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61)
“그게 뭔가?”
“신춘불로탕이옵니다. 현비께서 천자께 올리시면 아실 거라 하셨사옵니다.”
“아…… 그게 이거로군.”
홍무제는 궁녀가 바친 탕약 그릇을 움켜쥐고는 잠시 바라보다가 단숨에 마셨다.
“흐음, 제법 쓰군.”
“사탕을 올리겠나이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물러가거라.”
홍무제는 궁녀를 물리곤, 손수 손을 뻗어 물을 마셔 입안을 씻어 내었다.
탕약을 마신 그는 황좌에 늘어지듯 앉아 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이보게, 대총관. 짐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든 모양이야.”
“어찌 그런 말씀을…….”
대총관이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양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바짝 숙였다.
“아니, 늙은 건 늙은 게지. 이제는 안력도 떨어져 시야가 가물가물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늙었다는 게지.”
“폐하, 그런 황망한 말씀은 부디 삼가 주시옵소서!”
대총관이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홍무제는 괜히 고약한 마음이 들었다.
저자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게 오히려 그가 늙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고 대총관을 탓하진 않았다. 어차피 대총관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해도, 그건 그거대로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에 주원장은 문득 실소하니, 그 또한 늙은 탓인 것 같았다.
“태자는 요사이 바쁜 모양이군. 아침 문안이 아니면 부르기 전에 볼일이 없어.”
“맡으신 일이 많아 그런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기야 하겠지. 한데 태자가 하는 일들이 잘 되고 있는 겐가?”
홍무제는 그 물음을 하면서 태자의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문하였는데 언뜻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뭔가 많이 맡기긴 했는데, 멍한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시켰는지를 따질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따로 질문을 더하진 않았다. 그런 물음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나이 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귀찮았던 것이다.
“태자 전하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시옵니다. 영민하신 만큼 만사에 불여튼튼하시니, 폐하께서 가지신 가장 큰 홍복이십니다.”
“그런가, 후후.”
주원장의 얼굴에 조금은 바보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그것도 자신의 자리를 이을 태자가 잘하고 있다니, 그저 기분이 좋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태자가 지난 몇 년 사이에 많이 성장했던 것 같아. 예전에도 영민하다는 생각이야 했지만, 유약하여 뭔가 강단이 모자란 것 같아 불안했는데, 요사이에는 그런 것도 없어.”
“그렇사옵니다. 지금 태자 전하를 보고 있으면, 불현듯 폐하의 젊은 시절이 떠오르곤 하옵니다.”
“오호, 그래? 하하하.”
헤벌쭉한 웃음 속에서 주원장은 태자를 떠올리고, 이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시절, 비렁뱅이라는 손가락질을 면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결국은 비렁뱅이와 다를 바 없던 시절.
어제 알던 자가 오늘 횡액을 당하고, 오늘 알게 된 자가 내일 자결하던 그 시절,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세상과 싸워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를 얻어 군병이 되고, 장수가 되었으며, 왕이 되어 마침내 천하를 얻었다.
지금은 체통을 위해 그 시절의 이야기를 삼가지만, 내심 자랑스러운 기억이자 추억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태자를 두고 황자들을 살피면서, 늘 가슴 한편에서는 아들들로부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발견하길 바랐다.
‘나와 같은 자, 한 손에 천하를 쥐고 흔들 능력과 배포가 있는 자.’
그런데 어느 날부터 태자로부터 그런 모습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으니, 주원장은 그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보게, 대총관.”
“말씀하시옵소서.”
“언젠가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태자를 잘 지켜 주고 도와주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응당 그리해야 할 제 사명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렇게 약한 말씀은 마시옵소서.”
대총관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찍으며 물러났다.
다만, 대전을 나선 대총관은 슬픔을 보이던 표정을 지우곤, 허리를 펴 담담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바뀔 때가 온 겐가.’
요사이 천자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나날이 쇠약해지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럴 만한 춘추에 이르시긴 했으나, 노화의 속도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걱정은 아닌가.’
대총관은 하늘을 향했던 시선을 내리며 미미한 실소를 지었다.
단 한 번도 천자를 진심으로 걱정한 적은 없었다. 그가 잘못되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한 적은 많았어도…….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처음부터 천자의 대총관이고 가장 측근의 태감은 아니었다.
