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92)
발밑에서 신하들이 통촉하라며 난리였다.
통촉(洞燭).
아래 것들의 사정을 헤아려 주는 것.
그러니까 신하들은 자기 형편 좀 봐 달라고 난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형편이 곤궁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대저 황성에서 황상을 앞에 둘 수 있는 자들 중에 진정한 의미로 통촉해 달라 청하는 자는 없었다.
‘내게 특혜를 달라, 내게 자리를 달라, 저기 내 경쟁자를 쳐 내달라.’이거나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십니다.’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오늘 조정이 열린 뒤로, 내내 성영제의 귀에 들어온 통촉 또한 다를 게 없었다.
모두가 저마다 말을 늘어놓으며 통촉해 주길 바라지만, 그들이 바라는 통촉은 결국 앞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통촉의 대상은 같았으니, 지금 잡호장군들이 벌이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명나라 곳곳에서 잡호장군들이 의용군을 이끌고 이장과 이노인을 습격한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만 해도, 성영제 앞에 달려온 신하들 대부분이 그들을 벌해 달라 요구하였다.
하나, 성영제가 이리저리 말을 돌리고, 연왕과의 싸움을 핑계로 그 청을 거부하자, 그리고 잡호장군이 하는 짓이 동야와 유관하다는 소문이 돌자, 신하들도 이장과 이노인의 습격함이 황상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제발 자기가 품고 있는 이갑만은 남겨 달라 애원하거나, 은근히 가시를 세우며 후회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던 것이다.
‘재밌군.’
물론, 성영제는 어느 쪽 통촉일지라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반응을 통해 권주를 건네야 할 무리와 벌주를 내려야 할 무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로웠다.
이는 똑똑하거나 겸손한 무리와 멍청하거나 오만한 무리로 나누는 것이었다.
어리석거나 오만한 자들은 지금 명군이 역도 연왕과의 싸움에서 승세를 얻지 못하고 곤란에 빠져 있으니, 천자가 자신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고, 똑똑하거나 겸손한 자들은 오히려 전란 중이기에 자신들이 진정 위험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중하는 것이리라.
장차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어느 쪽을 높이 사고, 어느 쪽을 저버려야 할지는 뻔한 바, 성영제는 그의 앞에서 소란스러운 자들의 명부를 머릿속에 작성하였다.
물론, 아무리 무시하고자, 그리고 오히려 벌하고자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해결하지는 못하기에, 성영제는 얼마간 신하들의 통촉 소리에 시달릴 것을 각오하였다.
하나, 다행(?)히도 신하들이 그들이 거느리는 이갑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되는 대사건이 벌어졌는데, 문제는 성영제 또한 이갑과 권신들을 처리할 여유를 잃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여유를 잃은 정도가 아니라, 그가 천자에 등극한 이래로 가장 크게 충격 받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명 수군의 패전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경륭, 천하에 이런 견자(犬子)를 보았는가!”
성영제는 울분을 토하였다.
제남과 정주에서 40만에 이르는 명군과 의용군이 사라졌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였건만, 이경륭의 헛짓거리에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가 애초에 천하에 의병을 호소하면서 그것으로 전황을 뒤집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잘못된 선택과 준비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의용군의 피와 땀으로 번 시간 동안, 응천부와 직례성을 중심으로 연-고려군에 저항할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되었으니, 화포와 화약을 생산하고, 처음에 유용하기 쓰였으나 재고가 곧 바닥나 지금은 쓰지 못하고 있는 기름 포탄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하여, 이제 다시 연-고려군과 맞붙게 된다면, 그동안 일방적으로 밀리던 화력을 극복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한데, 양주의 수군이 몰락하였으니, 기대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연-고려군과의 전선에 오롯이 쓰였어야 할 군병과 군수가 이제는 장강의 하구를 방어하는 데에도 쓰여야 할 것이고, 군수의 생산 중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던 직례성이 당장 적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기는 이제 응천부 또한 안전하다 장담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성영제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탐라 수군의 위력을 떠올리면, 얼마 뒤에 장강 깊숙이 들어와 응천부를 향해 방포하는 탐라 함대를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경륭을 육시(戮屍)하라! 조국공의 작위를 폐하며 식읍 또한 회수할 것이다! 이경륭을 막지 못한 다른 도독들 또한 당장 압송하여 금군에서 그 죄를 조사하라!”
