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55)
* * *
“우리는 배신으로 세상을 배웠다. 태초의 산중노인이셨던 분부터 숱한 배신을 겪었고, 그것은 우리가 태초의 산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절름발이 티무르의 생존과 패권을 도왔으나, 그 보답은 모멸과 추방이었다. 인도의 시아파 토호 놈을 도와 그의 왕조를 세우는 것을 도왔지만, 그 보답 또한 추방과 척살이었다. 아체의 해적 놈들도 마찬가지였고, 브루나이의 볼키아 왕도 다를 게 없었다. 자기들이 급할 때는 산중의 지혜를 높이 산다며 모셔 놓고, 자기들이 편해지면 우리를 천하다며 경멸하고 쫓아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다.”
포구에 선 이스마일의 말에 주변에 있는 자들이 모두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 모두가 하사신의 후예들인 바, 지금 이스마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그들의 역사는 실로 뼈에 사무친 것이었다.
아니, 역사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적어도 아체의 술탄에게 당한 배신부터는 직접 체험한 바였다.
마자파힛(Majapahit)이라는 강대한 힌두교 왕조 아래 숨죽이고 있던 무슬림들이 봉기함에 있어, 산중의 지혜는 많은 이점을 줄 수 있었고, 그 덕에 그들은 쉽게 동방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하나, 정착이 쉬운 것과 제대로 된 세력을 구축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고, 술탄들은 하사신들이 세력화하는 걸 몹시 꺼려 그들을 이용하면서도 은근히 방해를 획책하였다.
당장 급하고 도움이 되니까 쓰지만, 언젠가 반드시 버려야 할 세력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건 가장 최근에 도왔던 브루나이의 술탄도 마찬가지였으니, 볼키아 왕조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하사신들은 브루나이가 사실상 독립하자, 민다나오 섬을 개척한다는 명목하에 또다시 쫓겨나게 되었다.
이스마일은 다시 한 번 수모를 겪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기회가 왔다 여겼다.
민다나오의 개척을 주도하는 현 브루나이 술탄의 둘째 아들이 스스로 술탄이 되고자 욕심을 부리면서, 하사신에게 많은 힘을 몰아준 덕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늘에 이르러 그의 목숨을 앗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고, 여기저기 떠도는 치욕의 역사는 이제 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의 변화를 증명할 최초의 증인이 될 터…….”
이스마일은 더 가까워진 고려의 함대를 보며 말을 줄였다.
어리석은 이교도이나, 작금의 현실에 하사신의 나라와 교류하기에는 오히려 가장 나은 상대로 보고 있었으니, 저들 또한 이곳에 아직 세력을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강대한 듯하나, 이 남쪽 바다에서 세력을 제대로 세우고자 한다면, 괜한 적을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스마일은 볼키아의 세력을 넘기며 고려와 화친을 맺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와 함께 산중의 지혜를 빌려줄 의향도 있었다.
“산중의 지혜는 누구도 감히 거부할 수 없다. 고려라 한들 다를쏘냐.”
고려 또한 그들의 장수를 잃은 바 있는 만큼, 산중의 지혜를 빌리는 것에 관심이 지대할 것이라 이스마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비단 이스마일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고려 함대의 입항을 기다리고 있는 하사신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제껏 그들이 의탁했던 모든 세력이 그랬던 만큼 그 생각은 경험적으로 옳은 것이었고, 그들이 가진 나름의 자부심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배 몇 척은 정말 큽니다. 인더스의 그 토호 놈들도 저렇게 큰 배는 없을 겁니다.”
어느 하사신의 나이 든 신하가 감탄한 말에, 이스마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세상은 넓고 권력은 끝이 없음을 절감하였다.
그가 꼬마이던 시절에 하사신이 몸을 의탁했던 인더스 강 하구의 왕국은 모든 바다를 지배하려는 양 많은 거함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이 그보다 더 큰 배는 없을 것 같은 배도 있었건만, 지금 고려의 함대에 중심을 잡고 있는 몇 척의 배들은 그 배보다 분명 더 컸다.
당장은 적이기에 두려운 존재지만, 화친하여 거래할 수만 있다면 그만큼 최고의 협력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스마일은 미소를 한껏 띠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앞서 있던 큰 배에서 연기가 터져 나왔고, 이어 커다란 포성들이 귀청을 때렸다.
