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1)
* * *
네 필의 말이 힘을 쓰자 커다란 신형 고로가 기울어졌고, 이어 그 안에서 펄펄 끓고 있던 쇳물이 쏟아졌다.
“지화자!”
철소의 소장이 기분 좋게 외치자, 장인들이 환호하였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방원도 한껏 미소를 띠었다.
아직 탐라 상단의 철소에도 몇 군데 설치되지 않은 신형 고로가 유덕사의 철소에서 첫 생산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잠깐 동안 흥에 겨운 것도 잠시, 철소의 일꾼들은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쇳물을 쏟아 냈다고 끝나는 건 아니니, 벽돌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흘러가는 쇳물을 받아 철괴와 철판의 형태로 가공을 하는 작업이 급했다.
이제까지 유덕사에서 생산되는 주철은 크게 삼분되어, 하나는 유덕사에서 자체 소비하고, 남은 둘은 각각 요동국 당국과 탐라 상단에 팔려 나가고 있었다.
다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섯으로 나뉘어 그중 하나만 유덕사에서 소비하고, 다른 넷은 둘씩 요동국과 탐라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고려를 받치는 양대 제후국들이 그만큼 철을 많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방원은 얼굴이 띠고 있던 미소를 거두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왕부와 관련되어 무언가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건 이미 전에 아내로부터 전해 들은 바 있었다.
아내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었기에, 당시에는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아니, 탐라공택 내 분위기마저 일변했다 하니, 제법 큰일일 수 있겠다 여기긴 했으나, 설마 그것이 명나라와의 전쟁까지 담은 큰일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원에게 그 일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그 전쟁의 주역이었으니, 그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탐라국 통무총리로부터 철 생산 증산에 대한 협조 요청이 있었을 때, 그의 회사가 탐라국에 속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임하였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 요동국 당국으로부터 생산된 철의 납입을 요구받았을 때도 바로 응해야 했다.
덕분에 유덕사의 모든 장인과 일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게 되었고, 더 많은 이문을 얻을 수 있던 물산의 생산을 뒤로 미루게 되었지만, 방원은 물론 가장 낮은 일꾼까지도 불평을 하는 건 볼 수 없었다.
이제는 비단 탐라국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마도 고려의 거의 모든 백성들은 작금의 고려가 과거의 고려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자신들이 어떤 행운의 시대를 맞이했는지를 깨닫고 있었기에 그 고려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얼마간의 고됨은 충분히 인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라와 백성이라…….”
방원은 스스로 나라와 백성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임금과 백성을 주인과 객으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얕은 시야였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물론, 유자의 가르침에 백성들의 중요함을 역설한 구절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치자의 입장에서 그 붕 뜬 이야기는 그저 성세에나 가능한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다.
“아니, 고려가 성세에 이른 것인가.”
방원은 문득 중얼거려 자문하니, 아직 확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탐라에서 배우길, 성세는 평세의 회복과 유지를 위한 노력이 우연히 닿을 수 있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만약 이번 싸움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만 있다면…….”
고려의 치세가 첫 성세의 순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방원의 머리에 스쳤다.
그 즈음에 방원은 앞서 발걸음을 옮긴 끝에 함주의 포구가 보이는 곳에 있었으니, 수행원들의 의아한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포구의 복잡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덕사의 철물을 포함하여 근래 활기를 되찾은 함주의 산물들이 많은 배들을 통해 바다로 나가니, 그 배들은 요동국과 탐라국에 닿아 고려의 국력을 키우는 바탕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모습은 비단 함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인 바, 과거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힘의 집결과 운용이 명나라를 상대로 발휘될 것이 절로 기대되었다.
“나는 나의 회사를 나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다.”
문득 방원이 중얼거림을 넘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하니, 수행원들이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바라는 시선을 던졌다.
“후후, 그렇게 알아 두라는 말이다.”
부연 없이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방원의 속마음은 유덕사를 통해 또 하나의 ‘탐라국’을 건설하길 바라는 간절함이 가득하였다.
* * *
그의 꿈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저 도관을 열어 제자를 받아, 먹고 사는 것이 전부였다.
하나, 무명인 자가 홀로 산속에 허술한 도관을 연다고 제자들이 알아서 생기는 것도 아니기에 그는 돈과 명예를 얻고자 사천을 종횡하였다.
