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94)
* * *
가장 먼저 당도한 건 사람이 아니라 문서였다.
고려국왕이 친서를 내려 탐라공과 요동공을 종전 협상을 위한 고려의 대리인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내용이랄 게 많지 않은 그 의례적인 친서는 딱딱하고 담담한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문맥상에서 고려국왕의 안도와 기쁨을 은근히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훨씬 더 최악의 결과까지 우려했던 이번 전쟁을, 아직 협상의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사실상 승리로 마칠 것 같다는 기대감 덕인 듯했다.
아마 그다음으로는 세자가 무탈하고, 종전하면 더는 세자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덕일 것이다.
사람으로 처음 탐라국에 당도한 이는 의외로 점파국의 비나수르 왕이었다.
전과 달리 제법 큰 점파의 배를 몇 척 거느리고 유구 상단의 안내를 따라온 것이었다.
기다렸다가 토번과 대리, 그리고 사천의 대표와 함께 와도 충분할 터인데, 어찌 너무 급하게 왔다 싶었는데, 그의 곁에는 또 다른 인물이 동행하였다.
“이자는 딘 깐득(丁乾德 : 정건덕)으로, 오래전 안남 딘 왕조의 후예입니다. 이번에 남월에서 봉기함에 있어 앞장선 자이지요.”
“…….”
비나수르 왕이 소개한 자를 몽주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꽤 수척한 얼굴을 한 그자는 몽주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비나수르 왕도 눈치를 보며 몽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같이 와서는 안 될 자를 데려왔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데려오는 것이야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다만, 이자와 함께 온 용건이 짐작되고, 그것이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실상 약간은 탓하는 느낌이 묻은 대답이었다.
“이해합니다. 남월에서의 봉기가 성공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계륵처럼 느껴지겠지요.”
계륵이라도 되면 다행이겠으나, 지금은 그저 혹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아마 저 오래된 베트남 왕조의 후예라는 자는 남월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온 것일 터니, 정작 전쟁 당시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음을 생각하면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지금쯤 열심히 실무진들이 명나라 관리에 맞서 종전 협정에서 어떻게든 한 푼의 이득이라도 취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터인데, 만약 거기에 남월의 독립까지 얻어 내고자 한다면, 다른 부분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크게 포기해야 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들도 체면이 있어 너무 큰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너무 크지 않다? 하면, 뭘 원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
“이자와 함께 명나라에 반기를 든 자들은 향후 아무런 조치 없이 종전이 된다면 모조리 몰살당할 것입니다.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지, 이들의 의지는 분명했습니다. 하니, 그냥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말을 돌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는 걸 말씀하시지요.”
몽주는 빙그레 웃는 비나수르 왕의 표정을 직시하며 말하였다.
그가 아는 비나수르 왕은 그런 쓸데없는 동정 따위를 가질 자도 아니었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자신에게 간청할 자도 아니었다.
“하하, 마음이 간절하여 괜한 말부터 꺼냈군요. 하기야 탐라공의 방식이 단도직입적이니, 그에 따라 말씀드리지요.”
그러면서 비나수르 왕이 말하니, 과연 그는 무작정 딘 깐득을 데려온 건 아니었다.
“해남섬을 저들에게 내주겠노라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해남섬은 가히 탐나는 곳이긴 하나, 월인들이 상당히 거주하는 곳으로 우리 점파가 점유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 꽤 큰 반란에 직면하겠지요.”
“하여, 그곳에 같은 월인인 저자의 세력을 이주시키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같은 월인들이니, 한마음 한뜻으로 잘 섞여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한마음 한뜻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월인이라 통칭하지만, 월인 안에는 무수한 족속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남도의 월인과 남월의 월인은 절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몽주는 비나수르 왕의 수작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점유하더라도 골치가 아플 게 분명하니, 차라리 우호적인 월인 세력을 그곳에 보내서 점차 해남섬을 흡수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해남도의 원주민들과 대신 싸울 방패로 삼겠다는 의도임에 틀림없었다.
비나수르를 보며, 몽주는 참 대단한 자다 싶은 소감을 가지다가 딘 깐득을 다시 보았다.
“그대와 그대의 세력도 그러길 바라오?”
몽주의 물음에 전해지자, 딘 깐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수긍 속에는 어쩔 수 없다는 의사가 담겨 있는 듯했으니, 아마 그도 장차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해남도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게 될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앞서 비나수르 왕이 말한 대로, 그들에 대한 별다른 조치 없이 종전한다면, 명나라는 차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남월에서 봉기했던 자들을 처단하려 들 것이니, 딘 깐득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음이었다.