오왕 시절부터 따지면 적어도 4명의 대총관이나 그에 준하는 내시들이 숙청을 당하였으니, 그들의 과실로 인한 벌이라곤 하나, 그 누구도 죽임을 당할 만큼 죄를 지은 적은 없었다.
아니, 아예 그저 천자의 변덕과 의심증으로 인해 애꿎은 이가 죽은 적도 있었다.
비단 태감들뿐만 아니라, 지금 조정의 대소신료들 중 진심으로 천자에게 충심을 당하는 자들은 손에 꼽을 것이고, 오히려 천자의 눈치에 고개와 허리를 숙인 채 피바람을 피하는 데 몰두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자들의 마음속에는 늘 당금의 하늘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담겨 있을 것이니…….
‘왕강, 자네 말대로 이제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할 때인 모양일세.’
대총관은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천자 곁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왕강 태감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새로 지은 공택은 원기둥 같은 네 개의 아성을 거대한 기둥으로 삼은 커다란 직육면체의 형태였다.
아마 집으로 쓰이는 단일 건물 중 탐라에서 가장 큰 집일 공택의 1층은 사실 집이라기보다는 탐라공을 위한 관부로서 기능하는 바, 그중 대집회실이라 부르는 곳은 왕성의 편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총무 회의가 열리던 기존 회의실의 확장판이었다.
다만, 대집회실은 회의만을 위한 곳은 아니었으니, 지금 송별회가 열리는 장소가 그곳인 이유였다.
“자, 모두 잔을 들게. 그간 내 곁에서 고생 많았네. 외직으로 나가서는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하게. 물론, 너무 편하게만 지내면, 나중에 나를 다시 볼 때, 분위기가 영 좋지 않을 터이니, 적당히 하고.”
“하하하.”
“모두 건강하고, 만사에 형통하길 기원하네. 거배(擧杯)!”
“거배!”
유리로 만든 예쁜 잔을 들어 서로를 축원하며 잔에 든 술을 마시는 이들은 몽주의 곁에서 오랫동안 보필해 온 대신청장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인사 개편과 함께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군관대신 탁기와 전당청장 금점녀만 남을 뿐, 모든 이들이 저마다 탐라섬이 아닌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몽주는 자신의 신하들을 훑어보다가 한 명씩 불러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와 당부의 말을 건네고자 하였으니, 그 첫 주자로 선택받은 이는 농관대신이었던 초고불이었다.
“자네에게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신은 주군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아니, 탐라의 산업을 일으킴에 있어 농관부의 일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크게 두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다른 중요한 일이 주군의 지휘가 없다면 발전하기 어려운 것에 반해, 농관부의 일은 그저 명만 내리시면 관리와 백성들이 알아서 진행될 수 있었기에 그러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웠다.
농관부의 일, 그러니까 농산, 수산, 축산의 일은 초고불의 말마따나 굳이 주도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농관부나 농관대신과의 접점이 적을 수밖에 없었으니, 몽주는 늘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어쨌든 그간 대신임에도 탐라섬을 떠나 탐라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하하, 사실 고생이다 싶긴 했었습니다. 다만, 이제 외직으로 나가니, 다른 이들과 달리 저는 익숙하여 별걱정이 없는 이점이 있습니다. 제가 부임하게 될 태백시도 여러 번 가 봤으니까요.”
태백시는 태백군의 상시(上市)로서 행정 구역 개편과 함께 개발되고 있는 ‘신도시’인 바, 그곳의 산업 중 태반이 농축산과 관련이 있어, 농관대신이었던 초고불 또한 여러 번 방문하여 그곳의 개발을 지휘 감독한 바 있었다.
아무래도 각종 첨단(?) 산업의 중심지가 된 탐라섬에서 농산업은 물론, 축산업이나 수산업마저 도태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감소세에 있는 터라, 농관대신은 다른 대신청장들보다 훨씬 많은 지방 출장(?)을 다녀야 했던 것이다.
“태백상시가 아직은 다른 상시에 비해 규모가 작다고는 하지만, 장차 농산과 축산은 물론, 광산에서도 중심지가 될 잠재력이 있는 만큼, 잘 다스려 주길 바라네.”
“기대에 부응하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주군.”
