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68)
* * *
“풍경만 보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군요.”
대리 지방의 어느 방면에 나타난 일단의 탐라인들은 그들의 눈에 비친 이국적인 풍광에 혀를 내둘렀다.
붉은 땅 위에 푸릇한 새싹과 노란 봄꽃이 어우러지니, 대지가 온통 알록달록 총천연색을 이루고 있었다.
“저 푸른 곳이 바로 보이찻잎이라더군.”
“오, 저도 다점에서 한번 맛본 적 있지요.”
“운 좋으면 여기서 숙성된 보이차를 바로 맛볼 수 있겠지. 물론, 그 차 맛이 얼마나 좋을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잘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고 말이야.”
익문 제4대 김견은 선임 대원 묘덕남을 보며 말했으니, 그가 경치 구경에 나오긴 했지만, 신경은 온통 임무에 쏠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잘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대리에서는요.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립된 왕국을 꿈꾸던 곳이지 않습니까.”
“그 꿈이 철저히 짓밟혔으니 걱정이지. 명나라의 눈을 속이는 것과 명나라에 대항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로 느껴질 게야.”
“전 그래도 낙관적으로 봅니다. 그자가 전혀 생각이 없다면, 만나자는 제안에 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겠지.”
누군가의 만남에 대해 언급하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처럼,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익문 4대들이 일제히 바라본 방향에는 한 줄기 길이 있었고, 그 끝에 말 두 필이 끄는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 익문대 앞에 멈춰 선 마차의 마부는 익문대원들을 본 척도 없이, 곧바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라마승의 모습을 한 삼십 대 중반의 젊은 사내가 있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탐라의 외신 김견이라 합니다.”
익문 4대장이 목례하곤 인사말을 전하자, 라마승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띠며 합장하여 인사를 받았다.
“명나라 말을 잘하실 거라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곳 대리의 방언까지 구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설프게 익혔습니다. 길게 말하면 들통 날 실력이지요.”
“허허, 탐라에서 이곳은 수만 리는 떨어진 곳인데, 이처럼 말이 쉽게 통할 정도로 익히신 것이라면, 조금 달리 들려도 대단한 실력이지요.”
“칭찬 감사합니다.”
상관부 관리였던 김견은 일 때문에라도 명나라의 말을 익혀야 했는데,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어 짧은 배움으로도 금세 익숙해질 수 있었으니, 비단 명나라의 ‘표준어’라 할 수 있는 오어(吳語)뿐만 아니라 몇몇 방언도 익힌 바 있었다.
탐라국은 외관부 산하에 사교청을 두고 관리들을 교육하면서 외국의 말을 익히게 하였고, 아예 전문 학교를 세워 오어나 왜어를 넘어 점파의 언어나 회회어까지 가르치고 있었으니, 이제 탐라의 어지간한 관리들은 저마다 외국어 하나씩은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는 익문대에서는 더욱 중요시되는 부분이었고, 익문대원으로 선발함에 있어 주요 기준 중 하나였다.
김견은 라마승, 아니 단씨 가문의 몇 안 남은 핏줄 중 하나인 단악교와 잡담과 같은 말을 나누며 근처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그 정자는 명나라가 운남을 정복한 뒤, 그곳의 풍광에 감탄한 어느 장군의 명에 따라 세워진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여 애초에 목적은 상실한 곳이었다.
미리 자리를 만들어 둔 그 정자에 김견과 마주 앉은 단악교는 예상외로 먼저 그들이 만난 이유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내게는 사촌들이 많았습니다. 사내만 열둘이었지요. 그중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네 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네 명조차도 가문을 잇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지요.”
양왕국을 몰락시키는 데에 있어 명나라를 도운 단씨 가문이 얻은 건 철저한 배신이었다.
명나라는 단씨 가문을 철저히 구축하고자 하였으니, 가문의 중심이 되는 자들은 죄를 뒤집어씌워 죽였고, 어린 자들은 거세하여 대를 잇지 못하게 하였다.
그 탓에 단씨 가문의 직계는 사실상 절단된 상태였다.
