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79)
* * *
탁기는 그가 앉은 자리 앞에서 서성이는 연왕을 바라보았다.
상기된 채 이를 악문 모습이 보이니, 그의 심정이 좋지 않다는 정도는 이미 파악할 수 있었다.
“대체 이 작자는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소. 천자에게 귀의하다니……. 그건 그냥 죽겠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요?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미친 작자였다니…….”
탁기에게 말하는 것이라기에는 혼잣말이나 투정에 가까운 말투였다.
물론 중요한 건 어투가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탁기가 3차로 건너온 고려군을 감독하고 북평(연경)으로 돌아오니, 그사이에 진왕 주상이 천자에게로 전향했다는 소식이 닿아 있었다.
확실히 의외의 일이긴 했다.
연왕이 진왕과 틀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탁기가 예견하기에도 그가 천자의 편에 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진왕 주상은 이황자로서 너무 천자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그의 왕부도 가진 힘이 컸다.
연왕과 틀어진 이상 그가 최후의 방책으로 천자에게 읍소할 가능성이 있음은 염두에 두긴 하였지만, 그래도 이처럼 전격적으로 천자에게 귀의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연히 연왕은 당황하다 못해 분노했으니, 어찌 보면 진왕 주상이 연왕을 ‘엿 먹일’ 최고의 방법을 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진왕 주상이라는 인간 자체가 어디 편에 서든, 그건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달린 4만의 군세였으니, 진왕을 포기함으로써 그 군세마저 포기하기로 작정한 연왕으로서도 그 4만의 군세가 온전히 천자에게 귀속되는 건 뼈아픈 일이었다.
탁기의 입장에서도 입맛이 쓴 일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탁기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그걸 감안해도 적어도 이번 전쟁의 서전에서만큼은 이미 이기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4만의 군세라곤 하나, 기강조차 제대로 서지 않은 약졸들에 불과하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도 숫자는 중요한 법 아니겠소. 약졸들이라도 화살을 나르고, 치중을 옮기는 건 시킬 수 있는 법이오.”
“그래 봐야 23만에서 27만으로 늘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연왕부는 현재 황제군의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산동성에서 많은 관리들이 연왕에게 귀의한 덕이었다.
군병을 많이 데려올 수 있는 도지휘사의 장수들이 정작 별로 전향하지 않아 군세의 증가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군정을 그만큼 자세히 알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23만에서 27만으로 증가한 것을 ‘불과하다’고 표현하기에는 수의 단위가 크긴 했지만, 탁기의 표현은 진심이었다.
3차에 걸친 파병 끝에 마지막으로 왜국의 용병 4만 8천이 연왕부에 입성함으로써 연-고려 연합군의 규모가 20만에 이르렀다.
전에 통무총리가 표현한 대로 군수 보급을 위해 고용한 자들까지 군병으로 취급하면 무려 25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여기에 공격과 방어의 입장까지 생각하면 단순한 숫자 싸움으로도 우세하면 우세하지, 밀리지 않고 있었다.
또, 탁기는 다른 군대는 몰라도 탐라군은 명나라를 상대로 10대 1의 싸움이 가능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는 단지 개복포나 화극소총과 같은 열병기의 의존한 맹신이 아니었으니, 발달된 전투 교리와 군병 개개인들의 기량과 사기, 그리고 준비된 보급 체계와 같이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부분에서 탐라군이 총체적으로 명군을 압도한다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명군이 50만의 대군을 추가로 징집, 훈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 전쟁 전체를 쉽게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연-고려 연합군에게도 명나라 서쪽과 남쪽에서 반란과 침입을 감행할 동맹들이 있으니, 마냥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연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연왕부와 고려 사이에 전쟁의 목표가 달라, 같은 상황을 두고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연왕부의 ‘독립’에 중점을 두고 있고, 연왕은 이미 어렵다 여기긴 하지만 어쨌든 ‘제위 찬탈’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왕의 근심과 우려, 그리고 탁기의 태연함이 겉돌고 있을 때, 그들이 있던 왕성의 대전으로 몇몇의 인물들이 모였다.