뻐뻐버벙!
“……!”
눈에 비친 광경과 귀에 들린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은 이스마일은 그의 앞에 크게 들어 올려 있는 흰 기를 바라보았다.
‘분명 흰 기가 보일 터인데……? 지난번에 분명 흰 기를 보이고 대화를 나눴었는데……? 한데, 어째서?!’
그 생각을 말은커녕 표정으로도 드러내지 못한 그 순간, 수많은 철구들이 포구를 덮쳤고, 이스마일은 그중 하나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한순간에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쿠콰과광!
날아간 천뢰탄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포구를 화염으로 뒤덮었다.
“흰 기를 들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듣기라도 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요?”
기함의 선장이 찜찜한 양 말하였다. 십중팔구 항복을 청하려는 게 분명했을 텐데, 그것을 무시하고 대뜸 방포부터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하나, 탁기는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지 중령의 일을 보아, 이미 저들의 흰 깃발을 믿을 수 없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는 여기 술탄과 협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닐세. 우리가 받은 명은 이곳에 있는 회회인들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그것은 저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네. 하면, 굳이 항복 요청을 확인할 필요가 없지.”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다시 말문을 열어 물었다.
“하면, 그 자객의 무리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들도 모조리 처단하시렵니까?”
탁기는 굳이 답할 필요가 없다는 양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선장이 굳이 물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질문을 하나 더하였다.
“혹여 그들 중 수장급 몇을 살려 두어 그들의 솜씨를 뽑아낼 수 있다면 제법 이득이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주군께서 크게 경을 치실 말이로군.”
“아, 그렇긴 합죠.”
선장이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탁기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또한 주군께서 자객과 암살에 대해 얼마나 혐오심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정지 중령이 암살에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주군께서는 암살을 배부른 독약이라 하셨네. 배고프다고 먹으면 당장은 배가 부를지라도 결국 자신의 명줄을 끊고야 만다는 말씀이셨지. 이제 탐라국은 배가 고픈 사정에 처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 만큼, 암살과 같은 독약은 실수로 먹는 일조차 없도록 미리 없애 두어야지.”
주군께서 암살과 같은 일에 단 한 번도 연루되지 않은 건 아님을 탁기는 알고 있었다. 일례로, 오래전 규슈탄다이 료슌의 암살을 방조한 적도 있었으니까.
하나, 주동이 되어 암살을 도모한 적은 없었고, 탐라국이 일정 수준이 된 이후에는 암살을 수단으로 삼아 논의한 적조차 없었다.
주군께서 회회인의 무리 중 자객들을 어찌 처리하라 구체적으로 명한 바는 없었지만, 회회인들의 세력을 섬멸하라는 명에 더해, 주군께서 가지고 계신 암살에 대한 혐오를 생각하면, 회회인 자객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하면, 자객들을 철저히 추살하라 명을 발하겠습니다.”
탁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장이 기함에 있는 해병대 군병들에게는 물론 다른 배에게 명을 전파하였다.
다만, 자객 무리의 수장급들을 철저히 수색하라 명하였는데, 그 대상들이 초포(初砲)에 폭사했음은 아직 알 수 있을 때가 아니었다.
* * *
민다나오 술탄국 정복은 이상할 정도로 손쉽게 끝났다. 앞서 임도에서의 싸움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고 느껴질 만큼 저항은 가벼웠다.
나중에야 적진에 적전 분열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탐라군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더 나중에 안 것이지만, 술탄을 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하사신의 수장이 포격에 폭사당했던 터라, 적전 분열에 더해 지휘관의 부재까지 겹친 민다나오의 회회인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륙전이라는 불리한 전황임에도 순식간에 승기를 잡은 탐라군은 곧바로 술탄국의 지배층을 솎아 내기 시작한 바, 너무나 빠른 패배에 미처 도주하지도 못한 그들은 탐라군병들에게 엮인 굴비처럼 줄줄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주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술탄국의 중심지인 곳은 만의 깊은 안쪽이었고, 사방은 열대의 우림과 산악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그곳으로 도망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나라라곤 하나, 그 역사가 무척 짧아 제대로 된 영토도 만의 주변에 불과한 터라, 그곳을 점령당하는 순간 민다나오의 술탄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의외로 강대한 함대를 소유했던 것도 브루나이 술탄국의 지원 덕이었고, 더 큰 힘을 보유하지 못한 건 민다나오의 술탄이 부왕으로부터 독립하고자 욕심을 부리다가 그 지원을 잃은 탓임을 알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민다나오의 술탄국은 하루 만에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후에는 정리의 과정이었으니, 변복하여 숨은 지배층을 골라내고, 사로잡은 회회인 군병들을 포로화하며 민다나오의 술탄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원주민 마을들을 해방(?)시켜 그들의 본래 통치 제도로 회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간이었다.