다만, 단 한 사람만이 운 좋게 명나라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으니, 바로 지금 익문대가 만나고 있는 단악교였다.
일찌감치 출가하여 토번에서 사원 생활을 하였던 덕이었다.
“단씨 가문이 가진 억울함을 저희가 어찌 다 이해하겠습니까. 하나, 적어도 명나라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을 것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습니다.”
“복수심이라…… 고려도 부처를 따르는 나라라 들었습니다. 하면 복수라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도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김견은 단악교의 온화한 미소 뒤에 숨겨진 표정을 읽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단악교가 결코 명나라에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랬다면 사원을 떠나 환속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김견의 시선을 느꼈는지 단악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 스승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저희에게요?”
“그렇습니다. 제 스승께서는 지금 토번의 왕이신 총카파(Tsong Kha pa)이십니다.”
“…….”
낯선 이름과 명칭에 김견은 살짝 당황하였다. 토번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물론 알고 있었다.
사천의 서쪽 높은 산속에 있는 나라.
한때 당나라를 위협하여 공물을 받아 낼 정도로 강대했던 세력.
하나, 그 토번도 몽골의 침공은 이겨 내지 못했으니, 토번이라는 이름은 옛 왕국일 뿐, 지금은 그저 그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 토번에 새로이 왕조가 일어섰다는 말은 들은 바 없었다.
그가 아는 토번에 관한 최근의 소식은 명나라가 토번을 정벌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명나라의 그 정벌이 그 깊고 험한 산속 안쪽까지 모조리 정복했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나라는 그들의 영토 서쪽에 있을 수 있는 토번 지역의 위협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토번에 왕이 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 바 없었으니, 지금 단악교가 말한 토번의 왕이라는 표현은 분명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라마승으로 살던 단악교가 어찌 토번의 왕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김견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단악교는 다시 말문을 열어, 그가 스승이라 부르는 자의 말을 전하였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익문대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고 진중한 표정을 띤 김견은 단악교의 말이 일단락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토번이 이번 일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조건은 있었지만, 김 대장이 보기에 그 조건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그저 단씨 가문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독립의 기치를 세우게 하는 것이 모든 목표였던 익문 4대의 의장에서는 소기의 성과는 물론, 예상외의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 김견은 경망을 떠는 대신, 처음부터 그가 의문을 품었던 부분에 대해 물었다.
정말 토번에 왕이 있고, 그 왕이 단악교의 스승이 맞는지, 어떻게 토번의 왕을 스승으로 맞이하였는지에 대하여.
그에 단악교는 너털웃음부터 흘렸다.
“하하하, 확실히 토번을 모르는 자라면 의아해할 부분이긴 합니다. 고려인이여, 토번은 신성한 땅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그곳에서는 신의 뜻이 왕의 명을 대신합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신의 대리자이니, 곧 토번의 왕이십니다.”
* * *
탐라의 외신들과 만나고 난 후, 단악교는 다시 마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사안의 중대함을 생각하면 그리 긴 만남은 아니었다. 하나, 이미 양방 간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명확한 만큼 합의를 위해 논의할 부분은 그만큼 적었다.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군.”
단악교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나이 열셋에 출가하였으니, 그것은 그의 뜻도, 그의 부모의 뜻도 아니었다.
철저하게 백부의 주장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영민했던 조카가 자기 아들의 지위를 넘볼 것을 우려하여 억지로 출가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머나먼 토번의 땅으로.
사실 대리에서 토번 불교는 그리 흥성한 종교는 아니었다.
그저 토번과 가까운 산악 일부 지역에서만 자리를 잡았을 뿐이었으니, 어떻게든 가문의 권력과 거리가 먼 곳으로 쫓아내기 위한 백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리고, 새로운 기회를 얻게 하였다.
이제 백부도, 사촌형도 없다. 백부의 손자이자 그의 큰 조카가 있긴 하나, 거세된 남성으로서 조카는 별거 아닌 존재였다.
“이십 년의 공불도 속세의 미련 앞에서는 부질없구나.”
처음 어느 대리의 토호가 보낸 인편을 통해 탐라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응할 생각이 없었다.
