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50)
시승태는 올해 21살로, 2년 전에 탐라군 훈련소를 졸하고 탐라수군이 되었다.
그가 수군이 되면서 받은 보직은 감시수, 소위 계장수였으니, 그의 체구가 작고 몸이 날렵한 탓이었다.
감시수는 돛대 위 망대에서 주변을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였다.
한데 그 망대가 매우 좁고 일단 자리를 잡으면 고개를 돌리거나, 특이사항을 소리쳐 알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터라, 그 모습이 마치 지붕 위에 올라간 수탉이 홰치는 모습과 같다 하여 계장수(鷄將帥)라는 조롱조의 별명으로 불렸다.
사실 승태는 처음 감시수의 보직을 받으면서, 횡재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얼핏 보기에 상당히 편한 보직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박해 있을 때는 갑판원과 같이 행동하지만, 적어도 항해 중에는 망대 위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이 큰 착오였음을 알게 된 건 금방이었다.
망대는 그가 작은 체구임을 감안해도 편히 있을 곳이 아니었고, 갑판으로부터 20여 미의 거리는 의사를 소통함에 있어 마치 200미쯤 떨어진 것처럼 목이 아프도록 고래고래 소리쳐야 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건 엄청난 흔들림이었다.
돛대의 길이만큼 흔들림은 더욱 커지기에, 갑판에서는 그저 가볍게 출렁이는 바다임에도 망대 위에서는 엄청난 요동을 느껴야 했다.
그 요동은 뱃사람으로서 충분히 극복했다고 여겼던 뱃멀미를 다시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다 파랑이라도 있는 날이나 거친 기동 훈련이 있는 날에는 망대에서 튕겨 나갈 것 같은 두려움을 품은 채 가죽끈으로 몸을 고정시키고 돛대를 끌어안고 있어야 했으니, 제발 얼른 다른 보직을 맡길 바라 마지않을 수 없었다.
하나, 망대에 올릴 정도로 체구가 적은 후임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그는 그의 선임이 감시수 보직에서 벗어나면서 왜 그처럼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자신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던졌는지를 절감하며 2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선임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가 1년 정도 짧은 시간만 감시수 생활을 한 것도 그렇지만,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한 적도 없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승태는 굉장히 불운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가 탄 배가 여송섬 탐사에 참여하면서 벌써 세 번째 실전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곱 식경! 적선 접근!”
사방에서 터지는 방포음과 숱한 고함이나 비명을 뚫기 위해 승태는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래 갑판에서 그의 외침에 알아들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다들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나, 그래도 선미 쪽에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인도계 전선에 대해 누구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애간장이 탈 수밖에 없었다.
“제발, 뒤쪽 좀 보라고! 뒤에 배가 들이닥치고 있다고!”
계속 고함을 쳐 목소리가 쉴 대로 쉬어 더는 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할 때, 천만다행으로 승태는 문득 항해사와 시선을 마주쳤다.
“뒤! 뒤!”
구체적으로 말할 상황도 아니기에 승태는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 선미 쪽을 가리켰다.
항해사가 그 신호에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다가, 적선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더니, 선장에게 그것을 알렸고, 선장의 명령에 따라 배가 급격히 회전하였다.
적선의 전진 방향에서 피하기 위함이자, 선측면의 화포를 통해 접근하는 적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크게 요동치는 돛대 위에서 승태는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돛대를 부여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질 뻔한 걸 모면했다는 안도감보다는 접근하는 적선을 선장이 알아차린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돛대를 부여잡은 채 숨을 헐떡이던 승태의 시야에 전방 해역이 들어왔다.
그의 시야 속에 보이는 배들, 떠 있든 가라앉았든, 멀쩡하든 불타고 있든, 어쨌든 수십 척의 배들이 저마다 생존과 승리를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싸움은 탐라수군과 수적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지만, 서로 소속이 다른 수적들끼리도 다투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끼이익!
