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93)
* * *
연-고려 연합군에게 사로잡힌 명나라 포로들의 수는 물경 12만에 이르렀는데, 모두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다만, 포로들 중 갇혀 있다는 표현이 적확하게 어울리는 자들은 1만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오직 명군 군관이거나 의용군의 주동자들만이 일종의 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포로들은 갇혀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손색이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엄연히 철망으로 담을 삼은 고립되고 구별되는 공간에서 거주하되, 일과 중에는 담당 군병의 인솔과 감시하에 각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포로들의 임무는 여러 종류의 노동이었다.
망가진 농토나 황야를 개간하거나, 물자를 나르거나, 건물을 짓는 등의 인부 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 노동 강도가 포로에 대한 대우치곤 그리 세지 않았고, 의식주의 제공도 기대 이상인 터라, 포로들이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때문에 포로 수용에 제법 큰 비용이 들어서, 연왕부 측에서는 굳이 포로들을 그리 대우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견도 있었는데, 탐라군이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용은 좀 더 들지만, 그만큼 인력은 덜 든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아예 시선도 못 마주칠 만큼 잔혹하게 처리할 것이 아니라면,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게 반란의 여지를 줄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적병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장차 명나라와 정통성 대결을 펼쳐야 하는 연왕의 입장에서는 포로들에 대한 대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탐라군의 ‘자비로운’ 대우에 동의했다.
물론, 포로는 포로였고, 자비롭다는 평가 또한 인권이라는 개념이 미약한 시기이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온다!”
제남의 어느 포로 수용소.
누군가의 외침에 잠시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잠시 후 조용해졌고, 이어 아프다고 알리는 것이 분명한 신음 소리가 많아졌다.
개중에는 완전히 꾀병임에 분명한 짓을 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그런 꼴을 하는 건 오늘이 홍익의병(弘益醫兵)이 수용소를 찾아오는 날이기 때문이었고, 홍익의병 중에 여인네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 주목!”
일단의 군병들과 머리에 하얀 두건을 두른 홍익의병들이 들어오더니,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1천 명이나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말문을 열자, 바로 곁에 똑같이 포로 신분임에 분명한 명나라 사람이 통역하여 외쳤다.
“아픈 곳이 있는 자들은 의병이 지나갈 때 손을 들라! 다만, 아프지 않음에도 꾀를 내어 아프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벌할 것이니, 이 점을 명심하라!”
통역하는 포로가 마치 벼슬이라도 하는 것처럼 뒷짐을 지고 크게 소리치는 꼴에 모여 있던 포로들 중에 가시눈으로 쬐려 보는 자가 많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이내 홍익의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두 의병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물론, 남자 의병이 지나갈 때는 모른 척하고 있던 자들이 여자 의병이 다가오면 손을 번쩍 들며 아픈 표정에 신음까지 내는 꼴이란 우습기 그지없었다.
‘쯔쯧…….’
모여 있는 포로들 중 거의 끝에 자리 잡고 있던 여운(呂雲)은 명나라 포로들의 꼴불견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산동성 남부에 살던 그는 형과 함께 포로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다만, 같이 붙잡힌 건 아니었다. 형은 산동성의 첨사로 전쟁 초기 일찌감치 사로잡혔고, 그는 후에 의병으로 참여했다가 사로잡혔는데, 운 좋게 수용소에서 형을 만나게 되었다.
의병에 가담할 정도로 반연왕 반고려 의식이 철저한 그로서는, 아무리 전쟁에서 제외된 포로들이라곤 해도, 적국인 고려의 여인네들을 보고 시시덕거리는 자들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물론, 누군가 그의 심기를 알았다면, 그러는 너도 여기 나와 있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여운은 남자든 여자든 의병이 지나가도 손을 들지 않고 있었으니,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점점 가까운 곳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주변 포로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욕설을 들을 수 있었다.
‘배신자 놈!’
‘고려의 개!’
‘역도의 종놈!’
고려 여인네들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던 중에도, 포로들이 기어이 멸시가 가득한 욕설을 뱉지 않을 수 없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앞서 통역을 했던 자이자, 여운의 형이기도 한 여진(呂震)이었다.