몽주는 비나수르를 향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닫고는 잠시 후 다른 말을 꺼냈다.
“일단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다만, 그 문제는 내가 홀로 결정하기는 곤란하니, 다른 분들이 오면 그때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몽주의 대답이 다시 전해지자, 비나수르 왕은 미소를 살짝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딘 깐득은 불안한 표정으로 몽주를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월 문제는 몽주의 말대로, 향후에 다시 의논되어 큰 반대 없이 비나수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는 어차피 점파국이 해남도를 얻을 만한 기여를 한 만큼, 점파국이 그곳에 딘 깐득의 세력을 이주시키는 건 문제가 될 것 없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또, 명나라 측에서도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거부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협상에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명나라는 남월의 역도들이 남월 지방을 떠나는 것에 아무런 반대하지 않았으니, 전후 반년에 걸쳐 점파국은 해남도에 물경 10만에 이르는 남녀노소를 이주시킬 수 있었고, 몇 년 뒤에는 해월(海越)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워 딘씨를 왕조로 삼았다.
물론, 해월의 딘씨 왕조는 점파국의 괴뢰국이었다.
딘씨 왕조는 철저하게 점파국의 왕조와 혼인해야 했으니, 향후 점파국이 해남도를, 해월국을 흡수하기 위한 예비였다.
하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로 볼 때, 너무 멀리 내다본 짓이었으니, 해남도가 점파국에 완전히 흡수되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 * *
몽주가 탐라섬을 떠나 요동에 닿은 건 단오 즈음이었다.
정전됨과 동시에 장산군도의 1함대가 귀환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몽주를 비롯한 귀빈들을 싣고 요동에 닿은 것이었다.
요동국에서 요동국과 며칠 전에야 겨우 닿았다는 나하추를 승선시켜 다시 연왕부 직고에 닿았으니, 양력으로 1394년 6월 1일이었다.
연왕부에서 보낸 기간은 9일이었으니, 그 시간은 고려 중심의 국제(國際)를 형성하는 시간이자, 고려의 실무 관리들이 명나라와 협상을 대략 마무리하는 걸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다만, 모인 대표들 사이가 마냥 ‘핑크빛’ 분위기는 아니었다.
명나라를 전방위로 압박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곧 건국할 세력들을 끌어모은 탓에 그들 간에도 서로 맞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장차 서로 간의 영역을 확정함에 있어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천의 종기신은 살짝 경망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사천의 영토와 백성들을 챙기기 위해 종횡무진하였으니, 이는 아무래도 사천이 명나라는 물론, 사방으로 닿는 나라들이 많은 탓이었다.
다만, 몽주의 시선에는 그게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본디 외교라는 게 뻔뻔해야 하고,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손가락질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곧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헌신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연왕부를 떠날 무렵에 이르러서 종기신은 그가 바라는 바를 거의 모두 이루었다.
하여, 사천의 영토는 파촉 지방 전체에 더해, 토번 쪽 산악 일부와 운남과의 교통로로 깊이 파고들었으니, 그 모양이 현대 중국의 사천성과 중경시를 더한 것과 많이 유사해질 수 있었다.
“전 정말 잘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사부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이상한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은 심지어 처량할 정도라, 몽주마저도 매몰차게 굴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종기신의 대활약은 비록 당대의 한계로 인해 국경선씩이나 정해지진 않았지만, 여러 제국들 간의 국경 지대를 대략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장차 고려를 중심으로 제국들이 연대하는 과정에서 각국 간에 마찰과 분란의 소지가 될 수도 있는 영토 분쟁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듯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명나라와의 협상이었고, 협상이 대략적으로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몽주는 다른 대표들과 더불어 다시 바다로 나섰으니, 바다를 헤쳐 양주의 장강 유역에 닿은 건 보름 경이었다.
* * *
결국 관건은 중국을 나누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다른 제국(諸國)들과의 요구에는 상대적으로 쉽게 응하였지만, 연왕부와 사천의 독립과 그 영역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총카파의 토번이나 나하추의 감숙은 명나라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곳이었고, 점파국의 해남도 점유를 인정하는 것이나, 남월의 역도들이 해남도로 이주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 대리국의 부활 역시 명나라가 정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인 터라, 아쉬운 가운데에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이내 인정하였다.
그에 비해, 연왕부와 사천은 그들이 중국의 본토라 여기던 곳이 뜯겨 나가는 셈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 한 뼘의 땅이라도 덜 주기 위해, 그리고 아마 훗날 다시 복속할 것을 염두에 두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물론, 연왕부와 사천, 그 둘 중에 명나라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협상에 임한 쪽은 연왕부였다.
