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5)
* * *
“5대가 가장 고생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였습니다!”
기진맥진한 중에 토해 낸 그 말은 재수 없음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그런 소리는 말라고 하고 싶지만, 나도 생각이 다르진 않아. 허허,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싶네.”
묘덕문 대원의 투정을 타박하던 익문 4대 김견 대장도 세수를 한 것처럼 묻어 있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실소하였다.
익문 4대가 있는 곳은 대리의 북쪽 거의 500길미나 떨어진 탕구라 산맥의 어느 계곡이었다.
당금 토번이 영유하고 있는 영토의 동쪽 끝이자, 명나라에게 빼앗긴 임도 지방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라는데, 사실 처음 온 익문대의 시선에는 어디가 탕구라 산맥이고, 어디가 아닌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사방에 널린 게 온통 높고 험한 산이고, 그 사이의 깊은 계곡이었으니, 산의 맥(脈)이라고 표현하기가 무색했던 것이다.
“고려의 산이 그립습니다. 고려의 산은 험하다 해도 오르지 못할 것 같지가 않은데, 이 동네 산들은 바라보는 것만 해도 아찔합니다.”
백두산을 가져다 놔도 동네 뒷산처럼 보일 곳이었다.
물론 해발 높이만 따지기에는 ‘티벳 고원’의 해발 높이가 높으니, 객관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백두산을 평균이라 쳐도 그런 산들이 수두룩하게 놓여 있었다.
“이제 숨을 좀 돌렸으면, 넋두리는 멈추게. 저 승려들 보기에 민망하니까.”
“…….”
그들을 안내해 준 토번 불교의 승려들도 지치고 땀을 흘리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익문 4대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굉장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긴 했지만, 겹겹이 천을 두른 법복을 입은 채 나막신 같은 신을 신고 고산유곡을 앞장서 이곳까지 익문 4대들을 이끌고 왔으니, ‘코르크’ 밑창이 있는 가죽신에 질 좋고 가벼운 면 옷을 입은 익문 4대들이 힘들다 투정하기 민망했던 것이다.
게다가 익문 대원들 모두가 상당한 수준의 훈련을 통과한 자들임을 생각하면 토번 불교 승려들이 무슨 신비한 비법이라도 익힌 건가 싶었다.
물론, 토번의 땅이 높아 상대적으로 선선한 곳이긴 해도, 여름에 접어든 계절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쉬고 있으니, 토번 승려들 중 선임인 자가 다가와 무어라 말했다. 명나라 말을 거쳐 전해진 그 말은 그만 쉬고 가자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그들의 왕이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도 있다면서…….
익문대들은 좀 더 쉬고 싶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도 다른 사신이 주군보다 늦게 오면 미운 마음이 들 것이기에 몸을 일으켰다.
“자, 다들 출발!”
김견은 대원들을 하나씩 확인한 뒤, 이어 대리인들로 이뤄진 짐꾼들도 살폈다.
모두 작은 봇짐을 짊어진 그들이야말로 가장 보살펴야 할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짊어진 짐 때문이었다.
다시 200길미 가까운 거리를 삼 일에 거쳐 주파한 뒤, 익문 4대는 마침내 목적지인 나취(那曲)에 도착하였다.
토번의 도읍이랄 수 있는 라싸(拉薩)로부터 북동쪽으로 220길미 떨어진 그곳은 토번에 그리 많지 않은 제법 큰 고을 중 하나였다.
토번의 대부분 땅이 그러하듯 대부분이 산과 골짜기로 뒤덮인 중에 그나마 산세가 온화하고, 골짜기가 넓은 나취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하루를 기다리자, 마침내 토번의 왕 총카파를 만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토번의 왕 총카파이시어.”
김견은 마주 인사하며 서둘러 당황했던 표정을 정돈하였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총카파의 외모 때문이었다.
일단 너무 젊었다. 총카파가 젊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30대 초반의 단악교를 제자로 둔 만큼 40대 후반 정도를 예상했었다.
그 정도 나이도 스스로 왕의 칭호를 거머쥔 자의 나이로는 젊은 편이니까.
