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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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뵌 게 아니라 귀신이 들린 게지. 암! 아니면 왜 이런 엉뚱한 짓거리를 하겠어. 그냥 나만 재수가 없는 게지, 나만!”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온 석삼이의 투덜거림이 몽주의 귀에 아주 잘 들려왔다.
굳이 숨어서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잠시 나갔다 들어오니 문밖까지 석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
몽주는 충분히 이해했다. 벌써 한 달째 비누 제조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고, 그 골머리 외 육체적인 고됨은 대부분 석삼의 몫이었으니 뿔이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그나마 만 스물이 넘기 전에 혼인을 시켜 주겠노라 약조한 덕에 일단 그의 앞에서 투덜거리는 일은 없었지만, 역시나 시간이 흐르자 없는 곳에서는 짜증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흠흠!”
몽주는 잠시 석삼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헛기침을 하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석삼은 투덜이 모드에서 노비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일은 잘 보고 오셨습니까요.”
“다행히 쓸 만큼 구했지.”
말을 하며 몽주는 고개를 돌리며 뒤쪽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그 눈치에 석삼이 대문 밖을 나가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한 짐을 싣고 있는 수레를 볼 수 있었다.
“저, 저게 다 악회입니까요?”
“암.”
“하면 저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요?”
“갔네. 다들 절에 매인 몸들이니 서둘러 가더군.”
“그, 그럼, 저건 다 누가 옮깁니까요?”
누구겠는가. 몽주는 뻔뻔히 미소를 던지고는 걸음을 옮겨 마루에 엉덩이를 놓으며 편안하게 앉았다.
석삼이는 무어라 할 말이 목구멍으로 나오는 걸 억지로 막는 양 크게 침을 삼키곤, 축 처진 어깨로 악회(堊灰), 즉, 생석회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악회들은 모두 근처 큰 절에서 사 온 것이었다. 현대에서 비누를 제조하는 연습을 하면서 재료들을 다 어디서 구할지 살짝 염려가 되었는데, 의외로 만물상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있었으니, 약방과 사원이 바로 그곳이었다.
다품종 소량의 약방과 소품종 대량의 사원.
약방의 경우는 현대에서는 절대 약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들까지도, 예컨대 수은이나 납까지도 약으로 쓰고 있는 덕에 온갖 물질들을 다 구할 수 있지만, 대신 대량으로 사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약으로 조금씩 쓰고자 구해다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원은 품종은 약방보다 좀 적고 사원마다 주품목이 다르지만, 대신 많은 양을 구할 수 있었다.
고려 시대의 사원은 단지 종교 시설을 넘어서는 일종의 관영 기업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원들이 나라로부터 받은 거대한 사원전을 소유하고 있어,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 여러 사업들을 경영하고 있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으로 양인들의 피땀을 쥐어짜내는 절과 중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종교의 순수성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대신 사업적인 수단은 발달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건설 회사나 미술 쪽 장인 길드 역할에 더해 어떤 사원은 출판사 역할을 하고, 어떤 사원은 철공업자가 되고, 어떤 사원은 무협소설 속 표국의 일을 하게 되었다.
몽주가 악회를 사 온 절은 최근에 증축을 하면서 건축재료를 많이 모았고 그중 남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 악회는 미장(美匠) 작업에 필수적인 재료였기에 상당량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레 한가득 생석회를 실어 왔으니, 비누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준비를 얼추 맞출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재를 석회유와 반응시켜야 하는데, 그를 위해 필요한 산화칼슘을 대량으로 구해 왔으니까.
몽주는 마루에 앉아 악회가 담긴 자루를 옮기는 석삼이를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일어나 원래 석삼이가 하던 일을 확인해 보았다.
재도 많이 모았고, 식물성 기름도 한가득이었다.
어떤 식물로 재를 만들지를 두고 이것저것 많이 실험해 보았지만, 의외로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탄산칼륨을 제공하는 역할만을 할뿐.