“어째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들어서며 호방한 목소리로 물은 자는 요동공의 후계자이자, 파병된 요동군의 사령관인 이방과 공자였다.
그와 같이 온 유구군 대장 김기추와 왜국의 두 용병대장들인 도가시 요시나리와 아카마쓰 사다오도 연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연왕이 헛기침을 하며 안색을 정돈하고는 말하였다.
“진왕이 천자에게 투신했다는 소식에 잠시 걱정을 하고 있었을 뿐이오. 하나, 그런 잡졸들이 천자의 편에 선다 한들, 정예한 우리의 군병들에 비할 바겠소? 그저 혹시 모를 상황을 점검하던 차에 불과하니, 개의치 않으셔도 되오.”
연왕이 조금 전까지의 모습과 달리, 담담한 표정과 자세를 갖추고는 먼저 자리에 앉으며 여러 군장들에게도 자리에 편히 앉으라 하였다.
연-고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연왕이었다.
그가 최종적인 작전권이나 명령권을 가진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색이 총사령관으로서 다른 군장들에게 초조한 모습을 비춰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여러 군장(軍長)들이 모인 건 서전이 열리기에 앞서 연합군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연-고려 연합군은 서안부터 제남에 이르는 일직선의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는데, 그렇다고 그 방어선에 일렬로 군병을 배치하는 건 아니었다.
가상의 방어선을 두고, 그 방어선의 배후에 있는 주요 거점 몇몇 곳에 대군을 배치해 두었다가 적의 공격에 일차로 대응하게 되어 있었으니, 지금 덕주에 연왕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 그 일례였다.
연왕군 7만 중 5만 정도만 덕주에 주둔했고, 나머지 2만은 수십에서 수백의 단위로 흩어져 덕주의 남쪽 제남을 기준으로 그 좌우에 있는 길목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는 크고 작은 성(城)을 전술적인 목표로 삼아 싸우는 ‘전통적’인 전투 교리와는 궤가 다른 것이었으니, 탐라군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한 전략이었다.
또, 연왕도 화포와 같은 강력한 원거리 화약 병기와 함께 진행되는 싸움에서 성을 중심으로 전장을 구성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이해하였기에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물론, 명군도 화포를 동원했고, 알게 모르게 고려의 영향을 받아 폭죽시 형태의 화약 병기도 사용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 전투 교리의 큰 변화는 없었다.
아무래도 고려의 화포와 달리 크고 무거운 청동 화포를 사용하기에 전장에서 유연하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인 듯했다.
실제로 명군은 육전에서 화포를 사용함에 있어, 사실상 성문 및 성벽 파괴용 공성 무기에 지나지 않은 바, 성이라는 전통적인 전장의 ‘패러다임’을 교체할 수 있는 화포라는 무기를 전통적인 방법에 끼워 맞춰 쓰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싸움의 방법’을 달리함에 따라, 연-고려 연합군은 명군의 장수들이 보기에 이상한 곳에 전위를 잡은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시야에서 연왕군이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북평과 직고를 배후에 두고 성과 요새를 통해 방어력을 높였어야 했는데, 대뜸 덕주까지 내려와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것조차도 연-고려군이 상정한 서안-제남의 가상 방어선보다 북쪽이니, 확실히 명군의 상식을 파괴한 군사 배치였다.
대전에 모인 군장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할 곳을 나누고, 주의해야 할 부분을 논하였으니, 마지막에 이르러 화제가 된 것은 두 가지였다.
“일단 수군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오. 탐라수군이 천하무적임은 잘 알고 있으나, 우리의 작계가 바다에서의 기습을 일절 허락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있으니, 탐라수군은 절대 방심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걱정 마십시오. 이미 장산군도를 장악하였다는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탁기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연왕이 놀랍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벌써요? 저항은 없었다 합니까?”
“묘도에 명 수군 수백이 있긴 했으나, 우리 함대에 감히 저항할 수는 없었다 합니다.”
“하하, 하기야 기껏해야 대선 몇 척이 전부였을 테니, 수십 척의 함대를 앞두고 그저 항복하는 것이 최선이었겠지요.”