문득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승태는 밖으로 튕겨나갈 것 같은 강한 원심력을 느꼈다.
후미에서 돌진해 오는 적선을 피하기 위한 기동 중에 전방에서 다른 경함선을 향해 전진하던 회회인의 배가 그가 탄 배 쪽으로 침로를 바꿔 끼어들었으니, 그것을 피하기 위해 또다시 조타한 탓이었다.
“제기랄…….”
하나, 안 그래도 여유가 없이 뒤엉켜 있는 해역에서 변침으로 적선을 회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가 탄 배는 회회인의 배와 비스듬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쿵! 콰지직!
선수끼리 충돌한 충격은 갑판 위의 군병들을 나뒹굴게 만들었다.
그 정도의 충격이야, 다친 자들도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나, 망대 위의 승태에게는 아니었다. 돛대를 타고 증폭된 충격은 힘껏 돛대를 부여잡고 있던 승태의 양팔을 순식간에 풀어 버렸다.
그의 몸은 잠시 공중에 떠 날아가려다가 가슴쯤에 묶인 가죽끈에 걸려 반대로 튕겨야 했고, 하필 재수 없게 그의 머리와 돛대가 정면충돌하고 말았다.
퍽!
순식간에 여러 번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돛대에 머리까지 부딪치자 승태는 망대 아래 가죽끈에 매달린 채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그의 배와 충돌한 수적의 배로부터 회회인들이 백병전을 시도하려는데, 그 너머로 해사 한 척이 힘껏 달려와 회회인의 배에 충파를 시도하는 게 보였다.
쾅!
해사가 제대로 충파하자, 회회인의 배 측면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아마 이내 침수가 시작되고 회회인의 배는 두 동강이 되어 침몰할 게 분명했다.
승태가 탄 배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한 순간이었다. 하나, 이번에도 승태에게는 꼭 그렇지 않았다.
충파를 당한 회회인의 배가 경함선에 부딪치며 다시 한 번 큰 충격이 덮쳤으니, 갑판 위의 군병들이야 다시 잠깐 넘어졌다가 일어나면 그만이었지만, 승태는 나무에 걸린 연처럼 마구 나부껴야 했다.
‘살아나면, 다시는 죽어도 망대에 오르지 않으리라.’
정신을 완전히 놓기 전에 승태가 다짐한 바였다.
* * *
여송섬 탐사대가 총 17척 중 6척을 잃고 이주섬으로 귀환하였다는 소식이 탐라 조정에 전해진 건 동지가 며칠 안 남은 때이자, 요동국의 개척 회사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탐라국 백성들 사이에 ‘주식’ 구매에 대한 열기가 생길 무렵이며, 몽주가 현대에서 눈뜨기 열흘 전쯤이었다.
그 소식은 아주 많은 이들을 당황시켰다. 군관대신을 비롯한 탐라조정의 관리들과 몽주는 물론, 현대의 재상과 두신까지도.
굳이 따지면 승전보임에 틀림없지만, 설마하니 함대의 삼분지 일을 잃을 만큼 큰 싸움을 치러야 했다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움의 주된 이유이었다.
“필리핀 제도의 세력 상황이 예상보다 더 치열한 모양이군요. 특히 이슬람 세력이 서른 척이 넘는 배를 마닐라 만 입구까지 끌고 올 정도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네요.”
회의 때 만난 두신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와 재상이 전에 몽주에게 제출한 필리핀 및 동남아 보고서에는 아직 이슬람 세력이 크게 자리 잡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기껏해야 칼리만탄 섬의 브루나이 왕국이 약간 손을 뻗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평가해 둔 것에 대한 미안함인 모양이었다.