돌아다니며 도학을 강연하고, 도술로서 사람을 구제하겠노라, 그를 통해 자신을 따르는 자를 구하여 제자를 얻겠노라 마음먹은 것인데, 실상은 탁발승이 하는 짓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하나의 우연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날도 어느 고을에 선 장터에서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도학을 강연하고, 겨우 동냥이나 다름없이 얻은 동전 몇 푼으로 객점에서 한 끼를 때우는데, 갑자기 그 객점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나중에야 자세히 안 것이지만, 그 객점의 2층에 다른 고을에 사는 부자가 쉬고 있었는데, 재산 상속과 관련된 문제로 그 부자가 괴한의 급습을 받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습격은 실패에 돌아갔고, 괴한은 1층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 하였는데, 잡으라는 고함 소리에 종기신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곁을 스쳐 도망치는 괴한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한데, 그 주먹이 어떻게 합이 맞았는지 괴한의 옆구리에 적중하였고, 그의 몸이 붕 떠서 객잔의 구석에 처박히기까지 하였다.
얼결에 괴한을 잡은 종기신은 부자의 감사를 받으며 큰 사례금을 약속받게 되었는데,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멀쩡하던 부자가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일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독살 시도도 했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고을의 유일한 의원이 하필 그때 부재중이었던 것이다.
하여, 그를 데리고 의원이 있는 다른 고을로 데려가기 위해 부자의 심복들이 난리를 칠 때, 종기신은 그때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함을 깨닫고 나섰다.
자신이 해독할 수 있다고 나선 종기신은 오래전에 그가 산에서 독버섯을 잘못 먹었을 때, 스승께 받은 수타법(手打法)을 그 부자에게 시행하였다.
앞서 자객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기염을 토한 바 있는 터라, 종기신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부자의 심복들도 그것만을 믿고 있지는 않았기에 다른 고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타법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그 마차가 다른 고을의 의원 앞에 당도하여 심복들이 마차문을 열었을 때, 이미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싶었던 부자가 손수 일어나 마차에서 걸어서 내리는 기적이 있었다.
그 일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니, 종기신은 부자로부터 사례금을 받는 걸 넘어 정기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도술을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그렇게 오 년이 지나, 종기신은 사천성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도관에는 수백의 젊은 제자들이 도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딱!
“아이고……!”
“그래서 네놈이 정말 그 부자를 살렸다는 게냐? 어디서 거짓부렁이냐?”
“제가 등 부자의 막힌 혈을 타통하고 그 덕에 그가 깨어난 건 사실입니다. 다만…….”
“다만 뭐?”
“그 부자가 깨어나자마자 절 보더니, 갑자기 자기와 장사를 하자면서…….”
“오호, 둘이 짜고 세상을 속였구나!”
장삼봉은 제자이면서, 제자 아닌 종기신이 꺼낸 짧은 말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였다.
알고 보니 그 등(鄧)씨 성의 부자야말로 대단한 자였다.
그가 정말 종기신의 수타법에 막힌 혈이 풀려 깨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것이 돈벌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걸 보면 상재가 이만저만인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돈은 좀 벌었느냐?”
“예? 예, 허허, 일 년에 은 백 근은 그냥 남습니다.”
종기신은 조금 전까지 야단맞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돈 이야기에 웃음을 흘렸다.
제자들로부터 받는 정기적인 수련비에, 근방 상인들로부터 거두는 보호비, 그리고 관부의 일에 협조하면서 관인들로부터 얻는 기부금까지, 그 크고 작은 수입들은 등씨 부자와 나누어도 그를 큰 부자로 만들 만했다.
딱!
“에고……!”
장삼봉의 매운 꿀밤에 종기신은 다시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면, 그냥 돈이나 벌고 있지. 무엇하러 고려 놈들과 손을 잡은 게냐?”
“예? 스승께서 그들에게 절 소개해 주신 거 아닙니까?”
종기신은 고려의 신하들로부터 들은 괴이한 노인네 이야기에 곧바로 스승을 떠올렸고, 그것이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큰 이유가 되었다.
“이놈아, 어차피 네놈이 큰일을 도모할 작정을 하고 있었지 않았느냐? 아니었다면, 아무리 내가 네놈이 있는 곳을 그놈들에게 알려 줬어도 네가 고려와 손을 잡았겠느냐?”
“그야…… 그렇지요.”
“왜 그런 마음이 생긴 게냐?”
스승의 물음에 종기신은 문득 목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피며 옷맵시를 단정히 하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스승님, 지금 사천성의 현실은 참으로 처참합니다. 원의 잔당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사천의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스렸음은 스승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한데, 그 원을 무너뜨리고 사천을 차지한 명 또한 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이 가혹하게 수탈하여 멀고먼 응천부로 가져가니, 천혜의 옥토를 가진 사천땅에 굶주린 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어찌 도법을 연마한 자로서 이를 두고 비분강개하지……! 아이고……!”
딱!
다시 한 번 그의 이마에서 경쾌한 타성이 터져 나왔다.
