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3)
* * *
“음, 이거 굉장하군요.”
탁기는 손에 쥔 잔 안에 든 검은 액체를 내려다보며 감탄하였다.
“처음 마셔 보는 것 같이 말하는구먼?”
“처음 마십니다.”
“그래? 주군께서 첫 수확된 가비라 하여 나눠 주셨잖은가?”
“전…… 영 수상쩍어서 부하 장교에게 줘 버렸습니다.”
“저런…….”
화극 총리가 혀를 차며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는 시선을 보냈다.
“첫 맛도 괜찮지만, 맛을 볼수록 다른 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깊이가 있어. 나는 요새 사탕도 거의 안 넣고 마시네.”
“쓸 텐데요?”
“다른 차도 씁쓸한 맛으로 마시지 않나?”
탁기는 자신이 지금 마시는 가비에서 사탕맛이 빠진 걸 상상하니, 절로 연상되는 쓴맛에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 귀한 가비를 냉큼 부하에게 던져 준 어느 관대한 장군께서는 이리와서 문권을 보시게.”
화극이 손짓하며 말하자, 탁기는 찻잔을 조심스레 들고는 총리 앞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문권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한참 동안 문권을 뒤적거리는데, 장수가 넘어갈 때마다 표정이 계속 변하였다.
“표정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이는군.”
제법 시간이 흘러 탁기가 문권의 마지막 부분을 넘길 때쯤, 화극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건네자, 탁기도 씨익 입가에 큰 미소를 띠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군량은 충분할 것이라 여겼는데, 실제는 반대로군요.”
말은 부족한 점을 지적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군량이 모자란 건 아닐세. 현지 조달이 있지 않은가?”
“약탈…… 은 아닐 테고, 현지에서 구입하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거기 보면 원정 때 가져갈 군자금이 따로 배정되어 있지 않은가.”
통무총리가 통무총사에게 보인 문권은 향후 1년간 탐라국이 총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에 대한 예측이 담겨 있었다.
병기와 화약 같은 군수 물자부터 군병들이 쓸 수건이나 향낭 같은 생활 용품까지, 이미 비축 중인 양에 더해 1년 안에 동원하여 전선으로 수송할 수 있는 예측치까지 총망라된 것이었다.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엄청난 동원 물량에 이 정도의 군자금까지 충당하려면, 전당청이 금고문을 연 것 같군요.”
“왜 아니겠나. 지금 그래서 전당청장의 입이 댓발 나와 있네. 주군께서 가지고 계신 저금으로 금과 은을 반출하게 하셨거든. 근데 알다시피 그 돈은 장부에 적힌 숫자에 불과하니, 실제로는 전당청의 금고만 털린 셈이지.”
“그래도 새 발의 피 아닙니까? 풍문으로 듣자니, 전당청 금고에 황금만 백 통이 있다던데…….”
“백 통씩이나 있을까. 내가 통무총리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나도 모르겠네. 아마 주군과 전당청장만 정확히 알고 있겠지. 근데, 확실한 건 주군이든 전당청장이든 화폐령에 위협이 될 정도로 금은을 책출하지는 않으셨을 걸세. 그쪽으로는 다들 아주 민감하시니까 말이야.”
원정군에 배정되는 군자금은 탐라의 동전이 아니라 칭량 화폐의 형태, 달리 말하면 금은 덩어리 그 자체였다.
“생각해 보면, 명나라와 싸우는 게 다른 곳과 싸우는 것보다 나은 점이 있어. 명나라는 은을 화폐로 쓰고 있지 않나. 다른 곳이라면 약탈을 피하기 위해 일일이 물물 교환하거나 차후에 변상하겠다는 문권을 작성해야 하는데, 명나라에서는 바로 거래가 가능하지 않겠나?”
화극의 말에 탁기가 과연 그런 면도 있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도 지금 탐라의 미곡점에서 쌀을 사듯이 명나라에서 식량이나 여타의 물산을 쉽게 구매할 수 있으리라곤 여기지 않았다.
하나, 적어도 연왕부에서 연왕과의 협상을 통해 군량을 받을 때, 협상의 수단으로써 은자를 제시하면 보다 많은 규모의 군량을 책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만약 점령지에서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급히 군량을 수급할 때도 금은을 쥐어 주면 보다 쉽게 약탈의 불명예를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순위군 집결은 무난히 완료되었다고 들었네.”