“자료가 부족한 곳이라 예측이 틀리는 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답하긴 했지만, 몽주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필리핀 제도의 상황을 좀 더 정확히 파악했다면, 탐사대의 규모를 키웠을 것이고, 그렇다면 괜한 손실은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재상과 두신을 전적으로 탓하기에는 앞서 말한 대로 역사적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사실 필리핀의 역사는 스페인의 진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전의 역사는 필리핀을 정복한 스페인의 기록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그 외는 역사학보다는 고고학적인 영역에 가까웠다.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회의 분위기가 어색할 즈음에, 재상이 턱을 매만지며 말문을 열었다.
“일단 정리부터 하죠. 민다나오 섬에 있는 그 술탄국이 정말 술탄이 다스리는 제대로 된 왕국인지는 몰라도, 서른 척이 넘는 선단을 마닐라 만까지 보낼 정도로 강대한 건 맞겠죠. 그렇다면 그 민다나오 술탄국은 브루나이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지원이 없다면 그처럼 강대한 세력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인가요?”
재상이나 두신이나 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핀 제도나 그 주변 동남아 군도 지역에 대한 자료의 부정확함을 확인한 이상 쉽게 결론을 지어서는 안 되겠지만, 몽주가 보기에도 재상의 추정은 이치에 맞아 보였다.
일단 민다나오 섬 자체가 현대 필리핀 중에서도 낙후된 지역인 것처럼, 당대에도 그 섬의 힘만으로 수십 척의 배를 거느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여송섬의 세력들은 수백 척의 전선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지원을 받을 곳이 있어야 하는데, 당대에 그럴 만한 곳은 브루나이 술탄국뿐이었다.
가깝기도 하고, 종교적으로 손을 잡을 만한 곳도 브루나이뿐인 것이다.
“근데, 그렇게 보기 좀 껄끄러운 점이 있잖아.”
“민다나오의 세력이 시아파 같아서?”
재상의 되물음에 두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몽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재상이나 두신이나 모두 시아파를 떠올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자리파이고, 어쌔신의 기원이 되는 하샤신(Hashashin)을 떠올렸다.
“근데 하샤신이라고 단정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하샤신이 암살을 감행한 건 주로 수니파랑 시아파의 배신자들이었어. 오히려 이교도와는 별문제가 없었다고 들었거든.”
“수니파와의 암투가 치열해서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이교도와도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애초에 하샤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게 몽골과의 갈등 때문이니까.”
“페르시아 하샤신이 무너진 게 몽골의 침입 때문이긴 하지만, 그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지. 그걸 두고 이교도와 사이가 나빴다고 하기엔 좀 부족해.”
“뭐, 어쨌든…… 설령 하샤신이 이교도를 배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려 당대 시점에서 하샤신의 행동 방침을 종교적인 이유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건 분명하지.”
재상의 마지막 발언에는 두신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샤신이 종교적 단체로 출발하긴 했지만, 그 종교적 암살 단체로서의 정체성은 사실상 이미 100여 년 전에 무너졌다.
현대에도 시아파에 하샤신파가 존재하긴 하지만, 당연히 광신도적 암살 단체와는 거리가 먼 단체다.
하샤신의 두 기둥이랄 수 있는 페르시아 하샤신은 몽골에 의해 멸망했고, 다른 하나인 시리아 하샤신은 십여 년 후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으니, 암살 단체로서의 하샤신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두 사람이 동남아 이슬람 세력으로서 하샤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건, 하샤신의 멸망이 하샤신에 속한 인원의 멸종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하샤신의 멸망 이후에도 중동과 이집트의 기록에는 하샤신에 대한 기록이 꾸준히 남아 있는 바, 하샤신의 구성원들은 권력자의 더러운 손으로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몽주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 생각을 정리했다.
두 사람이 민다나오 섬의 세력을 시아파의 나자리파, 즉 하샤신으로 추정하는 것에는 그도 이의가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그 세력을 하샤신으로, 혹은 하샤신이 속해 있다고 추정하기 충분한 정보를 준 게 그였으니까.
정지 함대는 17척으로 나가 11척만 돌아왔지만, 분명 승리하고 돌아왔다.