오히려 중요한 건 재 알갱이의 크기였다. 반응을 잘 일으킬 수 있도록 곱게 만들되 너무 작아 거르기 힘들어지면 석회유와 반응한 잿물에 재가 남을 수 있고, 자칫 비누에 재가 섞일 수도 있어 적당한 크기의 알갱이여야 했다.
비누 제조에 사용할 기름 역시 식물성과 동물성을 두고 실험하면서 식물성으로 결정하였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콩기름, 즉, 식용유를 구하였다.
사실 비누 제조에는 동물성 포화지방이나 폐식용유가 더 적합하다는 게 일반적인 정보였고, 실제로 현대에서 실험 삼아 만들 때도 폐식용유를 사용했었다. 비누화 반응이 더 잘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하나 막상 해 보니 식물성 기름이든 동물성 기름이든 비누화를 위한 ‘휘젓기 노가다’는 마찬가지였다.
또 현대에서처럼 대량으로, 싼값에, 질이 좋으면서 동시에 비누에 첨가하기 적합한 향을 구할 수 없는 고려에선 최종 결과물의 향이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쪽이 더 좋았기 때문에, 결국 콩기름이 최종 선택된 것이었다.
“하아,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네.”
몽주는 지난 한 달 동안 실험을 하면서 꾸준히 모은 재료들을 가늠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량생산에 도전할 때가 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의 기준에서는 절대 대량생산이랄 수 없었다. 고려의 기준에서도 나라나 사원에서 관리하는 천민 바치들의 작업장이 해내는 생산량에도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몽주와 석삼, 두 사람이 만들어야 할 양으로는 충분히 대량생산이었다.
사람을 더 쓰면 도움이 되겠지만, 나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따로 동떨어진 집까지 구한 마당에 외인을 들이는 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ㅁ’자로 둘러싸인 집 안마당에서 몽주와 석삼은 비누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에구구…….”
널브러진 두 사내. 한 명은 중간 계층의 양인이요, 다른 한 명은 천민인 노비였으나, 지금은 계급 따질 것 없이 나란히 누워 앓는 소리를 함께 내고 있었다.
쉬지 않은 노동의 결과가 근육통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큰 통에 담긴 액을 천에 대고 붓고 거르기를 몇 번했는지, 약불 위에서 걸쭉해진 비누를 얼마나 휘저었는지, 가루처럼 굳은 비누를 천으로 건져 다시 맑은 물에 얼마나 행궈댔는지, 이상하게 그렇게 급박한 작업은 아닌 것 같음에도 전혀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거기다 다 했다 싶을 때, 남은 글리세린을 챙기는 일이 남았음을 깨닫고 실시하느라 심적으로는 두 배로 일한 느낌이기도 했다.
툭. 몽주는 괜히 석삼에게 발길질을 하였다. 세게 찬 건 아니고, 문자 그대로 툭 찼다.
“헛, 왜 차시오?”
“억울해서 그런다.”
“억울할 게 뭐가 있습니까요?”
“네 녀석이 제대로 했다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내가 이리 헉헉댈 일도 없었을 게 아니냐.”
“하이고-!”
석삼이 기가 막히다는 듯 감탄사를 길게 뽑았다.
“어찌 그리 얄밉게 말씀을 하십니까요! 애당초 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신 것이 주인 도련님 아니십니까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도련님께서 일 많이 했다고 골골댈 만큼 일을 하신 것도 아니지 않소!”
“허허, 이놈 보게. 그럼 내가 한 것이 일이 아니라 놀이였다는 게냐.”
“일은 일이지만, 쉬운 일이었지요. 쇤네가 물을 부으면 도련님은 천을 대어 물이 걸러지게 하는 정도만 하셨지 않소.”
맞는 말이긴 했지만, 몽주도 할 말은 있었다.
“비노를 휘저은 건 내가 더 많지 않았더냐.”