한데, 총카파는 단악교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더 후에 그나마 단악교보다 몇 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생김새 자체가 동안이라 거의 10살은 어리게 보였다.
게다가 전체적인 분위기도 왕이라든지, 토번 불교의 수장이라는 지위의 인물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법복이 아니라면 순박한 농부로 생각했을 만한 느낌이었다.
“토번의 왕이나 총카파로 절 부르지 마십시오. 제 법명은 로잔탁파이니, 그리 부르시면 됩니다.”
총카파는 암도 지방에 속하는 ‘총카라는 지방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총카파 본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칭호였다. 물론 토번의 왕이라는 칭호도 두말할 것 없었다.
그 대답이 전해져, 정말 그리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데, 총카파보다 더 총카파스러운 주변의 인물들, 그러니까 나이도 좀 더 있고, 분위기도 고압적인 자들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었다.
‘하, 이거 순탄치 않겠군.’
김견 대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총카파를 향해 예를 계속 갖추었다.
첫 만남의 분위기부터 토번이 개입한 정황이 어떠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 토번이 탐라의 손을 잡고 명나라에 대항하는 그 모든 결정은 아마도 주위의 머뭇거림이나 반대를 무릅쓰고 총카파가 강행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취해야 할 행동 강령은 일단 관찰이겠지.’
만약 관찰 결과, 총카파가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장악력과 지도력을 갖추고 있다면 익문대는 총카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고, 반대의 상황이라면 총카파에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물론, 바라는 바는 당연히 전자였다. 시간이 촉박한 중에 반대파를 설득할 여유는 없으니까.
다행히도 익문대는 단 며칠 만에 총카파의 장악력과 지도력을 인정할 수 있었다. 아니, 인정이라는 말도 우스울 정도였다.
총카파는 토번에서 거의 신(神)인 자였다. 고려 식으로 보자면 보살의 현현이랄까.
그렇기에 총카파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으니, 그 장악력은 장악력이라는 표현보다는 신성(神聖)이라고 말해야 적합할 정도였다.
“고려는 아직 우리를 믿지 못하고 있군요. 이해는 합니다.”
총카파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확신한 익문 4대장 김견이 그를 알현하여 고려의 지원책에 대해 밝히자 나온 대답이 그러했다.
“토번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도 있지만, 이곳이 아주 깊은 내륙이라는 점도 이해해 주십시오. 이곳까지 식량과 철을 대량으로 운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김견의 양해를 구하는 말에도 총카파는 묵묵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화가 난 건가 싶어 김견이 조심스러워하는데 꽤 긴 침묵 끝에 눈을 뜬 총카파의 표정에는 분노나 실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대의 주군이 탐라공이라 하였소? 이번 싸움을 이끄는 것도 그이고?”
“그렇습니다.”
“하면, 탐라공은 실로 귀재(鬼才)를 가졌구려. 금은으로 운반을 용이하게 하고, 동시에 동맹을 이롭게 하며, 적을 해롭게 하려 하다니. 게다가 이곳은 수만 리 떨어진 곳이거늘…….”
“…….”
뜬금없이 주군에 대한 감탄을 늘어놓는 총카파를 보며 김견은 의아하였지만, 주군을 욕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직후에 총카파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주군께서 토번과 사천에 물산 자체가 아니라 금은을 보내신 이유가 단지 운반의 용이성에만 있지 않음을 총카파가 꿰뚫어 보았으니, 다른 제국(諸國)과 달리 오직 토번과 사천만이 가능한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총카파가 탐라공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이해하자, 이후의 대화는 상당히 순탄하였다.
다만, 김견이 다시 깨달은 바지만, 총카파는 단지 덕망 높은 승려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는 토번의 이득을 위해 얼마든지 세속적인 협상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는 사천의 익문 5대도 마찬가지였다.
종기신은 다소 부족한 인물이었으나, 장삼봉은 도사이면서도 동시에 닳고 닳았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세속적인 인물이기도 한 바, 탐라공이 사천에 금은을 보내어 노리는 바를 정확하게 간파하였고, 그에 응하면서도 사천의 이득을 위한 협상을 주도하였다.