“예, 열 중 아홉은 시일 안에 응하였습니다.”
“열에 아홉이라, 그래도 집결령에 불응한 자들이 꽤 되는구먼.”
“시중에 나 있는 소문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양호한 수준입니다. 명나라와의 싸움에 끌려간다는데 겁이 나겠지요. 물론, 불응한 자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입니다.”
전시 모집령에 불응하면 그 전까지 받은 전체 월봉의 두 배를 나라에 배상해야 하고, 추가로 그 죄질에 따라 태형부터 유형까지에 이르는 엄한 벌을 받았다.
“그런 자들은 군법에 따라 목을 베야 하는 거 아닌가?”
“주군께서는 사형을 꺼려 하시니까요. 죽이는 것보다는 죽도록 일을 시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옛날 같으면 집안이 몰락하고 마을 전체가 고생할 일이었는데 말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 어쨌든 병력 동원에는 별문제가 없겠군.”
“예, 육군과 수군을 도합하여, 목표했던 8만의 군병을 투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1년 안에 약 3만의 예비 병력도 준비할 수 있을 테고요.”
물론, 급하면 일반 장정들을 징병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허수아비 군병보다는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군이 중요했다.
하여, 실상 10만 이상의 군병을 투사할 수 있는 탐라군이지만, 2만의 군병을 남겨 방어와 신병 훈련에 투입할 예정이었다.
“탐라군 8만에, 연왕군 6, 7만, 요동군 3만에 후국군과 유구군이 각각 5천…… 거기에 왜국에서 5만 정도. 명나라 남쪽과 서쪽의 제국(諸國)을 제외해도…… 20만이 훌쩍 넘는군. 아니지, 중국 놈들 방식으로 계산하면 여기에 우리 총리방에서 모집 중인 자들 5만쯤은 더 더해야지. 군병은 아니지만 치중의 수송을 위해 고용되는 인력이 그 정도 되니까 말이야. 캬, 엄청나구먼.”
이미 알고 있는 바지만, 새삼 다시 셈하면서 통무 총리는 감탄을 마다치 않았다.
공민왕 시절에 복마군까지 더하여 6, 7만의 군병을 동원하는 것도 힘겨웠던 게 고려의 현실이었다.
한데, 어느새 고려 본토만 따져도 도합 17만가량의 병력과 인력을 전시 동원하는 게 가능해졌고, 그중 11만가량은 오롯이 탐라국의 힘이었고, 그마저도 여유를 둔 것이었다.
“상전벽해야, 상전벽해…….”
화극의 중얼거림에는 감탄을 넘어 감격이 묻어 있었다.
늘어난 인구와 발달된 산업, 그리고 보다 체계화된 정치와 행정이 결합하여 드러난 국력에 대한 감격이었다.
* * *
그 반짝거림이 몹시 매력적이었다.
천단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늘을 향해 옥새를 들어 올림에, 정오의 태양이 머리 뒤에서 쏟아 내는 햇빛에 반사된 황제봉천지보의 눈부심이 그러했다.
‘내가 이 정도로 보위를 원했던가.’
태자 주태가 스스로에게 물으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허약했던 시절엔 스스로 보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겼지만, 실상은 보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미리 대비하는 마음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태자로서 입지를 다지면서도, 스스로 나라의 안위와 부강함을 원할 뿐, 제위 그 자체를 탐하지 않는다 내세웠지만, 그 또한 어쩌면 배우고 익힌 유자로서의 가르침에 따른 모범 답안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단을 내려와 즉위의 조칙을 받아 든 태자는 이제 명나라의 황제, 천자였다.
연호는 성영(成榮).
문무백관이 모두 허리와 고개를 숙여 천자의 존위를 경배하였고, 응천부의 모든 백성들도 모든 일을 멈추고 황성을 향해 절하였다.
‘내 손으로 명나라를 절대 반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이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며 부강의 정점임을 증명해 보이겠노라!’
솟구치는 자부심과 희열에 얼굴색마저 달아오른 새로운 천자는 즉위와 함께, 마치 그의 아비가 그러했듯 잠을 잊은 양 정사(政事)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가 꿈꾸는 관자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는 성영 1년의 가장 첫날부터 준비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던 것이다.