이마를 부여잡은 종기신은 왜 자꾸 같은 곳만 때리는 건지 스승을 원망하였다.
지금이야 야밤에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도관의 안처라 상관없는데, 이마에 난 혹이 내일 아침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한동안 관을 깊이 눌러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종기신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 수탈하는 관인들과 결탁해서 잘 먹고 잘 살던 놈이…… 솔직히 말해라. 등씨 부자가 부추기더냐?”
“아닙니다!”
“하면, 등씨 부자에게 내줘야 하는 돈이 아까웠던 게냐?”
“…….”
“에휴, 그럴 줄 알았다.”
“그것도 작은 이유긴…….”
딱!
여지없이 꿀밤이 선사되었고, 종기신은 또 잠시 이마를 부여잡고 신음해야 했다.
장삼봉은 그런 종기신은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제자 같았으면 당장에 파문할 일이었지만, 종기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다 내 업보로다.’
그에게 있어 종기신은 그의 혈육일 수도 있는 자였다.
수십 년 도사로서 수양해 놓고도 연정을 이기지 못해 품었던 여인의 아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 여인으로부터 종기신이 그의 아들이라는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반대로 아니라는 말도 듣지 못한 것이 그로 하여금 종기신에게 더는 매몰차게 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비인부전해야 할 도법을 알려 주었고, 그리하여 그가 자신의 제자라 천명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 또한 그의 실수였고, 업보였다.
다만, 종기신이 내세운 명분 자체는 그릇된 건 아니었다.
그가 주로 거하는 바로 옆 호북성에 비해도 사천성은 명나라의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성의 경계를 넘으면 분위기마저 달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랄까.
아무래도 본토 중 가장 마지막까지 명나라에 저항하던 구원(舊元)의 세력이 있던 곳인 탓에 응천부에서 사천성 자체를 배격하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해 보아라.”
“……?”
“네가 네 이득을 위해 봉기한다 하더라도, 결국 백성들이 그 전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게다. 그럴 수 있겠느냐?”
스승이 진중하게 묻자, 이마를 어루만지던 종기신도 고쳐 앉아 진지하게 답하였다.
“해 보겠습니다. 다행히 돌아가는 사정이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이 어리석은 제자, 천신이 주신 기회를 결코 헛되이 잃지 않을 것이고, 제 손으로 세운 명분 또한 거짓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스승이 비웃거나 꾸짖는 대신 짧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종기신은 반색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사천을 도국(道國)으로 만들 것입니다. 백성 하나하나 도학의 예를 따르고, 도법을 연마한다면, 그곳이 진정 무릉……!”
따악!
“아이고오……!”
다섯 번째 꿀밤이 가장 강력했다.
“이놈이, 잘 나가다가 뭔 헛소리를 하는 게냐? 도는 도일 뿐, 나라의 질서가 될 수 없음을 모르는 게냐? 모든 백성들이 평생 선식만 하며 살 수 있겠느냐? 자식을 먹여야 할 부모들이 수양할 틈이 있겠느냐? 이것아, 도사가 도사일 수 있는 건 세상을 꾸려 나가는 수많은 속세인들이 있는 덕이다. 네놈이 진정 봉기하여 나라를 세운다면 너도 더는 도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한심한 것…….”
장삼봉은 혀를 차며 제자를 노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우둔한 것을 그냥 두었다가는 혼자 고생하는 걸 넘어 사천을 통째로 파탄지경에 빠뜨릴 것 같았다.
“……그 고려에서 온 외신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냥 당부의 몇 마디만 남길 생각으로 제자를 찾았던 장삼봉은 아무래도 자신이 제자의 일에 조금 더 개입해야 함을 절감하며 물었다.
* * *
탐라 공택은 늘 많은 관원들이 드나들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문턱이 닳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오고나갔다.
특히 체관청의 관리들은 하루에도 십여 차례 공택을 방문하니, 탐라공 전상의 급보가 그만큼 잦은 탓이었다.
그 즈음에 외국에서 전해지는 장계들, 특히 익문대가 보낸 장계에 담긴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건 전쟁의 명분에 관한 것이었다.
예컨대, 연왕부는 충효의 명분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천자이자 아버지를 독살한 증거를 내세워 태자의 정통성을 공격하고, 태자를 천자로 삼는 명나라에 대항하는 명분을 구축함으로써 짧게는 독립을, 길게는 제위 탈환의 정당성을 얻고자 함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왕의 명분만으로는 그 모든 전쟁 당사국의 참전을 정당화할 수는 없네.”