그렇게 한 달가량의 시일이 지나갔으니, 탁기는 슬슬 회군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수십 명의 회회인들이 밧줄을 당기고 있었으니, 그 끝에는 커다란 비석이 걸려 있었다.
그 비석에는 회회인의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 의미는 ‘다가오지 마라.’였다.
그곳은 민다나오 섬의 서쪽에 위치한 곶 지형의 바닷가였으니, 만약 브루나이 술탄국에서 배를 띄워 온다면 그 앞바다를 지나올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이걸 보고 말귀를 알아들을지 모르겠습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몽둥이를 들어야지.”
비석 건립의 임무를 맡은 장교의 말에 탁기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였다.
그 비석은 일종의 명분이었다. 미리 경고했으니, 그 경고를 어겼을 때,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브루나이의 책임임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민다나오의 술탄국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사실과 이곳에 세운 비석을 통해, 고려가 민다나오에 회회인들이 진출하는 걸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알림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민다나오를 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저들이 차후에 데려갈 회회인들인가?”
탁기가 묻는 자들은 비석을 세우기 위해 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 회회인 사내들로, 대부분 평범한 피지배층 출신이었고, 그들을 탐라에 데려가려는 이유는 회회인의 언어와 문자를 습득하는 데에 쓰기 위해서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 하사신이라는 무리는 철저히 제외해 두었습니다.”
하사신들은 체포를 원칙으로 하되, 만약 일말의 저항이라도 있다면 즉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피다이인지 뭔지 자기 목숨을 도외시하고 암살을 시도한다는 말이 있어, 탐라 군병들로 하여금 항상 여럿이 무리를 지어 다니도록 하면서 특별히 유의하게 하였는데, 걱정했던 것에 비해 암살자들의 저항은 별로 없었다.
저항의 몸부림이 약간 있어 봤자, 뻔한 패전병의 발악 같은 것에 불과했다.
하기야 암살과 같은 기책이자 궤도는 적의 약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그 약점을 파고들 때나 의미가 있을 뿐, 견고하게 구축한 탐라군의 정병을 흔들 만한 계제는 아니었다.
“수고하게. 나는 먼저 돌아가겠네.”
“살펴 가십시오, 영감.”
탁기는 거의 다 세운 비석을 뒤로하고 먼저 배에 올라 민다나오의 포구로 돌아왔다.
하선을 하자마자 탁기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러 장교들을 볼 수 있었다.
저마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결과나 그 와중에 생긴 문제에 대해 보고하며 명을 받길 원하였기에, 탁기는 그들을 상대하느라 다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대신 영감, 출출하시지요? 향초전을 가져왔습니다.”
“오, 그래?”
안 그래도 입이 궁하던 참에 잘되었다 싶은 탁기는 보좌관이 대령한 향초전을 환영하였다.
“카흐와도 대령할깝쇼?”
“좋지. 내가 어떻게 마시는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탁기의 표정이 옆에서 보기 좀 민망할 정도로 환해진 건, 민다나오 섬에서 발견한 새로운 음식과 음료 때문이었다.
향초(香蕉)와 카흐와(qahwa)라는 것인데, 그중 향초의 경우, 사실 그 존재 자체는 이미 탁기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본 적도 있었다.
다만, 향초를 본 건 그것을 먹는 과실로서 본 게 아니라, 섬유의 재료로써 본 것인 바, 구주 남부에 향초가 재배되고 있어 향초로 부드러운 섬유를 제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향초로 만든 섬유는 제법 고급 사치재였으니, 왜국의 귀한 자들이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주로 쓰였다.
다만, 비단이라는 최고의 옷감이 있는 터라, 향초 옷감은 비단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왜국에서나 약간 쓰일 따름으로, 중국이나 고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물산이었다.