비노는 비누의 당시 말이며, 짠돌이나 석감과 함께 쓰이는 것으로 순우리말이다. 다만 씻을 때 쓰는 물질이라는 의미로 지금의 짠돌, 석감이나 현대의 비누에 비해 좀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비노든 비누든 그걸 만들기 위해 석회유를 만들어 재와 반응시킨 후 기름과 함께 혼합하면 비누(지방산염)와 글리세린(글리세롤)이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약한 불로 가열하며 오랫동안 젓는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식물성 기름은 동물성 기름에 비해 비누화 현상이 다소 약한 편이라 좀 더 오래 저어야 했는데, 양이 많아지자 양이 늘어난 이상으로 노동 강도가 세졌다.
이전까지는 실험 삼아 소량으로 제작했던 데다 현대에서는 젓는 것도 흔히 ‘도깨비 방망이’라 불리는 핸드 블렌더(hand-blender)를 이용했기에 휘젓기가 많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여기서는 긴 나무 주걱으로 손수 큰 통을 몇 개나 휘저어야 했으니 목 아래 몸 전체가 비명을 질러 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약한 몽린의 몸을 탓해야 할 수준을 넘어섬에 틀림없었다.
하나, 석삼은 그렇다고 해서 주인 도령의 수고에 동정을 보내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이 모든 게 주인 도련님의 괴상한 짓 때문 아니오? 거품 좀 나는 석감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러코롬 돈 낭비, 시간 낭비에 사람까정 못살게 군답니까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석삼에게 이 모든 일은 그저 괴상한 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실 이미 실험 제작을 통해 비누가 뭔지를 보고, 또 직접 손에 거품을 내어 씻어 보기도 했지만, 비노풀(비누풀, Saponaria)이라 불리는 다년초를 사용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인지 별로 신기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 석삼의 반응만 봐도 역시나 ‘비누’로서의 비누는 의외로 상품성이 떨어짐에 틀림없었다. 그건 여기서 만들 수 있는 비누 품질의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비누’로서의 비누가 아닌 비누를 한 달에 걸친 연구와 실험 끝에, 그나마 사기 칠 만한 수준의 품질로 결코 적지 않은 양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향은 없지만 그렇다고 냄새가 나쁘지도 않은, 그리고 마를 때는 무척 피부가 당기지만 씻고 난 직후에는 적어도 석감보다는 훨씬 더 깔끔한 느낌을 남기는 그런 비누.
몽주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마당의 도기 안에 담긴 비누 가루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누런색 알갱이들이 얼핏 금가루인 양 탐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몽주는 석삼의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딱!
“아이코, 왜 때리시는 겁니까요!”
“말버릇이 얄미워서 때린다, 왜?”
“쳇, 할 말 없으니까 괜히…….”
또 석삼이 투덜댔지만, 몽주는 못 들은 척하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시렵니까요?”
“아직.”
“또 할 일이 남았습니까요?”
“가다랑어를 널어야 할 때가 아니더냐.”
“아아…….”
석삼은 잊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투덜대도 상관없는 주인 도령이라곤 하지만, 그보다 더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는 일.
석삼은 가죽신을 신는 몽주 옆으로 뛰어내림과 동시에, 짚신을 신고 서둘러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큰 상자가 몇 개 있었다.
“바로 열겠습니다요.”
“그러게.”
무쇠로 된 끌과 망치를 든 석삼이, 막 뒷마당으로 들어서는 몽주에게 허락을 얻곤 가까운 상자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상자 위쪽 모서리 몇 군데에 박혀 있는 목정(木釘, 나무못)을 끌과 망치로 뽑아냈다.
가능한 밀폐시키기 위해 몽주가 고민하던 중, 석삼이 가내에 늠축(廩蓄, 쌀 관리)일을 하던 노비가 쌀통을 만들 때 쓰는 방법을 알고 있음을 말해 주어 그로부터 알아낸 방법이 바로 목정을 이용한 밀폐였다.
“오! 주인 도련님, 이것 좀 보시오. 곰팡이가 많이 줄었습니다요.”
“그러냐.”
석삼의 호들갑에 몽주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지난번보다 피어난 곰팡이의 양이 적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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