익문 4대와 5대의 대장들로서는 꽤 힘든 협상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주군으로부터 받은 지령에 따라 협상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금은을 손에 쥔 건 그들이었으니까.
* * *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몽주 씨가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몽주 씨 따라 저도 천몽에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군요.”
두신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다시 갸웃거리기를 반복한 끝에 중얼거렸다.
“그냥 거래 내지 구입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현대인에게는 별게 아니겠죠. 다만, 적에게서 군량과 물자를 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조금 대단할 수도 있죠. 그게 아무 데서나 가능한 일은 아니니까요.”
“오호, 은근 자랑이네요?”
재상이 살짝 비꼬듯이 말했지만, 그도 몽주가 충분히 대단하고 대담한 전술을 펼쳤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몽주는 군수 물자를 보내는 대신 금은을 보내 사천과 토번이 전쟁에 쓰일 물자를 명나라로부터 ‘구입’하도록 하였다.
명나라와 싸울 때 필요한 군수 물자를 명나라에서 조달한다는 건 토번이고, 사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례로, 이미 연왕부와의 동맹이 공표된 고려에서 직례성에 군량을 구입하러 가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다른 지역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 사천과 토번은 가능했으니, 사천은 그 자체가 이미 명나라의 일부인 곳이고, 토번은 명나라에게 빼앗겼지만 수많은 토번인들이 살고 있는 임도 지방이 있기 때문이었다.
종기신과 장삼봉은 사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기에 사천의 상인들은 물론 관부의 물자까지도 금은으로 교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 토번의 총카파 또한 임도 지방의 토번인들을 통해 그곳의 물자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돈이야 들지만, 그렇게 동맹군의 군수를 충당하고, 적이 쓸 수 있는 물자를 줄인다면 분명 이득이겠죠. 흠, 지난번 회의 때도 그랬지만, 몽주 씨로부터 전해지는 정보가 모두 이로운 것들뿐이네요. 얼핏 생각하면 아예 명나라를 뒤집어엎고, 정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거야 가능한 이득을 챙기고 싸움에 나서려 노력하고 있고, 그걸 말씀드리는 거니까 그렇지요. 전쟁이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명나라가 가진 규모의 잠재력이 드러날 것이고, 저와 아군을 힘들게 만들겠죠.”
“그래도 자신은 있으시잖아요? 지난번에는 질 자신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이길 자신이 있을 차례 아닌가요?”
재상의 물음에 몽주는 실소를 머금었다. 뜻대로만 되면 분명 자신이 있는 싸움이었다.
“이번에도 질 자신이 없는 정도로 하죠. 사람이 겸손해야죠.”
그렇게 겸양(?)을 보인 몽주는 다시 재상, 두신과 더불어 고려의 전비를 검토하였다.
천몽 속에서는 당대의 프레임에 갇혀 볼 수 없는 부분을 현대에서 짚을 수도 있기에 세 사람은 그들이 직접 현대에서 전쟁을 이끄는 마음으로 전쟁 준비를 파악하고 전쟁의 양상을 예측하였다.
그런 논의는 명나라와의 전쟁이 가지는 특수성을 두드러지게 하였으니, 그 회의의 후반에 나온 이야기는 어쩌면 처음 전쟁을 계획할 때 나눴어야 할 이야기에 가까웠다.
“전승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선전포고 직후 먼저 바다로 공격을 감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연왕부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아쉽네요.”
“그렇지요. 이겨야 하고 이길 수도 있지만, 완벽하게 이기는 건 피해야 하는 전쟁이죠.”
오늘날의 중국도 그렇지만, 명나라의 동안은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고, 응천부를 비롯하여 주요 고을도 바다나 큰 강을 통해 접근하기에 용이하다.
탐라국이 강대한 수군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명나라의 지리적 상황은 고려에 큰 이점을 줄 수 있으니, 자연 바다를 통한 습격으로써 군사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마땅했다.