일찌감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일까, 여진은 여운이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 이미 수용소를 담당하는 고려 군병의 끄나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끄나풀 중에서도 왕끄나풀이었으니, 휘하에 여러 앞잡이들을 두고 포로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소문 같은 걸 고려 군병들에게 고해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혹여 누군가 포로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에 혹하는 자들까지 모조리 알아내어 고려군에게 일러바쳤으니, 고려군의 입장에서는 입안의 혀처럼 달콤하게 구는 자였다.
처음 형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여운은 좌절감이 들 정도였다.
하여, 일부러 형을 아는 척하지 않으려 하였고, 형의 앞잡이가 그에게 형이 만나고자 한다고 전해 왔을 때도 거절했었다.
하나, 이제는 형을 만나기 위해 의병이 방문하는 날을 기다릴 정도였으니, 형의 진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툭.
형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꼬깃꼬깃 접힌 종이가 여운이 앉은 자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그 종이를 재빨리 주워 품에 갈무리하곤 딴청을 피웠다.
벌써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형과 그만의 비밀 작계였다.
‘나는 고려가 궁금하다. 어찌 그 작은 나라가 명나라와 대등할 정도로 큰 힘을 부릴 수 있는지 알고자 한다. 하여, 나는 고려에게 아부해, 알 수 있는 건 다 알아내고,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배운 것을 너에게 전할 것이다. 너는 그걸 면밀히 기록하여 챙겨 두어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잃는다면, 나는 배신자라는 악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고, 우리 집안 또한 대대손손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철저하게 간수해야 한다.’
억지로 끌려 나오듯 만난 형과의 첫 대화에서 들은 말이 그것이었으니, 실제로 이후 여진은 여운에게 계속 밀지(密紙)를 건네주었다.
여운도 형의 뜻을 깨닫고 그 밀지에 적힌 것을 철저하게 옮겨 적은 후 간수해 오고 있었다.
이는 포로의 수가 너무 많아 연-고려군이 철저하게 포로들을 감시하지 못한 탓과 더불어, 여진이 고려에게 빌붙은 척하며 의심을 피한 덕이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군의 장계나 문권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그가 그저 끄나풀에 불과함에도 아우에게 연신 밀지로 전할 내용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탁월한 기억력 때문이었다.
여진이 이른 나이에 천거를 받아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천재적인 기억력 덕분이었으니, 한 번 기억하고자 하는 건 절대 잊지 않을 수 있던 바,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모든 정보를 암기하여 아우에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여운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대체 이걸 왜……?’
그날도 막사로 돌아와 조심스레 형이 건네준 밀지를 펴서, 마찬가지로 형이 구해다 준 종이와 연필로 그 내용을 옮겨 적던 여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형이 건넨 이번 밀지의 내용은 포로 수용소로 건너온 의복에 달린 표식에 적힌 글귀들이었다.
포로들에게 지급되는 옷들은 보통 고려군이 입다가 버려진 옷들인데, 그 옷의 안감에는 작은 천이 기워져 있었으니, 여운에게는 그저 무늬로 보이는 문자가 박혀 있었다.
사실 얇은 천을 종이 삼아 인쇄하듯 찍어 낸 터라, 빨래 몇 번 하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지기에 포로들에게 지급되는 옷들에 달린 표식은 보통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하나, 그중 알아볼 수 있는 내용도 간혹 있었으니, 형 여진이 그것을 기억하고 적어 보낸 것이었다.
그 내용이란 옷을 만든 회사라는 집단의 이름과 만든 지방의 이름, 그리고 옷의 크기를 알리는 표시 등이었으니, 여운으로서는 대체 그런 정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처음 형이 그에게 밀지를 전한다고 했을 때만해도, 여운은 형이 대단한 정보를 빼돌릴 것을 기대하였다.
예컨대, 고려의 화포나 화약에 대한 군정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런 정보를 알아내는 게 쉬울 리가 없겠지만, 형이 빼돌리는 모든 정보들이 시시콜콜한 것에 불과했으니, 여운으로서는 점점 기운이 빠졌다.