탁기도 탐라국이 구주를 얻은 이후에야 향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향초를 섬유의 재료로 알았을 뿐, 그걸 먹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구주의 향초는 그 크기가 작고, 껍질 안에 큰 씨앗이 빼곡히 들어 있어, 애초에 먹을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한데, 민다나오 섬에서 다시 보게 된 향초는 뭔가 달랐다. 그 크기가 훨씬 큰 데 비해, 씨앗의 수는 오히려 적었고, 나머지 과육 또한 사과와 비슷한 맛을 내고 있었다.
사과도 탐라국에서 출세한 이후에야 맛볼 수 있었던 귀한 과일이었으니, 탁기는 민다나오 섬에 널려 있고, 따로 많은 양이 재배되고 있는 향초가 그와 비슷한 맛을 낸다는 건 기꺼운 일이었다.
한데, 놀라운 건 민다나오의 사람들이 향초를 요리의 재료로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탁기가 반갑게 맞이한 향초전도 그 요리 중 하나였다.
“음, 이거야 원, 이렇게 간단한 음식이 이처럼 맛있다니…….”
향초전은 아주 간단한 요리로, 야자열매로부터 얻은 기름에 향초 갈은 것을 넣어 둥글고 넓게 튀긴 것이었다.
씹히는 느낌은 소맥(밀)의 반죽을 튀긴 것과 비슷한데, 은근히 도는 단맛이 자꾸 입맛을 당기게 만들었다. 맛뿐만 아니라, 포만감도 제법 주어 간식 내지 가벼운 한 끼 식사로도 충분했다.
탁기가 향초전을 맛보며 한참 즐거워할 때, 보좌관이 다시 들어왔으니, 그는 찻잔을 올린 원첩(쟁반)을 들고 있었다.
“영감께서 드시는 대로 우려 왔습니다.”
“오, 고맙네. 음, 향이 정말 좋군.”
향초전보다 더 반갑게 맞이한 건 회회인들이 카흐와라 부르는 차였다.
카흐와는 탁기도 처음 보는 물산이었고, 민나다오의 원주민들도 몇 년 전, 하사신들을 통해 처음 접한 것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인도보다 더 먼 서역에서 즐기는 차인 모양인데, 그 찻물의 색이 탁하다 못해 검어 처음에는 차라기보다는 탕약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처음 카흐와라는 걸 소개 받을 때, 약에 취한 하사신들이 정신을 차리고자 마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처음에는 탁기는 카흐와를 맛볼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호기심 많은 장교가 카흐와를 맛보고 얼마 뒤, 탁기에게도 카흐와의 맛을 볼 것을 권하였다.
향이 괜찮은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음미가 묘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 권유도 탁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는데, 후에 카흐와를 맛본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카흐와에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여 탁기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 효능이란 잠을 쫓아내고,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것이었고, 당시 안 그래도 일이 많아 깊은 밤까지 일을 하던 탁기로서는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맛보게 된 카흐와가 탁기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게 된 건 불과 며칠 걸리지 않았다.
휘이, 휘이이-!
휘파람까지 불며, 탁기는 까맣게 우러난 카흐와 찻물에 양젖을 조금 따라 넣고, 이어 사탕도 약간 양을 넣었다.
카흐와에 단맛을 조금 추가하면 더욱 풍미가 좋아지는데, 민다나오 섬에는 특이한 수수가 있어 원주민들은 그 수수에서 짜낸 달콤한 즙을 넣는 모양이었다.
다만, 탐라군의 치중에는 사탕이 있어 그걸 사용하고 있었다.
후르륵.
취향대로 조제한 카흐와를 한 모금 마시자, 탁기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미소를 띠었다. 한데 문득 한순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 곧 민다나오 섬을 떠나면 자칫 향초전과 카흐와를 맛보기 어려울 수도 있음이 떠올랐던 것이다.
탁기는 특히 카흐와를 잃을까 걱정이었다. 향초야 달리 맛난 것이 많은 탐라에서 크게 그리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카흐와는 그가 아는 세상에서 대체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다나오산 향초와 카흐와의 씨앗을 가져갈 생각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둘 다 열대의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 같았으니, 탐라섬에서는 재배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름 심각한 고민을 하던 탁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때 아닌 주군의 얼굴이었다.
“뭐, 주군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시겠지.”
근거는 없었지만, 탁기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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