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7)
* * *
고려국왕 왕요의 손아귀에는 두 통의 서찰이 쥐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탐라국공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니, 달리 부를 수도 있겠지만, 당금 고려에서 고려국왕과 탐라공의 사이에는 장계나 상소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고, 그 내용도 공식적인 건 아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장남 왕석이 보낸 것이었다.
그 서찰은 세자가 왕에게 보내는 것이기 전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이었으니, 일상의 서찰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두 서찰 모두 한 가지 공통적으로 담은 내용이 있었으니, 참전과 출병이 그것이었다.
탐라공은 명나라의 내분에 개입하는 고려의 대표로서 고려왕에게 출병의 변을 전한 것이고, 세자 왕석은 탐라군의 군병으로서 참전하게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각오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시선이야 왕석의 서찰에 더 많이 갔지만, 어느 쪽이든 왕요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대부분은 수심(愁心)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니, 두 통의 비단 주첩(奏帖)으로 전해진 서찰들을 움켜쥔 그는 창가에 서서 유리창 너머의 빈 궐 안뜰을 바라보았다.
“뒷모습에서도 근심이 가득한 게 느껴지는군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럴 만하신 게지요.”
근위병이나 내관들을 제외해도, 수심에 젖은 고려왕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궁중후 염흥방과 탐라 봉왕청장 홍길도였으니, 두 사람 모두 고려왕에게는 무슨 논의를 하든 부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청장 홍길도는 고려왕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앞에 있는 궁중후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1천 명이 넘었다지요?”
“아, 그렇습니다. 시일이 촉박해서 5백을 넘길까 우려하였는데, 예상보다 호응이 좋았더군요. 특히, 여인들도 입회할 수 있게 한 게 주효했다 봅니다.”
홍 청장이 꺼내고 궁중후가 답한 것은 홍익회의 직원을 선발함에 대한 것으로, 후국이 파병하는 5천의 군병 외 왕도와 후국령의 백성들 중에서 홍익회의 직원으로서 따로 파견될 인원이었다.
그들은 주로 탐라군의 후방에서 부상을 당한 탐라군과 다른 아군들의 치료에 나설 예정으로, 지금은 한창 ‘위생병’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사정이 생겨 시급하게 진행하는 일인 만큼 궁중후께서 많은 관심을 쏟아 주십시오. 물론, 지금도 그리하고 계시지만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탐라공께서 전적으로 지원해 주신 것이라 저야 약간의 발품을 팔면 그만이니, 당금 고려의 사정에서 궁중후로서 별다른 공을 세울 수 없는 중에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이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홍익회의 창설 자체가 예정보다 급하게 진행된 것인 만큼, 홍익회의 직원을 선발하는 것 또한 급하게 시행되었고 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당장에 전장으로 나가야 하는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여, 작금의 고려 왕실이 홀로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탐라나 요동에서 진행하는 건 왕실의 사업이라는 홍익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 결국 궁중후가 그 일을 도와야 했다.
덕분에 아마 파병이 마무리가 될 때쯤에는 홍익회의 직원들도 기초적인 준비는 완료될 것인 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는 홍익회도 전장에 설 수 있을 듯했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문득 궁중후가 물으니, 홍길도가 보기에 물음을 하면서 그의 시선은 잠시 고려왕에게로 향해 있었다.
“물론입니다. 뭐든 물으시지요. 한데,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것이라면, 제게 물을 건 없으실 겁니다. 제가 아는 건 궁중후께서도 아실 테니까요.”
탐라의 총동원 체제는 곧 고려의 총동원 체제를 불러 왔고, 전쟁에 대한 세부사항도 고려국왕 및 고려의 제후들, 그리고 다른 우방의 군주들에게 점점 더 많이 제공되었으니, 궁중후도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건 아닙니다. 다만…….”
무슨 물음인지 상당히 머뭇거리던 궁중후는 봉왕청장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만약 이번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물론 그리되리라 믿습니다만, 어쨌든 그리된다면 고려 국체의 변화도 능히 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대체 무슨 질문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던 홍 청장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그도 모르게 시선을 고려왕에게로 잠시 돌렸다.
국체란 국가 체제로 볼 수 있고, 상당히 광범위한 내용이 들어갈 만했지만, 지금 궁중후가 조심스럽게 말한 내용은 결국 황제국의 선포를 의미함이 틀림없었다.