그저 이게 아니면, 나중에 형과 집안이 배신자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미래가 두렵기에 계속하겠지만, 여운도 더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후에 포로 생활에서 벗어날 때까지 이어졌는데, 그때까지도 여운은 그와 형이 한 일이 그들의 인생을 얼마나 크게 바꾸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와 형이 정화 태감을 만나 그 정보를 건네고, 그 공로로 단박에 천자의 총애를 받게 될 때까지, 그 시시콜콜한 정보가 곧 고려와 탐라의 체제와 사회를 보다 정밀하게 살필 수 있는 척도이고, 진정 명나라에 필요했던 정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 *
“…….”
성영제는 고려 탐라국공의 서찰을 펼쳐 본 뒤 담담하게 접고는, 그의 앞 멀리 떨어져 있는 탐라의 사자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에는 외관대신이라 하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비서원의 관리라 쓰여 있군. 혹, 좌천된 겐가?”
“어찌 주군을 모시는 데 자리의 높고 낮음을 따지겠습니까. 다만, 굳이 답이 필요하시다면 강직(降職)한 건 사실입니다.”
“허, 자네 외신이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로군. 탐라공에게 미운털이 박힌 건가, 아니면 그만큼 탐라국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은 겐가.”
“부디 후자라 여겨 주십시오.”
“후후.”
비서원 주무관이자, 익문대의 수장 차현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의응답을 무난히 넘어갔다.
혹여 명 황제를 배알하러 온 자의 직위가 낮아졌다고 트집을 잡을까 조금 걱정했고, 그보다는 서찰의 내용을 두고 탐라가 오만하다고 격정을 낼까 많이 걱정했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다른 건 상관없었다.
“살이 아닌 뼈를 부러뜨리겠다라…….”
다만, 문득 성영제가 서찰에 담긴 글귀 중 하나를 읊조리자, 차 주무관은 살짝 긴장을 끌어올렸다.
“솔직히 조금 무서운 말이로군. 짐은 지금도 고려가 대명의 뼈를 취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말이야.”
“…….”
차현유는 놀란 낯으로 고개를 조금 들다가 좌우를 살폈다.
그곳은 황제의 거처인 대전인 바,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만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 중에 성영제가 너무 솔직한 감상(?)을 피력하는 걸 들으니, 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사이에 명 황제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후회가 스치고 있었다.
그도 이제는 전쟁을 어떻게든 종결지어야 할 때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나, 종전하고자 하면, 결국 연왕에게 명나라의 땅을 내주어야 하고, 그가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떻게 포장해도 실상 명나라의 패배이자, 명 황실과 천자의 위신이 추락하는 꼴이니, 그에 아쉬움과 후회가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까지 치닫지 않을 수도 있었고, 연왕과 싸우더라도 고려와는 싸우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좀 더 전황을 좋게 가져갈 수도, 지더라도 잘 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와 명나라가 얻은 것은 겨우 망국을 피했다는 정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전후에 어찌 될지,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쏟아부어야 회복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아니, 훗날을 걱정하는 것도 당장은 사치였다.
패장 이경륭의 헛짓거리로 인해 장강 하구의 제압력을 잃었고, 급기야 응천부 코앞까지 탐라수군이 들어오는 걸 감수해야 했으니, 명나라의 중심인 황실마저 그 안전이 명백하게 위협당하는 처지였다.
비록 온힘을 짜내 막아 내긴 했지만, 피해의 규모만 생각하면 명나라가 더 큰 피해를 입은 게 사실이었다.
다만, 탐라수군이 가진 위용의 상징과 같은 거대 함선을 불태운 전공이 있는 덕에 마치 역전한 것처럼 사기를 가져올 수 있었고, 패전이라는 멍에는 쓰지 않을 수 있었음에 불과했다.
나라의 곳곳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미들이 목 놓아 곡하고 있었고, 오늘 먹을 식량이 없어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지 못하는 이가 수두룩했다.
전에는 너무 많다 여길 정도로 쌓아 둔 은자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그렇게 흘러간 은자로도 구할 수 있는 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연-고려군에 비하면 날파리 떼나 다름없는 서쪽과 남쪽의 외적, 반도들과의 싸움도 의병의 힘이 빠지자 더는 밀지 못하고 고착화되었다.
복잡한 심경을 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성영제는 문득 차현유와 시선을 마주치자 말문을 열었다.
“하나 묻겠노라.”
“하문하십시오.”
