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0)
운구의 행렬은 10리에 이르렀다.
그 거리에 눈물과 통곡 소리가 가득했으니, 개중에는 우는 척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서글퍼서 우는 자들도 많았다.
물론, 가장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자들은 순장될 처지에 놓인 10여 명의 관리와 50명 가까운 수의 군병, 그리고 궁녀들이었다.
목적지는 자금산(紫金山)의 효릉이었다.
이미 마황후의 시호인 효자(孝慈)를 따서 만들어진 능묘에 홍무제 또한 합장하게 된 것이다.
하여, 효릉은 아직 개국황제에 걸맞은 웅대한 능묘는 아니었지만, 이제 더욱 크고 웅장하게 조성될 것이니, 이미 20년에 걸친 확장 공사가 계획되어 있었다.
응천부의 백관들은 물론, 나라 안 모든 관리들이 상복을 차려입은 그 즈음에도 모든 관리들이 국상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천자의 죽음은 다음 천자의 즉위와 맞닿아 있는 바, 차기 천자를 위한 준비에 매진하는 관리들 또한 많았다.
“옥새육보(玉璽六寶)를 확보했습니다.”
응천부의 높은 곳에서 멀리 자금산으로 향하는 운구 행렬을 보던 왕강은 그 보고에 몸을 돌렸다.
동야 소속의 내시 6명이 각각 작은 상자를 받들고 있었다.
왕강이 턱짓을 하자, 그들은 일제히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비단에 쌓인 무언가가 하나씩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도 왕강이 먼저 다가가 확인한 건 가장 화려하고, 멋지게 장식된 상자 안에 든 보물이었다.
황제봉천지보(皇帝奉天之寶).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국옥새를 대신하는 최고의 옥새.
오직 즉위식이나 천단에 제사를 지낼 때만 쓰는 옥새였다.
조심스럽게 들어 전후좌우를 살핀 왕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황제봉천지보를 포함하여 그 여섯 개의 옥새들은 홍무제가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정통성의 상징으로 삼은 보물들이었으니, 그 상징적인 의미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잘 모셔 두어라. 오늘 밤에 태자 전하께 바칠 것이다.”
아직은 태자 전하라 부르고, 정식적으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오늘 밤 이후 태자는 더는 차기 보위자가 아닌, 실질적인 천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세상을 여는 길이기도 하지.’
왕강의 미소는 그런 득의를 가지고 있었다.
태자를 배경으로 동야를 손에 쥐어 명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왕강은 희열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가 보기에 그저 시간문제였…….
‘아니야. 시간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지. 유약하신 태자 전하라면 아우들을 숙청하는 것에 유유부단하실 가능성이 커.’
그가 명나라의 실권을 얻는 건 태자의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달라질 것인 바, 왕강 태감은 태자의 정통성과 권력에 경쟁자가 남아 있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 경쟁자의 후보로는 당연히 망제(亡帝)의 다른 아들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연왕 주체가 가장 주의해야 할 자였다.
물론, 동야는 이미 선제(先帝)의 귀천 직후부터 다른 황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중이었으니, 왕강 태감은 그날도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조용히 있다고?”
“네, 응천부 방향으로 제사를 지낸 걸 제외하면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합니다.”
자신의 왕부에 나간 모든 황자들은 천자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는 천자의 뜻으로, 왕부에 나갈 때부터 강조하길 자신이 죽더라도 영지를 떠나지 말고, 다스리는 데에 열중하라 명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고 이렇게 조용히 있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황자들은 그럴 수 있어도, 연왕은 아니었다.