하나, 불행히도 성영제 주태가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마음껏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불과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정치적 파동이 발생했으니, 성영제가 동야의 건의를 받아들인 데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동야의 왕강 태감은 성영제의 즉위 직후, 천자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왕부를 가지고 있는 황자들의 복종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자들을 하나씩 소환하여 천자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을 것을 제안하였다.
천자도 그 제안에 깃든 동야의 의도를 짐작하긴 했다.
황자를 불러놓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강요한 뒤, 그가 거절하면 불충의 명분으로, 그가 받아들이면 그것대로 황자의 권력과 지위를 줄이거나, 폐하고자 기도하려는 것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천자가 동야의 제안에 응한 것은 그가 보기에 이미 자신이 제위에 오른 만큼 황자들도 더는 보위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렇지 않을 자를 꼽자면 연왕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러니 불러다 적당히 권위를 보이고 또 적당히 달래면, 황좌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을 선언할 것이니, 차후에 끝까지 반항하는 황자를 골라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황자들을 소환할 필요를 느꼈다.
동야 또한 은근히 민감한 일이 될 수 있는 황자의 소환에 대해 비교적 쉽게 응한 것을 두고, 천자가 가진 의향을 짐작했지만, 황자를 일단 응천부로 소환할 수만 있다면, 그 후에는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고, 천자도 다시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진심은 감춘 채 황자를 소환하는 일을 시작했다.
첫 소환 대상자는 이미 정해진 대로 삼황자 진왕 주강이었다.
그의 허약한 심지와 얄팍한 기반을 생각할 때 절대 소환을 거부할 리가 없을 것이기에 첫 소환의 대상으로 가장 적합하다 모두가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 그것이 오판이었음이 드러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황자 소환의 영장을 소지한 황성의 관리가 진왕부(晉王府)로 떠난 지 고작 열흘 만에 귀환하였으니, 걸린 시간만 봐도 알 수 있듯 당연히 그는 삼황자를 데려오지 못했다.
삼황자가 소환에 불응한 명분은 칭병(稱病)이었으나, 그걸로 흐지부지될 문제가 이미 아니었다.
천자의 지엄하신 명이, 아마도 인사와 관련된 명령을 제외하면 거의 처음으로 황성 외로 발령된 그 명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천자와 명 황실의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게다가 삼황자 주강이 진정 병환이 있어 오지 못하는 것이라면, 치병 후 황성을 방문하겠다든가, 소환에 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사죄의 말을 전해야 마땅하거늘, 주강의 답신은 그저 ‘유감’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성영제 주태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주강 황자를 끌고 오라는 명을 내렸고, 동시에 그 일을 급히 추진한 동야를 거칠게 훈계하였다.
하나, 그 정도에서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아니었으니, 북쪽으로부터 천자가 아우들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말해 보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권한 일의 결과인가?”
“송구하나이다. 다만, 아직은 수습할 여지가 있사옵니다. 괴이한 소문은 분명 연왕부에서 비롯된 것이니, 연왕을 추궁하여…….”
“추궁?! 대체 어떻게 추궁하겠다는 겐가? 다른 황자들 하나도 불러들이지 못해 놓고, 어찌 연왕을 잡아 추궁할 수 있냐는 말이다!”
천자가 발연대로하여 고함치자, 왕강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다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폐하, 천자의 명에 반기를 드는 자들은 그가 누구고, 어떤 위치에 있든 반드시 벌하여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치세의 초년에 반기를 든 자를 그대로 두는 것은 향후 폐하의 정치가 그 바탕부터 흔들리는 걸 좌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오니, 천자께옵서는 소환에 불응한 주강 황자와 괴소문을 퍼뜨린 주체 황자를 결코 용서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왕강은 자신에 대한 추궁에서 슬쩍 비켜서며, 어떻게든 천자의 분노가 주강과 주체에게 향하도록 말을 늘어놓았다.
