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
“알겠습니다. 조만간 결정이 나면 알려 드리죠.”
“지금 결정하는 것도…… 아! 기다리죠.”
재상이 뭐 미룰 거 있냐는 식으로 말하다 몽주가 슬쩍 눈치를 주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러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요동 정벌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을 겁니다. 아니, 사실 상관이 크게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식의 영향일지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몽주 씨가 아직 설정을 정하지 않았으니까요. 개인적으로 고려 백성들 입장에서나 상인으로서 시장의 안정을 바라는 입장에선 요동 정벌 따위는 애초에 시작도 안 하는 게 제일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몽주 씨가 현대의 지식을 이용하여 신상품을 만들고 그를 통해 지배층의 인심과 인맥을 잡겠다고 마음먹으셨고, 또 나름 덜 위험한 접근 방법을 강구하신 듯한데, 가장 큰 문제가 남았죠.”
그 문제가 뭔지는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뭘 만들 거냐는 것.
“그 여성들을 위한 신상품이란 게 뭐가 있을까요? 현대에서야 너무 많아서 문제지만, 그 시대에는 화장품이나 청결 제품 정도? 하나, 이미 몽주 씨도 예전에 설정했듯 그 시대에 쓰고 있는 석감이나 청포가 의외로 쓸 만하다고 하셨으니, 선택하기가 은근히 힘들 것 같군요.”
재상의 말투는 함께 ‘고민해 보자.’였지만, 표정은 몽주를 향해 ‘한번 생각한 걸 꺼내 봐라.’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몽주도 생각해 본 게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비누죠.”
“…….”
당연히 반응은 좋지 않았다. 너무 뻔하긴 했다. 특별한 장비나 재료 없이 지식만 있다면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비누.
“몽주 씨, 이거 본인이 설정한 걸 어기시는 것 같은데요. 이미 고려에서 비누 대용으로 쓰고 있는 석감의 성능이 질 낮은 비누보다 더 낫다고 인정하셨지 않습니까.”
“석감이 쓸 만한 건 사실입니다. 다만 비누보다 석감이 낫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는 압니다.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그다지 반응이 좋진 않겠죠. 비누를 비누로 판다면요.”
“그렇……? 비누를 비누로 팔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곧장 자기주장을 하려던 재상이 멈칫하며 몽주의 마지막 말에 주목했다.
“비누를 비누가 아니라, 주름 제거용 화장품 내지 약품으로 팔아 볼까 합니다.”
“…….”
재상이 인상을 찡그리며 몽주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동안, 잠자코 있던 두신이 감탄하며 무릎을 쳤다.
“확실히 세탁비누로 세수를 하면 마를 때 피부가 엄청 당기긴 하죠.”
두신의 말을 들은 재상이 실소를 지었다.
“피부 당김을 주름을 펴는 것처럼 사기를 친다는 말이십니까?”
“네.”
“그러다 진짜 죽습니다. 여성들이 아니라 몽주 씨가요. 피부가 당기다 못해 허옇게 터지는 살갗에 난리가 날 거고, 분노한 고관댁 부인에 의해 관아에 고발되어 죽도록 맞을 걸요.”
“물론, 그 전에 막아야죠. 로션도 만들 겁니다.”
몽주의 대응책에 재상이 인상을 찌푸리며 두신을 바라보았다. 그도 로션을 그 시대에 쉽게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두신이 혹여 아나 싶어 본 것이다.
“글리세린을 이용하시려는 모양이네.”
“글리세린?”
“맞습니다.”
재상이 되물을 때, 몽주가 순순히 인정했다.
글리세린 혹은 글리세롤.
“지방산염을 추출할 때 글리세린이 나오니까요. 하는 김에 일부러 더 철저하게 글리세린을 분리시켜서 더 빡빡한 느낌의 비누를 만들어도 좋고요. 아시겠지만, 글리세린과 물을 섞으면 그게 로션이죠.”