“전승한다면 더는 상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하면, 상국도 아닌 나라의 연호를 빌려 쓸 이유가 없을 것이고, 독자적으로 연호를 쓴다면, 그건 결국…….”
“그걸 원하시는 겁니까?”
“제가 원하고 말고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탐라공과 요동공의 의사가 중요하지요.”
더 정확히 말하면 그중에서도 탐라공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이는 국력의 크기에 따른 것이기 전에 요동공은 분명 찬성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요즘 고려 백성들 사이에 고려가 황제국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설마요.”
“설마가 아닙니다. 물론, 무슨 대단한 사상이 있어 나오는 말이라기보다는 백성들의 바람 같은 것이겠지요. 이제 백성들도 고려가 명나라와 싸우게 될 거라는 걸 다 아는데 이길 수 있다고 믿거나, 이기길 바라는 자들은 자연 그다음의 상황도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홍길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저 고려에서 이번 전쟁을 승리할 것이라 가장 믿어 의심치 않는 탐라공이나 측근 신하들도 그다음의 상황을 두고 예측을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그가 탐라특별시를 떠나 지금 왕도에 있는 터라 최근의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탐라 조정과 오가는 통문 중에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승리하리라 믿으나, 그 믿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신경과 노력을 오롯하게 쏟아부어야 하는 게 명나라와의 싸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무지렁이 백성들이 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심지어 유자들 중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서경에 방문이 붙었는데…….”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을 하던 궁중후가 문득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꾹 닫았다.
홍길도는 그의 반응이나 그제야 귓가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고려국왕이 다가왔음을 깨닫고는 표정과 자세를 바로하였다.
“궁중후께서 괜한 말씀을 하고 계셨군요.”
“아, 그게…….”
염흥방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사이 고려왕은 자리에 앉아 홍 청장을 바라보았다.
“청장은 굳이 뜬소문까지 탐라에 전할 필요는 없소. 지금은 오직 국운을 건 싸움에 집중할 때이니. 그리고 고려 보위의 이름이 왕좌인지, 황좌인지는 이 고려에서 더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알아들었습니다.”
홍길도는 일부러 감탄의 표정을 더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진정 대헌장 체제하 고려왕으로서의 본분을 이해하고 있고, 만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마음이었다.
실제로 홍길도는 궁중후의 말을 들으면서도, 차후에 고려왕이 고려황제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전통적인 의미의 황제일 수는 없다고 여겼다.
만약 차후에 고려왕의 존명에 변화가 있고 국체의 상승이 있다면, 그건 명나라의 천자와는 다른 의미와 명분을 가진 것이어야 마땅했다.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황제국 선포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왕요는 다른 말을 꺼냈으니, 당연히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파병의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 것이오?”
“각국마다 그리고 군마다 다 다릅니다. 탐라수군의 경우는 이미 전장에 나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다만, 육군이 연국에 입성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요동군이 칠 일 후에 국경을 넘을 것이고, 탐라군도 그 즈음에 바다를 통해 일차 파병이 시작될 것입니다.”
‘전투 병과’만 따져도 8만에 이르는 파병 규모를 가진 탐라국은 3차에 거쳐 파병을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일차로 탐라육군 일부와 고용병, 그리고 순위군 일부가 건너가고, 이차에 육군과 순위군 나머지 거의 대부분이 건너가며, 마지막에는 소수의 탐라군이 그사이에 왜국에서 온 용병들을 이끌고 파병될 예정이었다.
후국은 요동국을 통해 파병할 것이고, 유구국은 탐라섬을 경유하긴 하지만, 수송은 유구국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탐라국 각 사령부에 따라서도 전쟁에 참여하는 정도와 태세가 달랐으니, 남면의 1군 사령부는 근위군과 더불어 연왕부로의 파병을 주도할 예정이고, 동금주의 2군 사령부는 신병 훈련에 집중하며, 구주의 3군 사령부는 왜국의 용병들을 전담하게 되어 있었다.
이주섬의 4군 사령부는 명나라 연안과 가까운 곳인 터라, 방어에 집중하되 탐라수군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도 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면, 그중에 용종들은 어디에 속해 파병되는 것이오?”
“그야 용종마다…….”
용종 출신 군병들이 한 부대에 다 속해 있는 게 아니니까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답을 하려던 홍길도는 고려왕이 묻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세자 저하의 파병에 대해 물으시는 것이라면, 아마 두 번째 파병 때일 것이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것이오?”