하나, 며칠 사이에 그 제안은 그를 괴롭히는 번민으로 변하였고, 그것이 두드러져 그의 스승마저 눈치를 채게 하였다.
의외였던 건 그의 스승이 보인 태도였다.
부패한 홍모파에 저항하여 황모파의 수장으로서 토번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왕이 되신 스승은 단악교가 고민하는 이유를 알게 되자, 뜻밖의 말씀을 내리셨다.
9.5//“돌아가 너의 백성들을 구제하라.”//
세속적인 고민에 빠진 걸 훈계하실 줄 알았던 스승의 명에, 단악교는 처음에는 대리에 가서 라마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알리라는 뜻인 줄 알았다.
대리는 유목민족의 땅이었고, 이후 회회인들이 침투한 곳이었으니, 부처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곳인 바, 그곳에 가서 라마승으로서 고역을 감수하라는 의미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나, 스승의 말씀은 철저히 세속적인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대리의 왕가를 되찾아 백성들을 구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다만, 의미심장한 말씀도 있었다.
9.5//“그것이 곧 나와 우리 교단을 돕는 최선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나, 그 뒤로 스승께서 탐라가 제안한 일에 협조할 의향이 있음을 알리면서 조금 이해할 수 있었고, 지금 탐라의 외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승께서는 신의 말씀을 넘어 왕권까지 염두에 두신 게 분명해.”
토번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황모파를 이끌고 계신 스승은 왕으로 자처함에 무리가 없으시지만, 그렇다고 토번의 전역을 관장하시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홍모파 또한 적지 않은 권력을 쥐고 있는 바, 그들을 몰아내는 것이 토번의 미래를 위한 급선무였다.
그런 중에 만약 탐라가 대리의 봉기를 도울 수 있다면, 토번 또한 도울 힘이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니, 스승께서는 탐라의 힘을 빌려 그의 대에서 홍모파를 척결하고, 토번을 일통하길 바라심이 틀림없었다.
생각할수록 꽤 괜찮은 길이었다.
멀고 먼 고려에서 토번의 땅이나 권력을 노릴 것도 아니니, 그들을 돕고 그 대가로 토번의 미래를 얻을 수 있다면 분명 그것은 현명한 길일 것이다.
담담히 눈을 감은 단악교의 표정과 달리, 그의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두 주먹은 어느새 힘껏 움켜쥐어져 있었다.
* * *
육체적인 고생만을 따지면 익문 5대가 가장 큰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점파에서 라오족을 따라나선 건 익문 4대와 함께였지만, 도중에 길을 바꿔 익문 5대는 파촉의 땅으로 접어들었으니, 그 과정의 고됨은 고립된 땅으로써 파촉이 가진 유명세와 비례하였다.
게다가 다른 곳과 달리 사천은 엄연히 명나라가 협의의 본토로 여기는 곳으로 곳곳에 명군과 관리들이 자리 잡고 있는 터라, 일부러 더 험한 길을 따라 움직인 탓에 고생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도중에 어느 노인을 만나게 된 건 정말 예기치 못한 정도를 넘어 황당한 수준의 일이었다.
지팡이가 없으면 서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허리가 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그야말로 꼬부랑 할아버지가 가파른 산기슭으로 난 한 줄기 길가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익문 5대들은 비밀스러운 이동 중에도 그 노인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대관절 무슨 탓에, 젊은 장정들도 걸음하기 어려운 산길에 주저앉아 있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하여, 익문 5대장 엄호길수가 말을 걸어 목적지를 물었는데, 노인은 입술을 비틀며, 그러니까 비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자네들도 참 고생길이 훤하구먼.”
“……?”
“주인을 잘못 만나서 쓸데없는 짓에 청춘을 바치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
엄호 대장은 의아한 표정 대신 냉정한 눈빛을 지으며 주변 대원들에게 눈짓하였다.
아무리 봐도 이 노인이 몹시 수상쩍었던 것이다.
“허, 이놈 보게. 제 놈 고생하는 걸 걱정해 주니, 독기를 품네그려.”