하나, 성영제 주태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지금 짐에게 말장난을 하는 것이냐! 이미 주강이 불응한 일이 알려져 여러 왕부의 황자들이 경직되어 있고, 짐이 황자들을 숙청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는 평범한 소식조차도 오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데, 이제 다시 주강과 주체를 잡으려 한다면, 그 즉시 모든 왕부가 짐을 경계하고 적대할 것이니, 이는 황자들 모두를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
왕강은 이론적으로 다른 모든 황자들을 역적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그만큼 보다 확실하게 황자들의 권력을 폐할 수 있는 명분은 없으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명 황실이 다른 왕부들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마다 크고 작은 왕부를 가진 모든 황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지금 천자의 질책 또한 그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인 바, 더 변명할 게 없는 왕강은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눈을 질끈 감을 따름이었다.
“물러가라! 차후에 이 일에 대한 처결을 다시 정할 것이니, 그때까지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중하라!”
성영제의 지엄한 목소리를 들은 왕강은 일순 기운이 쑥 빠지는 기분이었다.
겨우 이 정도 일로 처결씩이나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억울함 이전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세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허탈감이 더 큰 탓이었다.
왕강이 천자 앞에서 물러난 뒤, 지금의 경직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황자들을 위로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니, 왕강은 그와 동야의 입지가 좁아짐을 절감하였다.
하나, 이 또한 요동치는 정국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며칠 후, 연왕의 이름으로 된 포고문이 명나라 곳곳에서 흩뿌려지기 시작했으니, 그 내용이 참으로 망극하였다.
명나라 북상의 연왕부에서 계유년에 표하나이다.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 홍무제]의 사남이며, 현 연왕 주체가 엎드려 아뢰나이다.
소자의 운명이 기구하고 궁박하여, 비(妣 : 돌아가신 어머니)를 일찍 여읜 뒤로 황실의 황량함 속에서 의지할 데 없이 성장하였으나, 돌아가신 선제의 엄중함과 다정함에 힘입어 마침내 연왕부를 맡기에 이르렀나이다.
왕부를 다스림에 천 가지 수심과 만 가지 고민이 날로 사무쳐 몇 백억 번이나 마음속에 초조함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연왕부를 다스림에 있어, 심력과 진력을 잠시도 쏟아붓지 아니하지 않은 것은 선제께서 소자를 가르침에 있어 왕부의 백성들을 소자의 백성처럼 여기며 다스리라 하셨으니, 실로 왕부를 맡은 이래로 그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아니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왕부의 흙은 백성들의 살이요, 왕부의 물은 백성들의 피이니, 이것을 소자에게 알리신 선제의 은혜는 천자의 성은이며, 친부의 다정이었나이다.
하여, 선제께서 명하시어 당신의 죽음이 있던 날에도 장례와 묘소를 찾지 말라 하신 명을 듣고, 뜨거운 눈물과 한탄을 누르며 왕부를 벗어나지 아니하였고, 그저 응천부 황성을 향해 열두 번 절을 했을 따름이옵니다.
모든 슬픔과 울음을 왕부와 백성들을 다스림으로써 씻는 것이 선제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여기었으니, 소자가 걸었고, 앞으로도 걸을 길은 오직 그 길뿐이며, 그것이 황실의 지엄함에 이바지하는 길이라 여겼나이다.
그렇기에 결코 작지 않은 의문이 전해짐에도 소자는 그 소식을 전한 자를 오히려 꾸짖고, 매를 때려 감히 심중에 파문을 일으킨 것을 훈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 근자에 이르러 신제 주변의 간신들이 함부로 날뜀에 더는 눈을 뜨고 봐줄 수가 없게 되었으니, 혈육의 정마저 끊기를 기도하는 자들에 대한 분개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이는 나라의 정치를 가름하는 법도의 문제이기 전에, 대저 천자께서 저희 형제를 낳으시어 만들어 주신 천륜의 문제이니, 오호, 통재라!
군신지간과 부자지간은 목을 베는 도끼 앞에서도 상세히 아뢰어야 하는 것이니, 효(孝)로써 돌아가신 선제를 위해서도, 충(忠)으로써 받들어 모시는 신제를 위해서도 이 변변찮은 변경왕(邊境王)은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후략)
천자에게 고하는 글의 형태를 띠면서도, 글자를 조금 아는 백성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쓰인 그 포고문이 공개되자, 명나라의 여론과 황성 안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물론, 가장 크게 뒤집힌 것은 명나라의 운명인 바, 나라 안이 온통 온갖 종류의 열기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건 계절이 여름에 접어든 것과는 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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