대신직에 있던 자가 일개 지방 수령으로 발령되는 것은 현대 한국은 물론, 과거 고려의 상식에 비춰 보면 좌천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나, 탐라국에서 지방 수령의 직급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상시의 시장은 1급 관리로 지정되어 대신과 같았고, 일반시의 시장은 2급 관리로서 청장급에 해당하였다.
물론, 모든 조직이 그러하듯 직급이 같다고 해서 동등한 권력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탐라공과 가까운 곳에서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대신과 지방 수령인 시장이 같은 권력을 쥘 수는 없고, 같은 급의 시장들 사이에서도 그 관할 지방의 인구와 경제에 따라 권력이 차별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대신청장에 있던 자가 부임하는 지방은 그만큼 조정의 관심을 받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진주상시의 시장으로 부임하게 된 포은은 진주상시가 가지는 경제적 중요성과 포은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이 서로 부합되는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진주는 장차 특별시로 성장할 만한 곳입니다. 탐라국의 모든 지방이 중요하나,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진주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곳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포은은 그가 진주상시에 부임하게 된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하기야 내관대신으로서 탐라국의 지방 행정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은 중에 가장 중요한 상시 중 하나인 진주에 부임함으로써, 그가 대신으로서 느끼고 깨달은 점을 백성과 더욱 가까운 곳에서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임을 포은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일일이 대신청장들과 짧은 면담을 나누며 술도 한 잔씩 주고받으니, 마지막 홍길도와 이야기를 나눌 즈음에는 몽주도 제법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음, 취기가 오르긴 하네. 그래도 자네가 마지막이지 않은가.”
“저야 굳이 따로 말씀을 내려 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투에서 약간이나마 불만이 느껴졌다.
“왕도로 가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홍길도는 이번에 새로 생기는 봉왕청의 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봉왕청(奉王廳)은 고려왕의 요청으로 제후국들이 왕도에 설치하는 기관었는데, 제후국들 간에 교환 설치한 판무청과 같은 역할이었다.
자연 직급도 판무청의 수장인 판무관과 같았지만, 아무래도 현 고려의 체제하에서 별 힘이 없는 왕도인 만큼, 그곳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관리들 사이에 파다했다.
“왕도행이 맘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저도 다른 대신청장들처럼 지방 수령으로서 현실을 체감하길 바랐습니다.”
“알고 있지. 자네라면 더욱 그런 마음이 컸을 거야. 그리고 그래서 자네를 왕도로 보낸 것이기도 하고.”
“……?”
홍길도의 표정에 애매한 의아함이 서렸다. 얼핏 몽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습이랄까.
“혹, 저를 통해 왕도에 전하실 함의(含意)라도 있으십니까?”
몽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네가 나와 탐라국의 의미를 고려왕과 왕실에 지속적으로 전하는 전령이 되길 바라네.”
“지속적이라 하시면……?”
“굳이 내가 지침이나 명령을 전하지 않더라도, 자네의 재량으로 고려왕과 왕실에 영향을 행사하라는 말일세.”
“…….”
잠시 놀란 빛을 띠던 홍길도의 표정에 다시 애매함이 서렸다.
고려 백성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크고, 탐라공의 곁에서 백성들을 평안하게 만들 제도와 기술을 관찰했던 그였기에 왕도에서 고려왕에게 해 줄 말이야 많았다.
하나, 그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 또한 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영향을 주든 말든, 그 영향이 만들어 낼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고려왕과 왕실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고려 왕실에 세 가지를 약속하였네. 명예, 존경, 돈이 그것들이지. 다행히도 금상께선 나의 뜻을 따라 협조해 마지않았으니, 그 첫 번째로 용종의 군복무를 통해 명예를 얻고 있네.”
처음에는 강제로 집행되었던 용종의 군복무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발적으로 응하고 있었다.
이는 용종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개를 숙인 덕이기도 했지만, 탐라와 요동에서 복무한 젊은 용종들을 통해 세상이 크게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임을 인정한 덕이기도 했다.
그리고 복무 중인 용종 출신 군병들이 얻은 무용담과 전공은, 약간의 ‘펌프질’과 더불어 고려 왕실의 명예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면, 다음번으로 왕실에 존경을 주고자 하십니까? 그래서 저를 통해 고려 왕실이 존경을 얻는 방도를 열기를 바라시는 거고요?”