“파병의 순서에 따라 어디가 더 위험한지는 저도 알기 어렵습니다만, 탐라군 내부에서도 세자 저하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있을 겁니다. 그저 걱정인 것은 세자 저하의 고집이지요.”
홍 청장의 말끝에 격하게 동감하는 양 고개를 끄덕이는 고려왕에게서 아들의 고집에 지고 만 아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자가 여에게 제발 군내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걸 멈춰 달라 청하였소.”
“특별대우라…….”
다른 용종들은 일반 백성 출신 군병들과 다를 것 없이 다루는 탐라군이었지만, 세자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번 전쟁에 앞서서도 일부러 세자를 2군 사령부 쪽으로 옮겨 전장이 아닌 신병 훈육에 투입하고자 하였다가 세자의 강력한 반발이 있어 결국 취소했다.
세자의 안전과 편의를 봐주려는 것만큼, 세자의 반발은 일개 군병의 항의로 취급할 수 없었고, 특히 출신과 상관없는 취급을 천명한 탐라군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발이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걸 피하고자 하였다.
“전하, 세자 전하의 뜻을 높이 평가하셔야 합니다. 고려 왕실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리고자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시는 그 각오를, 다른 모든 이들도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전장에 나간다 해도, 현지 사령부가 세자 저하를 적전 일선에 배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세자 저하 본인도 결국 원하는 것은 전쟁의 경험이고, 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존경일 것이니, 자신의 생명마저 도외시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
홍 청장의 말이 끝남에도 고려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하였다.
“그대가 탐라공의 신하임에 틀림없구려. 어쩌면 그렇게 탐라공과 같은 말을 여에게 하는 거요.”
세자의 서찰과 함께 온 탐라공의 서찰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있었으니, 용종 출신들이 희생하는 만큼 왕실이 살찔 것임을 다시 강조함으로써 세자의 각오 어린 결정을 받아들이라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관절 탐라공은 다른 평범한 백성들의 안위와 안전에는 그처럼 민감하면서도 어찌 용종들은 험지로 몰아붙이는지 모르겠소. 용종들도 결국은 백성의 일부가 아니오.”
고려왕의 말투는 묻거나 따지는 것이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웠다.
물론, 묻거나 따지는 말이었다고 해도 홍길도는 얼마든지 대답할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단지, 그 말을 입으로 내뱉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말이다.
‘군림하면서 나라를 망쳤던 고려 왕실이 다시 백성의 지지와 존경을 되찾는 대가라면 그 정도는 약소한 것 아니겠습니까.’
* * *
“하아, 하아…….”
여인의 가냘픈 숨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사내가 일어나 벌거벗은 몸에 의복을 걸쳤다.
그들이 있는 방안이나 침상의 모습, 그리고 널브러진 이불과 사내가 걸친 옷 등을 볼 때, 부유한 고관대작의 안실임에 틀림없었다.
사내가 옷을 대충 다 걸치는 동안에도 여인은 그저 숨만 고를 뿐이었으니, 밀린 이부자락 옆으로 훤히 보이는 그녀의 등과 엉덩이에는 얇은 매질의 수없는 흔적들이 붉게 남아 있었다.
“오늘 체 아우가 온다더군.”
“…….”
사내가 문득 남긴 말에 여인의 숨소리가 일순 멈췄다.
“아직도 널 헌신짝처럼 버린 그 녀석이 보고 싶은 게냐? 후후후, 어리석긴…….”
사내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했으니, 여인을 향한 비웃음이면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온 아우를 향한 비웃음이기도 했다.
“녀석은 분명 내게 애원하러 오는 것이야. 내가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위태로울 처지거든. 그걸 생각하면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아. 하하, 녀석을 보거든 네 안부도 전해 주마. 내 아래서 아주 즐겁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이야.”
진왕 주상은 웃음기 어린 말을 남기곤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여인은 이부자락을 움켜쥐고는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아마 소리를 감추기 위한 방법이었겠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와 맞춰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아주 막지는 못했다.
* * *
정국이 긴박하게 흘러가는 사이, 연왕은 과감하게 왕부를 벗어나 북방을 순방하였으니, 태원, 낙읍, 서안을 방문하여 그곳에 왕부를 둔 황자들을 규합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암살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꽤 위험한 짓이랄 수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행하였으니, 그의 주변을 지키는 호종과 북방의 잡음을 지워 버린 서창의 일 처리를 믿기 때문이었다.