비록 애초에 승전을 목표로 한 게 아니라, 그저 탐사와 정찰이 목표였기에 그 피해가 크게 다가오긴 했지만, 그래도 적들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당연히 승리에는 전리품이 따르기 마련이었고, 탐라까지 그 전리품들 중 일부가 전해졌다.
몽주도 그 전리품들을 직접 확인했는데, ‘이슬람’스러운 건 많았지만, 그것을 토대로 수니파니 시아파니 구별하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십여 명의 포로들도 끌려 온 바, 그중 다분히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자를 향해 황인종 무슬림들이 ‘바티니’라 부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바티니란 ‘가짜 신앙자’, 즉 겉으로 보이는 신앙과 다른 믿음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자, 수니파와 시아파를 가릴 것 없이 무슬림들이 하샤신들을 가리킬 때 사용한 멸칭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중동계’ 외형을 가진 자들은 하샤신이거나 그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이 페르시아나 시리아의 하샤신과 달리 종교적인 색채는 별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었다.
만약 원조 하샤신처럼 광신적인 단체라면 수니파와 결코 손을 잡지 않았을 테니까.
고로, 민다나오 섬의 하샤신 혹은 그 후예에 대한 추정은 어느 정도 좁힐 수 있을 듯했다.
“브루나이 술탄국이, 혹은 브루나이 술탄국의 지원을 받는 민다나오 섬의 또 다른 술탄국이 어쩌다가 동남아까지 흘러들어온 일부 하샤신들을 무력 단체로서 흡수 내지, 고용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몽주의 정리에 재상과 두신도 동의하였고, 그걸 확인한 몽주는 하샤신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하샤신은 신경 쓸 거 없겠네요. 그저 암살에 지금보다 주의하면 그만이겠고요. 따로 변수로 둘 필요는 없겠어요.”
“음, 그렇겠네요.”
하샤신에 대한 몽주의 빠른 ‘무시’ 결정에 재상과 두신이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 말이 일리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쌔신’의 기원이 되는 전설적인 암살 단체라는 명성 때문에 과하게 그 존재를 의식했지만, 실상 당대 동남아 군도 지역에서 하샤신은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독립적인 단체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냥 용병단, 암살에 능한 대원을 가진 용병단.
딱 그 정도일 것이다.
정지 함대의 피해는 불운과 더불어 예상보다 강대했던 동남아 세력의 존재로 인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해법도 간단하다.
“본대의 전력을 증강시킬 생각입니다. 조금 부담이 되겠네요. 안 그래도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급에 투입해야 할 전력도 늘어나게 생겼는데 말이죠. 뭐, 그래도 본래 역사대로 만들어 둬야죠.”
“본래 역사대로요?”
두신이 마지막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저도 상상을 좀 해 봤는데요. 지금 여송섬과 그 주변의 세력이 너무 강해요. 아무리 저로 인해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다곤 하지만, 필리핀 제도의 상황에까지 큰 영향을 줬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한데, 삼십여 척의 전선을 동원하는 술탄국에, 톤도 왕국도 이십 척 정도의 전선을 동원했다는 건 예측의 오차를 생각해도 너무 강대해요. 마젤란이 세계 일주 중에 필리핀에서 죽었을 무렵, 스페인에 의해 기록된 필리핀의 상황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부족 세력이 난립해 있는 것에 불과했는데 말이죠.”
“음, 그러니까 실제 역사에서도 지금처럼 강대한 세력들이 있었는데,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하기 전에 그 세력들이 무슨 이유로 인해 이미 다 무너졌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거군요.”
“네, 그 이유가 그 세력들 간의 각축으로 인한 공도동망일 거라고 생각하고요. 민다나오의 술탄국이 마닐라 만까지 서른 척이 넘는 전선을 끌고 온 것도 그 각축의 일환이었는데, 하필 정지 함대가 거기에 휩쓸린 것일 테죠.”