“탐라공은 짐과 명나라를 계속 적대할 것인가?”
“…….”
차 주무관은 바로 대꾸하지 못했지만, 이내 그 질문의 주체가 고려나 탐라국이 아닌 탐라공임을 알고는 그 의미를 간추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가?”
“제 주군께서 제게 종종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전쟁도 결국은 외교의 일환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외교는 사람의 친교와 유사하나, 더 낯짝이 두꺼운 일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낯짝이 두껍다?”
“그렇습니다. 하여,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우가 되고, 오늘의 친우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도 흔하게 여겨야 한다 말씀하셨지요.”
“후후.”
성영제도 익히 아는 종류의 이야기였으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지금 들은 말을 신료들이 듣는다면, 특히 유자들이 듣는다면 어찌 반응할 것인가.
아마도 더더욱 믿을 수 없는 난적이라면서 난리가 날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 신하들의 의견 같은 건 얼마든지 그의 손짓으로도 묵살할 수 있었다.
당금의 명나라 정국에서 의외로 성영제의 독재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잡호장군을 이용하여 전국의 이갑 중 큰 곳 대부분을 일소하였고, 장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일부 회군시키고 의병들을 더욱 모아 응천부와 그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권신들을 짓눌렀다.
또, 훗날의 통치에 필요할 권위가 떨어지긴 했어도, 백성들과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그 노고를 위로함으로써 백성들의 찬양 또한 높았다.
몇 번의 실수로 인해 위축된 유자 출신 신료들은 지금 충성을 경쟁하느라 바쁜 중이었다.
이제 전후에 잡호장군들만 토사구팽한다면 통치 체제만큼은 오히려 선제보다도 더 단단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성영제 본인만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외신의 말로 대신 전해 들은 탐라공을 믿을 수 있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하나, 성영제는 이제 믿음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더는 십분 믿기를 경계하고 있었다.
솔직한 속내를 말하고 표정으로 드러내었던 성영제는 어느새 표정을 지우고 외신을 내려다보았다.
“탐라공이 이처럼 종전의 뜻을 강하게 비치니, 그에 응할 일말의 여지를 남기겠다. 다만, 조정에서 이에 대해 다시 논의해야 하니, 외신은 그때 다시 나와 탐라공의 의사를 전하라.”
“……황공하옵니다.”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정리된 터라, 잠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차현유도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를 숙인 뒤 성영제 앞에서 물러났다.
* * *
다음 날, 차현유는 응천부의 조정에 나가 여러 신료들 앞에서 탐라공의 서신을 올렸으니, 편전 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종전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 뜻을 표하는 문구가 너무나 당돌하여 그에 반발하는 신하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히 오만한 고려와 탐라를 끝까지 벌하자고 주장하는 주전파와 그래도 종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주화파로 나뉘니, 성영제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간간이 던지는 말로써 신하들 전체를 능수능란하게 조율하였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흐른 뒤, 성영제가 다시 차현유를 불러 명하니, 종전을 협상할 자리를 마련하되, 반드시 탐라국공과 연왕이 참석해야 함을 전제로 하였다.
그 사뭇 곤란한 요구는 이후 탐라와 응천부 사이에 여러 번 사신들이 왕래하게 만들었으니, 다시 이십 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구체적으로 협상을 진행할 주체와 장소가 정해질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우습게도, 협상의 장소는 양주의 장강 위였으니, 명 수군의 배와 탐라 수군의 배를 연이어 협상장을 만들기로 하였다.
협상의 대개는 신하들이 진행하되, 최종적인 타결은 이번에 명나라와 다툰 모든 세력의 수장들이 참석하여 동의하는 것으로 하였다.
탐라공과 연왕이 참석함은 물론, 성영제 본인도 모습을 드러내기로 약속함에 따라, 갑작스레 이 시기에 이뤄지기 어려운 대단위 ‘국제 정상 회담’의 장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 합의에는 협상의 종료까지 정전(停戰)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마치 성영제가 크게 양보하고 아량을 베푼 것 같은 모양새였으나, 그날 조회가 끝나기 직전에 연-고려 연합군이 크게 한발 진격하여 서주의 북쪽, 소양호(昭陽湖)의 서쪽 호반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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