하여, 사천과는 가장 관건이었던 파촉 지방의 동쪽 끝이자, 현대 중국의 중경시에 속하는 봉절현(奉節縣)지역을 두고 옥신각신하였지만, 그래도 몽주와 제왕(諸王)들이 양주에 닿을 무렵에는, 그 현에 속하는 포구의 이용 권한 같은 걸 인정받는 등 몇 가지 조건하에 지역색대로 사천에 양도하는 합의에 이르렀다.
하나, 연왕부와의 경계는 몽주와 제왕들이 도착했을 때까지도 아직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중이었다.
“송구합니다. 명나라 측이 워낙에 강경한 터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협상단의 수장이자 외관대신인 혜신결이 사죄하였고, 뒤늦게 협상에 참여했던 연왕의 신하도 연왕에게 자신의 모자람을 사과하였다.
하나 그렇다고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건 아니었다.
“명나라 측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정주와 등주 둘 다 내줄 수는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리를 옮겨 명나라의 요구에 대해 묻자, 혜 대신의 대답은 그처럼 간단했다.
“흠, 어려운 일이로군. 정주와 등주라…….”
정주는 이번 싸움에서 연-고려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쓰인 곳이었다.
황하의 남쪽인 데다가 관중 지방과 중원을 나누는 위치를 점하고 있는 요충지.
그에 비해, 등주(滕州)는 산동성의 가장 남쪽 지역으로 태산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구릉 지대를 북쪽으로 두고, 서쪽으로는 소양호를 끼고 있으므로 태산과 구릉지대로 나뉜 산동성을 온전히 얻고자 하면 반드시 얻어야 하는 곳이었다.
“둘 다 얻을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한 연왕의 물음에 연왕부의 신하가 고개를 저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조건을 제시하여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직고와 바꾸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허…….”
연왕이 어이없다는 양 탁식하니, 직고는 연왕부에 있어 북평 이상으로 중요한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교환이 가능할 리가 없으니, 그만큼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었다.
명나라의 강경한 자세를 확인하자, 연왕은 표정을 굳히다가 문득 몽주를 향해 말하였다.
“만약 합의하지 못하면, 탐라공께서는 다시 싸울 수 있으시겠소?”
“…….”
몽주는 대답 없이 다른 제왕들을 둘러보았다. 요동공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곤란한 표정을 보였다.
요동공은 전쟁 전에 연왕부와의 경계 확정으로 이득을 얻은 상태였고, 다른 제왕들도 이미 명나라와 합의를 이룬 상황이었으니, 이제 전쟁을 멈추고 각자 자기 기반을 회복시키고 발전시키고픈 마음일 수밖에 없었다.
몽주의 시선에 따라 움직인 연왕의 시선도 그런 분위기를 확인하자, 몽주가 말하였다.
“군이 철수한 것이 아니니, 하려고 하면 싸움을 재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그건 연왕부에게도 이로운 일은 아니겠지요.”
연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종전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서주의 북쪽이자 소양호의 서편을 공략하면서, 연왕군이 제법 무리하였으니, 150리를 진군하는 중에 2만이 사상한 바 있었다.
명군이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명군의 수가 월등했고, 연왕군의 사상자들 중 죽은 자의 비율이 높은 건 아니지만, 그만큼 군력이 단기적으로 약화된 건 마찬가지이기에 계속 싸움을 지속하는 건 자칫 패배의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연왕이 선뜻 두 고을 중 하나를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그가 전쟁이 부담스러운 이상으로 명 황제도 부담을 짊어지고 있으니, 조금 더 무리한다면 정주와 등주 두 곳을 모두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은 탓이었다.
몽주는 굳이 양자택일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촉해 봐야 오히려 미련만 커질 게 뻔했고, 자칫 포기를 강요하는 모양새가 되어 괜한 앙심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다른 제왕들 사이에서는 몇몇 조언(?)들이 있었으니, 토번의 총카파는 ‘금 대신 삼(麻)을 지고 가라’는 중아함경(中阿含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욕심 대신 인심을 얻으라는 조언을 하였고, 사천의 종기신은 인위보다 무위를 좇아야 한다면서 두 고을을 명나라와 나눠 가지는 걸 무위인 양 강조하였으니, 많은 이들이 저자가 무위의 뜻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연왕부에서 저자가 했던 행동들은 그럼 뭐였는지 하는 의문과 어이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그 밖의 대표들도 무언으로 종전에 대한 압박감을 보냈는데, 사실 연왕에게 있어 중요한 건 결국 탐라공의 마음이었다.