실제로 톤도 왕국이 마닐라 만 입구 근방에 중국계 세력이 자리 잡는 걸 허락한 것도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니, 인도계 및 중국계와 이슬람계 사이에 필리핀 제도의 패권을 두고 다툼이 있는 건 분명했다.
물론, 그런 다툼이 양 세력의 공망으로 이어졌다는 건 분명 유추를 통한 결과였다.
다만, 어느 세력이든 필리핀의 원주민들에게는 외부 침입 세력이었고, 그들 간의 다툼으로 전력이 약화된 틈에 원주민들이 그들을 몰아냈다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뭐, 사실 정지 함대가 필리핀의 배들을 많이 파괴해서 이미 많이 약해졌겠지만, 그들의 배가 다우선의 형태에 가까운 것 같으니, 비교적 빠르게 복구할 거예요.”
다우선(Dhow)은 흔히 이슬람의 배라고 하면 연상할 수 있는 바로 그 배로, 아랍과 인도 및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쓰이던 범선이었다.
정지 함대가 이주섬으로 복귀할 때, 적선 한 척도 나포해 왔고, 몽주가 그 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보고 받은 바 있었다.
한데 전반적인 설명이 다우선과 같았다.
특히 서양이나 동아시아와 달리, 배를 구성하는 각 부품을 연결할 때, 나무못이나 쇠못을 쓰지 않고 야자나무 섬유로 만든 끈으로 엮어 조립했다는 설명이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면 다우선으로 분류할 만한 배가 분명했고, 다우선의 특징대로 내구성이 떨어지고, 규모도 작은 대신 유연하고 건조 기간이 빠를 것이다.
“봄에 우리 본대가 출정하여 여송섬에 닿을 무렵에는 저들도 전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겠죠. 하지만 우리가 그마저 격파해 버리고, 거점을 무너뜨리면 나머지 잔당들은 원주민들이 알아서 정리할 테고요. 그러면 본래 역사대로 돌아가는 거죠. 아,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겠죠.”
이미 정해 두었듯 탐라가 외부로 진출함에 있어 ‘면’의 형태로 진출하는 건 이주섬까지였고, 그 후에는 ‘점’의 형태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즉, 군력으로 한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걸 노리는 대신, 거점 도시를 세우는 것에 일단 만족하고, 차츰 그 도시의 영향력을 넓히면서, 원주민 외 다른 세력의 진출을 차단함과 동시에 교역을 통해 원주민들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필리핀 지역에서는 당연히 ‘마닐라 만’이 그 거점 도시를 세울 곳이었다.
“근데 정지 장…… 중령은 어떤 상태입니까? 설마 죽는 겁니까?”
“글쎄요.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부였으니, 아직은 저도 잘 모르죠. 저도 그런 식으로 암살 시도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
보고에 의하면, 정지 중령은 벌써 엿새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포도당 주사를 맞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룩 회복할 가능성은 더더욱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후송할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신의 가호를 기원할 수밖에 없죠.”
몽주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포섭한 그리 많지 않은 역사적 위인 중 한 명의 쾌차를 바랐다.
* * *
몽주가 현대로 가지고 온 고민거리는 여송섬의 상황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합성 고무나 실리콘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냐고 묻는 거예요.”
“자연 고무도 가능하긴 하죠. 좀 더 자주 보강해 줘야겠지만요.”
“자연 고무도 빼면요?”
몽주의 연이은 물음에 강지혁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실리콘이나 합성 고무를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양진이를 만들 때도 썼었는데요.”
“그게…… 양진이 때야 그 대신 옛날식 뱃밥을 써도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근데, 이번에는 아니잖아요.”
“……?”
다시 한 번 지혁의 표정에 그게 뭔 소리냐 싶은 표정이 떠올랐다.
경상도와 서울을 오가며 대형 함선의 건조를 주도하고 있던 그가 몽주의 호출을 받고 오게 된 건 뱃밥 때문이었다.