서창을 세운 연왕이라면 지금쯤 응천부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전념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아. 연왕이 지난 요동과의 전쟁에서 많은 군력을 잃은 이후, 그 세를 복구하지 않고 있다지?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앞서 연왕부에 대한 여러 보고들도 연왕이 자중……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의기소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충분히 그럴만한 재력이 있음에도 줄어든 군력을 복구하지 않는 건 아무리 자중하고, 의기소침했다고 가정해도 이해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혹시 우리 몰래 어딘가에 군력을 숨겨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왕강은 자신의 짐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듯이 동야에 속한 태감들을 둘러보며 시선으로 물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저희가 연왕부만큼은 다른 왕부처럼 속속들이 파헤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하나, 설령 군력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그리 큰 규모는 아닐 것입니다. 1, 2천의 군병들을 몰래 유지하는 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군병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대사를 소문도 나지 않게 진행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으음.”
태감들의 반응에 왕강은 침음을 흘리며 자신의 생각을 다시 되짚었다.
확실히 약간의 군병들을 숨기는 건 가능하겠지만, 유의미한 규모의 군력을 감추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왕강은 연왕부에 대한 우려가 조금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좋아. 아무런 정황도 없는 걱정에 몸을 사리다가 오히려 큰 우를 범할 수 있겠지.”
“하면, 계획대로 시행하시렵니까?”
“그래야지. 음, 첫 대상은 누가 좋을까. 처음부터 연왕을 겨누면 너무 티가 나려나?”
태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첫 대상은 태원의 진왕(晉王)이 좋을 듯합니다.”
“삼황자 주강 말인가.”
“예, 진왕의 성품이 유약하기 그지없고, 세력도 약한 편이라, 감히 응천부의 소환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태원의 진왕은 연왕부에 가까워 그간 연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니, 그를 불러 폐위시킨다면 연왕부를 고립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오, 그렇기도 하겠군.”
왕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직 태자의 윤허를 받지는 못했지만, 동야는 왕부를 가진 황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 중이었고, 설령 태자 전하의 허락이 없다 하더라도 강행할 생각이었다.
함부로 죽이지만 않는다면, 응천부에 불러 놓고 권력과 작위를 폐하는 건 태자 전하께서도 겉으로는 나무랄지라도 속으로는 만족하실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데,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그리고 어떤 명분으로 하든, 결국 연왕은 그것을 숙청의 시작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면, 차라리 연왕부를 먼저 노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아니야.”
앞서 먼저 연왕을 언급한 왕강이었지만, 그 반론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연왕을 너무 모르고 있어. 서창 때문에 제대로 파헤친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만약 연왕이 태자 전하의 소환에 불응한다면, 곧장 분위기가 험악해질 터인데, 연왕부가 힘을 숨기고 있을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 대응을 구상하는 것에 실수가 있을 수 있어.”
“하면, 다른 황자들을 숙청하는 중에 연왕부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진행해야겠군요.”
“그래, 지금까지는 너무 두드러질 것이 우려되어 조심스러웠으나, 이제는 조금 드러나도 상관없겠지. 그러니 어떻게든 연왕부의 사정을 알아내. 그게 최우선이야.”
“알겠습니다.”
동야의 태감들이 물러나자, 왕강은 속이 후련한 표정으로 앉은 자리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조금 전 연왕부를 철저히 조사하라 명한 것 자체가 꽤 속 시원한 일이었다.
그간 연왕부를 조사하게 하면서도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해야 했던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주체 황자, 조금만 기다리시오. 당신의 헛된 꿈을 부숨으로써 이 나라가 더욱 강대해진다면 그것도 썩 괜찮은 일 아니겠소?’
* * *
홍길도의 눈에 고려국왕의 몸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몸을 떨고 있었다.
탐라공이 보낸 장계를 쥔 손끝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이, 이것이 진정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오?”
어찌 보면 불쌍한 모습이었다.
일국의 왕이 나라가 전쟁을, 그것도 명나라라는 거대한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건 놀라움 이전에 충격이었고, 수치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고려국왕은 하나의 상징일 뿐, 나라의 주인이 아닌 왕도의 주인에 불과함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요동공도, 유구공도 동의한 일이오?”
“그러합니다.”