“노인장의 성명이 무엇이오?”
“그러는 네놈의 성명은 무엇이냐? 딱 봐도 한족은 아닌 게 분명한데.”
“난 장난칠 마음이 없소. 노인장은 정체를 밝히시오.”
“나는 호북성의 장 모일세.”
“호북성 사람이 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게요?”
“그러는 네놈은 강족도 아닌 놈이 여기서 뭐하는 게냐?”
“…….”
엄호 대장은 자꾸 이상한 예감을 들게 만드는 노인을 죽일지 말지를 속내로 저울질하다가 한 번 더 인내하기로 하였다.
“다시 묻겠소. 대답을 잘하셔야 몸이 성하실 것이오. 무슨 연유로 이 산중의 소로에 있는 게요?”
“이놈아, 너도 이 길을 따라 성도로 가려던 거 아니냐? 나도 마찬가지다. 가다가 힘들어 쉬고 있는데, 네놈들이 나타난 게고.”
“성도에 무슨 일로 가시는 게요?”
“허, 이놈이 아주 내 속곳 색까지 알아낼 참이로구나. 오냐, 말해 주마. 내 제자 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되었느냐?”
“제자?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데, 제자를 두었소?”
노인의 모습은 볼품없었으니, 암만 봐도 농꾼 이상이 아니었다.
“내가 이래 봬도 소싯적에는 도사 소리 좀 들었지.”
“…….”
그 말을 들은 엄호길수의 표정에서 일순 맥이 빠졌다.
처음 하는 말이 뭔가 의미가 있는 듯했기에 긴장했는데, 이제 보니 도인 행세를 하던 보잘것없는 노인네였던 것이다.
“알았소. 길이 험하니, 조심하시오.”
엄호 대장은 대원들에게 그만 갈 길을 가자고 손짓을 하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등 뒤로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허, 노인네가 힘들어서 주저앉아 있는데, 자기 볼일 끝났다고 그냥 가는 저 싸가지 좀 보게.”
엄호 대장은 그 말을 못들은 척하곤, 대원들을 이끌고 서둘러 산길로 들어갔다.
한데, 얼마 뒤 기겁할 일이 있었으니, 그들이 걸어가던 길 앞쪽에 아까 본 그 노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날 업어 주려고 다시 온 게냐?”
“……대체 어떻게 우리보다 앞서 온 것이오?”
“이놈아, 주위를 둘러보아라. 내가 앞서 온 게 아니라, 네놈이 다시 돌아온 것 아니냐?”
“……!”
그 말에 익문대들이 황급히 주변을 살피니, 과연 아까 노인을 만났던 곳이었다.
“아무래도 잘못된 길로 들어선 모양이다. 서둘러라. 이러다 산중에서 해가 저물겠다.”
엄호 대장이 조금 신경이 곤두선 표정으로 명하자, 익문대들은 서둘러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놈들아, 나 좀 데려다 달라니까!”
익문대들은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집중해서 산길을 걸었다.
딱히 갈림길도 없는 터라 어디서 길을 잘못 들어선 건지는 찾지 못했지만, 분명히 제대로 길을 잡았다.
한데, 얼마 뒤 다시 그들 앞에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
“허허! 보아하니, 또 길을 잘못 들어선 게로구나? 거봐라. 날 업어다 주는 게 네놈들의 팔자인 게다.”
헤벌쭉 웃으며 다시 돌아온 익문대들을 맞이하는 노인의 모습에 익문대원 중 하나가 엄호에게 귀엣말을 하였다.
“아무리 봐도 수상합니다. 저 노인이 이상한 술수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무슨 술수?”
“…….”
그 대원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도술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긴 했지만, 탐라에서 배우며 자란 그가 뱉기에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엄호 대장은 다시 노인의 앞에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노인이 한 짓이오?”
“뭘 말이냐? 코앞에 둔 길을 못 찾는 거? 예끼! 네놈들이 길눈이 어두운 걸 가지고 왜 날 타박하느냐.”
“…….”
“날 데려가면 네놈들이 못 찾는 길을 찾아 줄지도 모르지. 나는 보이는 것도 보고, 안 보이는 것도 볼 줄 알거든.”