“길게 보자면 자네 말이 맞네. 나는 고려 왕실에게 존경을 줄 생각이야. 다만, 그 존경을 얻는 방법은 금상과 왕실, 그리고 금상의 신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세. 누군가 그에 대해 가르침을 내려 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물론, 그 스승의 역할을 할 자로서 나는 자네를 택한 것이고.”
홍길도는 주군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가 결코 아무짝에 필요 없는 자리로 밀려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연히 또 다른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 대체 고려 왕실이 존경을 얻을 방도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자네가 금상의 신임을 얻은 뒤 문권으로 전할 것이네. 다만, 미리 말해 준다면,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군.”
“……?”
“구휼.”
“구…… 휼이라 하셨습니까?”
홍길도의 표정에서 애매함이 더욱 짙어졌다.
구휼(救恤).
화를 당했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
분명 고려 왕실이 백성들을 구휼한다면, 백성들의 존경을 얻기는 할 것이다.
하나, 천하의 탐라공이 생각한 방법치고는 너무나 평범했다.
사실 작금의 고려 왕실 자체가 탐라국의 구휼을 받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고려 왕실이 고려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 훌륭한 구휼책을 실행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게다가 탐라국 자체적으로 위기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여러 방도를 택하고 있는 바, 자칫 탐라공의 위엄 앞에 고려 왕실만 초라하게 보일 수 있었다.
물론, 고려의 신하가 아닌, 탐라국의 신하라는 정체성을 가진 홍길도의 입장에서는 개의치 않을 부분이긴 하나, 탐라공의 의도와는 맞지 않음이 분명했다.
“아직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니, 자네만 알고 있게.”
몽주는 홍길도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 하곤 말문을 열었으니, 잠시 후 홍길도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리하시면……?”
“맞네. 이는 고려 왕실에 존경을 주는 방법이자, 돈을 쥐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
홍길도는 과연 그러하다 깨달음과 동시에 어째서 그 방도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사람이 필요한지도 알 수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존경보다 돈에 경도될 수도 있는 방법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자네의 임무 또한 막중할 것이야.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제대로 옷을 입을 수 있지 않겠나.”
홍길도의 고개가 천천히, 그리고 크게 끄덕여졌으니, 그의 표정에도 각오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 * *
직례성 양주 포구에는 늘 고려에서 온, 정확히는 탐라국에서 온 배들이 있었다.
탐라로부터 생산된 여러 물산들이 황해와 장강을 거쳐 들어온 양주는 고려와의 교역을 책임지는 태자 휘하 관리 및 상인들이 고려의 물산을 명나라 곳곳으로 유통시키는 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
게다가 워낙에 교역량이 많고, 그 많은 양조차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중인 만큼 양주에 고려 배가 들어오는 건 늘 있는 일, 별일도 아닌 일이었고, 오히려 입항하거나 정박한 고려의 배가 없는 게 이상한 일일 정도였다.
그런 양주에 어느 날, 명 태자가 직접 행차하였다.
태자의 용무는 그날 입항한 탐라의 교역선에 있었으니, 별일이 아닌 고려 배의 입항 중에 별일인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리고 있는 게 그 선물이라는 겐가? 길이만 이십 척(尺)이 넘는다 해서 기대가 많았는데, 그만한 건 보이지 않는데?”
“저기 저 상자들 안에 분해되어 실려 있다 하옵니다. 세울 곳을 찾은 후 그곳에서 다시 쌓아 만드는 식인 모양이옵니다.”
태자보다 먼저 도착하여 상황을 살핀 마삼보의 대답에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천자의 상을 조각내어 왔다는 것도 그랬고, 다시 쌓아 본래의 상을 만들기 전에는 완성된 모습을 미리 살피지 못한다는 점도 맘에 들지 않았다.
“안 되겠다. 장소를 마련하여 탐라에서 보내온 용상(龍像)을 완성시키게 해라. 내 먼저 살펴 그 수준을 확인해야겠다.”
태자의 결정은 얼핏 이치에 맞는 것이었기에, 그 명령을 받은 다른 태감이 발걸음을 움직이려 하였다.
한데, 그 전에 마 태감이 먼저 말문을 열어 의견을 제시하였다.
“소신이 보기에, 태자께서 먼저 살피는 것은 이롭지 않사옵니다.”
“내게 이롭지 않다? 그게 무슨 말이냐?”