물론, 천자의 곁에서 더러운 짓거리를 할 유일한 집단인 동야가 근신 중이라는 사실도 결행에 도움이 되었다.
태원에서 진왕(晉王)과의 만남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이미 천자의 위협을 피부로 느낀 바 있었으니, 연왕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합류를 청하였다.
말이 합류지, 작금의 상황에서 연왕의 아래에 서기로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낙읍에서 만난 주왕(周王)도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어린 시절 황성에서 그나마 연왕과 친분을 나눈 황자인 터라, 좀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합류가 결정되었다는 차이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왕부의 힘을 손쉽게 얻은 연왕이었지만, 그걸로 만족할 일은 아니었다.
진왕부나 주왕부나 모두 그리 세력이 크지 않아, 두 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군력은 도합 3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남은 이황자 주상의 진왕부는 관중과 농서를 아우르는 큰 세력이었고, 군력도 4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만큼, 연왕은 주상을 설득하여 그에게 합류시키고자 하는 욕심이 컸다.
그냥 두면 천자에게 먼저 당하여 흡수되거나 아예 천자 측에 붙어 버릴 수도 있는 바, 진왕부의 4만 군력은 그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여, 상황도 그렇고, 본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면에서도 그렇고, 진왕 주상이 꽤 고압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건 연왕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인내할 각오도 하였다.
하나, 해도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왕 부인이 안부를 전하더구나. 내 연모 아래 호의호식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아니, 이곳으로 보내 줘서 고맙다고. 후후후!”
“…….”
애걸복걸하지 않으면 힘을 빌려 주지 않겠노라며 주상이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걸 볼 때도 잘 참던 연왕의 인내심이 그 말에 뚝 끊겼다.
짙은 피부 아래 열기가 솟아 검붉어진 얼굴로 연왕은 잠시 주상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진왕 주상,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권하겠소.”
“뭐, 당신? 권하겠소? 네 이……!”
“상황 판단도 못한 채 경망 떨지 말고, 내게 귀의하시오. 그것만이 당신이 살길이오. 이미 진왕(晉王)과 주왕이 내게 귀의했으니, 당신이 손을 잡을 곳은 더는 없소. 혹여 천자께 용서를 구할 생각이라면 접으시오. 천자께서는 당신을 살리고자 하여도 주변에서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니.”
말을 마칠 때, 연왕은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에 진왕이 격분하여 크게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이놈이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밖에……!”
“아무도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게요. 그러면 나 또한 나의 군병을 부르는 수밖에 없으니. 혹여 이곳이 당신의 성안이라고 해서 나를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진 마시오. 나의 군병 하나가 당신의 허수아비 같은 군병 열을 능히 상대하고도 남을 것이니,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을 것이오.”
진왕부가 4만의 군병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당장 성안에 그 군병들이 모두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래도 2천의 군병이 주둔하고 있는 만큼, 1백의 군병만 데려온 연왕을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었다.
하나, 진왕은 쉽게 다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도 눈이 있으니, 앞서 연왕의 군병들로부터 확인한 그 예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진왕 주상은 본디 겁쟁이에 가까운 자였으니, 자신의 안위에 해로울 일말의 가능성을 깨달은 순간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삼 일 드리겠소. 내가 연왕부에 돌아가서 삼 일이 지날 때까지 내게 귀의하겠노라 의사를 표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적이라 판단할 것이오.”
“…….”
연왕이 몸을 돌려 나감에, 그를 위해 내온 찻잔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진왕 주상은 연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분기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와, 왕 부인에게 갈 것이다.”
연왕이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주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관에게 명하였다.
지금의 치욕과 분노를 어딘가에 풀어야 했으니, 그 대상은 달리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연왕의 최후통첩과 같은 말을 통해 파악된 현실의 상황에 주왕은 아무리 분풀이를 해도 점점 더 위축될 뿐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연왕의 아래 들어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갈팡질팡한 마음을 잡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결국 삼 일이 흘러 버렸다.
* * *
계유년 칠월, 천자의 군대가 집결을 완료하였다.
그 수는 누군가의 예상보다는 많았고, 다른 이들의 예상보다는 적었으니, 약 23만이었다.
대운하의 요충지 중 한 곳이자, 산동성 남부의 큰 고을인 제녕(濟寧)의 주변에 주둔한 그 천자의 군대는 정로대장군 장흥후 경병문(征虜大將軍 長興侯 耿炳文)의 통솔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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