몽주는 좌우를 번갈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총무회의를 위해 대회의실에는 수십 명의 고관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천성의 종기신은 원명동적(元明同賊)의 명분을 내세웠네. 원나라나 명나라나 다 똑같은 도적이라는 말이지.”
적어도 사천의 백성들에게는 먹히고도 남을 명분이었고, 만약 종기신이 그 명분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 준다면 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다.
“토번의 총카파는 고토회복의 명분을 가졌네. 지난 명나라의 토번 정벌로 인해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것이지.”
명나라가 침탈한 토번의 땅은, 현대 중국 청해성의 남부에 해당하는 암도(Amdo) 지방으로, 백성들의 대부분이 토번인이고, 총카파의 고향이기도 했다.
당연히 암도 지방의 토번인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
“대리국은 왕조 복원과 배신에 대한 보복을 내세웠고, 점파국은 적성을 타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노라 선언할 것이네.”
명나라가 대리 지방에서 저지른 일이나, 안남 지방을 정복하기 위해 명나라가 오랫동안 준비한 일을 생각하면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분들이었다.
“왜국과 남장국은 공식적으로는 참전하지 않네. 그저 그 나라의 백성들이 용병으로 참전할 뿐인 게지.”
사실 더 정확히는 왜국과 남장국 자체가 용병이었다. 남장국은 북부의 왕실이 남부의 ‘분리주의자’를 타파하는 데 도움을 받기로 약조 받았고, 왜국이 어떤 대가를 얻을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이쯤에서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할 게야. 그렇다면 우리의 참전 명분은 무엇이냐는 것이지.”
몽주는 고관대신들을 훑어보며 빙그레 웃었다. 앞서 한 말도 결국은 이제부터 할 말을 위해 깔아 놓은 밑밥이었다.
“고려의 참전 명분은 연왕과의 동맹이네.”
짧은 그 말이 있은 후, 대회의실의 고관대신들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몇몇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이나 몰랐어도 바로 그 사정을 간파한 자들만이 크게 호흡하며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몽주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천몽의 시작 이후, 수없이 역사를 바꿔 왔지만, 연왕과의 동맹 선언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 중에 가장 큰 역사적인 기점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것을 연왕이 받아들였습니까?”
아주 적절한 질문이었다.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인데, 왜 하필 동맹을 명분으로 하느냐는 따위의 질문이 있었다면 섭섭했을 뻔했다.
몽주는 그 적절한 질문을 던진 자, 교관대신 각민성열을 향해 칭찬의 시선을 던지며 답하였다.
“받아들여야지. 우리가 명분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건 결국 그 명분을 적어도 연왕에게는 강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게다가 연왕은 거부할 여유가 없지 않나.”
연왕이 가장 바란 건 아마 상국 명나라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참전이었을 것이다.
그 명분이라면 연왕의 나라와 고려의 관계 또한 자연히 상하의 관계로 이어질 터였다.
명나라의 정통성은 곧 천자에게 있으니, 연왕을 그 정통성 회복의 당사자로 인정한다면, 연왕이 제위를 얻지 못하더라도 당연히 천자의 위상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몽주에겐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연왕이 독립의 기치를 세우는 순간, 연왕은 고려와의 동맹도 선언할 것이네. 이미 대사관 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지.”
그 정도로 구체적인 논의까지 진전되었음을 들은 대신들 사이에 묘한 흥분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명나라의 정통성을 주장한 연왕과 그의 정통성 주장에 손을 들어 주며 동등한 관계를 맺은 고려.
그것은 현 명 태자의 명나라를 부정하는 선언인 바, 이제 고려에 상국은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는 셈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 절차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했다.
연왕의 나라와 동맹을 맺는 건 고려국으로, 연왕의 상대는 고려왕이어야 했다.
하나, 고려왕은 정통성은 갖추고 있었지만 실권은 없으니, 그 동맹의 주체로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 동맹의 논의는 탐라국이 주도하고, 요동국이 협조하는 형태였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고려국왕에게 힘을 주어 그가 동맹의 체결을 이끌게 하는 것인데, 몽주든 요동공이든 아직 고려왕과 고려 왕실에 대한 신뢰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여, 탐라공과 요동공이 고려왕의 대리자로서 동맹의 당사자가 되는 방식을 연구하는 중으로, 그 문제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급한 중에도 진중하게 절차적인 문제를 따지고 있었다.
다만, 그 절차적인 논의와 무관하게 이미 실질적으로 동맹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이번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지금의 탐라국과 고려를 위해서는 물론, 나와 제신들, 그리고 백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물러설 수 없는 전쟁에 나서게 되었네. 이제는 정말 죽을힘을 다 짜내어 싸워 봄 직하지 않겠나.”
몽주의 말에 여타의 이론이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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