지방산염이 곧 비누고, 비누를 얻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순물(?)이 글리세린인 셈이며, 글리세린을 물에 섞으면 끈적끈적한 액체 형태의 로션이 된다. 굳이 말하자면 스킨로션쯤 될까. 로션류의 거의 모든 화장품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로션이나 화장품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핵심은 그거였다.
“그러니까, 일부러 글리세린 함유량이 적은 비누로 피부를 더 당기게 하고, 그 당김을 주름이 펴지는 거로 사기를 친 후, 적당할 때 로션을 발라서 당김을 제거한다?”
“핵심을 짚으셨네요. 말씀 그대로 사기죠. 하나, 그 시대에는 꼭 사기라곤 할 수 없죠. 로션을 발라 주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을 테니까요.”
“아니죠. 그 시대에도 화장품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기초화장이니 미백이니, 색조 화장 같은 것도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설프게…….”
“로션은 없어요.”
흔히 하는 표현대로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해 주는 화장품은 없었다. 기방의 여인들이 저마다 세안품과 화장수를 사용하지만, 수분 증발과 함께 오히려 피부가 푸석해졌고, 그걸 막기 위해 돼지비계를 이용한 지방질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곤 했다.
냄새도 안 좋을 수밖에 없고, 피부에 좋을 리도 없었다. 때문에 차라리 그냥 물로만 씻는 게 더 나은 피부결을 유지하는 비법으로 여기는 여인들도 많았다.
“내 생각에는 충분히 통할 것 같은데? 물론, 유통로는 어떻게 개척하느냐는 문제가 남긴 하지만, 일단 상품성도 충분해 보이고, 목표 소비자의 호응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네.”
두신의 말에 재상도 더는 무어라 반론할 수 없겠는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재상과 두신 모두 몽주의 생각에 찬성 내지 비(非)반대하자 몽주는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놓은 게 있어요. 이건 꼭 여성용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여성에게 환영받을 거라 생각해요.”
재상과 두신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거죠.”
몽주는 그가 앉은 소파 옆 바닥에 놓여 있던 검은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 두 사람과의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다랑어포?”
“이거 가츠오부시잖아요?”
포장지에 쓰인 ‘가다랑어포’라는 이름과 투명한 비닐 안으로 보이는 가다랑어포의 모습에, 재상이 곧바로 가츠오부시임을 알아보았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식재료지만 아시아 쪽에 많이 퍼진 터라 한국에서도 생산되고 있었기에,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포장된 걸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걸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
몽주가 가다랑어포를 아이템으로 꺼내자, 두 사람은 각자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이용하여 가다랑어포나 가츠오부시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검색을 통해 주요 사안을 알 거라고 생각하며, 몽주는 고려에서 가다랑어포를 만드는 이유와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고려 후기의 음식 문화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담백하죠.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맛이 없어요. 테이스트(Taste)가 배드(Bad)하다는 의미로도 그렇고, 문자 그대로 맛이 아주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단 매운맛이 없는 게 가장 큰 아쉬움인데, 우리네 매운맛은 고추가 들어와야 얻을 수 있으니 그건 좀 참을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감칠맛은 어느 정도 낼 수 있을 겁니다. 조미료는 아니지만, 조미료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만들면 되죠.”
“그게 가츠오부시라고요?”
“네. 현대식 조미료가 아닌 이상 가츠오부시는 최상급 감칠맛 조미료인 셈이고, 아직 일본에서도 가츠오부시가 완성 단계의 식재료는 아닌 시절이죠. 에도시대 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일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가 좀 먼저 쓰도록 하죠.”
갑자기 조미료 내지 식재료에 대한 논의가 나오자, 재상이나 두신 모두 할 말이 궁한 듯 저마다 턱을 문지르고 뒤통수를 긁어 댔다.