홍 청장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유구공은 어차피 의견을 개진할 위치가 아니었고, 요동공은 생각보다 쉽게 주군의 뜻에 동의해 주었다고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 명나라와 어떤 식으로든 크게 부딪칠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지난 요동국과 연왕부의 전쟁에 숨은 속사정마저 아는 인물이라면, 연왕의 생존 싸움에 고려가 개입할 가능성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자가 극히 적을 뿐이지만 말이다.
봉왕청장이 생각을 가다듬는 사이에 고려국왕 왕요는 심호흡과 더불어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탐라공은 충분히 승전할 수 있다 써놓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소.”
“…….”
홍 청장은 지금 고려왕이 자신에게 그의 주군의 판단을 평가하라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잠시 어이없었지만, 이내 금상의 사정을 생각해 보니, 그와 같은 물음을 던질 곳이 딱히 없기에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탐라공 저하는 승산이 없는 전쟁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분입니다. 탐라군의 기조가 이미 이긴 후에 싸우는 것이기도 하지요. 아마 조금 더 자세히 작계를 알릴 수 있었다면, 전하께서도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실 수 있었을 겝니다.”
“대체 그 작계가 무엇이오? 청장은 알고 있소?”
홍길도도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나, 고려왕이 모르는 큰 줄기는 알고 있었다.
“혹여 군의 기밀을 누설하는 일이 될 수 있어 입을 열기 곤란합니다. 다만, 명나라와의 전쟁은 고려 홀로 수행하는 게 아닌 만큼, 아마도 이 전쟁 이후에 세상은 천지개벽할 것입니다.”
“…….”
금상은 도통 이해 못할 표정을 보였지만, 홍길도는 그쯤에서 말을 아꼈다.
고려왕이 즉위 이래 넓은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우치게 하는 것도 당장 홍길도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이번 전쟁을 통해 그가 충격과 더불어 깨닫길 바라는 게 나았다.
하여, 어쩔 도리가 없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쯤에서 마감하였고, 본디 홍 청장과 고려국왕이 긴밀히 논의할 수 있는 이야기로 주제가 전환되었다.
물론, 전쟁과 아주 무관한 주제는 아니었다.
“하면, 홍익회의 창설은 전후로 연기되는 것이오?”
“아닙니다. 오히려 앞당겨질 것입니다.”
“정말이오? 그게 가능하겠소?”
“어차피 전장이야말로 홍익회의 활동이 가장 필요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홍익회의 창설과 활동에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하여 일반 백성들의 구휼 활동은 뒤로 미루고, 전상 군병에 대한 구조와 조력 활동을 먼저 시행하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홍익회의 설립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음…….”
고려왕 왕요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홍익회(弘益會).
현대 한국인들이 듣는다면 기차와 관련된 어느 수익 단체를 떠올릴 이름이지만, 당대에는 고려 왕실이 주관하는 구호 단체의 이름으로 정해졌다.
한마디로 고려판 적십자회.
평시에는 백성들을 구휼하고, 전시에는 일종의 의무(醫務) 군단으로 복무하는 것을 창설 목표로 둔 홍익회는, 몽주의 머릿속에서는 국제적인 활동, 비단 고려 백성들을 넘어 범인류적인 활동을 하는 기구로 발전하길 바라고 있었지만, 아직은 창립조차 되지 않은 ‘관부’였다.
왕요가 홍익회의 창설에 기대가 많은 것은, 그것이 탐라공이 고려 왕실에 약속한 세 가지 가치의 중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고, 그중에서도 ‘돈’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예와 존경이야 군 복무나 여러 다른 활동으로도 얻을 수 있겠지만, 제후들의 지원과 왕도의 작은 세수 외에 고려 왕실이 재원을 굴릴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의 역할을 홍익회가 맡게 될 것이었다.