하여, 연왕은 제법 긴 고민 끝에 몽주에게 독대를 청하였으니, 몽주는 그와 함께 중함선의 다른 선실로 자리를 옮겼다.
“만약 공께서 나라면 어찌하셨겠습니까?”
“…….”
연왕은 몰랐을 테지만, 몽주가 꽤 많은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질문이었다.
천몽의 기연을 통해 미래의 지식을 가진 몽주였으니, 그가 연왕 주체로 천몽을 영위한다는 가정 어린 질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런 전쟁도 하지 않았겠지.’
일찌감치 태자가 되었든지, 독자 세력으로 제위를 찬탈할 힘을 키웠을 것이다.
물론, 연왕의 질문이 그런 모르는 부분까지 짚어 물은 건 아니었으니, 몽주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대답을 내놓았다.
“저라면 정주를 포기하겠습니다.”
“하나, 정주는…….”
“예, 황하의 남쪽에 있는 요충지지요. 하나, 그래 봐야 고을 하나에 불과합니다. 명나라가 정주를 얻는다고 해도 단기간에 관중을 노리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그에 비해, 등주를 얻는다면 왕야는 산동성을 오롯하게 얻게 됩니다. 아니라면, 산동성의 대부분을 얻어 놓고도 명나라가 한발 들이밀고 있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테지요.”
“맞는 말씀이나, 정주에서 물러나면 관중과 하북은 섬주와 복양 사이 낙읍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땅으로만 연결될 것이니, 이는 실로 위태로운 형국이 아니겠소?”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리나, 몽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태행산맥의 서편으로 물자를 운반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평평한 땅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하북과 관중이 낙읍으로만 이어진다는 건 이제 왕야가 다스릴 땅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겁니다.”
“으음…….”
현대 중국의 영토에서 보자면 우스운 일이나, 당대까지만 해도 태행산맥의 서쪽이자, 관중 지방의 북쪽 지역은 중국의 본토라는 개념이 부족했고, 자연히 교통과 물류를 따짐에 있어 그런 변경 지방은 제외하며 구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밀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태원을 통해 서안까지 물자를 운송하여 교역하기도 했던 연왕마저도 그런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연왕이 다시 고민에 빠진 듯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몽주의 결정을 따르겠노라 말하였다.
다만, 그의 말소리에 갈증이 묻어 있고, 손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으니, 그 결정을 내림에 얼마나 큰 긴장과 고뇌가 숨어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꽤 담대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고통의 크기는 짐작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기야, 이제 연왕은 진정 홀로서기를 하여야 할 참이었다.
황실에서부터 외로이 성장했다 하지만, 이른 나이에 연왕부로 떨어져 나와 왕부를 다스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나라의 품에 안겨 있었고, 명의 황제가 그의 아비였다.
하나,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그의 아비는 없고, 명나라는 최대의 적수가 될 판이었다.
그의 기반이 되어 줘야 할 한 뼘의 땅마저 소중한 상황에서 양자택일에 몰려 한 고을을 양보해야 하니, 매분매초마다 자신이 정녕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나, 현실은 냉정했고, 연왕의 결정은 이내 문권으로 분하여 명나라 측 관리에게 전해졌으니, 마침내 명나라와의 종전 협상이 실질적으로 타결되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성영제를 마주하여 연왕을 비롯한 제왕(諸王)들이 모여 종전 합의를 조약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삼 일이 지난 후였다.
* * *
그날은 참으로 오랜 만에 몽주가 성영제 주태와 대면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그가 어찌 성장하였고, 어떻게 변하였는지 많이 들어 익숙했지만, 몽주는 성영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절로 고개를 돌려 연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생김새는 많이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같이 심적인 괴로움에 짓눌려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생김새 이전에 분위기가 똑 닮아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연왕이 두 고을을 두고 고민했던 것에 비해 성영제는 나라가 두 쪽 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테니, 그의 고통이 훨씬 컸으리라.
다만, 명나라는 여전히 거대한 제국이라는 점과 그가 황제로서 중국의 종주권을 쥐고 있다는 점 등이 그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니, 그마저 지키지 못했다면 몸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어째, 내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이군.’
두 형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몽주는, 어쩌면 없을 수도 있었던 명나라의 내전을 기어이 유도하여 일으킨 것에 대한 작은 미안함을 품었다.
물론, 아주 잠깐 스친 감정일 뿐이었다.
그날의 조약은 갑술화의(甲戌和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으니, 조약서에 담긴 많은 내용을 차치하고, 가장 뚜렷하게 남은 함의는 ‘남송 시대로의 회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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