그러다 겨우 재상이 살짝 태클을 걸어왔다.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긴 한데, 감칠맛이라는 게 조미료의 맛이라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감칠맛을 극대화한 게 조미료일 겁니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에도 감칠맛을 내기 위해 뭔가가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있지요. 다들 아시는 것들로 감칠맛을 냅니다. 소의 뼈나 멸치 같은 건어물 따위 말이죠.”
부엌데기 노비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걸 보며 확인한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가다랑어포도 결국 건어물이네요. 하지만 가볍게 뿌리거나 고봉으로 놓아 먹는 가다랑어포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국물을 우려내는 형태라 불편하기도 하고 감칠맛이 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츠오부시를 보급한다?”
“보급이라기보다는 향신료 취급의 사치재인 거죠. 그리고 제가 알리지 않아도 가다랑어포 만드는 방법이 알음알음 퍼져 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때는 정말 고려 백성들이 다 사용할 수 있겠죠.”
“널리 퍼지기 전에는 결국 이 역시 소수의 있는 집안 여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함이라는 거군요.”
맞다. 여성의 지위가 높든 낮든, 요리를 직접 하든 아니든 집안의 음식은 결국 안주인들의 책임이었고, 그 요리의 맛과 질을 통해 여인들은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중 하나를 얻을지가 결정된다 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손쉽게 맛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를 제공해 주는 이는, 권세가 여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정말 가다랑어포를 고려에서 만들 수 있습니까? 지금 검색해서 쭉 보니 일단 가다랑어가 남해안 쪽 일부에서만 잡힌다는데 주인공, 아니, 몽주 씨가 있는 한양부에서는 너무 멀리 있잖습니까.”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며 말한 두신의 지적에 재상이 좋은 지적이라는 듯, 오케이 손짓을 하며 몽주에게로 몸을 돌렸다.
뭐, 그쯤이야.
“거제도에서 한양부까지 오 일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네?! 에이, 보름이면 모를까, 오 일 안에 어떻게 옵니까. 그리고 여름 같은 때면 오 일 동안에도 충분히 상할걸요.”
몽주는 딱히 반론을 하진 않았지만 굳건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들에게는 그저 설정이나, 그로서는 고려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직접 경험했기에 그저 강하게 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된다고 치죠.”
“…….”
“그리고 실제로 됩니다. 생각보다 수운을 통한 유통망은 많이 발전되어 있어요.”
“뭐, 고려가 해상 강국이랄 수 있긴 하지만…… 좋습니다. 가능하다고 치죠.”
재상의 태클은 의외로 빠르게 멈췄다. 몽주가 보기에 그는 어차피 주된 부분은 비누와 로션 쪽이고, 가다랑어포는 그리 큰 변수가 아닐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만들 줄 아시는 건지……?”
“비누나 가다랑어포나 이론적으로는 할 줄 알죠. 하지만 여기서 미리 해 볼까 합니다.”
“네? 여기서요?”
재상은 방 안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요, 따로 장소를 구해야겠죠. 그래서 말인데요, 두신 씨. 죄송하지만 작업장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충분히 사례는 하겠습니다.”
“저희 공장요?”
두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아무래도 비누와 로션을 만들려면 잿물도 만들어야 하고 여러 화기도 사용해야 하는데, 이런 주택단지 내에서 그런 걸 할 수는 없잖아요. 신고당할 수도 있고요. 제 추측인데 두신 씨의 작업장이면 화기나 위험물 취급에 관한 허가를 미리 얻으셨을 것 같아서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모든 작업장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도구나 장비는 모두 가져갈 것이니, 한편에 공간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놀이에 뭐 그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은 표정의 두신이 반쯤 설득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쯤에서 재상이 끼어들어 빌리는 대가에 대해 말을 꺼내었고, 몽주는 적당한 비용을 지불하기로 하고 동의를 얻어 내었다.
“근데 이론대로 잘될까요?”
두신의 물음에 몽주로선 대답할 게 없었다.
‘해 보면 알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