이경륭은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의 무릎을 베고, 온갖 수모를 주며 고통스럽게 죽인 뒤, 그의 구족마저 멸해 버리고 싶었다.
그를 막지 못한 다른 도독들도 무조건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으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선제의 잔혹한 형벌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심이 그나마 너그러운 벌을 택하게 만들었다.
이후, 조정에 쏟아지는 모든 말들은 장강의 위험에 대한 대처였으니, 대개 서주에 있는 명군 중 일부를 불러 장강을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다.
일견 당장 선택할 수 있는 대책은 그뿐이었으나, 성영제는 고민 어린 표정을 지을 뿐, 가타부타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결국 당일에는 그저 남아 있는 수군을 정비하고,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리는 것으로 마감하였다.
* * *
그날 밤, 황자징이 제태, 방효유와 더불어 대전 앞에서 황상과의 대화를 청하였다.
성영제가 허락하니, 그들은 곧바로 엎드려 곡하며 벌을 청하였다.
“소신들이 죄인 이경륭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모르고 그의 중임을 간청하였나이다! 부디 저희를 벌하여, 보는 눈이 없는 자가 인사에 나서는 것을 경계토록 하시옵소서!”
“…….”
아닌 게 아니라, 성영제는 그들도 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애초에 이경륭이 능력이 없는 자임을 알고, 그를 배제하고 싶었음에도, 결국 수군 도독의 자리라도 내주게 된 것이 황자징을 비롯한 여러 유자 출신 신료들의 간언 탓이었다.
하나, 아무리 못마땅해도 유자 관리들은 성영제의 발밑을 받치는 자들이었기에, 특히 이갑제를 폐한 뒤에 유자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기에 차마 그들을 벌할 수는 없었다.
성영제는 마음속의 격동을 애써 잠재우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대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우치고 사죄하니, 어찌 벌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제라도 만사에 생각을 무겁게 해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실 그들도 자신들이 실제로 벌을 받으리라 여기진 않았으니, 실상 형식적인 청죄와 용서의 절차가 지나가자, 본론이 시작되었다.
“폐하, 양주의 수군이 고려 수군을 막기 어려워졌으니, 황성 또한 그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만약 급하게 적이 쳐들어와 황성을 위협하는 참극이 일어나면,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나더러 파천(播遷)을 하라는 겐가?”
성영제의 대꾸에 냉랭함이 깃들어 있자, 방효유가 나서 설득을 이어 갔다.
“폐하께옵서 만약 위태로워지시면 백만의 대군이 있더라도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명군이 다른 걱정 없이 용전할 수 있도록 적의 위협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 또한 천자께옵서 갖춰야 할 용기이옵니다.”
“…….”
성영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으니, 앞서 들은 말들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조정에서 신하들이 당장에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소란스러웠음에도 그가 별다른 결단을 하지 않은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가 황성을 떠나 파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명군의 대계도 바뀔 것이니, 그것을 먼저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천자가 황성을 떠난다는 건 당연히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성영제는 감았던 눈을 뜨며 말문을 열었다.
“만약 천하의 백성들이 의기를 보여 스스로 목숨을 걸고 적과 대항하지 않았다면, 짐은 파천할 수도 있었음이야. 하나, 백성들이 짐과 황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생업을 뒤로 하고 군수를 생산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지금, 짐이 황성을 떠나는 것은 결국 백성들을 저버리는 짓일 뿐이네.”
“하오나, 폐하……!”
“짐이 위태로우면 나라가 위태롭다 하였는가? 맞는 말이지. 하나, 아직 적이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니니, 당장 위태로운 건 아니네. 그에 비해, 짐이 파천하는 순간 이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네. 나를 위해 희생한 백성들이, 그런 자신들을 버린 짐을 계속 천자라 생각해 주겠는가?”
군사적인 지평에서는 피난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정치적인 지평에서는 그 자체가 멸망을 촉진하는 악수라는 게 성영제의 판단이었다.
“응천(應天)은 하늘의 명에 따르고, 백성의 뜻에 응함[順乎天而應乎人]을 의미하네. 짐이 파천하여 천리를 거스르고 민심을 배신하면 어찌 천자가 천자일 수 있고, 응천부가 응천부일 수 있겠는가.”
“…….”
문득 엎드려 있던 세 신료들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고,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소신들, 죽을힘까지 쏟아 황성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겠나이다!”