연왕이 크게 웃음을 흘리며 말하였지만, 명 수군의 허술함에 은근히 씁쓸한 기색도 있었다.
명의 수군이 가진 규모가 객관적으로 작은 건 아니지만, 엄청난 길이를 가진 명의 해안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수군 전력 중 대부분이 장강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그 외의 곳은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명군이 빠르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장산군도(長山群島), 명나라에서는 묘도열도(廟島列島)라 부르는 그곳을 삽시간에 탐라가 장악할 수 있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마주하는 해역을 가로지르듯 놓인 크고 작은 섬들이 바로 장산군도였으니, 그곳을 장악한다 함은 곧 황해의 북부를 다스리고, 산동반도의 해안과 발해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산동반도의 해안까지 제압하고 있다는 건 곧 명의 수군이 바다를 통해 아군의 배후를 침입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바, 지금 연-고려 연합군의 방어선 또한 그걸 믿고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2 함대가 직례성 연안에 있는 창도에 조그맣게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이주섬부터 발해만까지 명의 수군이 함부로 나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허허, 듣기만 해도 믿음직하외다.”
연왕은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동시에 부러운 마음을 가졌다.
탐라수군은 동원되는 모든 함선을 통합한 후 세 개의 함대로 재편되었다.
제1 함대는 6척의 중함선을 비롯하여 70척으로 구성되었고, 제2 함대도 6척의 중함선을 포함해서 60척으로 이뤄졌으며, 제3함대는 3척의 중함선을 위시로 30척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제1 함대가 장산군도에서 발해만의 안팎을 장악하고, 제2 함대가 창도(槍島), 즉 오래 전 탐라공이 명 수군을 전몰시키기 전에 함대를 숨겼던 그 무인도를 중심으로 장강에 집중된 명 수군을 경계하였다.
제3 함대는 이주섬에 있는 제4 수군 사령부를 지원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하되, 명 수군과 충돌할 가능성이 가장 큰 제2 함대를 제1 함대와 더불어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외에 상당수의 상선들이 보급과 운수에 동원되고 있었으니, 황해는 탐라군의 손아귀에 쥐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수적으로는 밀리지 않는 명 수군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짐작하더라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봐서 명 수군과의 교전을 유도할 계획도 있었으니, 그 순간부터 황해에서 명나라의 배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라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군에 대한 확신을 가진 연왕은 다음 주제를 꺼내었다.
“현재 우리 방어선의 서쪽 끝은 섬주(陝州 : 현대의 싼먼샤 시)이오. 한데, 서안의 진왕이 명 황제에게 귀순한 상황에서 섬주는 서안과 너무 가깝소. 내가 보기에 차라리 서쪽 방어선을 낙읍까지 후퇴시키는 게 나을 듯 한데, 제장들의 생각은 어떻소?”
“낙읍으로 이동하면 태원 방면으로 우회로가 뚫리게 됩니다. 비록 거리가 멀어 적이 그 길로 이동한다면 먼저 알아차릴 수는 있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 생기면 후방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탁기가 낙읍으로 방어선을 옮길 경우 우려스러운 부분을 지적하자, 연왕도 알고 있는 듯 곧바로 대답하였다.
“맞는 말씀이오. 하여, 임분(臨汾 : 린펀)에 새로 거점을 두어 군병을 주둔시키는 게 어떨까 싶소.”
“그리하면 작계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연-고려 연합군이 상정한 방어선은 후방의 거점들로 형성되는 바, 좌우로 섬주와 덕주, 그리고 중앙의 복양(濮陽 : 푸양)에 큰 거점을 두고 그 사이에 작은 거점들을 두는 형태였으니, 큰 거점이 작은 거점을 통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는 비단 방어뿐만 아니라, 역습 내지 기회를 보아 선제공격을 할 경우에 대비한 배치이기도 한 바, 탁기로서는 가급적 그 대계에 변형을 주길 원치 않았다.
특히, 좌우 큰 거점의 외부에 새로 거점을 두는 건 상황상 작은 거점으로는 부족할 것이므로, 꽤나 많은 군병들이 작계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 임분의 경우는 낙읍과 제법 험한 산맥으로 갈라져 있어 서로 협력하기 어려운 지리 속에 있기도 했다.