마치 북로남왜 시절 왜구의 침입에 시름시름 앓던 명나라의 상황을 압축적, 집중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전황의 흐름을 초기부터 가져오는 방법인데, 몽주는 전쟁의 승리에는 도움이 되나, 고려의 승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겼고, 재상과 두신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번 전쟁의 목표가 연왕의 보위 찬탈에 있지 않고, 명나라의 분열에 있음을 생각하면 초반부터 승세를 가져오는 건 오히려 대국적으로는 손해인 셈이었다.
하여, 모든 전력은 일단 연왕부 쪽에 집결시키고, 방어적인 태세부터 갖출 예정이었다.
“하면, 수군은 이번 전쟁에서 별 활약을 안 하는 겁니까?”
“활약을 해야죠. 최소한 명나라 수군은 궤멸시켜야 하니까요. 탐라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명 수군을 무찌르려면 일단 바다로 끌어내야 하는데, 잘될까요? 명 태자, 아니 성영제는 탐라의 수군 전력을 잘 알고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싸움을 회피하려 하지 않을까요?”
“탐라의 수군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아는 것과 수전에서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같지 않겠죠. 그러면 성영제나 수군 장수들의 오판을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듣기에 따라서는 몽주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나, 그렇게 보기에는 몽주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너무 자신만만했다.
“그나저나 언제쯤 개전될 걸로 보입니까?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은 것 같은데요.”
“군의 동원을 개전으로 보자면, 이미 시작했죠. 우리나 명나라나 군세를 모으는 중이니까요. 근데 본격적인 전투의 발발을 개전으로 보면, 한 달 안팎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탐라군의 경우 순위군의 동원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순위군을 모았다고 무작정 전장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아무리 평시에 순위군이 계속 훈련해 왔다고 해도 실전을 앞두고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그 기능과 사기를 최대한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명나라의 경우는 더하니, 넓은 땅, 많은 인구 탓에 훈련은 둘째 치고 새로 징집하고, 흩어진 군세를 모은 뒤 재편하는 시간만 해도 상당히 필요할 것이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었다.
본디 국지전 이상의 규모를 가진 전쟁에 기습 개전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만약 기습이 있고 그것이 성공했다면 그건 당한 쪽이 멍청하게 경계를 못한 탓일 뿐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로 곧 싸우게 될 걸 알고 치르는 게 대규모 전쟁인 것이다.
“일차 전선은 여기부터 여기까지입니다.”
군세의 동원과 배치에 대한 이야기 중에 몽주는 펼쳐진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한 줄의 선을 그었다.
왼쪽 끝은 서안이었고, 오른쪽 끝은 제남이었으니, 결국 황하를 전선으로 삼는 셈이었다.
물론, 당대의 황하는 현대의 황하와 달리 그 하류가 산동 반도의 북쪽이 아니라, 남쪽 회수 방향으로 뻗어 있어 정확히 황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도를 바라보는 몽주의 머릿속에 명나라와 연왕부 및 고려군이 황하를 중심으로 맞서는 그림이 펼쳐졌다.
* * *
순천시는 여수군의 속해 있었다.
이는 곧 여수군의 상시는 여수상시라는 말이니, 고래로부터 전라도 남부의 큰 고을이었고, 한때 여수 지역을 휘하 속현으로 두었던 순천의 입장에서는 체면이 안 서는 일이었다.
하나, 남면이 탐라공의 치세를 받은 이래, 상업과 산업의 발전으로 여러 고을의 운명이 바뀌었으니, 순천도 그 성세를 여수상시에게 빼앗겼고, 인구도 역전된 지 오래였다.
한데, 지금 순천은 그 어떤 큰 고을 못지않게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으니, 2만이 넘는 순위군들이 순천에 집결해 있기 때문이었다.
본디 순위군이 평시 훈련하는 곳은 남면에 수두룩하지만, 대규모 동원을 대비하여 몇 곳에 대단위 집결지를 마련해 두었으니, 그중 한 곳이 순천이었다.
때문에 지금 순천에는 남면 남동부에 거하던 순위육군 소속 군병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니, 갑자기 순천의 시가가 북적대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물론, 이는 순위군병들의 영외 출입이 가능한 덕이었다. 현대 한국 징병제를 생각하면 이상한 모습이겠지만, 고래로부터 현대까지 정말 정병강군인 군대는 군병이 맡은 바 임무 수행에 충실하면 그 외의 시간에는 자유로운 편이었고, 탐라군도 마찬가지였다.