“탐라에서 보낸 용상이 천자의 눈에 들 것인지 여부를 두고 생각해 보면, 먼저 만약 그 수준이 높아 황성에 들일 만할 경우, 용상을 먼저 보신 것을 천자께서 불쾌하게 여기실 수 있고, 탐라국에서도 겉으로는 아닐지라도 속으로는 탐탁지 않을 수 있사옵니다.”
“…….”
“또, 만약 그 수준이 저열하여 황성에 들일 만한 것이 아닐 경우라 하더라도 전하께서 저 용상을 내치실 수 있겠사옵니까? 그 또한 자칫 천자의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될 수 있사옵니다. 더불어 천자께서 탐라의 공물을 맘에 들어 하시든 그렇지 아니하시든, 전하께는 손해가 없사옵니다.”
“손해가 없다?”
묵묵히 듣던 태자도, 손해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기에 얼른 되물었다.
그가 보기에 만약 천자께서 탐라가 보내온 선물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천자께서 탐라와의 교역에 제동을 걸 수도 있었다.
그건 태자로서는 절대 바라지 않는 양상일 것이니, 미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 마삼보의 생각은 달랐다.
“전하, 감히 충언컨대, 이 나라의 태자임을 늘 자각하시옵소서. 만약 천자께서 탐라국이 보내온 용상을 맘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면, 그건 탐라국이 대처해야 할 일이지, 전하께서 미리 걱정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
“오히려 천자의 심기가 불편하심을 이용하여 탐라국을 압박하실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옵니다.”
태자는 아차 싶었고, 동시에 언젠가 탐라국의 신하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돌려 말했지만, 천자를 닮으라는 충고.
천자를 닮으라 함은 결국 천자의 이기심과 권력욕을 배우라 함이니, 그 배움의 기본은 자신을 중심으로 판도를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하나, 천성이 착하고 부드러운 편인 태자로서는 애써 노력하여도 방심하는 순간마다 그저 아무런 갈등이 없기만을 바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네 말이 옳…….”
자신의 우유부단을 자책하며 태자는 마 태감의 말에 동의하려다가 문득 멈칫하였고, 이어 정색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크흠! 네가 감히 내 명을 거부하는 게냐? 지금 네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어찌 책임지지도 못할 간언을 올렸겠나이까.”
“좋다. 괘씸하기 그지없으나, 네놈이 책임까지 진다 하니, 네 말대로 해 보마. 단, 만약 천자께서 노여워하시어 문제가 생긴다면, 네 너를 친히 훈계할 것이다.”
“황공하나이다.”
마삼보는 머리가 무릎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숙여 태자에게 복종함을 표하였다.
비록 천성은 유약한 편이나, 태자의 영민함이 지금 이 순간 체통을 지키고, 가장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선택한 행동에 그를 모시는 태감으로서 감읍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사이, 탐라에서 온 배에서는 계속 하적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탐라에서 보내온 공물에 대한 소식이 천자의 귀에 들어간 건 다음 날 오후였으니, 천자의 첫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별 쓸데없는 짓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려 하는 탐라국의 의도가 못마땅하다는 것이 천자의 공식적인 반응이었는데, 사실 그보다는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새긴 석상이 어떨지 불안한 탓이 컸다.
그의 못난 외모를 고스란히 담았든, 반대로 거짓으로 꾸민 것이든, 어떤 식으로든 그의 심기를 건드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여, 당장에 폐기하라 명하려 했지만, 상국으로서 소국의 조공을 함부로 내치는 건 위신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라, 어쩔 수 없이 황성 구석에서 탐라가 보낸 석상을 조립하게 허락하였다.
그 후, 주원장은 며칠 뒤에 그 석상을 맞춰 세웠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부러 무시하고,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한데, 다시 열흘가량 지난 후에는 그 스스로 발걸음을 옮겨 석상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그가 애써 무시하려 해도, 그 석상을 먼저 본 자들의 칭찬이 워낙에 많았던 탓이었다.
다른 건 무시하더라도, 가장 아끼는 현비 이씨까지 침상에서 그 석상을 언급하여 자신을 칭찬하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잘 만들었기에, 이화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이화(李花)는 현비 이씨를 부르는 천자만의 별칭였다.