“하나, 그렇다고 섬주를 고집할 수도 없지 않소?”
“…….”
연왕이 답답한 어투로 물으니, 탁기도 대답이 궁했다. 확실히 서안이 천자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섬주는 큰 거점을 두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여, 이래저래 연왕과 똑같이 답답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을 때, 문득 요동의 이방과 공자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언제 이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심했는데, 지금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
“그제 요동에서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우리 요동국에서 이번 전쟁에 좀 더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 것이 있었는데, 그 결실을 보았다는 내용이었지요.”
이 공자의 말에 다들 기대감을 가지며 귀를 기울였으니,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탁 장군, 오래 전에 서쪽으로 갔던 나하추를 기억하십니까? 최근에 개척회사가 그와 조우했었지요.”
“물론, 알고 있……. 혹시?”
탁기가 짚이는 게 있어 묘한 표정을 짓자, 이방과의 표정도 한층 자랑스럽게 변하였다.
“예, 나하추에게 함께 손을 잡고 명을 치는 건 어떤 지 문의하였었습니다. 다행히 꽤나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온 모양입니다…….”
하나, 자랑스럽던 이 공자의 표정은 짧은 말을 마칠 때쯤에는 눈치를 살피는 표정으로 바뀌었으니, 연왕과 탁기의 표정이 몹시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저희가 나하추에게 권하여 감숙 일대를 치게 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명의 힘을 빼놓고 신경을 분산시킬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서안의 진왕이 천자에게 넘어간 상황에서는 서안을 견제하는 이점도 얻을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차후에 서안을 치려 할 때 조력을 얻을 수도 있고요.”
이방과가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점만 있을 뿐, 불리한 것이 없었다.
나하추가 원하는 건 오직 전후 감숙 일대의 종주권과 연왕부 및 고려와의 협력 관계에 불과했으니, 응당 챙겨줄 만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연왕의 심기에 불편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은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명나라 황제와 다투는 상황이지만, 명 황실의 황자로서 명나라의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기는 것이 못마땅할 법했다.
하나, 당금의 전황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고, 연왕도 명나라 전체를 생각하기 전에 그의 안위부터 챙겨야 하는 시점에 그런 불편함은 묵과해야 한다고 여겼다.
실제로 연왕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 건 그 때문이었다.
다만, 탐라 총사령관 탁기가 복잡한 마음을 품는 건 이방과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하추는 5만의 기마를 동원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 정도면 감숙을 도모하고도 남을 것이니…….”
이 공자가 부연하여 나하추의 전력이 크게 도움이 되는 이유를 말하려 하자, 탁기가 그만하라는 뜻을 표하였다.
“나하추를 끌어들이는 것이 전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건 이미 이해했소.”
그러고는 연왕을 보며, 잠시 휴정을 청하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신 듯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잠시 쉬시지요.”
“그럽시다.”
연왕이 곧바로 응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탁기도 몸을 일으켰다.
다만, 그는 곧바로 나가는 대신 이방과 공자에게 시선으로 따라오라 신호하였다.
* * *
“무슨 일로 부르시는 겁니까?”
탁기가 대전 뒤 정원에 서 있자, 이방과가 서둘러 따라와서 물었다.
그는 요동공의 사실상 장남이자 후계자로서 범인과 신분이 다른 자였지만, 평민인 탁기에게 오히려 존대했다.
이는 연합군 중 가장 많은 군병을 거느린 자에 대한 존중이자, 만약 대헌장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도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을 자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방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탁기는 크게 한숨을 토하곤 입을 열었다.
“소장은 나하추와 손을 잡는 것을 요동 조정에서 심각하게 검토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시일이 급한 일이긴 했지만, 요동공께서 여러 신료들과 더불어 깊이 논의한 끝에 결정한 일입니다. 혹시 먼저 알려 탐라국의 뜻을 묻지 않을 것을 타박하시는 거라면, 송구하나, 나하추가 응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 알리기가 곤란했다는 점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요동 조정에서도 나하추가 이처럼 전격적으로 응할 줄은 몰랐다.