다만, 왕요가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홍익회가 관부이면서 관부가 아닌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인데, 재단 법인이자 비영리 법인으로 활동하게 할 계획이지만, 아직 법인이라는 개념이 탐라국에서조차 제대로 서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국왕이 그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여, 실제로는 더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홍익회를 꾸려 나갈 생각이었는데, 명나라와의 전쟁이 급히 다가오면서 홍익회는 일단 관부의 형태로 출범하고, 나중에 법인화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오. 더 솔직한 속내를 말하자면, 탐라공이 우리 왕실이 재원을 가지는 걸 꺼리는 건 아닌지 의심…… 흠흠, 뭐, 그런 생각도 들고 있소.”
“그 짐작이 아주 그른 건 아닐 것입니다.”
“…….”
왕요는 조심스럽게 꺼내 보인 속내를 홍 청장이 곧바로 인정하자,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전하, 홍익회는 아주 큰 단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활동을 위해 막대한 재원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홍익회의 운영 모두를 고려 왕실에 부여한다면 그 홍익회가 설립 목적에 맞게 굴러 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섭섭한 마음이 드신다 해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왕실이 그만한 신뢰를 아직 주지 못한 것은 인정…….”
왕요가 표정을 바꾸며 딱딱한 분위기를 전환하려 하였으나, 홍 청장이 다시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무리 고려 왕실이 훌륭한 모범을 보인다고 해도, 탐라공 저하는 절대로 홍익회를 고려 왕실에 온전히 쥐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전하께서 이해하기 어려워하시는 그 복잡한 형태의 단체를 세우는 것이 신뢰를 도탑게 만들기 위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홍익회의 수장은 당연히 미정인 상태지만, 고려왕 본인이든 다른 이이든 어쨌든 왕실 인사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나, 이사단이라는 홍익회의 운영 조직에는 제후들이 선임한 자들이 여럿 참여하게 되어 있었으니, 만약 왕실에서 홍익회의 재원을 횡령하거나, 위수하려고 한다면 자연히 그 사실이 제후들에게 전해지게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탐라공은 참으로…….”
왕요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정이 없다든지, 왕실에 대한 충성이나 존경이 없다든지 하는 말은, 그런 말이 통하는 자에게나 할 수 있는 법이었다.
하나, 탐라공이든, 눈앞에 있는 홍 청장이든 그런 게 통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으니, 그간 탐라공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음에도 별달리 관계가 진척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하, 부디 이 나라의 왕실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날을 잊지 마십시오. 이는 협박이나 경고가 아니라, 충언입니다. 아무리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왕실을 지탱하고, 장차 더 화려한 미래를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탐라공임을 가슴에 새기셔야 합니다.”
홍 청장의 말이 들려옴에, 금상 왕요는 처음에는 숨마저 멈추고 있다가 천천히 다시 호흡하였다.
강압적인 언사인가 싶어 놀랐던 마음이 그것이 아님을 알고 안도한 것이었다.
“알겠소. 여가 아직 미력하여 탐라공의 깊은 뜻을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앞으로도 그대가 이해를 도와주시오.”
“망극하옵나이다.”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홍길도 봉왕청장을 보며, 금상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새삼스레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왕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지 절감한 탓이었다.
‘어쩔 수가 없구나. 탐라공을 믿는 것이 정녕 고려를 위하고, 왕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로다.’
고려왕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읍하는 홍길도도 따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로군. 왕요는 주제를 파악할 줄은 아나, 탐라공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모자라. 부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 왕요의 좁은 시야도 조금이나마 넓어지길…….’
* * *
장가구의 북쪽에서 거의 10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큰 계곡은 거대한 군사 기지로 변해 있었다.
물경 5만이 넘는 군병들이 머물고 있고, 그들을 위한 병참과 군마들이 가득한 그곳은 또 하나의 고을이었다.
다만, 연왕부의 다른 고을과 달리, 그곳에는 평범한 백성들이 일절 살지도, 출입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달랐고, 그것이 그곳의 비밀을 지키는 근원이었다.