뱃밥이란, 목조선의 부품의 연결 부위에 생기는 틈새를 막는 재료를 통칭하는 것으로, 전근대에는 주로 질긴 식물로부터 뽑은 섬유질이나 톱밥 등을 섞어서 사용하였다.
당연히 고려 당대에서는 그런 천연 재료를 뱃밥으로 사용했는데, 중함선을 건조함에 있어서도 뱃밥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한데, 천몽에서 몽주가 대형 범선의 건조 계획에 대해 선소 장인들에게 밝히자, 그들은 크게 곤란해 하였다.
그들이 곤란을 표한 이유는 그 대형 범선이 순수한 목조선이 아니라, 강철을 재료로 쓰는 목철선(木鐵船)이라는 점에 있었다.
새로이 건조에 도전하는 대형 범선은 배의 용골과 늑골에 철강을 써 길이와 부피의 증가로 인한 선체의 부하를 견딜 수 있게 한 배였다.
이는 목조선의 안전 설계 규모가 길이 60미터, 최대로 잡아도 70미터가 한계인 탓이었다.
물론, 목조선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규모인 배들도 있었지만, 그런 배들은 거의 모두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고, 실제 범선 시대 후기의 거함들은 모두 목철선이었다.
장인들이 목철선의 건조를 어려워한 건 일단 철강재로 용골과 늑골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그 접합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 그런 두려움은 연구와 실습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기에 몽주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장인들이 뱃밥의 문제를 내세웠을 때는 몽주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철재와 목재의 연결 부위가 목재와 목재의 연결에 비해 더 쉽게 헐거워지고, 상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짜 맞추는 형태로 만들고, 접지에 뱃밥을 잘 쓰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여겼는데, 장인들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걸 보니,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실험을 통해 확실히 파악해 봐야겠지만, 장인들의 우려대로 기존의 뱃밥으로 연결 부위의 마찰과 유격을 견딜 수 없다면, 지금 현대에서 짓고 있는 대형 범선을 고려에서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건조 자체가 가능하더라도, 이후 운용에 있어 굉장히 자주 보수를 해야 할 터였고, 거친 항해 중에 침수 사고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각종 합성 물질을 통해 강한 탄성과 인장력 및 내구도를 갖춘 뱃밥을 사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천몽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실리콘은 언감생심이고, 그나마 천연 고무라도 있다면 어느 정도 감당할 만하겠는데, 아직 고무가 몽주의 손아귀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필리핀 제도에 인도고무나무가 전파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무를 채취하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없다면, 인도 지역이나 신대륙까지 진출한 뒤에야 고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서 대형 범선의 완공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천몽에서도 서서히 준비를 시작하고자 했던 몽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몽주는 강지혁을 다그쳐 어떻게든 적당한 뱃밥거리를 찾게 하였는데, 그의 반응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부정적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왜 실리콘이나 합성수지를 안 쓰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먼저였으니, 그에게 천몽을 밝힐 수 없는 몽주로서는 그저 범선 ‘오타쿠’로서 변명해야 했다.
“양진이호에 붙어 있는 자동 항해 시스템처럼 옛 방식으로 가능한 것을 현대적인 기술로 보강하는 건 상관없지만, 옛 방식으로 불가능한 일을 현대 기술로 대체하는 걸 바라지 않아요. 만약 실리콘 범벅이 아니고서는 운용할 수 없는 배라면, 저는 대형 범선이 완성되더라도, 완성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고, 실제 운항도 미룰 생각입니다. 그러니 지혁 씨가 애를 써 주십시오.”
“하아, 정 그러시다면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보인 지혁을 보내면서, 몽주는 아무래도 천몽 속에서 대형 범선의 건조 계획을 늦추고, 중함선의 수를 보다 늘리는 쪽으로 중장기적인 수군 전력 육성의 방향을 고쳐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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