상중상말도 순천에 집결한 순위군병이었다.
그는 이틀간의 집중 훈련을 마치고 동료들과 외출에 나섰으니, 순천 장터에 있는 어느 국수집으로 향했다.
본래도 꽤 큰 주막을 운영하던 주인 할매가 주막을 거두고 만든 국수집인데, 그 맛이 좋아 벌써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다.
상말의 눈에 어느 아이가 들어온 건, 국수집 마당에 놓인 상에서 동료들과 국수 한 그릇 뚝딱하고 그냥 가기 섭섭하여 탁주 한 사발을 나눠 마시던 중이었다.
그 아이가 눈에 띤 건 그 아이의 수상한 행동 때문이었다.
“이보오, 도령. 지금 우리를 보고 적는 것이오?”
상말의 말투는 항의조였지만, 사용한 어휘는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치곤 공손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그 아이의 복장이나, 그 아이의 손에 들린 만년필을 보면, 절대 여염집의 아이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목소리에 무언가를 적던 아이는 고개를 들어 상말을 바라보았고 말문을 열었다.
“실례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자시고, 대체 우릴 보고 뭘 적었는지나 봅시다.”
상말이 성큼성큼 걸어와 아이의 손에 들린 책자를 거의 빼앗듯이 손에 넣었다.
아이는 조금 분한 기색이었지만, 크게 호흡하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이, 뭔데 그래?”
“아까부터 이 도령이 여기서 우리를 보며 뭔가 적고 있잖아.”
동료가 묻자, 상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래? 뭘 적었는데?”
“그게…… 별 시답지 않은 것들인데?”
아이의 책자에 적힌 것들은 순위군병들의 복장이나 장구 등을 관찰하고 묘사한 내용이었다.
“어라? 이거 꽤 오래전부터 적은 모양이야. 사 년 전 것도 있어.”
상말은 책자의 앞부분을 보며 신기하였고, 이어, 시선을 아이에게 돌렸다.
“이거, 도령이 계속 적은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만 돌려주시지요.”
“돌려주기 전에, 대체 왜 이런 걸 적은 건지나 압시다.”
“꼭 아셔야 돌려주실 겁니까?”
어린아이가 분한 기색을 보이는 중에도 정중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귀여워진 상말이 장난스레 그렇다고 답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순위군병에게 지급되는 품목의 변화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걸 왜……? 혹 도령은 나중에 장수가 되고 싶은 게요?”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몸집이 작고 무예에 소질이 없어 장수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후에 관리가 되고자 공부할 따름이고, 그 적은 것도 후에 탐라의 관리가 될 때를 대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관리가 될 때를 대비한다고? 대저 관리가 되는 것과 순위군병의 장구를 확인하는 게 무슨 상관이오?”
“어찌 상관이 없겠습니까? 탐라국에 있어 탐라군은 단지 나라를 지키고 도적을 막는 역할에만 있지 않고, 탐라의 교역을 성사시키는 근본이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만약 나라에서 탐라군병에게 주어야 할 의복과 장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면, 이는 탐라국의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이만 그 책자를 돌려주시지요.”
“아, 알았소.”
상말은 또박또박 대꾸하는 아이의 기세에 밀려 책자를 넘겨주었다.
“신경 거슬리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니, 뭐…… 나중에 또 복장이나 장구를 알고 싶으면, 차라리 다가와 정중히 물으시오. 그게 더 정확하지 않겠소?”
“충고 감사합니다.”
아이는 목례 후 뒤돌아 걸어갔다.
상말도 도로 국수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아이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이보오, 도령! 도령의 성명이 무엇이오?”
아이가 뒤돌아서더니, 잠깐 멈칫한 후에 대답했다.
“순천 김씨. 자는 국경(國卿)입니다.”
“나중에 꼭 훌륭한 관리가 되시오. 그때도 우리네 군병들에게 관심을 잃지 마시고.”
“예, 알겠습니다.”
다시 목례 후 돌아서는 아이, 국경은 올해로 11살이었지만, 체구는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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