왕부의 순시를 명분으로 몇 곳을 거친 끝에 장가구에 닿았고, 밤을 틈타 그 비밀 군사 기지에 도착한 연왕은 새벽에도 자지 않고 그를 기다려 군례를 보이는 군대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이전에도 그의 군력은 강대했지만, 지금은 그때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욱 강력해졌다.
과거 명나라의 대 고려 교역을 전담했을 때에 비해서는 다소 손색이 있긴 하나, 연왕부의 수입 중 많은 부분을 쏟아부었고, 거기에 장가구의 금광에서 얻은 수입 대부분을 투입하여 기른 군력이었으니, 더 강대해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곤란했을 것이다.
“구복, 화포 훈련은 어찌 되고 있느냐?”
군병들에게 오랫동안 사례하고, 그를 위해 준비한 군막 안으로 들어간 연왕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장수 구복을 향해 물었다.
“아직 훈련의 기간이 길지 않아 모자란 부분이 있습니다만,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 하면, 고려가 쓰지 못할 화포를 보낸 건 아니로군.”
“그거야 이미 화포를 전해 받을 때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쩝…….”
연왕은 쓴 입맛을 지우는 양 입맛을 다셨다.
수은과 생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명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연왕은 독립을 위한 전쟁을 할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내심 명나라 보위를 손에 넣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긴 하나, 그도 그것 이전에 살아남는 것이 우선임을 인정했기에 그리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독립이든 제위든 당장 급한 게 군력이라는 건 동일했고, 급하게 군력을 높이는 방안 중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화포의 수급이었다.
명나라에도 화포가 있고, 여러 사출 방식의 병기가 있긴 하나, 고려의 화포를 경험한 그의 눈에 그런 ‘구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자연히 고려에 화포의 도입을 타진하였다.
무기의 도입이라는 건 다른 물산처럼 단지 값이 맞고, 생산이 가능하다고 추진될 수 있는 게 아닌 바, 그리 길지는 않으나 격렬한 논의 끝에 요동국에서 쓰고 있는 것들 중 100문의 화포 도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추가로 연왕은 막대한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하였으니…….
“그 새나두라는 곳이 여기서 얼마나 멀지?”
“700리에 이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납목륜강(시라무렌강) 유역의 끝자락까지는 400리 정도이지요.”
“가깝군.”
“저하, 어차피 당분간은 노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화포는 우리 군력을 배로 높일 만한 무기입니다.”
장수라 그런지 구복은 고려의 화포에 크게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구복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차피 노리고 싶어도 노릴 만한 힘도 없었고, 당장 내년에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처지에, 그 땅에 미련을 가지는 건 정말 미련한 짓이었다.
다만, 만약 살아남아 독립까지 취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쩌면 굉장히 후회스러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안산 산맥과 서납목륜강 유역을 경계로 그 이북마저 고려가 취한다면 연왕부는 동과 북으로는 고려에, 서와 남으로는 명나라에 갇힌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급한 게 살아남는 것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살아남은 뒤에는 자신과 연왕부의 발목을 붙잡을 거래였다.
“저하, 길게 보십시오. 살아만 남는다면 하북과 하남, 그리고 관중과 관동의 땅으로도 능히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고려의 도움이 없이도 기회를 보아 중원의 일통을 노릴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고려…… 와도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복은 말을 하다 조심스레 마무리하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연왕은 그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게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고려와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고려의 존재감은 과거와는 차원이 달라지고 있었으니, 구복의 말처럼 되기보다는 고려에 의존하는 연왕부의 미래가 더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연왕이 그런 암울한(?) 미래상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사이, 문득 구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데, 그 일은 언제 시작하시렵니까?”
“아마도 조만간이겠지. 태자 형님께서 본색을 드러내시지 않겠는가.”
태자 형님이 절대 권력을 위한 기치를 높이 세울 때가, 곧 그 권력에 치명타를 선사할 최적의 순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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