현비 이씨 후궁으로 들어와 자신을 모신 지 몇 해나 흘렀음에도 종종 자신을 보는 시선에 아쉬움이 묻어 있는 걸 느낄 때가 있었으니, 홍무제는 그것이 자신의 못난 외모 탓이라 여겼다.
물론, 현비가 감히 천자의 얼굴을 두고 품평할 리도 없기에 그저 천자의 자격지심이 낳은 오해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주원장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현비가 요 며칠 사이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부드러웠고, 심지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까지 하였으니, 그 변화가 신기할 정도였다.
“소첩이 어리석어 상공의 용안에 담긴 웅심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사옵니다.”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지만, 애써 꾸민 말과 달리 이번에는 분명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이상하고 심지어 무례하다 싶었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점점 마음에 들었나이다.”
천자의 앞길을 안내하는 태감에게 그 석상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채근하자, 대답이 그와 같았다.
그렇게 석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점점 끓어오르는 와중, 천자는 마침내 황성의 구석진 어느 뒤뜰에 놓인 그 석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정말 이상한 석상이었다. 앞서 태감이 평한 대로 심지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한데, 정작 홍무제는 이상함은 느낄지언정, 무례함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홍무제였기에 오히려 그 석상에서 무례함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저랬던가? 저랬나? 아, 그래, 저랬지…….’
천자의 모습을 담은 석상이므로, 온갖 예복을 갖춘 모습이나,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과장되게 표현했으리라 여겼다.
하나, 탐라국에서 보낸 석상은 그저 전장에 지친 장수의 모습만을 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아 이끌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상당한 무명소졸을 부축하고 있었으니, 그 자신의 몰골도 성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 싸움에 지친 장수가 바로 홍무제 주원장이었고, 그의 젊은 시절이었다.
스스로 지쳐 힘겨움에도, 지치고 다친 다른 병졸들을 도왔으니, 사실 그건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그의 손에 겨우 들어온 좁쌀만 한 권력과 부하들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나, 주원장의 속내를 모르는 휘하 병졸들은 자신들과 함께 악전고투하는 군관 주원장을 향해 충성을 바쳤고, 훗날 그가 반군의 수장이 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잊었고, 부끄러웠던 나의 과거여…….’
천자는 천천히 그 석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그 석상이 평범한 돌로 조각된 게 아님을 깨달았지만, 이미 석상의 재질 따위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이인일마(二人一馬)는 실제와 크기가 거의 같았다.
무명소졸의 얼굴은 흔하디흔한 얼굴이었지만, 그 장수의 얼굴은 분명 홍무제의 것이었다.
그 장수는 몹시 지치고 힘들어 이맛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이를 악물고 있어 몹시 사나웠지만, 홍무제는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뭔가 멍청한 느낌을 주는 인상을 가진 탓에 일부러 어진에는 흉악살의 모습을 담게 하여 위엄을 갖추려 했지만, 그 결과가 그저 부드럽게 추한 얼굴을, 거칠게 추한 것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었는데, 석상 속 자신의 얼굴에서 그가 바라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홍무제는 천천히 석상의 주위를 돌며 차근차근 석상의 모든 구석을 살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많은 감동을 주는 예품이었으니, 그가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 떠오른 기억의 진의마저 되짚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석상의 주변에서 인생을 되짚은 바, 어느 순간 동행한 태감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을 때는 시간이 벌써 한 시진이나 흘러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석상을 옮겨…… 아니다. 그대로 두어라.”
대전 앞으로 옮기게 하려 했던 주원장은 다음 순간 마음을 고쳤다.
그건 수많은 이들에게 보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형상인 탓이기도 했지만, 그 석상의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이 이것을 독점하고픈 욕심에서 기인한 결정이었다.
심지어 그 석상에 대해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함구령까지 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탓에 오히려 알음알음 탐라에서 보낸 석상에 대한 소문이 황궁에 퍼져 나갔다.
그 석상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떤 구도와 기조를 가졌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소문이 퍼지니, 천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석상을 따라 하기 위한 노력이 응천부와 그 주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탐라에서 생산했다는 하얀 대리석이 명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그 석상으로 인한 예풍(藝風)의 변화나, 대리석 수요의 형성과 같은 일은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그 석상 앞에서 일어난 일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유년(癸酉年, 1393년) 정월 어느 새벽, 그 백옥 같은 석상 앞에서 홍무제가 피를 토한 채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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