다분히 몇 차례 더 협상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고, 상호 간의 먼 거리를 생각하면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갈리기 전에 나하추를 합류시키는 것이 관건이라 판단했을 정도였다.
한데, 나하추가 바로 응하였고, 내세운 조건도 매우 합리적이었기에 이처럼 연합군의 제장들에게 빨리 알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나하추를 끌어들이는 건 비단 전쟁에 도움이 되는 것 이상의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서로 신뢰를 쌓게 된다면, 차후에 개척회사의 사업에서도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 정도는 안배하긴 했습니다.”
“하면, 개척회사에 많은 무족들이 속해 있고, 무족과 몽골족이 철천지원수임은 어찌 감안하지 않으신 겝니까?”
“그야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불편해하셨던 겁니까? 이미 무족들은 몽골족의 영토에서 큰 불만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은 다툼이 몇 번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정도야 초원에서는 별일도 아니죠.”
대수롭지 않은 일에 뭘 그리 걱정하느냐는 투로 말하자, 탁기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하였다.
“지금 개척회사에서 간수하는 몽골족은 무족들에게는 원수의 친척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에 비해, 나하추는 원수 그 자체입니다. 지금 무족의 중심을 이루는 자들의 아버지 대부터 그들을 핍박한 당사자가 바로 나하추입니다. 오래 전에 탐라공께서 나하추를 놓아주었을 때, 그 충성스럽던 무족의 전사들이 은인으로 모시던 주군께 항의할 정도였단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 우려를 요동 조정에 꼭 전해 올리겠습니다. 하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나하추를 끌어들이는 것이 이번 전쟁은 물론, 차후에도 더 이익이 되리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
이방과의 말에 탁기는 잠시 그를 응시하면서, 부연하려다가 멈칫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가 조금 전에 이 공자에게 설명한 것은 주군으로부터 들은 의견이었으니, 개척회사가 나하추와 조우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에 나온 이야기였다.
다만, 그것은 탐라공이 나하추를 무시하고, 없는 셈 쳤던 첫 번째 이유에 불과했고, 탁기가 이 공자에게 밝히려다 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해진 소식으로 볼 때, 나하추는 서쪽에서 큰 세력과 충돌하여 도로 쫓겨 온 것임을 알 수 있네. 그 큰 세력이 내가 짐작하는 그 세력이 맞다면, 나하추는 지금 결코 안전한 상황이 아니지. 그런 중에 만약 나하추와 더불어 무언가를 도모한다면 후에 그 큰 세력이 나하추를 다시 치려할 때 우리도 그 수렁에 발이 빠지게 될지도 모르네. 나로서는 원치 않는 일일세.”
물론, 그 큰 세력이 정확히 어느 세력을 말하는지는 탁기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저 몽골제국의 일부였던 차가타이 한국을 말하는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하나, 만약 그 큰 세력이 차가타이 한국이라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니, 너무 먼 곳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들리는 소문에는 이미 약해져 별 힘을 쓰지 못하는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주군께서 그 큰 세력을 두고 우려하심에, 탁기는 차가타이 한국이 의외로 강대하거나, 애초에 그 큰 세력이 차가타이 한국이 아닌 또 다른 미지의 세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이방과 공자에게 하지 못한 건 그저 주군의 판단이 그러할 뿐, 일반적으로 보면 모두가 짐작이고 부정확한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탐라국에서야 팥으로 메주를 빚는다 해도 탐라공의 뜻을 따르겠지만, 요동국에서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탁기가 이방과에게 부족한 우려를 피력한 뒤, 다시 대전으로 들어가자, 곧 연왕도 돌아왔으니, 그의 표정에는 더는 복잡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하추가 절대 서안을 노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준다면 그가 감숙을 치는 것을 용인하겠소.”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이로써 이번 전쟁은 한발 더 승리에 다가갈 것입니다.”
이방과가 반색하며 응하였으니, 본디 요동 조정에 고하고, 그 뜻을 받는 것이 우선임에도 다소 성급하게 나서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요동 조정도 그에 반대할 리는 없었으니, 연왕이 그 제안을 받아들임에 더는 나하추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을 탁기도 반대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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