀 보자면, 인도계 대장이 인도계 부대장들을 거느리다가, 최근에 중국계 부대장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 두 중국계 부대장들은 정지 함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하나는 빈사 상태, 다른 하나는 신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그 톤도국이라는 곳에 우리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고 봐야겠군.”
취조의 결과를 통해 정세를 파악하고 나니, 정지 함대장은 톤도 왕국에 주목하였다.
그에 장교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데, 정지 함대가 여송섬을 탐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톤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닐라 만’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지리적인 상황이라도 파악해야 하는데, 자기네 중국 ‘부하’ 둘이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면, 함부로 톤도 지역으로 접근할 수 없을 터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어느 장교의 물음에 정지 함대장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라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지만, ‘만(灣)’이라는 환경은 탐라수군에게 충분히 큰 위험을 선사할 수 있었다.
‘마닐라 만’이 사방으로 직경이 50길미 안팎에 이르는 큰 만이고, 입구도 10길미가 넘어, 배가 움직이기에 충분하긴 했지만, 입구에 몇몇 섬이 자리 잡아 틀어막는 게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하여, 함대가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만약 톤도 왕국이 모든 힘으로 입구를 막고, 사방에서 죄어 온다면, 정지 함대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난국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정지 함대장이 문득 장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이대로 귀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나?”
그에 장교들도 서로를 향해 시선을 옮겼는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실 그건 눈치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이 주군으로부터 받은 임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탐사라곤 하지만, 그들의 임무가 가진 실상이 ‘무력 정찰’임을 다들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없나 보군. 나 또한 조금 어려움이 보인다고 그냥 물러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정지 함대장이 결정의 말을 내뱉자, 그다음부터는 ‘마닐라 만’을 정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정지 함대가 다시 바다로 나선 건 이틀 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