엄호길수는 잠시 더 노인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리며 주저앉았다.
“업히시오.”
“오, 그래,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노인은 힘이 빠져 주저앉았던 게 무색할 만큼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엄호 대장의 등에 업혔다.
“끄응!”
엄호 대장이 노인을 업어 몸을 일으키는데, 절로 용쓰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어허, 아직 젊은 놈이 왜 이리도 기운이 없는 게냐? 나 같은 노인 하나를 업는 게 그리 힘이 드느냐?”
“아, 아니오.”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호길수의 표정은 아닌 게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노인의 몸무게가 무겁게 느껴졌으니, 마치 건장한 청년 둘을 한 번에 업은 느낌이었다.
그에 다른 대원들이 자신이 업겠다고 나섰지만, 엄호 대장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이 거절했다.
“싫다! 나는 이놈이 맘에 드는구나.”
엄호 대장도 자존심이 있어 부하에게 노인을 떠넘기기 싫었기에, 노인은 엄호 대장에게 계속 업혀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산길을 나서는데, 어느 순간 엄호 대장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이 너무 무거워서 솔직히 산등성 하나도 못 넘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계속 걸음을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거워 미치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완전히 탈진하지는 않는 상태가 계속 유지됐다.
마치 엄호 대장이 포기할 만큼 지칠 때마다 누군가 힘을 불어넣어 주는 느낌이랄까.
더 신기한 건 이제 익문대가 길을 헤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앞서도 헤맨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노인이 주저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오길 반복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노인네가 진짜 도사인 겐가?’
엄호길수도 슬슬 노인네가 신비한 존재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대원들이 앞서 길을 열고, 엄호 대장이 노인을 업은 채 길을 걷길 한참 후, 해가 뉘엿뉘엿 먼 산 너머로 넘어갈 즈음에 일행은 마침내 산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함, 다 온 겐가? 그만 내려 주게.”
정말 업힌 채 잠이라도 잤던 건지, 노인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엄호의 너른 등판을 툭툭 쳤다.
엄호가 노인을 내려놓자, 노인은 구부러진 등에도 불구하고 사뿐히 땅을 밟고 서서 익문대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뭐, 네놈들에게 뭐라 하더라도, 제 주인의 명대로 할 놈들이니, 더는 말 않겠다.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니, 잘만 하면 노력이 아주 허무하진 않을 게다.”
덕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남긴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하며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노인장.”
엄호길수는 이마에 담을 훔치며 노인을 불렀다.
“왜 부른 게냐?”
“성명을 알려 주시오.”
“아까 말했잖냐?”
“성만 말씀해 주셨지 않소?”
“아, 그랬나? 뭐, 그건 네놈들이 만날 놈을 만나면 그놈에게 물어보아라.”
“……우리가 누굴 만날 줄 알고 그 사람에게 물으라는 게요?”
그건 익문대가 만날 사람을 노인이 모를 것이기에 물은 게 아니었다.
사실 익문대도 그들이 누굴 만나야 할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다 포섭하고, 회유할 대상이 있는 것에 반해, 사천 지방은 익문대가 몸소 확인하여 봉기의 주체가 될 자를 선별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허허, 글쎄다. 저 마을에 가면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노인네가 지팡이를 들어 그 끝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니, 그곳으로 난 길 끝에 작은 마을이 있는 게 보였다.
엄호 대장과 익문대원들은 그 마을을 확인하곤 저 마을에 도대체 누가 있는지를 묻기 위해 다시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
“어?! 어디 갔지?”
엄호길수와 마찬가지로 잠시 마을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대원들이 다시 노인을 찾다가 창졸간에 사라졌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워하였다.
그들이 나온 산길 쪽을 제외하면 탁 트인 곳이라 몸을 숨길 곳도 없는데, 노인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놀랄 만도 했다.
“저, 정말 도사였을까요?”
어느 대원의 물음에 엄호 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 없이 그저 노인이 가리켰던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산길에서 만났던 노인에 대해서는 가급적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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