황자징의 입에서 각오 어린 투지가 흘러나왔으니, 적어도 앞서 자신들의 죄를 밝히며 벌해 달라고 청할 때보다는 진정성이 깃든 것이었다.
* * *
갑술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전세는 연-고려군이 제녕 공략에 성공한 것을 제외하면 뜻밖에도 별 변화 없이 고착되었지만, 극심한 소비전의 양상은 지속되었다.
이는 명군은 물론 연-고려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그 극심한 소비가 연-고려 측은 물자에 집중되어 명 측보다 더 많은 군수를 소모하고 있고, 명군은 군수도 군수지만, 군병의 소모도 많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사실 그런 상황은 고려, 특히 탐라국으로서는 바라지 않는 바였다.
명 수군의 실수를 이용하여 통렬한 패배를 명나라에 안겼을 때만 해도, 이제 곧 종전의 협상이 개시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명나라는 기어이 항전을 결정했고, 그 항거의 수준이 예상을 뛰어넘어 대단했기 때문이다.
“흠, 성영제는 전후에 어찌하느냐에 따라서 명군의 반열에 들 수도 있을 것 같군.”
통무총리 화극이 장계를 훑어보다가 한마디 하니, 몽주의 고개도 절로 끄덕여졌다.
성세를 이룬 군주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국난을 넘어 망국의 위기를 넘긴 것을 포함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성영제의 활약은 지금까지 몽주가 가지고 있던 천자라는 지위에 대한 선입견, 특히 창업하지 않고 계업한 천자에 대한 편견을 깨 버리기에 충분했다.
명 수군이 졸렬해진 뒤로, 성영제는 스스로의 안위와 위신을 상관하지 않고, 또 하나의 지휘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양주에 남아 있는 수군을 응천부와 보다 가까운 포구로 옮긴 뒤, 금군과 합하게 하여 그 군세를 직접 지휘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수시로 황성을 나와, 응천부와 직례성 등에 행차하여 군수를 생산하는 데 노고가 많은 백성들을 위로하니, 익문대의 장계에 쓰인 대로 ‘하늘이 내려와 백성의 곁에 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는 선제와는 극명히 다른 모습이었고, 역사 속 건문제와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현명한 행보였다.
“그나저나 왜국에서 항의는 없었는가? 꽤 신경질을 낼 것도 같은데?”
“생각보다 그리 거세진 않았습니다. 특히, 남조 측은 실상 별 유감의 뜻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반이나 죽고 다쳤는데도 그렇다는 겐가? 난 당장에 회군시키겠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뭐, 저마다 다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호타하의 끔직한 수장 사고가 있었던 이후로, 왜국 용병들의 소모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데, 근래에 다시 큰 피해를 입었으니, 제녕을 공략하는 중에 사상자들이 많이 생긴 탓이었다.
연-고려군이 방어가 아닌 공격하는 상황이었고, 명군이 화력을 확충하여 거세게 저항한 탓에 쉽지 않은 공략이었던 데다가, 아무래도 병종상 왜병들을 근접전에 투입하는 탓에 사상자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제녕을 공략하는 중 생긴 3만여 사상자들 중 2만에 가까운 자들이 왜병이었으니, 본디 5만에 이르던 왜병들은 이제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는 혹시 용병이라 하여 함부로 위험한 곳에 투입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였기에, 탐라국에서는 왜국이 그 점을 두고 항의하면 어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정작 왜국의 항의는 약할 따름이었다.
익문대의 보고에 의하면, 북조든 남조든 서로 군세가 줄어 충돌이 적어진 덕에 각기 정비할 여유를 얻은 것에 만족하고 있었고, 또 왜국 용병들의 피해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조 출신들이 절반씩 상한 것도 불만을 잠재우는 원인이라 하였다.
왜국이 항의로 난리를 치면 모를까, 아니라면 몽주는 왜국에 대해 더는 신경 쓸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내 생각에 제녕을 점령한 만큼, 수군이 한 번 더 응천부를 위협하면 성영제를 협상장으로 끌고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
몽주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매함은 그렇게 해도 성영제가 협상에 나설지 확신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했고, 이미 한 번 크게 피해를 입은 수군을 다시 힘겨운 싸움에 몰아넣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 달 전쯤, 명나라가 좀처럼 종전 협상에 응하지 않자, 연-고려 연합은 성영제와 명나라 백성들의 항전 의지를 꺾기 위해, 논의 끝에 장강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니, 2함대 위주에 3함대의 해사 분함대를 더한 함대로 장강을 침범하였다.
그렇게 하구 근방 여러 고을에 위력 시위를 하여 양주에 닿았는데, 양주는 이미 포구를 폐하고 강변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전공이 미약하고, 응천부의 성영제에게 경고하기에 부족하다는 판단에 탐라 수군은 조금 더 진입하여 응천부의 고을을 위협하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양주 이후부터 장강의 폭이 많이 좁아진다는 점이었다.
특히 양주의 서쪽 경계쯤의 장강에는 몇몇 섬이 있어, 그 넓은 쪽 폭도 1길미를 조금 넘을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곳 강변과 섬에 잠복하고 있던 명군이 급습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급습의 주된 방법은 화포였으니, 물량의 명나라답게 양쪽 강변마다 백여 문의 대형 화포가 동원되었다.
명나라의 화포가 가진 사정거리가 탐라의 화포보다 부족하지만, 많이 좁아진 강폭은 탐라 함대를 모두 사정권 안에 두게 하였고, 또 명군이 미리 숨어 방어 태세를 갖춘 것에 반해, 탐라 함대는 강 위에 그 선체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탐라 수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탐라 수군이 일방적으로 당한 건 아니었다.
비록 좁은(?) 강폭으로 모든 함대가 마음껏 화력을 선보일 수는 없었지만, 엄연히 화포의 수는 탐라 함대가 더 많았고, 위력도 컸으니, 반 시진가량의 전투 끝에 명군의 화력을 역으로 잠재웠다.
하나, 거의 모든 배들이 적어도 한 번은 적탄에 명중된 탐라 함대의 피해도 상당했다.
한 척의 탐라급 중함선이 돈좌한 걸 포함하여 열두 척이나 침몰하거나, 거동이 불가하게 되어 모두 자침시키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적의 함정에 빠진 중에 역습하여 명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돌아온 건 오히려 탐라 수군의 전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 이제껏 그만큼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던 탐라수군이었기에 아쉬운 전투일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명군은 그 전투에 동원된 2백 여문의 화포 중 절반 가까이가 망가지고, 수천의 명군이 사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이라 칭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중함선이 명군의 기름 포탄을 맞아 발생한 화재로 인해 자침한 것이 명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탐라 수군으로서는 그 전투를 패전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공, 이제는 우리도 조금은 급하게 종전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소.”
몽주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무어라 결정하지 못하고 있자, 화극이 그의 요약된 장부를, 전보다 더 두꺼워진 그 장부를 툭툭 치며 재촉하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다시 한 번 협상을 요구해 보고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때는 제대로 명의 폐부를 찔러 보겠습니다. 한데, 제가 보기에 이제는 명나라도 마냥 무시하진 못할 겁니다.”
책상에서 어느 장계를 들어 살짝 흔들어보이며 몽주가 씨익 웃음을 지었고, 뭔가 싶던 화극도 그 장계가 가리키는 내용을 떠올리곤 껄껄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다시 종전 협상을 요구하는 사자가 명나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연왕도 한두 달 후에 종전할 것이라면, 차라리 보다 빨리 종전함이 낫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북중국에서 여름 밀 농사를 시작해야 할 시기였으니, 한 달만 늦어도 올해 농사는 물 건너가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에 인적, 물적 소모가 예상보다 컸던 탓에, 한 해 농사를 포기할 작정이었던 연왕으로서도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명나라도 마찬가지였으니, 회수 아래로 이모작이 가능한 곳이 많다 하나, 이미 첫 농사 시기는 지났고, 얼마 뒤에는 두 번째 농사를 시작할 시기가 도래할 테니, 분명 막대한 소모로 피폐해진 명나라도 이제는 종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몽주의 친서를 쥔 사자가 탐라섬에서 건너가니, 탁기에게 명하여 군진 사이에 전령을 보내 뜻을 전했던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협상 의지를 선보인 것이었다.
물론, 적극적이라는 것이 호의적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여태껏 살을 베었으나, 이제부터는 뼈를 부러뜨릴 것이오. 이번마저 거부한다면 다음번 협상은 목에 칼이 닿은 뒤임을 명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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